엄격히 말해 슬레이어즈는 아닙니다만. 재미 붙였쪄요. 어떠케요.


오랜만에 폭신한 침대에서 죽은 듯이 푹 잤다.
기지개를 켜고 눈을 부비니 오전 9시. 아뿔싸, 늦잠 잤다.
버릇대로 눈을 돌려 이웃 침대부터 확인했다.
짐작했던 그대로 시트에 주름살 하나 없이 정돈이 되어 있다. 간밤에 베개에 머리를 깃들인 흔적 자체를 말살했다. 한켠에 얌전히 놓여진, 여관 주인이 손질한 모양새 그대로 정리된 실내용 슬리퍼가 어쩐지 쓸쓸한 느낌을 준다.
그라바스는 머리를 긁었다.
이 나이에 예쁜 마누라가 야밤에 도망간 홀애비의 심정을 고스란히 맛보고 있다. 불합리하다.
일찌감치 일어나 피곤함에 골아 떨어진 제자는 냅두고 지 멋대로 개인 행동에 들어간 남자를 멋대로 원망하며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여독이 풀린 반질반질한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가니 반가운 얼굴이 하나 보였다.
「요한슨... 혼자군.」
신문을 무릎에 펼치고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와 후렌치 토스트를 먹고 있다. 곁들인 계란은 반숙.
돗수 낮은 위장용 검정테 안경이 낯설다. 거기다 반듯하게 빗어 뒤로 정리하여 묶은 머리 탓에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
아니, 실제로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요한슨은 계단을 내려오는 소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간장 국물처럼 생긴 어른의 커피를 홀짝거렸다. 스치고 지나가는 인기척에 반응, 잠시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신문 활자를 향해 다시 돌아간다.

오늘의 주요 뉴스.
친선 축구 게임에서 1-2로 승리. 코삭 마을, 붉은 기를 흔들며 흥분의 도가니.

야단법썩으로 형광색 잉크까지 덧바른 신문의 헤드라인을 곁눈질하며 이웃 테이블에 가 앉았다.
요한슨을 향해 아는 척 하는 바보 짓은 하지 않는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엔 다 까닭이 있다.
그라바스는 무심하게 메뉴판을 들었고, 금방 구운 크로와상 둘, 우유, 그리고 야채 치즈 샐러드를 주문했다.
아침 치고는 제법 되는 양이지만 성장기 어린애 밥통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지독하게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다.

 『저기요? 커피 리필 부탁합니다.』
저편에서 요한슨이 식당 종업원을 잡았다. 그라바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신문을 읽으면서 커피 마시는 일을 계속하려는 것 같다. 종이의 낱장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신문 기사는 그다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지 후우 - 하는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앞으로 계란 반숙은 오래 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로우드와 막스는 어디에 있지. 사부는? 다들 같이 있나.」
건강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스승은 여관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떠난 것치고는 시간이 늦고 있다.
검술 실력만 따져도 일류. 거기다 마법 클래스 또한 톱. 둘을 합쳐 IQ 100. 이 아니라... 아무튼 이쪽에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슬슬 불안해지려 한다. 혹시라도 실수로 발을 접질러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허리를 삐긋...

「점심 식사는 같이 하고 싶은데.」
낡아서 옆구리가 터진 신발을 들고 여관을 빠져 나왔다. 방 열쇠는 호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도중에 돌아와서 방문이 잠겼다고 화내는 건 아니겠지.」
들고 있는 신발에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탈취제의 사치를 누리지 못한 탓에 아주 죽여준다.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는 생각을 그래서 잠시나마 가져 보았다. 이 정도면 새 신발을 구입해도 사치가 아닐 것이다. 헤어진 부분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보았다. 검지와 중지가 동시에 들어간다.

그래도 그라바스는 수선집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무도회장에 나갈 적에 새 구두를 신으면 나중에 피 범벅이 된다는 걸 어렸을 적에 시종장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뭘 모르는 새내기 아가씨들이 곧잘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도 같이.
살갗이 짓무르고 벗겨져 거의 고문 수준이 되었음에도 그걸 필사적으로 감추고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무도회장에 깔린 카페트는 반드시 빨강. 새하얀 카페트를 깔았다간 왈츠와 함께 뿌려진 핏방울로 무시무시한 광경을 연출하게 된다.
구멍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도로 뺐다.
새 신발을 신으면 걷는 동작이 며칠은 굼뜨게 된다. 길 한복판에서 닌자 거북이를 만났을 적에「새 신발 탓에 발이 아파 잘 움직이지 못 했습니다」라고 하면 개그다.
그러니 새 신발 구입은 나중으로 미루고「아이구, 구려~!」라고 비명을 지를 구두 수선공에게 두둑한 팁을 쥐어 주자. 단, 신발 밑창은 새 것으로 교환해야 한다.

맑은 날씨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2층 창가로 널린 빨랫감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야, 좋다~ 라고 환호하며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가 공기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기분이 한층 더 좋아져서 팔을 위로 쭈욱 뻗으면서 멋지게 기지개를 켰다.
『잡화점에 들리는 김에 팬티라도 살까...』
요한슨 일행이 빌려 입었던 스승의 팬티는 일찌감치「소각-말살-그딴 거 없애버려-화이어볼」주문에 맞아 재가 되었다.
갈아 입을 팬티의 숫자가 부족하다.
현재 행방이 묘연한 스승이 잡화점에 들려 부인들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입을 팬티를 손수 고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은 되지 않았다. 제르가디스는 부끄럼쟁이다. 속옷 가게에 걸린 여성용 브래지어에 뺨이 굳어자기 멋대로「뒤 돌아~ 갓」구령을 붙였을 거다. 그러니 제자가 대신 고생을 하도록 하자.

그리 생각하며 골목을 빙글 돌았을 때였다.
쨍그랑 하고 어디선가 유리창이 깨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그 전에 대단히 힘찬 손길이 왕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우앗?!』
『쉿. 이리로.』
어느 틈에 나타난 건지 긴장한 요한슨이 건너편을 주시하며 그라바스의 등을 재빨리 떠밀었다. 유리로 만든 안경 알이 희번득 빛을 반사했다.
『요, 요한슨?』
『이대로 계속 걸어가십시오. 서두르되, 뛰지는 말고.』
『적인가.』
『아마도.』
낮게 삭이는 요한슨에 말에 그라바스 또한 긴장했다.
『알겠네. 시키는 대로 하겠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
말투가 덕분에 괴상해졌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궁중 어투라니.
개의치 않고 요한슨은 잘라 말했다.
『검을 소지하여 주십시오.』

- 그건 곤란해!

칼은 싫다. 아니, 쇠붙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속으로 만든 숟가락이 싫어 일부러 나무 젓가락을 사용할 정도다. 제르가디스가「네가 정녕 내 제자냐」라고 한심스러워 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어쩌다 금속이 닿으면 몸 어딘가에서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듯한 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이 싫어 옷에다 다는 쇠붙이 단추마저 없애 버렸다.
「이건 병인가요, 사부.」
「아니. 네 몸은 정상이다. 단지 네 몸을 에워싸고 있는 정령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뿐이야.」
「정령?」
「아님 자의식을 가진 에테르라고 할까. 아님 민폐나 끼치는 바보들이라고 할까.」
그리고 사부는 싫은 표정으로 정령들이「오버」하고 있는 것에 휘둘려선 안된다고 충고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금속은 매우 요긴하게, 그리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금속을 전혀 접하지 않으려면 무인도에서「윌슨」이라는 이름의 야자 나무 열매 하나 곁에 두고 외로운 생을 살아야 한다. 정 뭐하면 돌 화살로 물고기를 잡고, 나무 그릇으로 밥을 지어다 먹으라지 - 하고 스승은 넌더리를 냈다. 그러면서 검 한 자루를 손수 제자의 손에 쥐어주고 도깨비 같은 얼굴로...

화가 난 스승의 파란 눈동자를 떠올린 그라바스는 땀이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검을 소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 요한슨.』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
『당신은 당신의 몸 하나만이 아닌, 세일룬을 지켜야 합니다. 자, 검을 소지하여 주십시오.』

다시 유리창 하나가 더 깨졌다.
놀란 아낙네들이 꺄아 비명을 질러댔다.
그라바스의 얼굴이 초조감에 젖어 무섭게 일그러졌다.
검을.
검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세일룬을...
의지와는 달리 앞으로 내어밀 팔이 경련을 일으킨다.
이를 악 다물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어라.
잡아라.

.......... 젠장, 못 하겠다.

소년은 스스로가 환멸스럽다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하다... 실망시켜 정말 미안하다. 요한슨, 나는...』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요한슨은 고개를 숙인 왕자님을 그대로 두고 다른 방향의 골목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망연자실한 그라바스가 금방에라도 울 것처럼 울상을 지었어도 뒤를 돌아다 보거나 하지 않았다. 감정이라는 걸 얼굴 근육에서 깨끗하게 몰아내고 대신 크게 심호흡만 했다.

『어랍쇼. 분위기만 타고 안 넘어가네요.』
『그러게.』
『기왕에 암살자들과 한판 붙게 되었으니 이참에 왕자님에게 검을 쥐게 하자는 우리의 원대한 계획이 첫판부터 삐긋하는데요. 어쩌죠? 조금 더 압박을 해볼까요, 아님 일단 뒤로 물러날까요.』
작대기로 헛간 유리창을 깨뜨린 막스밀리엄이 제르가디스를 향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깨어진 유리창과 막스밀리엄의 작대기를 번갈아 쳐다보던 제르가디스의 눈동자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누굴 닮아서 황소 고집인 건지. 어휴.』
불평하며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다.
저건 그만 물러나자는 신호다. 막스밀리엄은 재빨리 작대기를 치우고 헛간 속으로 은화 세 개를 던졌다. 은화 세 개면 갈아 끼울 유리를 사고도 대다수가 남는 금액이다. 이 정도면 부랴부랴 달려나온 헛간 주인도 큰 불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왕자님 설득 작전은 나중에 계속하자. 그나저나 내가 적은 메모지는 잘 전달했고? 막스밀리엄.』
『그걸 두고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가시지요. 미리 저편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요한슨이 왕자를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다.
그렇담 별 걱정은 없을 터.
훌쩍 훌쩍 우느라 바빴던 그라바스가 잡화점에 들려선 스포티한 면 팬티 대신 엉뚱한 걸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다는 걸 모르는 스승은 서둘러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빨간색 하트가 그려진 무시무시한 걸 저녁에 당장 입게 생겼다는 걸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06/06/14 13:26 2006/06/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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