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걸음을 사뿐사뿐 옮길 적마다 한 마리 나비가 꽃밭을 날아다는 것 같았다.
나는 두 팔로 턱을 괴고 앉아 나른하고 졸린 표정으로 봄을 만끽했다.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먼 여행길에 오른다며 머리카락부터 잘린 내 입장에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도대체 할멈은 왜 내 머리를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싹 돋는 모양새의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의 길이로 자라려면 앞으로 몇 년은 걸릴 것이다.
『에휴...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의외로 주변에서의 반응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어서 심지어 나에게 말린 생강을 나눠준 남자는「지나치다」라는 표현을 쓰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안 좋아요. 왜냐하면 나오거든요. 저러면 너무 눈에 띄어요.』
『뭐가 나오는데. 설마.., 곰?』
『에엑?! 그건 또 뭔 소리랍니까. 제가 말하고자 했던 건 강도에요, 강도!』
농담이겠지. 나는 제법 놀랐다.
인적이 많은 곳도 아니고 주변은 우거진 숲이니 외길 따라 노상강도 출몰은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고 빠뜨린 부분이 있다. 바로 요마(妖魔)다.
이 세계에는 다섯의 바다와 여섯의 육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용은 스물한 마리가 있다.
이중에서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사막, 혹은 깊은 바다에 둥지를 틀거나 얼어붙은 동토에서 기나긴 잠이 든 용들을 제외하면 대략 열둘에서 열일곱 정도의 용이 인간과 더불어 자신의 고유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용은 그리고 인간들로부터 신으로서 숭배를 받는다.
숭배 받는 용들 중에서 흰색, 검정, 빨강, 파랑, 황금색 다섯은 으뜸이다.
내가 태어난 빈사국 주변은 성격 급하기로 유명한 적룡이 치세하는 곳이고, 적룡은 제국 이사실의 실세이며, 그 영토는 서대륙에서 가장 넓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넓은 만큼 치룡(緇龍), 녹각용, 오색신, 명라각희(鳴螺珏姬)의 영역과 서로 경계가 맞닿아 있고 더러는 미묘하게 공백이다.
겹치면 겹쳐지지 왜 공백이냐고? 인위적으로 그려놓은 국경선을 두고 전쟁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과 달라 용들은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대인배적이라고나 할까... 이 산은 내 것, 저 호수는 네 것, 이러며 다투는 법 없이 어느 정도 선에서 눈감아 버린다. 실제로 나이가 어린 편에 속하는 치룡에 대한 적룡의 처신은 놀랍도록 관대해서 - 그 지랄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 야금야금 치고 올라오는 치룡을 두고도 콧방귀 한 번 뀌지 않았다. 하긴, 그들이 진짜로 싸우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면 세계가 수십 번 멸망해버려도 부족할 터이니 우리로선 그 편이 좋다.
아무튼 이런 까닭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아 내버려두는 변경이 생긴다.
하지만 용들이 시선을 두지 않는 땅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듯 요마가 득실거리게 된다.
말린 생강을 입안에 털어넣다 말고 코를 막았다. 우에, 쓸데없이 맵다... 쏙 우러나온 눈물을 닦고 다시 말했다.
『가고한(* 한은 높다는 뜻으로 산이나 언덕을 의미)에서 단가고한까지 요마가 많이 나올텐데.』
『헤에~ 신기하네. 어린 아기님이 용케 그런 걸 다 알고 계시네요. 예전에는 그랬습죠. 한 30년 전까지만 해도 무인의 호위 없이는 단가고한에 쉽사리 들어가질 못했으니까요. 서른 척 크기의 로쿠리가 호랑이를 커다란 발톱으로 잡아다가 이렇게! 요렇게~!』
양손으로 뭔가를 쥐어뜯는 동작을 호들갑스럽게 해가며 남자가 말했다.
아무리 잘 봐도 그 무서운 로쿠리는 아니고 아낙네가 닭 모가지 비트는 것과 비슷은 했다.
『머리부터 댕겅 부러뜨리고 한 입에 꿀꺽 삼켰다는 이야기도 있습지요. 지어낸 얘기 같지요? 하지만 가짜가 아니랍니다. 이 근방으로 전해지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밭일을 하다 사람이 갑자기 없어지는데 어느 날 옷을 뒤집어 입고 집으로 돌아와선 자기 처자식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죽이는 겁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오면 자기 아들의 얼굴을 뜯어먹곤 시뻘개진 얼굴로 와그작 꿀꺽...』
가고한 지방에 잘 나오는 둔갑 요괴다. 둔갑은 감쪽같으나 사람의 옷 입는 법을 몰라 바지를 양팔에 꿰고 나타나기도 한다. 아이를 잡아먹은 뒤에 그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 길가를 떠돌면 부모가 길 잃은 자녀를 되찾아 집으로 데려가게 되고 결국 온 집안이 몰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주 악질인 종류다.
『무섭죠? 헤헤헤.』
이쪽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자니 손짓발짓 섞어가며 실감나게 애기하던 남자가 저 혼자 좋아라 했다. 애를 겁줘서 잘도 신이 나겠다. 거기다 내가 느끼는 이 뿌리 깊은 혐오의 감정을 다른 종류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우리 적룡님의 은총을 받는 땅이 되고부터는 사람들이 들어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으니 참 다행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정보를 더 얻을 요령에 자세를 바로잡고 질문을 해봤다.
『그렇다면 그 가고한에까지 인가가 들어섰다는 건가.』
『숯 만드는 사람들이 몰려들다보니 어느새 마을을 이루었습니다요. 대신 강도가 늘어 거기서 거기지만요. 여전히 치안은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다시 산적 이야기로 돌아왔다.
『하지만 르주실 지역에 적룡군 5단병이 주둔해 있어. 원래는 요마를 토벌하던 병사들이지만 국경 문제도 있으니 토벌할 요마의 씨가 말랐다는 이유로 철수시키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 간 커다란 산적놈들도 함부로 야적질을 하진 못할 터인데?』
머리 속으로 지도를 여러 개 펼쳐놓은 채 그렇게 말하자 몸종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틀렸다. 내가 외우고 있는 지도는 오래되었기도 했거니와 일반인 열람 금지였다. 상상의 두루마리를 갈무리하여 원래의 장소로 치워두고 고개를 똑바로 들자 석연치 않아하는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어, 그런 어려운 이야긴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뭐... 나도 그다지 잘 아는 내용도 아니라서.』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으나 이쪽을 보는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 찬 채였다.
『아, 개구리다!』
작은 돌을 들어 수풀을 향해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으로 사내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저기! 바로 저기에!』
쓸데없이 의심을 받을 염려가 크니 다음부터는 말을 조심해야 하겠다.
어쨌거나 싫든 좋든 아무래도 강도 걱정은 해야 할 것 같다.
일부 마차에는 큰 칼을 찬 개별 호위대가 붙었으나 나 같은 사람은 두어 명의 몸종이 전부다.
마차 안에는 시골 촌부가 보면 눈이 휘둥그레 벌어질 비싼 옷가지와 장신구들이 있고, 뭐니뭐니해도 신분이 높은 아이들을 납치하면 그들의 부모로부터 큰돈을 받아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지.』
심하면 노예로 팔려나가 행방이 묘연해지기도... 휘사 같은 아리따운 소녀가 납치를 당하면 아마 몸무게만큼의 은값으로 팔려나갈 것이다. 만 11세 여아라고 가정을 하면 대략 33둔... 말이 그렇지 은이 33둔이다. 그 정도의 금액이면 탐심에 눈이 먼 나머지 잘 발려진 낫을 쥐고 마차를 향해 곧장 덤벼들 수도 있다. 계획을 잘 짜는 놈들이라면 계곡 위에서 바위를 굴리거나 하여 소동을 일으킨 뒤에 곧장 길 주변으로 불을 놓아 이쪽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도 있고... 화살을 쏘아 말을 맞추면 폭주하여 뒤집히는 마차도 나올 것이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움직임에 몸을 맏기며 이러저러 상상을 하고 있자니 쓸데없이 머리만 아파왔다.
『강도라... 이거 예감이 영 안 좋은 걸.』
그리고 진짜로 커다랗게 쿵 소리를 내며 내가 탄 마차의 바퀴가 빠져버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