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리여리한 팔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매일 붓만 쥐고 있으니 살이 더 마르는구나.》
상냥하여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굳은살이 박혔는데 손가락만 그렇구나. 팔뚝의 모양은 이리 봐도 여인네가 아닌데 비쩍 골아 이 또한 사내답지 않으니 이것으로 무얼 할꼬. 장작 대신 써먹을까, 내 침실로 들여 목침(木枕)으로 대신할까. 옳거니, 그게 좋겠군. 오늘부터 이걸 베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친구는 한참을 껄껄거리다 별안간 연료가 소진이라도 된 것처럼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그리고는 날아가는 새가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언성을 높였는데 아무래도 무술을 연마한 자가 아랫배를 관통하여 울리는 소리라는 건 큰 북처럼 크게 들리는 법이라 주변에선 천둥이 쳤다 착각했다.

《근육이 없잖아, 근육이! 평소 운동을 전혀 안 하니까 근육 비슷한 것도 안 만져져! 흔적도 안 남았어! 이래가지고는 긴급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팔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그냥 당하겠다!》
나는 언제나처럼 고서를 필사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 그의 참견이 달갑지가 않다.
《그만 좀 주물럭거리세요. 게다가 그렇게 흔들어대니 제 팔이 많이 아픕니다.》
《너는 팔이 아프겠지만 나는 가슴이 아프다. 괘씸하다. 어찌 하려느냐, 날 이리 아프게 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벌겋게 부어오를 제 팔과 달리 아픈 가슴 쯤이야.》
《매정한 놈!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부어오른 팔은 금방 치료가 되지만 아픈 내 마음엔 연고를 바를 수 없으니 쉽게 낫지도 않는다. 하여 그대는 천하에 둘도 없는 불충한 자다.》
불충이란 단어에 발끈하여 대드는 나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모기처럼 가냘팠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불충이라뇨. 저는 제국 이사실의 백성도 아닌 걸요. 그러니 신하가 될 수 없고, 신하가 아닌지라 불충도 저지를 수 없사옵니다.》
따박따박 반박하자 그는 어린애처럼 발로 바닥을 걷어차며 짜증을 냈다.
《에잇. 하여간 말대꾸는... 지는 법이 없어요, 저놈의 얄미운 주둥이는.》
《아이고.., 팔뚝만 미운게 아니고 이젠 제 입도 얄미운 겁니까.》
《당연하지. 밉다. 미워서 못 살겠다. 그러니 그만 붓을 내려놓고 나와 어울려줘야겠다.》
《시러요. 바빠요. 관심 없으요.》
《불충이다!》

그렇게 밉다, 밉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그는 나름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골리는 재미로 그랬는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어쨌거나 가르친 사람이 무능해서가 아니고 게으른 글쟁이 나부랭이의 팔은 주먹질 용도로 써먹기엔 아무래도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
『운동을 좀 할 걸.』
양팔을 어루만져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근육 같은 건 안 붙어 있다.
더하여 영양 상태가 고르지 않아 뼈가 앙상한 팔이다.

『안즈 님, 잘 생각하셨소.』
가슴팍에 피가 튀어 더욱 으스스한 느낌을 자아내던 사내가 짧은 숨을 내뿜으며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손잡이가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단검을 오른손으로 쥔 채였는데 날이 위로 향해 있었다. 그러고도「죽이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감히 날 설득했다 생각하는 눈치다.
물론 나는 설득당하지 않았고, 어른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다. 반대로 내 뱃속은 먹물처럼 시커멓고 진흙탕처럼 지저분하다.

오늘에 이르러 다시 재생되기를 허락한 목소리가 잡동사니로 가득찬 심연으로부터 둥실 떠올랐다.
《요령을 알려주마. 그러니 잘 기억해두렴. 싸움에 임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선 제압이다. 그러니 있는 힘을 다해 쩌렁쩌렁 질러라. 내 친히 시범을 보여주지. 네 이놈,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이러느냐. 내가 누군지 알고 까부는 것이냐~!!》
가만 생각해보니 그건 좀 뭐랄까... 쑥스럽다.
풍채 좋던 친구가 말 위에 올라타서 그 대사를 꺼냈을 적엔 위풍당당하고 참 멋이 있었는데 내가 하면 그야말로 익살스러운 대사가 될 터, 깔끔하게 포기하자.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옳지, 바로 그겁니다. 안즈 님. 이리 더 가까이 오시오.』
생략된 말은「이리로 오면 멱을 따드리겠소」겠지.
고함은 못 질러도 기선제압은 할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파랗게 벼려진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선전포고를 했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 산중에서 무엇과 마주쳤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 하였느냐.
어금니를 꽉 다문 상태에서 숨겨놓은 본성을 까발리며 한껏 표독스런 표정을 짓자 이를 본 타평의 낯가죽에서도 미소 비슷하던 것이 한 꺼풀 벗겨져 내렸다. 독이 닿으니 표면이 망가져 녹아내린 것이다.
그 뒤를 대신한 건 당혹감. 동시에 이해가 가질 않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이었다.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거리에서도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너, 뭐... 뭐냐.』
말을 더듬으며 아래로 내렸던 팔을 번쩍 들었다. 여전히 핏물이 마르지 않은 칼날이 똑바로 겨누어졌다.
그는 겁에 질린 듯 보이기도 했고,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같았다. 이마의 주름이 무시무시했다. 배다른 동생 리세리가, 아버지가, 할멈이 나를 볼 적마다 드러내 보이던 찡그림이었다.
『글쎄다, 나는 무엇일까.』
마당에 드러누워 숨이 끊어져가는 개에게 달라붙어 항문부터 그 안쪽 내장까지 뜯어먹던 벌레를 목도하였을 적에 리세리는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동생은 문간방 너머로 정좌하고 앉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적에도 똑같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다면 나는 구더기인가. 불길함의 원형인가. 아직 죽지도 않은 동물의 살을 파먹는 벌레와 비슷하다 할 수 있는가.
이성을 직관적으로 마비시키며 잠식해 들어오는 그것의 정체는 혐오... 싫은 것, 참을 수 없이 싫은 것, 외면하고 싶은 것, 거칠게 꿰맨 흉터처럼 자국을 남기고 빗물처럼 침식하여 깊고 큰 고랑을 만든다.
자, 이제 나는 여기서 다시 질문한다.
너는 지금 무엇과 만났는가.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가장 절박한 충동에 의거하여 보름달에 정신줄 놓은 날짐승인양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선제공격.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오히려 붉게 달아오른 타평의 눈동자로 돌격하여 날아드는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모습을 비춰주던 반사막을 나뭇가지로 곧장 뚫어버리려 했다.
『오, 오지 마! 히이익! 히익!』
압력이 더해져 공기가 갑절로 무거워졌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환한 햇빛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득한 어둠을 느꼈다. 그 어둠 한 가운데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인간이 가까이 해서 좋을 거 하나 없는, 그야말로 풍기는 냄새 그대로 구역질나게 역겹고 해로운 종류다.

그의 칼이 내 가슴을 찌르는게 먼저일까, 아님 타평의 눈이 뭉개지는게 먼저일까.
「성인인 저 자의 팔이 훨씬 길다. 아마도 내가 먼저 찔리게 되겠지.」
고통을 예감한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았고, 곧 형태를 잃고 깨져버릴 남자의 왼쪽 눈알에만 오로지 집중하였다.

Posted by 미야

2015/05/06 21:17 2015/05/0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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