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은 의외로 늦게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니었다.

『이 자식아. 네 녀석 눈깔은 장식품이냐, 아님 썩은 붕어 눈깔이냐. 어떻게 애새끼가 사람 살려 이러고 달아나는데 그걸 까마득히 모를 수가 있냐. 설마, 대낮부터 술을 훔쳐 마신 건 아니겠지.』
『아, 아니어요, 타평 아저씨. 맹세코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어요! 진짜에요!』
『야! 그러면서 왜 자기 입 냄새를 맡아보는 거야!』
얼굴이 빨개진 미리노가 허둥댔다.
『아, 아뇨. 이건 그냥 콧물이 나와서... 그, 어쨌든 어린애가 빈 몸뚱이로 사라졌을 거라 생각도 못 했고... 멀리 가진 못 했을 테니까... 걸음이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어요. 흔적으로 봐선 이리로 계속 올라간 것 같...』
『제기랄, 아까부터 짜증나게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미리노!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빨리 앞장 서.』
『알았다고요, 알았어. 이쪽이에요! 이쪽으로 간게 분명해요.』
『인마! 너 진짜지 술 먹었지! 그쪽이 아니잖아.』

지척까지 따라붙은 목소리는 아까보다 곱절은 더 가깝게 들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나는 아직 어린아이고 폐활량도 아담했다. 게다가 다리 근육은 또래에 비해 형편없었다. 전생에서도 제대로 활 한 번 쏴보지 못한 허약남으로 늘 놀림의 대상이었고, 몸 쓰는 일은 아무래도 체질이 아니어서 전력으로 달리기라던가 밭일, 농삿일에는 젬병이었다. 지금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악착같이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올라갔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출발한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다리는 힘이 빠져 휘청거렸고, 머리로는 피가 몰려 귓속이 윙윙 울렸다.
이 상태라면 조만간 붙잡히고도 남겠다.

『하아! 이놈의 자식이 수작을 부리고 있구먼.』타평이 이를 갈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저씨?』
『이건 일부러 꺽은 가지야. 교묘하게 우릴 속이려고 손으로 가지를 꺾은 뒤에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움직였어. 이걸 봐. 부러진 가지는 이쪽인데 발자국은 저쪽으로 이어지지? 이 녀석이 우릴 반대 방향으로 따돌리려 했어.』
『설마 그럴 리가. 천치라 하지 않았소?』
『흥! 소문대로 천치 바보라면 우리 계획을 눈치 채고 도망을 칠 일도 없었다.』

마음의 눈으로 바위에 달라붙은 조그만 육신을 그려보았다.
손을 뻗어 더 높을 곳을 향하여 자신의 몸을 끌어올리고, 다시 손을 뻗는다.
문제는 그게 상상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흥분에 찬 목소리는 이제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고, 나는 이대로 산을 오르는 것보단 차라리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뻗어 나온 나뭇가지를 손으로 붙잡고 그쪽으로 체중을 실어 잠시 매달린 다음, 다리를 두어 번 흔들어 수풀로 뛰어들었다. 돋아난 덩굴의 가시가 옷과 머리카락을 할퀴고 잡아 당겼다. 끔찍하게 쓰라려 눈물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안쪽으로 더 몸을 밀어 넣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가뭄에 나무뿌리가 드러나면서 흙이 움푹 파인 부분이 있어 무릎을 접고 앉자 그럭저럭 숨을 만했다.
몸을 접기가 무섭게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틀어막은 입에서 거칠어진 단내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이윽고 눈가가 벌개진 두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바위 언덕에 이르렀다. 나는 더욱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오라... 어딘가 이 부근에 있겠군. 녀석을 느낄 수 있어.』
『그 느껴지는게 설마 멧돼지는 아니겠지요?』
『쉿!』
타평이 그렇게 근처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미리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수풀을 아무렇게나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여서 숨어있는 나를 찾기 위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발을 뻗어 풀을 밟고 흔드는데 당연히 그렇게 해서 튀어나오는 건 각다귀와 벌레들뿐이다.
그런 무신경함이 타평의 신경을 자극한 모양이다.
『병신아! 토끼도 그런 식으론 못 잡는다!』
『아아, 뭐여. 나더러 더 이상 어쩌라고요.』
두 사람의 각자의 불만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미리노는 징징댔고, 타평은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
『이 썩을 놈아. 지금 뭐라고 떠들었냐.』
『그르니까 걍 가자니까요, 타평 아저씨. 어차피 이런 곳에선 짐승에게 잡아먹혀 오래 못 가요. 일부러 안 잡아 죽여도 되는데... 쳇, 귀찮아 죽겠구먼.』
『이 바보 같은 놈! 이게 단순히 귀찮은 일인 줄 알아?! 네 녀석은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냐?! 엉?!』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작은 우격다짐이 벌어진 것 같다. 머리 위로 흙을 뿌려가며 엎드려 있는 내 귀로 땀내와 흐트러진 발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팔로 사람을 떠밀었는지 그중 한 명은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애초에 네 녀석이 실수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아이고, 아파 죽갔네. 솔직히 내가 실수한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로 해요, 말로!』
주먹으로 사람 머리를 치는 둔탁한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 우둔한 놈! 만의 하나라는게 가장 무서운 거야. 혹시라도 애새끼가 무사히 빠져나가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야. 종놈이 주인을 죽이려 했다며 저자거리에 목이 걸려. 알아?!』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에요! 이게 전부 나리가 시켜서 하는 일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목이 달아납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는 종놈이라 시키는대로 할 뿐이라고요!』
『이놈이 정신을 못 차리네... 너, 진짜 바보냐?!』
미리노가 발을 굴러가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왜 바봅니까! 누가 바보라는 거에요!』
『이놈아. 아직도 우리가 처한 상황을 모르겠어?!』
『알 게 뭐에요!』
『야! 너, 말 하다 말고 어디 가! 야!』
『이젠 다 지겨워. 난 돌아갈 겁니다.』
『거기 못 서?! 야! 미리노!』
『시끄러, 망할 늙은이! 애는 죽었다고 쳐! 돌아가서 그렇게 보고하면 되잖아. 누가 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우리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을 할 사람도 없어. 그냥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고. 그러면 되잖아? 배고 고프고 목도 말라. 내가 왜 여기서 땀을 빼야 하냐고. 그 애새끼가 절벽에서 굴러먹든, 산속에서 굶어죽든, 알 바 아니야. 엿이나 먹으라고 해. 난 그냥 말을 타고 내려가 술이나 진창 마실 거야. 쳇!』

순간 공기가 차가워졌다.·아니, 찌르는 듯 아파왔다. 살기(殺氣)다.
『맙소사. 입만 가벼운게 아니고 하는 짓거리도 가벼워서 못 쓰겠군. 안 되겠다. 네놈부터 처리하지.』
타평이 마리노의 목을 움켜쥐고는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그의 머리를 나무기둥에 세게 찧었다.
쾅 하는 굉음을 들은 것과 같이하여 몸을 더욱 안으로 말았다.
이어 무거운 보릿자루가 쓰러지는 기척이 들렸고, 더하여 예민해진 코로 비릿한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사람이 칼에 찔렸다! 타평이 쓰러진 미리노를 칼로 찔렀다!

숲속은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을 죽인 사내가 자신이 숨통을 끊은 시체로부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안즈~!! 이 못난 계집아! 네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 거기서 우릴 보고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알 수 있어! 넌 여기서 못 빠져나간다. 그러니 얌전히 나오는게 좋을 거다. 나오면 죽이진 않아. 목숨만은 살려주마.』
등줄기로 오한이 흐르면서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쥔 채로 목숨만은 살려주겠단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구제불능의 머저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섰다.

Posted by 미야

2015/05/05 21:04 2015/05/0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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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05 22:57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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