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일부 써뒀던 부분은 하드 말아먹으면서 전부 날아갔고... 1년 넘게 좌절 삼태기였다가 1인칭으로 바꿔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네요.
「제국에선 원래 이렇게 하는 거래요」라면서 그들은 풍성하게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랐다.
물론 제국인들이 단정하게 보이는게 가장 좋다면서 짧은 머리를 선호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는 하다. 용신 다음으로 신성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황제도 긴 머리는 귀찮다고 정색하며 기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남자들 이야기고.
가볍다 못해 허전해진 뒷통수를 매만지며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한가닥씩 줍던 할멈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머니까요.』
내심 당황했다. 듣고 보니 더 모르겠다. 내 판단으로는 그것과 이것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내가 몰랐던, 여행 전에 머리를 다듬는 풍습이라도 있는 건가? 멀뚱거리며 설명을 기대했으나 할멈은 줄줄이 얘기하는게 귀찮은 것 같았다. 아니,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여기는 듯했다.
이봐요? 나는 여자아이라니까요?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니 더하여 굽 낮은 신발과 바지까지 준비하여 내밀었다.
『그럼 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안즈 님.』
그녀는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내 팔을 우악스럽게 꽉 잡더니 소매 속으로 억지로 끼어 넣었다. 팔목이 비틀려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홑겹의 면으로 만든 치마가 벗겨졌다. 단추를 채우는 손길은 야무지고 신속했다.
거울을 보자 어느 틈에 빼빼 마르고 왜소한 몸집의 소년이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친으로 간다 결정이 내려지자 짐을 꾸릴 시간조차 촉박해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되었다.
대신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건 가문의 명예를 항상 염두에 두라는 딱딱한 내용으로 글을 적어 내려 보냈고, 어디로 사라지지 않을 그놈의 망할 허례허식에 따라 서찰은 값비싼 나전 장식이 된 검정 상자 속에 정중히 봉인된 채 하달되었다.
두 팔로 상자를 받아들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려 했다.
내용물은 그렇다치고 자결용 단검이나 목을 매는 용도의 비단 끈이 들어가 있으면 어울릴 법한 상자이지 않은가. 진짜로 죽으라 하는 줄 알고 잠시나마 기겁을 했다.
「허! 상자를 팔면 돈은 되겠구먼. 하지만 왜?」
아무튼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디서 잘못 배운 이상한 걸 흉내 내어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제 그만 마차에 오르시지요, 안즈 님. 일정이 촉박합니다.』
『아.』
리세리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는데.
손목을 잡힌 채 끌려가며 나는 내 귀여운 이복동생을 생각했다.
짐짓 돌아보니 우리 집 지붕이 궁궐처럼 드높았다. 높게 솟은 처마의 휘어짐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위엄을 내뿜었다.
『나 같으면 펑펑 울고 기절했겠구먼. 자기 처지를 알고는 있는 건가?』
『그러게. 완전히 남의 일이라는 식으로 멍한 얼굴이네.』
『단순히 바보인 건지도 몰러. 평소에도 꾸벅꾸벅 잘만 졸았잖아? 코앞에서 빗자루를 쓸며 일부러 먼지를 일으켜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하긴. 평소에도 불도 안 킨 어두운 방에 움직이지도 않고 오도카니 앉아만 있곤 했지.』
『아유, 소름 돋아. 무슨 어린애가 그렇담.』
『옛날에 약을 잘못 먹어 저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던데? 너 혹시 아니?』
『아, 나도 그 얘기 들은 적 있다. 배앓이 약이랍시고 친모가 쥐약을 먹였다고...』
『쥐약을?! 어머나, 끔찍스러워라.』
이럴 적엔 귀가 좋은게 흉이 되어버린다.
아니, 이 사람들아. 나도 슬프거든요?! 집에서 내쫓겼다는 거 잘 알거든요?!
그리고 내 어머니가 나에게 쥐약을 먹였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거든요?!
『썩을 것들!』
짐을 싣던 짐꾼이 내뱉은 욕설을 들은 모양이다. 사내는 놀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입을 헤 벌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 표정이 무덤덤했기에 이내 다른 이가 투덜거리는 말을 잘못 들었거니 스스로 납득하는 눈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가 아니고 대략 일곱 살 전후로 원래의 인격과 기억이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에 대한 작동 원리라던가 구조라는 건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 이 각성의 과정을 여러 번 경험해본 당사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젖먹이 시절에 그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생각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서서히 눈을 뜨고 깨어나는 모습을 상상했다면 그냥 웃겠다. 의외로 상당히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경험이다. 탈피를 하려면 낡은 등껍질부터 부셔야 함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외형이 깨져야만 그 속에 든 알맹이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음이다. 고통은 아마도 그런 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저녁식사 시간이었고, 하필이면 수저로 밥을 떠서 입안에 넣는 순간 각성의 때가 찾아왔는데 당시의 일을 회상하던 할멈의 표현을 빌리자면「별안간 밥상을 뒤엎더니 바닥에 쓰러져 다리로 벽을 차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삼킨 음식을 남김없이 토했으며, 이내 입술이 파랗게 변한 상태에서 두 팔로 자기 머리를 쥐어 몸통에서 뽑으려 하였습니다.」란다. 그거 참... 뭐랄까.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오싹했다.
반응이 하도 격렬하니 독을 먹었다 착각할 법하다. 눈이 돌아간 상태로 거품까지 뿜는 걸 보곤 대뜸 쥐약을 떠올렸다고 한다.
- 돈을 요구하던 생모가 나리의 금전제공 거절에 불만을 품고 아이에게 약을 먹였다.
일경이 겨우 지났을 뿐인데 불경스런 수근거림이 온 집안에 퍼졌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호랑이 무늬가 조각된 비싼 벼루를 마룻바닥에 팽개치며 대노했다.
「누가 건드렸느냐. 내가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내 명령 없이 손을 썼느냔 말이다!」
화를 내는 부분이 살짝 엇나가 있었지만, 아무튼.
나중에 듣기로는 개구멍을 통해 은밀히 집안으로 들어온 의원이 바닥에 흘린 반찬과 국을 싸서 조용히 가져갔다고 했다. 주방 일을 하는 여자들은 날벼락을 맞았는데 특히 찬을 만드는 이들이 뒷마당으로 끌려가 호된 매질을 당했다. 조사를 마친 의원이「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보고를 올렸음에도 사흘 내내 경을 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자리를 보전하고 드러누워 열에 들뜬 채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때로는 노래를, 때로는 구애를,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애원과 사죄하기를 반복했다. 몇 백년간 누적된 기억과 이전의 삶의 무게에 말 그대로 깔려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거의 실성한 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엄청나게 많은 얼굴들을 떠올렸고, 커다란 대못이 머리를 뚫고 지나가는 감각을 생생하게 맛보며 그들의 목소리를 전부 기억해냈다.
아버지,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친구,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나의 왕. 그리고 나의 용신...
밑바닥 없는 절망이 일곱 살의 어린아이를 통째로 삼킨 뒤 그 살을 씹어댔고, 그 날카로운 이빨에 곱게 갈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없었다.
저항은 쓸데없어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나는 거의 말을 잃었다.
이것이 약을 먹어 천치가 되었다는 소문의 실체다.
『원래 많이 이상해.』
우리 집 하인이 손가락을 자기 이마에 대고 빙빙 돌렸다. 내 이야긴가 보다.
솔잎을 따서 입에 물고 있는 날 봐서 그런지 빙빙 돌리는 동작이 평소보다 배는 컸다.
『큰 나라로 어려운 공부를 하러 가는 거잖아. 그런데 저렇다니까. 큰일이야.』
청색의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중년의 남자가 우리 집 하인이 내뱉은 흉을 듣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가 나쁜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게다가 너,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막 하면 욕 본다. 우리 같은 것들은 자나깨나 입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런 식으로 주둥이 함부로 놀리는 거 아니다.』
『쳇! 같은 종놈이면서 훈계를 하는 거냐.』
『인석아, 그게 훈계냐?! 거기서 왜 눈을 부라려. 진짜지 성격 이상한 놈일세!』
『내가 뭐가 이상해. 나는 정상이라고?』
『아이고, 우리 주인처럼 깐깐한 분을 만나야 정신을 차릴려나. 네가 우리 주인을 모셔봐야 하는데. 우리 아가씨처럼 사흘 내내 신경질을 부려봐. 아주 미치고 펄쩍 뛴다.』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경질은 차라리 괜찮지. 말도 마. 우리 도련님은 멀미가 나서 계속 토하느라 바빠. 그리고는 자기 토사물 냄새에 반응해서 다시 구토하고... 악몽이야.』
보름 가까이 지나자 하인들끼리는 이미 친해진 모양이었다. 서로 말을 섞지 않는 아이들과 달리 그들은 불을 피우고 한곳으로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휴식을 취하곤 했다. 통성명을 하고부터는 불알친구라도 되는 양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의 제일은 주인 흉보기였다.
『우웩, 어쩐지 너한테서 냄새 나더라. 아유아유아유아유 썩은 내.』
『뭣이 어째?!』
그 다음이 상대방 흉보며 눈 흘리기.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멀미로 고생한다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