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8년 전, 나는 또 한 번 죽었다.
하늘에서 주신 명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이번에도 역시 젊어서 절명, 사인은 두부손상으로 인한 충격사... 라고 하면 지나치게 간결한 설명인데 화재로 인해 발생한 유독가스를 잔뜩 들이마신 나머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진 상황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다 무너진 대들보에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져 그대로 즉사 - 여기까지 떠올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란 놈은 못난 사람이다. 그게 언젯적 일이라고 아직까지 그때의 일을 곱씹고 있다니.
숨이 끊어지면서 원한을 품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건 피치 못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슬퍼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후회는 없구나」읊조리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추구하는 목표인 만큼 그런 식의 횡액이 달갑지 않은게 사실이기는 하나... 어쩌겠는가, 상대방이 날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그것도 나 하나 잡겠다며 남의 나라 수도 한 가운데로 군대를 보내기까지 했는데.

「소원대로 책과 함께 불살라주지.」

순간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팔자가 기구하여 나란 녀석은 어디를 가든 매번 미움을 받고 만다.

옆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안즈 님.』
『별 거 아니오, 할멈.』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꾸했어도 마음 한 구석이 쓰라리고 아파왔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몸가짐 역시 흐트러진다. 나도 모르는 새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못마땅했는지 할멈이 헛기침을 했다.
흠칫하고 다시 배꼽 아래로 힘을 주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 나의 나이는 아홉 살이다. 한 달 보름 뒤에 생일이 돌아오는데 그 때는 열 살이 된다.
참으로 좋은 때다. 한창 어리광부리고 만사가 즐거울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움을 받을 팔자라는 것인지 고귀하신 아버님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분수에 넘치는 예장을 갖추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 오전 한 나절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낭비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무려 3개월 전이고, 그동안 집안에선 항상 그래왔듯 나를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온종일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 식사도 따로 챙겨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수저를 들게 했다. 이복동생 리세리가 받는 대접과는 하늘과 땅이라서 나는 누구와도 말을 섞을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서도 관심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완벽한 방임 상태로 나를 아무렇게나 내버려뒀는데 귀족이라면 당연시 여길 몸치장을 도울 전속 몸종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부모님께 문안 인사 어쩌고는 사치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아버지는 나란 아이에게 일절 관심이 없어서 어쩌다 정원 앞을 지나치는 나를 봐도 개나 고양이 취급을 하곤 했다. 두 발 달린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구나, 덕분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구나, 대략 이런 식이랄까.
그런 나를 아버지가 먼저 보자고 할 까닭이 없었다.
고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건 그냥 일종의 괴롭히기다.
다리가 저려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었다가, 힘들어하는 나를 몰래 훔쳐보며 큭큭 웃고, 나중엔 선심 쓰듯 별당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을까...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다.
허나 짐작했던 것과 달리 두꺼운 문평지가 양편으로 젖혀졌고「나리 납시오」라는 귀 간지러운 알림과 같이하여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강녕하시옵니까, 아버님.』
『음.』
정확히 열 다섯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예의바르게 절을 올리는 어린아이를 보고 남자는 어느 쪽으로도 해석하기 어려운 신음 소리를 냈다.
그래도 굳이 파악하자면 좋지 않은 쪽이다. 그 증거로 사내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남자는 빈사국의 귀족으로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다만 수려한 외모로 어려서부터 칭송이 자자했는데 그 덕에 입궐하여 왕의 잡무를 돕는 동아로 발탁되었다.
남자가 한 일은 왕에게 아침 세숫물을 은그릇에 떠다 바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별 거 아닌 허드레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는 대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코를 세우고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고, 의외로 그런 점이 통해 성년이 되어 궁을 나오고 난 뒤에도 주변에선 그를 보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귀한 핏줄이라 단단히 착각하곤 했다.
무슨 놈의 세숫물 담당이 고귀한 핏줄이냐 따지지 말 것, 왕의 발 씻는 물도 귀하고 세숫대야도 귀하다.
그러니 모두 입을 모아 외치도록. 나리 납시오, 라고.
코웃음이 나올 상황임을 본인만 모른다. 스스로를 높여 자신을 귀하다 생각하고 있으니 무어라 할 수도 없다. 더하여 한 번 당연하다고 여기면 자식이 아비된 자 앞에서 신하된 자의 예를 보이며 머리를 조아려도 이상하다 생각치 못하게 된다.

거드름을 피우는 말투로 남자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그만 머리를 들어도 좋다.』
『예.』
허락이 떨어졌으나 시선은 여전히 무릎에 둔 채로 행동을 조심했다.
나약한 분위기에, 얌전한 성격이고, 어른의 말에 순종하는 착한 아이. 남자가 원하는 모습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는 채였고, 과장하자면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운 걸 억지로 마주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느냐.』
『......』
선뜻 대답을 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완전히 빗나간 질문이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책을 가져다주거나 선생님을 데려와 수업을 받게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뜬금없이 공부라니?
당혹스러워하는 이쪽의 분위기를 읽었을까, 남자는 재빨리 질문 내용을 달리하여 말했다.
『글은 읽고 쓸 줄 아느냐?』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다. 글이라는 걸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이게 뭔 소리람.
재차 실수했음을 깨닫고 남자가 왼쪽 무릎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음. 글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없느냐?』
속사정이야 어쨌든 나는 이 집안의 장녀다.
남의 이목을 고려하여 드디어 나에게 글을 가르쳐줄 선생을 붙여주려나 보다.
촉을 세우며 기대 반, 근심 반,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배우고 싶사옵니다.... 만.』
아아... 틀린 답이었나 보다. 어쩐지 망한 것 같다. 아버지가 더욱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제가 쌀 축내는 것도 아깝죠? 전 분수를 알아요. 저 같은 놈에겐 글공부 같은 사치는 필요 없습니다. 얌전히 지내다가 이대로 죽을게요!」라고 외쳤으면 좋았을 거 같다.
『그럼 되었다. 사친으로 보내지는 건 안즈, 너로 결정하겠다.』
『네?』
『그렇게 알고 준비하거라.』

사친제도는 변방국의 귀족이나 왕족의 자제를 제국으로 보내 거기 상류층 자제들과 같이 여러 수업을 받게 하는 일종의 친화정책이다. 이쪽에서 희망을 하면 대학까지 보내준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면 너도나도 가겠다고 난리가 날만큼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시 쉽지만... 실상은 인질이다.
『제가 가도 되는 건지요, 아버님.』
5년에서 10년 가까이 공부시킨답시고 애를 그 먼 곳까지 데려다가 얼굴 한 번 안 보여준다.
당연히 부모들은 아이를 보내기를 꺼린다.
게다가 한참만에 다 커서 돌아오면 핏줄의 정 그딴 거 모르겠고, 결정적으로 낯선 모습으로 변한 아이들은 제국인처럼 말하고, 제국인처럼 옷을 입고, 제국인 입맛의 음식을 먹는다. 부모들의 당혹스러움이 정점을 찍는 순간이다. 당장 관리가 되어 입신양명하여야 할 터인데 이건 그냥 머리를 짧게 자른 외국인이다.
이렇다보니 너도나도 꾀를 부리기 시작해서 어느 해인가는 보내어진 사친 전부가 막둥이였던 적도 있다. 더러는 입양한 양자였다.
물론 머리 좋은 제국 황제가 그걸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장자를 보내라.」
그런 연유로 규율에 따르자면 사친으로 보낼 대상은 내가 아니라 이복동생 리세리가 될 터.

아버지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냐. 네가 이 집에서 제일 먼저 태어나지 않았니.』
그리고 자식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돌아와도 집안을 잇지는 않겠으나 네가 첫째인 것은 틀림이 없지. 아무튼 네가 가지 않는다면 천한 출신의 네 어미를 일부러 돈을 주고 사서 임신시킨 보람이 없잖느냐.』

주먹을 쥐고 아버지라는 작자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Posted by 미야

2015/04/22 13:29 2015/04/2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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