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목표물을 뒤에서 껴안고 목을 조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라벽치의 가정은 잘못되었다. 후끈거리는 팔뚝이며 등에 닿는 단단한 가슴팍이며 하는 느낌은 차라리 처녀를 겁탈하는 치한에 가까웠다. 그래도 뭐라도 해보라며 부추기니까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해본다. 그럼 잘근잘근 밟아볼까, 하지만 뒤로 끌어당겨진 탓에 나는 지금 한껏 까치발을 하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치한의 다리를 걷어차려 했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신체는 뒷발질을 하기엔 최적화가 안 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나와 대화하기를 계속했다. 덕분에 애초부터 목적이 이쪽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었다. 『그 남자가 널 상대로 강도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도 수상해. 무슨 재주로 폐쇄적인 영업을 하는 소극 상은으로 네가 돈을 찾으러 온다는 걸 알았을까.』 밀착된 자세에서 속삭이며 묻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은의 직원이 증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렸을 수도 있죠.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다면서... 욧!』 이번에는 팔꿈치로 뒤를 힘껏 찍었다. 그래봤자 이라벽치는 약간만 반응했다. 근육이 두꺼운 탓에 유리를 박아 넣어도 개의치 않아할 사내다. 그럼 맨손인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밀착은 더 심해져 목덜미에 닿는 콧김이 덥다 느껴질 지경이었다. 『뭐,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그런데 넌 아까부터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담담하게 얘기하는구나.』 대답은 둘째고 일단 살아야겠다. 끙끙대며 팔을 최대한 위로 뻗어 말랑거리는 귀를 잡고 세게 비틀었다. 『아이쿠!』 귀가 떨어질 지경이 되자 이라벽치가 슬그머니 결박을 풀어주었다. 아싸, 성공.
『이게 정말로 안즈에게 도움이 되는 겁니까. 내 판단엔 전혀 아닌데.』 정해진 달리기를 다 마친 후, 제법 거리를 두고 서서 우리 두 사람의 엉겨 붙음을 계속 못 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린청이 그 즉시 쏘아붙였다. 애초부터 제국인인 이라벽치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던 아이다. 그의 눈에는「커다란 짐승 같은 놈이 애를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로 보였던 것 같다. 하긴, 커다란 거울이 옆에 있었다면 나 역시 거울에 비친 우리들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보자보자 하니 아까부터 뭡니까. 팔을 잡아당기거나, 다리를 걸거나, 뒤에서 끌어안거나!』 아직 변성기를 맞지 않은 소년의 성대는 말도 안 되는 영역의 고음처리가 가능했다. 『어쩔 수 없잖아, 호신술을 배우는게 처음이라는데. 누구나 다 이렇게 시작한다고. 가벼운 몸싸움부터 시작해 점차 고급 기술로 넘어가야지, 첫 술에 물 위를 걷는 법부터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구차한 변명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그런 식으로 몸싸움을 가르칩니까! 왜 끌어안는 건데요.』 추행범으로 몰린 이라벽치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끌어안은 거 아니다. 가상의 적으로 셈치고 공격한 거야.』 『제가 봤을 적엔 희롱하는 것으로밖엔 안 보이던데요.』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다. 오해야!』 그래도 린청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더하여 면박까지 줬다. 『어쨌든 당신은 그렇게 썩 좋은 스승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방식은 영 글러먹었어 - 메기수염처럼 하얗게 탈색된 이라벽치가 산소를 갈구하며 입을 뻐끔거리자 린청은 얼른 내 손목을 붙잡았다. 『목검을 들 수 있게 되기 전까진 저 남자에게서가 아니라 차라리 나에게 배워. 예당국 련 가의 장남 린청, 다듬어지지 않은 무예 실력이지만 너에게 기초 정도는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다.』 『아니, 일부러 그럴 필요까지는...』 나는 진짜로 이런 걸 배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린청은 나의 우유부단한 거절을 다르게 이해했다. 『미안해할 거 없어. 신세진다고 생각지 마라. 단지 내가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아니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손까지 휘저었지만 이미 안 듣고 있다. 『그럼 첫 수업으로 알아두면 유용한 기술 한 가지를 가르쳐 주마, 안즈. 적이 멍청하게 굴면서 머뭇거리면 주저하지 말고 눈을 찔러.』 소년은 예고도 없이 검지를 들어 이라벽치의 눈을 푸욱 건드렸다. 『악~! 내 눈!』 『봐, 효과 좋지? 상대가 그 유명한 멸락 장군이라도 꼼짝을 못 하게 된다고.』 남의 눈을 찔러놓고도 속 시원해하는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한참 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부자가 되어 있었다. 황금을 입힌 종이로 뒤를 닦을 정도의 갑부는 아니었지만 땡전 한 닢 없던 어제와 비교하자면 부자가 맞았다. 『증서에 적혀진 금액을 받아왔습니다. 것보다... 이 화상아.』 숙희 숙사감대부는 사건 이후 왜 자기부터 찾아오지 않았느냐며 성질을 부렸다. 한가롭게 놀면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던 건 아닌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내 모습을 보더니 상황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로 몰아붙이며 벌컥 화를 냈다. 『안즈 님이 처한 상황이 어떻다는 건 알고 계시는 거 맞습니까? 지금까지 어디서 누구랑 놀고 있었던 겁니까.』 『안 놀았는데요.』 『아이고, 잘도 그랬겠다... 쯧쯧.』 안 놀았다는데 더 화를 낸다. 진짜지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성격 급한 사람만 모이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증서는 절반만 진짜였지만 소극 상은에서 일이 커지는 걸 꺼려했던지 손실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재원 부석상위 앞으로 왔던 편지와 증서를 다시 꺼내와 내 앞에 펼쳐놓았다. 염연히 사건 증거물일 텐데 어떻게 그게 일개 숙사감대부인 숙희 손아귀로 굴러 떨어졌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어쨌든 먼저 봤던 그 편지가 맞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것들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사납게 노려봐도 어쩔 수 없다. 여기 놓인 편지의 필체가 아버지의 것이 맞느냐 물어도 대답은 곤란했다. 신분 높은 이가 다른 사람에게 대필은 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있고, 유려한 필체로 대필을 해주는 걸로 밥 먹고 사는 중인도 있는 마당에... 한때 나도 대필을 하는 걸로 생업을 가진 적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다.
『본국에서 가져온 아버님이 주신 글자가 있으시지요?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게 과연 나에게 있던가, 가만 생각했다가 자개 장식이 된「자결 상자」존재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물품의 존재를 제3자가 정확히 꿰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숙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 남자라면 쌈지통에 든 바늘 개수까지 전부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업무를 처리하는 무시무시한 속도와 양을 봐도 이 남자는 결코 얕잡아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 물건이 숙사감대부의 책상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리고 있자니 숙희가 보일락 말락 고개를 숙였다.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개인 숙소에서 꺼내온 점을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불쾌한 기분이 들겠지만 이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굳이 숨겨야 할 물건도 아닌데요, 뭐.』 『그거 참, 하해와 같은 이해심. 그렇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뚝뚝 끊어지는 이상한 문장으로 양해를 구한 그는 상자를 열고 그 속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나란히 펼쳐놓고 보니 오싹했다. 집안의 명예를 항시 잊지 말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부석상위 앞으로 도달한 것과 그 형태가 매우 흡사했다. 누가 봐도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획의 삐침과 기울어짐, 올라감. 줄의 간격과 크기까지 판박이라서 일부러 돋보기를 들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도출된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숙희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점이 보이는가 보다. 『먼저 부석상위 앞으로 온 편지를 볼까요.』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사실 관습에 대해 아는 내용이 부족하여 일이 서툴렀습니다. 미리 챙기질 못한 것은 제 과오입니다. 요청컨대 나의 아이더러 소극 상은에 들러 “필요한” 금전을 찾으라 하십시오. 동봉한 것은 증서입니다.
이 간략한 문장에서 그는 필요한, 이라고 적은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자에서 꺼낸 편지에도 운 좋게 같은 단어가 적혀져 있더군요. 여기 이 부분이죠.「네게 “필요한”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너의 부족함을 먼저 인식하고 이를 채워줄 이에게 존경심을 보여...」자, 그럼 같이 나란히 두고 비교를 해볼까요. 어때요, 안즈 님이 보기에는.』 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쌍둥이처럼 똑같았으니까. 『똑같죠. 똑같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마치 습지에 비치는 모양대로 정성껏 그려 넣은 적은 것처럼.』 숙희는 재차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다듬지 않은 수염의 까끌거리는 촉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재밌어요, 이건. 마치 도전해 봐라, 주장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Posted by 미야
2015/08/1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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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걷기와 천천히 뛰기를 몇번이나 반복하여 가까스로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생물 오징어처럼 어기적거리며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나를 향해 이라벽치는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표정이 참으로 대견하구나 칭찬을 하는 것 같아 몸은 힘들었어도 기분은 좋았다. 이런게 아마 성취감일 것이다. 땀으로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녹초가 되었어도 상쾌했다. 달리자, 이대로 이라벽치에게 달려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 하? 기가 막히게도 이 미친 천둥 솥뚜껑은 갑자기 기합을 넣어가며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니, 시키는 대로 뜀박질을 한 사람에게 막판에 이르러 이런 식의 행패를 부리는 법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에서 신호가 번쩍번쩍 울렸다. 주먹이 커다란 수박처럼 확대되어 보였으나 그걸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솥뚜껑을 향해 제법 빠르게 돌진하는 중이었고, 뭐랄까. 튀어나온 기둥을 향해 머리를 깨부수고자 달려가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느리게 반응하는 둔한 몸은 여전히 달리기 자세를 유지했다. 한술 더 떠서 왼쪽 발목을 삐긋했다. 참 가지가지 하는 몸뚱이다. 하여 시선으로는 계속 이라벽치의 주먹을 쫓았지만 몸은 왼편으로 크게 쏠렸다.
『동체시력은 괜찮은데 역시 몸이 안 따라주는구나. 역시 체력이 문제군.』 꼭 때릴 것처럼 굴던 남자는 간발의 차이로 쥐었던 주먹을 도로 활짝 펴고 넘어지기 일보직전의 나를 붙들어줬다. 『잘 했다, 안즈.』 『허억, 허억! 지금 방금 뭐였습니까?!』 『뭐긴. 죽었다 살아난 거지.』 그렇게 말하며 별 거 아니라는 동작으로 발목을 툭 건드렸다. 하지만 이 남자의 완력은 장난이 아니라서 신발코로 가볍게 툭 치는 것만으로도 무릎 아래까지 찌르르 하는 통증이 번져왔다. 『아까 접지르던 것 같던데.』 『그걸 확인한답시고 제 뼈를 부러뜨릴 겁니까?! 살살 좀 해주세요.』 『아니 이놈아. 그 정도에 뼈가 왜 부러져. 말라붙은 개똥도 안 부러진다.』 항의했더니 엄살쟁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투덜대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신을 벗고 왼쪽 발목의 상태를 살펴봤다. 엄지로 누르자 찌릿한 감이 들었다. 잘 됐네, 핑계를 대고 오늘은 더 못 하겠다 말해야겠다.
『그래도 눈이라도 좋으니 다행이다. 보여도 피하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그래도 눈으로 보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면 몸은 어떻게든 반응하기 마련이니까...』 『어떻게든 반응한다고요? 에이. 그럼 날아오는 화살도 눈으로 보면 피할 수 있게요.』 『나는 피해.』 『......』 『돌진하여 달려오는 멧돼지도 충분히 피할 수 있고말고. 몸을 계속하여 단련하면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말도 안 돼. 일반화가 너무 심각하십니다. 100년을 노력해도 저는 그런 경지에는 못 올라갑니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지만 이라벽치는 그것으로 결론을 도출하여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려 했다. 『자! 그러니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부지런히 몸을 단련하도록 합니다!」우렁찬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픈 발목을 살살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길 포기하면 됩니다.』 『그래. 열심히 체력을 키우...... 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조차 살아남겠노라 각오했다면 제일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라. 무기를 드는 건 그 다음이다. 에이드 체이스만 치토.』
이라벽치는 치토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누구냐.』 『이라벽치 님은 치토를 모르십니까?』 『그 기분 나쁜 말을 한 자가 누군데.』되물으며 그는 진심으로 불쾌해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하여 살아남은 자입니다. 북대륙 채턴 지방 사람이에요.』 『들어본 적 없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무척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요. 끔찍한 재해가 닥쳤을 적에 밀려오는 식인 요괴들로부터 길마론 북서부를 훌륭하게 지켜냈어요.』 『그럼 그 자식이 영웅이란 말이냐?!』 『인간임을 포기했는데 영웅일 리 없죠. 나중에 그의 시신은 여섯 토막으로 잘려나가 훼손되었어요.』 요괴들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도 움직임이 둔한 어린이와 여성을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발 빠르게 도망치곤 했다. 나중을 도모하기 위해 인구 2천의 마을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전략은 훌륭했지만 인간이 할 말한 짓은 아니어서 치토의 도움으로 명줄이 길어진 왕조차 감사 인사를 생략한 채 그를 산채로 씹어 먹고 싶어 했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합니다 - 치토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증오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재해가 멎자 왕은 재빨리 그를 사형대 위로 올렸다.
『그렇다면 얘야, 너도 살기 위해서라면 인간이길 포기하겠다는 거냐?』 『아뇨.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눈을 있는대로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이라벽치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 그렇지?』 『모두로부터 욕설을 들어가며 사형대에서 목이 잘리는 건 싫습니다. 전 늙어 죽는 것이 소원이라서요.』 『그게 아니잖아!』 어쨌든 나는「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계속해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을 기억했을 뿐이다. 치토는 사형대 위에 오르기 전 감옥에서 짧막한 수기를 썼다. 나는 인간이길 포기했었노라고. 요괴와 싸우기 위해 요괴보다 더 지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신을 고쳐 신고 아픈 발목을 좌우로 돌려보았다. 다행히 심하게 욱씬거리지는 않았다. 차가운 물수건으로 화기를 내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 조심하면 기분 나쁜 이 감각도 곧 사라질 것이다. 『저라면 도망칠 겁니다.』 『음?』 『고난과 역경이 다가온다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칠 거에요.』 『그 다리와 그 체력으로?』 허리에 손을 얹은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겠다며 마치 절을 하듯 상체를 구부렸다. 『사내답게 정면에서 맞서 싸우라고는 말하지 않겠어. 지금의 네 상황에선 무리라는 걸 잘 아니까. 허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 가봤자 쫓아오는 악당에게 금방 잡힐텐데?』 이라벽치는 다시 원래의 결론 - 맞춤형 결론에 무사히 도달했음에 온몸으로 기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한다?』 체력을 기르자. 아자.
『칼을 들고 네게 덤벼들었다던 남자 말이다. 소극 상은 사람 말로는 너와 같은 빈사국 사람이라던데.』 이라벽치의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곰 같은 덩치에게 뒤로 껴안긴 채 목조르기라는 것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공격하는 시늉만 해 보이는 거라고 했지만 그거야 곰의 판단에서나 그런 것이고, 곰의 펑퍼짐한 앞발에 당한 나 같은 인간은 그냥 죽을 맛이었다. 『켁. 커억!』 『혹시 네가 보기에 얼굴이 낯익지는 않든?』 『그, 그게! 숨이 막! 켁!』 『그런데 그 남자의 주머니에 호패가 있더라니까. 빈사국 사람이 아니고 우리 이사실 백성이었다.』 어떻게든 조르기 공격에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쓰던 나는 잠시 버둥거리던 걸 멈췄다. 『몰래 훔친 걸까요?』 『하지만 호패의 원래 주인은 자기 걸 잃어버린 적도 없다고 그러던데.』 하여 나란히 놓고 보니 거짓말처럼 똑같이 생긴 호패가 두 개가 되었다. 직접 만든 두부를 팔던 장사꾼은 새파랗게 질려 쥐고 있던 손님 끌기용 딸랑이 방울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남에게 빌려준 적도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똑같이 생긴 걸 깎아 만든 적도 없다고 했다. 호패를 위조하면 그 형벌이 매우 무겁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사내는 겁에 질렸다. 「억울하옵니다! 소인은 정말 억울하옵니다! 나리, 진짜로 저에겐 죄가 없어요!」 이라벽치는 사내의 주장을 믿어주었다. 『설마, 두부 장수가 그랬을라고. 왜냐하면 그 장사꾼이 팔던 두부가 모양이 영 예쁘지가 않고 이상했거든.』 『......』 『상품으로 내놓은 두부도 그 꼴인데 그 실력으로 호패를 위조하겠어? 그렇게 말했더니 이 인간이 갑자기 자기가 만든 두부는 모양은 그래도 맛 하나는 기가 막힌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거야. 단골도 얼마나 많은지 한 번 보라면서 거래처 장부를 꺼내 오더군.』 언짢은 기억 때문일까, 목을 조르는 힘이 약간 세졌다.
Posted by 미야
2015/08/1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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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 안쪽을 기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사람을 찾는다고 말을 걸자 열 명 모두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것도 얼마나 신속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던지 이쪽에서 찾는 이의 이름을 대기도 전이었다. 『아닐세. 뭘 항의하거나 따지려고 그러는게 아니고, 단순히 물어볼 것이 있어 그래.』 저자세로 읍소를 하자 구석에서 야채를 다듬던 하수가 눈을 비스듬히 치켜떴다. 양파가 아무래도 매운지라 눈가가 붉었는데 얼마나 이력이 났던지 도마와 칼을 보지도 않고 갖은 야채를 재주껏 잘게 토막내고 있었다. 저러다 손가락을 자를 것 같아 보는 사람은 무서웠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난 또 누구라고. 얼굴을 보니 창고 도령이구먼.』 내 별명이 또 늘어났다... 도토리, 다람쥐, 팥알, 깨알, 빈사국 거렁뱅이에 창고도령.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자니 하수가 칼날에 묻은 자질구레한 야채 조각을 행주로 닦아내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내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작업용 식칼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채여서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생선용 식칼에 찔려 죽을 뻔한 것이 바로 어제다. 날 선 쇠붙이는 사절이다.
팔뚝 소매에 재주껏 땀방울이 솟은 코를 문지른 하수는「그래, 누구를 찾는다고요?」확인하며 물어왔다. 생사를 확인해보려 한다 말할 수는 없어 최대한 가벼운 어투로 락연의 이름을 언급했다. 『락연이라는 이름의 자를 찾고 있네. 혹시 오늘 일하러 왔나?』 『글쎄요. 집에 일이 있다고 며칠 쉬기는 했는데... 잠시만 기다려봐요. 락연~!! 안에 있냐?! 락연!』 귀청 울리는 천둥 부름에 대답하며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이는 체격부터 내가 알던 자와 전혀 달랐다. 나이도 훨씬 많아 이쪽은 40대 후반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노화된 피부 위로 검버섯이 약간 피었다. 눈동자는 평범한 밝은 갈색이었다. 손에는 연료로 사용할 숯을 하나 가득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날 찾수?』 『이쪽 도련님이 물어볼 것이 있다길래.』 락연은 다소 불온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이는 어려도 내 신분이 높았기에 겉으로 올리지는 않았지만「뭘 물어보러 온 것이 아니라 요구하러 왔겠지」불평하는게 훤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소방 하수들이 높으신 도련님들이 자신들을 개인 하인 취급을 한다며 불만을 표시하는 걸 본 기억이 났다. 부탁이야 뻔했다. 개인 취향에 맞는 간식을 대령하라, 오늘 국은 너무 짰다, 혹은 싱거웠다, 재료에서 당근을 빼라, 접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타등등. 이번엔 또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나 싶어 락연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뭘 따지려는게 아니라니까. 일을 며칠 쉬었다고 들었네.』 『아, 예예. 과년한 딸아이가 시집을 가게 되었기에... 애비된 노릇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습니다.』 예상치 않은 질문에 락연은 동료들을 흘끔거렸다. 「나 없는 동안에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없었어.」 입 뻥긋으로 의사소통을 간단히 해결한 그는 그 즉시 안도하며 다시 나와 눈을 맞춰왔다. 『그런데요? 도련님.』 『어제도 이곳에서 일을 했나?』 『그랬습니다만.』 『혹시 락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하수가 자네 말고 또 있는가.』 『글쎄요, 어지간한 사람들 이름은 알고 있지만 소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들까지는 아닙니다. 제 이름이 그렇게 희귀한 것은 아니니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아닐세. 일을 방해해서 미안허이.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야.』 락연은 별 싱거운 일 다 봤다며 꾸벅 인사를 한 뒤 일하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신원을 도용했나 보군.」 자리에 없는 사람을 골라 그 사람 행색을 하며 암시를 걸어두는 건 중급 이상의 요괴들에겐 쉬운 일이다. 이름마저 빌려왔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곳 소방에서 딸의 결혼식으로 정신없이 바빴을 진짜 락연 대신 톱니 모양 치아를 드러내며 더러워진 그릇을 치웠을 거라 생각하니 기가 찼다. 「난감하군. 나와 같이 저자 거리로 나가도 된다 허락한 자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중문으로 나가 칼에 찔린 시체 모습으로 들어온 자가 있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무엇보다 진짜 이름을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자다. 그런 자의 생사를 내 힘만으로 확인한다는 건 유령을 산 사람으로 부활시키는 것만큼 불가능에 가깝다.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행방불명된 자를 찾습니다 - 특징 : 톱니 이빨」벽보를 써 붙일 것도 아니었기에 포기했다. 「하는 수 없다. 어딘가에서 무탈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 그 기도가 (가짜)락연이 아닌 나를 위한 기도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다 지나면 나는 과연 무사히 숨 쉬고 있을까... 뺨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려 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연무장을 한 바퀴 뛰고 옵니다. 실시.』 『허허허... 농담도 잘 하시네요, 이라벽치 님은.』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거부하자 이라벽치는 정색했다. 『농담 아니야. 네 친구는 벌써 다섯 바퀴째 뛰고 있는 걸.』 『그야 린청은 저와 달리 강철 체력의 소유자니까요. 하지만 전 그렇게 오래 달리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 정도쯤 근육의 근 자도 보이지 않는 네 물렁거리는 팔뚝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러니까 일단 한 바퀴만 뛰고 오라는 거 아니겠니. 빠르게 뛰지 않아도 좋으니까 완주하겠다는 목표만 노려.』 이라벽치가 우리를 데려온 곳은 적룡군이 훈련하는 연무장이 아닌 일반 체력 단련장 - 곰보자국이 선명한 화살과녁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궁술을 연습하는 장소인 듯했지만 어쨌든 그 규모가 건물 열 채는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그걸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것도 아니고 바깥으로 돌아 한 바퀴를 뛰라니. 아이고, 오늘 그냥 제삿날이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무리라니까요!』 『도중에 정 힘들면 걸어도 좋다. 일단 뛰고 보자.』 『저어, 배가 살살 아파서... 잠시 뒷간에. 그럼 다녀오겠습니닷!』 『이 넓은 풀밭 전체가 야성의 화장실이야. 어디를 간다는 거니.』 『아! 깜빡 잊어먹고 있었는데 곧 수업 시간이에요.』 『지리가 안즈가 수업이라는 걸 전혀 듣지 않는다는 걸 여기서 모르는 사람 없다.』 결국 뺨 가득히 공기를 가득 집어넣은 채「힘 내라」응원까지 받아가며 풀밭을 뛰어야 했다. 달리기라니, 달리기라니! 내 취미는 어디까지나 인쇄된 글자를 읽는 것이지 몸을 쓰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숨만 쉬고 살던 소녀는 햇빛을 보는 일이 적어서 그랬는지 또래에 비해 체격이 작았다. 운동량 부족으로 팔다리는 부러질 것처럼 가냘팠다. 제공되는 식사가 끊어진 적은 없지만 기름진 밥상을 받았던 건 손가락에 꼽는다. 영양 불균형은 결국 저질 체력으로 돌아왔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호흡이 곤란해지고 말았다. 그새 땀이 솟은 이마를 닦으며 출발지점을 돌아다보았더니 이라벽치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다리가 무겁다. 종아리가 당긴다. 폐가 안쪽에서부터 짜부라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호흡이 뚝뚝 끊겨져 코와 입으로 뿜겨 나왔다. 『입은 벌리지 말고.』 충고를 듣고 벌어진 입을 닫았지만 그 즉시 질식사의 위기가 닥쳤다. 『지금처럼 팔을 크게 흔들면 나중에 힘들어져. 상체에 바짝 붙여!』 흔들리는 팔이 어디에 있다고. 내 몸뚱이에 그런 거 안 달렸다. 인식 가능한 신체 부위는 발바닥과 심장, 그리고 허파 정도다. 거추장스러운게 더 있는 것도 같다만, 머리와 몸이 죄다 따로 놀았다. 『턱을 당겨.』 그 말을 오해한 나는 입을 벌렸다. 『아니, 입은 다물고 턱을 당기라고.』 그거나 이거나 같은 말 아니었어? 이래라 저래라 헷갈리게 만들고. 미워 죽겠다.
이제 여섯 바퀴 째를 맞이한 린청이 뛰는 속도를 줄여 내 옆으로 붙었다. 『안즈, 눈은 뜨고 뛰어.』 『노력 중이야.』 더위 먹은 개처럼 헐떡대느라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 대꾸는 했다. 그 모습이 안스러웠는지 린청은 한참동안 소리 없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여기서 소리가 없었다는 건 말을 걸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나처럼 크억, 크억, 쇳소리를 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녀석은 나보다 몇 곱절 오래 달렸음에도 잠자는 아기처럼 편안하게 호흡했다. 『처음부터 너무 욕심 부리지 않아도 돼.』 『욕심?! 그런 거 전혀 없거든요?!』 나 같은 건 무시하고 어서 가라 짜증냈더니 그제야 원래대로 속도를 올려 저만치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8/11 14:25
2015/08/1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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