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걸어 발바닥이 화끈거릴 무렵에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소극 상은은 그 명칭에 깨어날 소(蘇)에 이길 극(剋) 글자를 사용했는데 어쩐지 그 직관적 인상은 작을 소(小,) 적을 소(少,) 그것도 아니면 푸성귀 소(蔬) 글자와 많이 흡사했다. 간판만 컸지 건물은 세로로 길죽한 2층이었다. 과거에 동대륙에서 거래하던 오남 상회와 비슷한 걸 상상했다가 직접 눈으로 그 크기와 규모를 보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물론 나의 잘못이다. 사과를 손에 들고 자두의 맛을 상상해서야 쓰겠는가. 두 가지 과일 모두 붉은 껍질을 가졌지만 크기도 다르고 그 향과 달기도 차이가 있다. 값비싼 비단을 필두로 각종 장신구와 금붙이를 다루던 오남은 큰 배만 세 척을 소유한 거대 상회였는데 그 역사만 300년이 넘었다. 그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상회를 떠올리며 지역 상은의 번지르르함을 기대했으니 전부 나의 불찰이다. 『이곳인가요?』 『맞는 것 같아.』 나는 증서에 적힌 이름과 건물 규모와는 맞지 않는 덩치 큰 간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리 말했다.
그래도 돈을 거래하는 장소인 만큼 출입구와 창문에는 단단한 쇠붙이로 두껍게 격자 장식을 만들어 달아 금품을 노리는 자들로부터 내부를 지키고 있었다. 사설 경비원으로 짐작되는 자도 한 명 있었다. 다만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자는 아니어서 덩치만 컸지 물렁살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자세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법이다. 경계하며 출입구 주변을 계속해서 왔다갔다 움직이는데 걸을 적마다 어깨가 크게 흔들거리고 보폭도 크기가 제멋대로다. 뒷꿈치를 끌고 걷는 버릇도 있었다. 건달이 달려들면 그럭저럭 힘으로 제압할 수는 있겠으나 그 이상은 무리다. 옆구리에 찬 검은 그저 장식이다. 뽑아서 실전으로 휘둘러본 적도 없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이쪽에서 먼저 눈인사를 하자 긴장하여 험악해졌다. 『무슨 용무요.』 그러면서 내가 아니라 락연을 주시했다. 여차하면 어떻게 요리하여 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눈빛이었다. 이 자는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고객이 아닌 강도라고 가정하라 사전 지시라도 받았나? 그렇지 않고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의 옷차림이 거부감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락연은 아무리 봐도 귀족이 아니었고, 재산이 많은 중인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며, 나야 빌려 입은 옷이라 그 형상이 몹시 꾀죄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는 계속해서 락연을 물고 늘어졌다. 『무슨 용무라고 묻지 않았소! 대답하시오.』 『말씀하시는 대상이 틀렸습니다. 이자는 동행하는 입장일 뿐이고 용건이 있는 쪽은 접니다. 본가에서 맡긴 돈을 찾으려고요. 그러니 저를 보고 말씀하시지요.』 그제야 남자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내 말을 전부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더러운 벼룩을 찾으려 했다. 그나마 손에 증서를 꺼내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후딱 내쫓으려 하였을 것이다. 『이름을 말하시오.』 여기서? 길바닥 한 가운데서? 그런 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니던가. 나는 의아해하며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지리가 가의 안즈라고 하는데요.』 가만가만 눈치를 보다 다음으로는 머리에 쓴 약식 하리건을 벗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 찰라, 사내가 턱짓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라 시늉을 해보였다. 나와 락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좁게 솟은 건물의 2층을 주시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요? 엄청 갑갑하게 만들었네요.』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게 만들어진 문을 열자 마찬가지로 비좁은 비탈 통로가 나타났는데 경사가 가팔라서 계단이라기 보다는 흡사 사다리를 연상시키는 구조였다. 거기다 양팔을 조금 펼쳤을 뿐인데 양쪽 벽이 모두 만져졌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낭패다. 한 명은 벽에 코를 대고 서서 까치발을 한 뒤에 최대한 숨을 들이마셔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봤자 엇갈려서 지나간다는 건 무리다. 『돈 찾으러 왔다가 성질을 내고 다 부수고 가겠어요.』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안 좋아. 비움토에 있는 유명한 공성이 이런 구조를 하고 있었지.」 그곳은 공략이 불가능한 불패의 요새였다. 올라가는 통로가 비정상적으로 좁아터진 관계로 병사가 한 명씩 진입해야 했는데 방어하는 입장에선 올라오는 족족 기다란 창으로 찌르기만 하면 되었으니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나중엔 쌓인 시체 때문에라도 내부 깊숙한 곳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나가려면 동료의 시신부터 치워야했다. 그러다 뒤에서 출입문이 닫기기라도 하는 날엔 좁은 통로에 낀 병사들은... 『덫 안에 갇힌 쥐 신세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예의 물렁살 경비원이 등 뒤에서 쿵 소리가 나게끔 출입문을 걸어 잠궜다. 《빈사국에서 온 손님이다! 손님 맞아라!》 락연이야 사람이 아니니까 얼굴색이 변할 일이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달라서 그 즉시 하얗게 질려버렸다.
『함정이었어! 락연! 도로 내려가야 해!』 『에?』 내 뒤에 선 락연은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도련님, 저 위에서 용무를 보셔야 하잖아요.』 『함정이라니까!』 망할 놈의 아버지. 역시 내 편지를 읽고 거기에 대한 답장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덫으로 유인하고는 날 잡으려 한 거였어 - 뒤돌아서 락연의 머리와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서둘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악, 악! 서둘지 말아요, 그러다 넘어진다니까요.』 『불평할 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서둘지 않으면 죽어!』
빈사국에서 온 손님이라는 말을 듣고 2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가 통로의 끝자락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광 탓에 새카만 윤곽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오른손에 식칼을 들고 있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식칼?!」 이 상황에서 식칼은 또 뭐냐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가 식칼을 쳐들고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쿵쾅거리며 계단이 울리는 소음과 신음, 심장이 뛰는 소리, 삐이 하고 울리는 이명 - 찰라와도 같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삼킨 채 어둠 속에서도 반짝임을 보이는 금속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생선을 다듬는 칼이다. 시장에서 싼 가격으로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허접한 물건이었다. 단, 사용한 적이 없는 새 칼이었다. 손잡이에서 나무향이 진하게 났다. 그건 비릿한 생선기름이 묻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의미했다. 여전히 식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어둠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잔뜩 일그러지고, 눈은 크게 벌어졌고, 잔뜩 주름이 졌고... 소금기가 번져 입술은 타버렸다. 『타평... 너냐.』
한심한 기분이었다. 왜 도망치지 않은 거냐. 어째서 그 숲에서 숯을 굽는 마을을 향해 도망치지 않은 거냐. 여전히 너에게 사명이 남았느냐. 아버지의 명령 따위가 뭐라고. 종놈이면 종놈답게 다 내려놓고 도망쳐도 되는데. 왜 너는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야. 지리가 가문에서 넌 쓰고 버리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아버지도, 핏방울 하나 섞이지 않은 어머니도, 배다른 동생도 네게 이걸 강요할 권리는 없어.
하지만 넌 기쁜 마음이겠지. 주인나리께 충성을 바치는 네 자신을 그토록이나 자랑스러워하면서. 쓸.데.없.어.
『안즈 도련님!』 나를 보호하기 위해 락연이 내 몸뚱이를 밟고 뛰어넘으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의치 않자 락연은 팔을 길게 뻗어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그걸 나로부터 밀어내려 기를 썼다. 『안즈 님!』 사람의 체중까지 실린 칼날이었다. 근육과 신경이 잘려 순식간의 락연의 손은 너덜너덜해졌다. 체액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머리와 얼굴을 향해 확 흩뿌려졌다. 『넋 놓고 있지 마! 넋 놓고 있지 말라고! 안즈 님!』 그곳은 이미 훌륭한 개미지옥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25 11:07
2015/07/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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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보드 A/S 마치고 돌아옴. 지화자! ※
요괴보다 더 요괴 같다...라.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지로 당겨진 미세한 근육이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쑤셔왔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확실히 요괴다. 혈관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도 이래선 제대로 된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인 어린아이의 얼굴은 흡사 솜씨 뛰어난 장인이 나무를 깎아 만든 훌륭한 가면처럼 보였는데 입가에 그럴 듯한 미소가 걸렸음에도 따스함은 쌀알 한 톨 만큼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그럴 듯하게 흉내를 내고 있을 뿐, 얇은 껍질을 벗겨보면 그 내용물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마음도 없고, 감정도 없으며, 오롯이 남은 것은 모방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장난치듯 활짝 펴보았다. 순식간에 미소가 지워지고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나타났다. 내렸던 손을 움직여 다시 얼굴을 가렸다가 또 한 번 활짝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웃고 있는 안즈가 유리창에 비쳤다. 어느 쪽이 나일까. 어쩐지 둘 다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나조차 모르는 어딘가에 있는 걸까.
가게 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종업원이 하던 일을 멈춘 채 이쪽을 응시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것으로 보아 헷갈려하는 눈치다. 잘 만들어진 두 개의 가면을 빠르게 바꿔 쓰는 사람이 밖에 서있는데 키를 보면 어른도 아니고 어린애다. 피로함에 허깨비를 보았다고 여겼던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손으로 주물러댔다.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사내는「아무래도 잠이 부족했었나봐」혼잣말했다.
그 길로 가게를 지나쳐 큰 길을 향해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락연은 내가 따라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며 제자리에 서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의외였다. 저 혼자서 가버릴 기세였음에도 그가 움직인 거리는 실제 얼마 되지도 않았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 탓일까,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나를 뭘로 보는 거에요. 나는 친구를 혼자 두고 가지 않아요.』 이제는 눈을 휘둥글 뜰 차례였다. 친구라니. 설마, 말다툼 비슷한 걸 했으니 친구가 된 건가. 『친구? 너와 내가?』 『친구죠.』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최소한 인간의 관점에선 지금의 너와 나의 관계를 친구라고 하기 어렵다고 본다만.』 『그런가요?』 『요괴의 관점이라면 잘 모르겠어. 네가 말해봐. 너와 나는 친구인 거냐?』 락연은 여전히 불쾌한 감정인 것 같아 이런 질문을 던지는게 매우 불편했다.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 입에 꿀꺽 삼켜진다거나... 아니면 야밤에 습격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일지도. 동무가 되자 말을 꺼내는 순간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상대는 요괴니까.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리는 징검다리를 지팡이로 쿡쿡 찔러보는 기분이다. 잘못 쳤다가 뒤집어지는 날엔 골탕을 먹는 건 온전히 내가 될 터인데 - 샛강은 건너가야 하고, 징검다리의 품질은 의심스럽고. 차라리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첨벙대며 들어가는 편이 속편하려나.
가만히 코를 문질렀다. 『친구가 뭐라고 생각하지? 락연.』 『글쎄요... 관심이 가는데 먹고 싶다는 충동은 생기지 않는 거랄까.』 나도 모르게 숨을 엇박자로 쉬고 말았다. 야, 인석아! 그렇다면 선택지는 걍 하나로 정해져 있는 거잖여! 엉뚱한 방향의 벽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우린 친구인 거겠지. 그래, 우린 친구야.』 『분명 친구인 거에요. 이렇게 안즈 님 얼굴을 보니 식욕이라는게 싹 없어지니까.』 이봐. 그건 재수 밥탱이라는 표현이라곳! - 인간은 보통 그런 말을 친구가 아니라 왕 싸가지에게나 한단 말이다! 속으로는 난리법썩 아우성을 쳤으나 겉으로는 평온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래. 이제부터 우린 친구다.』 안즈로 태어나 처음으로 - 반강제적으로 친구 선언을 하고 있음에도 차마 락연의 눈을 볼 용기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벗이라는 건 뭘까. 「마음이 닿는 거겠지. 아니면 닿고 싶어 하는 거라던가...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벗은 달과 같은 것이다. 환하게 저 하늘에 떠있으니 가슴이 떨리지. 닿고 싶어 애절해지고.」 시오재의 친구였던 인간은 그렇게 정의했다. 「미묘하게 틀린 것 같은데요. 그건 연인이잖습니까, 폐하.」 「뭣이?! 너는 달을 보며 애인을 떠올린다는 거냐?」 「보통은 그렇지요.」 「괘씸하군. 그렇다면 시오재, 오늘부터 넌 달을 보는 거 금지다. 이건 명령이다.」 늦은 저녁, 술을 마시면서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과음으로 이미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는 꼿꼿해서 지금까지 마신 것이 술이 아니고 우물에서 떠온 맹물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억지가...」 「잔이 비었다. 따라라! 불충!」 나는 무릎걸음으로 슬그머니 술상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이때 녀석이 화를 내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벌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 미묘한 간격에 착오가 생기면 후환이 두려워진다. 「적손. 오늘은 그만 드세요. 건강에 나빠요.」 「너는 내 친구잖아! 그럼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지! 안 그래?!」 「송구하옵니다.」 「이 불충아! 거기서 왜 사과하는 거야. 너와 내가 진실로 친구 사이가 맞느냐?!」 「최근에는 저도 헷갈리고 있사옵니다. 제가 폐하의 친구가 맞나요?」 친구. 우정. 사람의 마음. 나는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관절 친구란 무엇이옵니까. 폐하가 생각하시는 벗이라는 건 어떤 것인지요.」 그는 울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술잔을 쥔 손이 어느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를 찌푸렸다. 「자꾸 묻지 마. 그딴 거 몰라! 알게 뭐람.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지금부터 나중까지 내 옆에 있어주는 거야.」 「멀리 있어도 저는 폐하의 친구입니다.」 「하지만 닿지가 않아... 닿지가! 벽지 산간 골짜기에 처박혀서, 날 만나러 와주지도 않는데, 차라리 저 하늘의 달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 이렇게 어렵게 만났는데 술을 따르라는 소소한 청도 단칼에 거절하고, 가면 같은 얼굴로 웃기만 한다... 불충아, 답하여라. 너는 왜 웃느냐. 이런 내가 재밌느냐?!」 「설마요. 술주정 구경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호오, 그럼 지금 내가 술주정을 하고 있다는 뜻?」 말실수를 했음에 혀를 깨물었다. 벽은의 일개 관리가 대제국의 황제더러 술주정을 하고 있다 탓했다. 가늘어지는 눈매에 긴장하며 가만가만 말을 골랐다. 「술주정이라니오. 비슷은 하지만 아닌 듯하옵니다. 그냥 뭐랄까, 약간만. 그러니까 요만큼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 닥쳐.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술주정을 해 보일테다. 그러니 각오하라고?」 「아이고, 적손. 살려주세요.」 「손바닥 싹싹 빌어도 늦었어.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는 날이다. 그렇게 알고 내가 주는 잔을 받아라. 이 또한 명령이다. 그러니 쭈욱 들이키고... 옳지.」 진실로 벗이라는 건 뭘까. 어떤 관계일까. 대낮에도 달은 하늘에 떠있다. 하지만 햇살이 강한 탓에 사람의 눈으로는 한 낮의 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봤자 닿지 않는 건 마찬가지. 어둠 속에 떠오른 보름달이나, 보이지 않는 대낮의 달이나... 우정이라는 건 결국 높은 장소에 걸린 허상에 불과하다. 흔들리는 술잔 속으로 달이 떠올랐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도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2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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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쫓겨났다 - 라기 보다는 가는 방향이 엇갈려서 그만 내려야 했다. 『내려! 빨리 내려. 사람이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녀석은 순전히 나를 망신 주기 위해 마부석에 앉혀놓았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썩은 사과를 먹으라 주고 맛있었느냐 묻는 격이라 나는 망설임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너야말로 엿이나 먹어!』 그런 우리를 보고 락연은 기분 좋게 싱글벙글 웃었다. 『안즈 님 주변으로 친구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니었군요.』 『에엑? 친구?! 누가.』 『저 송주라는 도련님과 친구 사이가 아닙니까?』 요괴의 눈에는 심한 말다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우리들이 매우 친한 사이로 생각되었나 보다. 인간과 요물은 아무래도 서로 가치관이 달라서 적과 동지의 개념이 혼동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니까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 대화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그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격렬한 말싸움과 욕설이 엉뚱하게 우정의 과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녀석의 머리에 말똥을 올려놓았다는 걸 얘기해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요괴의 상식에 따라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한다 주장하진 않을까. 실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쳐다보는 이쪽의 심정도 모르고 락연은 포목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목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정성껏 배웅했다. 희미하게「죽어라, 안즈!」외침이 대답으로 돌아왔음에도 그는 저주의 외침을 애절한 석별의 정으로 착각하곤 좋아했다. 『활발해서 좋은 분 같아요. 다음에 만나면 단청과자라도 선물해야겠어요.』 『친구가 아니라는데 자꾸 그러네.』 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쫓기는 것도 아니면서 왜 빠르게 걷느냐고? 그야 이사실 사람들이 워낙에 성마르게 걷기에 서둘지 않으면 옆으로 밀쳐지게 돼서 그렇다. 게다가 호기심 많은 시선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뜨내기라고 생각하고 좋지 못한 것들이 달라붙게 된다. 호객꾼도 그러하고, 또한 장사치도 그러하고 잡꾼과 소매치기도 그러하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무리들이 락연과 내 주변을 포위하며 접근해오고 있는 중이다. 제일 앞줄로 막대과자와 튀긴 밀가루 빵을 파는 장사꾼이 나타나 고소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설탕을 가득 뿌린데다 참기름까지 바른 과자는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냄새가 났다. 자제력이 없는 어린애라면 이성을 잃은 채 덥썩 쥐고도 남았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입안으로 침이 돌았다. 하지만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하며 걷는 보폭을 넓혔다. 하지만 락연은 걸려들었다. 『도련님. 하나 먹고 가죠.』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요괴인데도 단 맛의 간식에 침을 흘리다니. 게다가 살 수 없다 단칼에 잘라 말하자 섭섭한 표정까지 짓는다. 『다섯 개에 1전밖에 안 하는데.』 『거꾸로 들고 흔들어도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 안 나와. 미안해. 정 먹고 싶다면 돌아오는 길에 사줄게.』
그리 정색하여 말하고 큰 대로에서 좁은 골목을 끼고 도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상은에 간다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책방 골목으로 들어와 버렸다. 잠재의식 속에 기억하고 있는 길을 따라 예전에 다니던 단골 가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락연은 눈에 들어오는 간판을 하나하나 관찰하다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이런 좁은 골목으로 상은이 있나요?』 있을 리가. 쓰게 웃으며 그 길로 돌아 나오려는데 그늘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로 방풍 중인 책들을 보자 이성이 절반은 날아가 버렸다. 해벌죽 웃으며 달라붙으니 오랜만에 물건 좀 팔아보겠구나 분위기 알아차린 주인이 한걸음에 달려 나와 흥정에 들어갔다. 『보는 눈이 있으시구먼. 50전만 내시게, 도령.』 전문가를 비웃는 거냐, 이 서면악달숙 궤보는 아무리 쳐도 30전이면! 『그럼 48전만 내고 가져가. 이거 보라고. 상태가 엄청 좋아요.』 쓰윽 훑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에 젖은 얼룩이 있는데 상태 좋긴. 42전! 『과자 사먹을 동전 한 닢조차 없다는 양반이 어느 주머니에서 42전이 나옵니까. 정신 차려요~!』 뒤에서 락연이 손바닥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 안즈가 아닌 시오재가 단골로 다니던 책방은 이미 상호가 바뀌어서 모르는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 있었다. 저번에도 노인이었는데 이번에도 주인은 노인이었다. 나는 찾아가야 할 소극 상은의 위치를 묻는 척하다 예전 주인의 안부에 대해 넌지시 물어봤는데 노환으로 몸져눕고 치료비가 다급해 결국 가게를 팔았다는 것 정도만 겨우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슬슬 흐려지기 시작한 기억을 힘겹게 더듬다가 결국 회색의 두터운 벽에 가로막혔던지 나에게 해줄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제가 마흔 두 살 되던 해에 이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이야기네요.』 『먼저 주인에게 재처가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였죠. 남편이 죽자 재산을 정리하고 동네를 떠났어요.』 『손님이 주문해놓고 찾아가지 않은 책이오? 글쎄... 안 찾아갔다면 결국 다른 사람이 구입해서 가져갔겠지.』 『도령께서 뭘 찾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 집은 그렇게 비싼 고서는 취급을 안 해요.』 『그러고 보니 먼저 주인이 북대륙이나 동대륙에서 온 귀중한 책들을 소량 취급하긴 했지. 지금은 한 권도 없다우. 그런 책은 요즘 팔리지도 않아요.』 『것보다 도령, 이거 안 살래요? 싸게 드릴게. 다른 세계에서 온 모험자의 여행을 다룬 소설책이야.』 현기증이 생기려 했다. 이들 전부가 언제까지고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일상을 반복하여 살아가고 있음에도 결국 모든 건 제자리에 그다지 머물지 못한 채 어디론가 움직여 사라지고 만다. 아름답던 나무는 썩어 밑둥만 남는다. 처녀는 노파가 되고, 번영하던 도시는 몰락한다. 물이 솟던 샘은 어찌하여 마르느냐, 초원은 왜 사막으로 변하느냐, 안타까움에 현을 튕겨 음률을 연주하지만 그런들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빛바랜 과거, 그리고 낯선 얼굴들. 나는 그 안에서 미아가 되고 만다.
『혹시 예전 주인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게우?』 슬슬 눈치를 보는 주인장을 향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기억하는 이가 없다면 그 사연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미심장에게 한 마디 툭 던져놓고 간단히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좀 천천히 걸어요. 그러다 넘어집니다.』 『서둘지 않으면 늦어, 락연. 소극 상은은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다고.』 『그럼 또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타면 되죠.』 『이야... 락연, 넌 성격이 느긋하구나.』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법이죠.』 실언이나 마찬가지다. 살아온 햇수만 계산하면 내 쪽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피식 웃는 나를 보고 락연이 화제를 돌렸다. 『혹시 그 죽었다던 노인장과 친구였습니까?』 나는 계속해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인위적으로 입 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려니 근육이 얼얼하니 아파왔으나 이런 경우 별 걸 다 궁금해 한다며 짜증을 내봤자 상대방에게 먹혀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충 둘러대고 애매하게 매듭을 지는 것이다. 『그냥 단골손님이었어.』 『그래도 일부러 찾아와서 그 사람에 대한 안부를 물었잖아요.』 어쩐지 그 목소리에 날카롭게 가시가 돋았기에 나는 짐짓 걷는 속도를 줄이며 건물 벽으로 붙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야. 굳이 일부러 라고는...』 『어쩌다보니?!』 여전히 나는 가면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뭘 묻고 싶은데, 락연.』 『당신은 폐하와 친구잖아요. 그렇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왜 폐하의 안부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아요? 어떻게 책방 주인에 대한 궁금증이 폐하에 대한 궁금증보다 더 클 수가 있죠.』 『자손과 친구였던 건 시오재, 나는 안즈.』 『그래서 하나도 안 궁금하다?』
이제 우리는 제자리에 멈추어 선 상태였다. 『당신... 전생했다며. 죽었다가 예전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그러면 이전 생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많이 있었을 거 아녜요. 아내가 나중에 어찌 되었는지 확인해봤어요? 자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해봤냐고요.』 『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단칼에 잘라 말하자 락연의 표정이 나빠졌다. 아마도 저건 비난의 의미이리라. 『냉정하네요.』 『현실적인 거지.』 『전혀요. 당신은 요괴보다 더 요괴 같아. 그것도 질 나쁜 요괴!』 매섭게 쏘아붙인 락연은 기분이 상했던지 나를 그대로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갔다.
Posted by 미야
2015/07/21 12:59
2015/07/2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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