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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벽치는 제일 먼저 내 옷을 알아봤고, 그 다음에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보통은 순서가 거꾸로일텐데 내 얼굴보다는 알거지가 된 나를 측은하게 생각해 아들 옷을 몇 점 주었다는 기억이 컸던 모양이다.
다 떠나서 이 자는 뺨을 얻어맞고 엎어진 내가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좋아하던 여자에게 털복숭이 엉덩이를 들킨 남자처럼 혼이 나간 표정을 지었는데 아무래도 나와 얽혔던 옛날 일들을 순서대로 곱씹다가 그 종착지로 자기비하에 빠진 눈치였다.
요괴, 소동, 저 녀석은 아직 어린 아이라고요, 자손 - 화내는 자손 - 분노하는 자손, 강도로 추정되는 시체, 토사물, 어린애를 포박해서 끌고 다니다 명령에 따라 집어던짐, 모두로부터 손가락질.
죄다 무시하고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낀 것 같다. 빙글 돌아서서「어디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야! 여기가 아니라 다음 골목인가!」딴소리를 하는 걸 봐선 분명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거였다.

『아는 얼굴입니까. 혹 친척이라던가.』
『아냐... 하은. 그런 것은 아니고... 에, 또. 그냥 알고 있는 정도.』
이라벽치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돌렸다. 다음 골목은 개뿔, 현실 회피는 거기까지였다.
『이 아이는 빈사국에서 올해 사친으로 왔네. 이사실로 오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봉변을 당했길래 곤란할 것 같아 도와준 적이 있어. 내재원에 문의하면 답변을 해줄 걸세. 수상한 신분은 아니야.』
『하지만 저 아이는 재(災)와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가 자기 일행이라 주장했고요.』
인상을 쓰고 있던 이라벽치는 하은이라는 자의 설명을 면전에서 부정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하은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게 아니고 그랬습니다만.』
『하면 너는 이 아이가 술법을 써서 요괴를 부렸다고 생각하나, 하은?』
『그럴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직접 목격했나.』
『어. 그건...』
하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직접 봤느냐고? 그가 보았던 건 정신이 나가 칼부림을 하는 자와 그에게서 도망치는 요괴와 어린이의 조합이었다. 사람을 물어뜯는 요괴를 본 건 아니다. 그랬다면 화살을 쏨에 있어 순서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요괴는 상처 투성이었다. 언뜻 봐도 열 군데가 넘는 베인 자국과 찔린 자국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실수한 건가. 남자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할 눈동자의 흔들림을 이라벽치는 정확히 파악했던 것 같다.
『직접 보지 않은 것을 단서에 의거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이랬을 것이다 저랬을 것이다 단정 짓는 건 보다 신중하게 하도록 하게. 자네가 이런 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으익?! 뭐야, 시체도 있잖아! 이건 상당히 엉망이군. 뭐? 다시 말해보게. 죽어 있었는데 만약을 위해 다시 목을 베었다고? 재에 오염되어서?! 그런데 피가 왜 이리 많아!』

깜짝 놀란 이라벽치가 시체를 들춰보는 사이, 나는 다른 병사에게 팔을 잡혀 자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밧줄에 꽁꽁 묶여, 거적으로 가리워져, 짐짝으로 취급되어 - 여러가지 근심걱정이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락연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숨이 끊어진 건 아닌데 적절한 조처를 받지도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보고 인간인지 아닌지 판단을 할 거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저 겁을 주려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한다면? 락연에게도 그런 몹쓸 짓을 한다면!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상대는 군인이었다. 관절을 통째로 뽑아내지 않는 이상 달아난다는 건 무리다.
『놓아주세요.』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제 일행이!』
하지만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이 죄책감은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우회하여 증명하는 거겠지.
『그만 놓아달라고요!』
잘 훈련된 군인은 이럴수록 들은 체도 안 하는 법이다. 내 팔을 잡은 자는 나를 그냥 통상적인 물건처럼 취급했다. 들어 올려야 한다면 들어올린다. 내리라고 하면 내린다. 단지 그뿐이다. 그래서 그 자는 나를 소극 상은에서 잡아온 관계자들과 한 줄로 나란히 앉혀놓는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rm skawkrk dnflf thrdls rjsrk. dlfjf rjfkrhs akfgkwl dksgdkTwksgdk. 그 남자가 우릴 속인 건가. 이럴 거라곤 말하지 않았잖아.》
표준 대륙어가 아니고 북방대륙의 알란밧 방언이었다. 코가 납작하고 이마가 평평한 생김새로 보아 그쪽 출신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무역을 해온 탓에 자력으로 말을 익힌 것 같았다. 병사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알란밧 방언을 골라 쓰면서 자기네들끼리 입을 맞추려 하는 것 같았다. 소곤거리면서 남들이 모르도록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는데 태도와 억양 탓에 흡사 조상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내색을 지우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조금이라도 더 작게 만들며 한껏 웅크렸다.
《알아서 하겠으니 눈 감아 달라 말한 걸 곧이곧대로 믿은 우리의 잘못일지도.》
《우린 그냥 기회만 제공했을 뿐인데.》
《제기랄, 이래서 처음부터 느낌이 안 좋았다니까. 수수료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손해야, 손해!》
나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가만히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djfaksms qkedkTsmsepdy. 얼마를 받았는데요.》
《많지 않다니까. 겨우 50동... 허억?》
남자는 흡사 나른한 졸음에서 깨어난 것처럼 목을 똑바로 세웠다. 착각인가! 설마, 착각이겠지. 단춧구멍을 닮은 작은 눈이 재빠르게 내 얼굴을 위아래 방향으로 훑었다.
anjdi. qkdrma sjduTsl? 뭐야. 방금 너였니?》
rmfo, sork akfgoTek. dl ehowl toRldi. 그래, 내가 말했다. 이 돼지 새끼야.》
이를 악물고 대꾸하자 상은 사람의 낯빛이 새카맣게 변했다.

50동이라. 하루 벌어먹고 살아가는 평민에게는 입맛이 동할 큰돈이지만 귀족에게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금액은 아니다. 최하위 막노동꾼의 하루 임금은 대략 30전이고, 글을 쓸 줄 알거나 기술을 배우면 200~300전까지 오른다. 100전이 1동이니까 상위 노동자의 약 2년치 (추정) 급료다. 그게 내 목숨 값이었다. 암산을 해보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아버지 성격에 굳이 날 죽이겠다며 50동을 썼다는 건 놀라웠다.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곤「당분간 내버려 두어라」이러는게 그 남자 성격에 맞을 것 같다. 내가 당장 빈사국으로 쳐들어가 집안을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빈사국 왕의 핏줄을 이은 서녀라서 내 존재 자체가 위협인 것은 더더욱 아니며... 나 같은 쭉정이는 그냥 멀리 보내놓고 나 몰라라 이러고 잊어버리면 되는데 굳이 손을 써서 나를 죽이겠다고 바득바득 우길 까닭은... 젠장. 서글퍼져 배까지 고파졌다.

결박되어 있던 자들이 작전을 바꿔 병사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전부 오해하신 거라니까요! 아무렴 우리가 사무월 기간에 사술을 써서 요괴를 부리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미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핏줄께서 마을 곳곳을 행차하시며 땅을 다지고 계시는데 그런 발칙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들키면 사형인데 말입니다!』
『암요, 암요! 우리가 아니라고요. 왜 있잖습니까, 저~기에 죽어있는! 외국에서 온 사내 짓입니다!』
『그 자의 짓입니다! 칼을 들고 우리를 협박했습니다!』
『그 자가 사술을 썼습니다! 눈도 시뻘겋고, 머리는 산발했고! 맹세합니다, 나리!』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세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모든 책임을 타평에게로 떠넘기는 작전인가 보다. 타평은 빈사국 사람이다. 게다가 도망 노예다.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기엔 매우 적합한 신분이었다. 나라도 타평을 지목하고 나섰을 거다.
그런데 잠깐, 방금 전 저 자가 뭐라고 했더라.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핏줄께서 마을 곳곳을 행차하시며 땅을 다져?

의문은 곧 풀려 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더위를 호소하며 짜증을 냈다.
『나도 내가 이 짓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사무월 동안 십이문대로에서 일주로까지 반복 교차하여 왕복하라니. 내전관들 머리통을 전부 박살내고 싶어 미치겠구먼. 정 해야 한다면 자기네들이 발 벗고 나와서 직접 하라고 그래! 양심도 없는 것들, 이 더위에! 그것도 두 다리로 걸어서! 미친. 말은 장식이냐?!』
더위를 먹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자손이 병사들에게 겹겹이 에워싸인 채 투덜대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30 12:48 2015/07/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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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분전환용 내맘대로 습작입니다. 그런데 언제 정리정돈을 하냐... ※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데 화살이 날아왔다.
내가 맞은 건 아니었다. 헤엄을 치며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 화살은 내 몸뚱이가 아닌 타평의 미간을 꿰뚫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날이 부러진 식칼을 높게 든 채로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살았다는 안도감은 들지 않았다. 락연을 붙잡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것처럼 더욱 무거워졌다.
『락연!』
『도련님... 이 아니라 응? 뭔가 틀린데, 이 냄새는. 당신... 여자였어요?』
『이 마당에 그런게 중요하냐!』
자세를 낮춰 그의 머리를 보호하려 하자 궁수는 노리는 방향을 바꿔 머리 정 중앙이 아닌 흉부에 정확히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 넣었다. 푹 소리에 반응, 몸이 움찔 떨렸다. 하나씩 발사한게 아니다. 살 세 개를 한꺼번에 끼워놓고 당기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화살을 날리는 사람은 흔치 않아서 - 라기 보다는 거의 없어서 궁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운은 상대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만두라는 신호로 팔을 들어 휘저었다.
『그만둬! 이 자는 적이 아니야! 락연은 적이 아니라고!』
나의 외침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락연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을 한 것인지 공격이 멈췄다.

『어린애는 쏘지 마.』
명령하는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반듯해서 듣는 순간 소름이 돋으려 했다.
『그쪽은 신속히 정리해. 재(災)에 오염되었다.』
정리한다는 건 무슨 뜻? 흐릿해진 눈을 들어 보니 붉은 갑옷을 입은 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거구의 목을 베고 있었다. 나는 기겁하며 락연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순서가 되면 그들이 락연의 목도 베어버릴까 걱정이었다.
『그의 안부가 걱정스러우냐?』
명령하던 자가 내 쪽을 노려보았다. 목소리만큼이나 냉정한 눈동자였다. 타인이 들어설 여지가 요만큼도 없는, 쓸데없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인간 아닌 걸 염려한들 무엇 하겠다고.』
내뱉듯 말한 뒤 손가락을 튕겨 움직임을 멈춘 락연으로부터 나를 강제로 떼어 놓으라 명했다.
『재앙을 뿌리는 것들이다. 말살해야 마땅한 것들이지.』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니면 너도 저 부정한 것과 한 패냐.』

억지로 턱을 세게 잡혀 고개를 들어야 했다.
『우-』
『벙어리가 아니면서 왜 입을 다무는 거지.』
나는 잡은 턱을 놓아달라고 손짓발짓으로 애원했다. 그래도 사내는 강경했다.
『수상해.』
『뇌에 구멍이 뚫린 것도 같고.』
『비린내도 나고.』
뺨이 오목하게 쪼그라들 정도로 힘을 주던 손을 치우면서 그가 쏘아붙였다.
『게다가 못 생겼어!』
아무리 외모에 관심이 없던 나도 확신하여 선언하는 말에 자존감이 확 무너지려 했다.

락연과 죽은 남자들은 검은 천으로 씌워져 어딘가로 치워졌다. 엉거주춤 일어서 들 것에 실린 락연을 따라가려 하자 단칼에 거부당했다.
『제 일행인데요.』
그래서 다시 비난을 받았다.
『이 자가 의원에게 갈 것 같은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요괴를 치료하는 의원이라는 건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 자를 따라가겠다고? 그거 참 호기롭구먼.』
멸시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남자는 입 꼬리를 슬그머니 당겨 비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원한다면 따라가도 좋다, 소년. 그쪽에서 너를 찬찬히 해부해줄 테니. 산 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보고 인간인지 아닌지 적당히 판단을 해줄 거다.』
『저는 소년이 아니라 사실은 여...』
바로 그 순간 솥뚜껑을 닮은 손바닥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격통에 반응하여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자니 그가 다시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소극 상은을 폐쇄하고 관계자 전원을 체포해. 죄명은 루은에서 허가 없이 사술을 사용하여 요괴를 부린 죄다.』
『복명.』
『반항하면 전부 베어라.』
병사들은 2개조로 나뉘어 명령을 수행했다.
나는 주제를 모르고 다시 나서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극 상은에서 사술을 사용하여 요괴를 부린 건 아니었기에 상황을 설명하고 막아야 한다 생각했다.
『그런게 아닙니다. 락연은 애초부터 저를 따라서 내재원으로부터 왔고...』
『그렇다면 네가 요괴를 부렸다고 실토하는 것이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와는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요괴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그렇지만 이사실에서 사역하는 사람 아닌 존재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이 남자의 상식은 루은은 철통방어가 되는 신성한 땅이고, 신룡의 은혜로 부정한 것들이 침입할 수 없다는 거였다. 여덟 성문은 주술에 걸려 있고 저주받은 것들은 감히 통과할 수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침범하는 것들은 적룡신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마땅하다 - 신념은 확고해서 내가 사정을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들 전부가 변명이나 거짓이 되어버린다.
그가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시 묻겠다. 네가 요괴를 부렸다고 실토하는 것이냐?』
예, 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아니오, 라고 할 수도 없고.
시간을 지체하자 손톱으로 검 손잡이를 튕겼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날 부분이 겁집에서 약간 솟아올랐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훌륭한 위협이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그때 키가 매우 큰 자가 골목으로 불쑥 나타났다.
목소리를 듣고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약간 올라온 검을 다시 검집 안으로 돌려 넣었다.
『무슨 일이야, 하은. 강도냐?』
『그게 아니라 요괴가...』
『요괴? 이런 곳에서?』
반문하다 말고 키 큰 남자가 나를 보고 들입다 손가락질했다.
『뭐야! 저거. 내 아들 놈 옷을 입고 있잖아!』
나도 지지 않고 소리 질렀다.
『이라벽치 님!』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29 10:44 2015/07/2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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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비밀방문자 2015/07/29 23:33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미야 2015/07/31 09:47 # M/D Reply Permalink

    항상 감상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자급자족용 - 이라 적고 자뻑용이라 읽는다 - 이라고 해도 좋아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에 항상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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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공간에서의 육탄전에 임하면서 우리 셋은 저마다 굳게 입을 다문 채 거칠게 숨을 토했다.
언어로 의사표현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밀착이 된 상황이어서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를 쏘아보는 시선과 땀 냄새, 그리고 급격히 빨라지는 혈액의 순환 - 락연의 손가락은 깊숙이 베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잘려나갔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칼날을 손에 쥔 채로 힘을 줘서 타평을 계단 위로 밀어 올리려 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지만 고통마저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힘겨루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락연은 자신의 가랑이를 최대한 좌우로 벌려, 눕다시피 한 내가 알까기 식으로 빠져나갈 공간을 만들려 했다.
「무리라고! 무리! 너무 좁아!」
어쨌든 그의 희망대로 어떻게든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고자 기를 썼다. 그래봤자 밟힌 형상이었다. 실제로 머리가 짓눌린 탓에 숨조차 쉬기 어려운 상태에선 마음만 굴뚝이고 움직임은 여의치 않았다. 나는 사실상 락연을 목마 태우고 있었다. 납작하게 짜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도망치려는 내 움직임을 눈치 챈 타평은 마음이 급해진 눈치다. 웃웃, 아앗, 이런 식의 괴음을 내지르며 락연의 손아귀에 잡힌 식칼을 강제로 비틀어 빼내려 했는데 흘러내린 체액으로 - 요괴의 피는 인간의 것보다 훨씬 묽었다 - 칼날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였다. 아차 하는 사이에 높게 들린 식칼이 락연의 목덜미를 향해 빠르게 내리꽂혔다. 퍽, 퍽 하고 살을 찢는 둔한 소리가 연거푸 두 번이나 들렸다.
사람이라면 그대로 숨이 끊어졌겠지만 락연은 요괴다.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바위처럼 버티고 서서 자리를 비키려 하지 않았다.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 점이 타평을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봤자 휘두르는 칼날은 나에게 닿지 않았다. 좌절감에 절규하던 그는 이번엔 락연의 배를 푸욱 찔렀다.

식칼이 꽂힌 마당에 락연은 나를 향해 눈짓했다.
의미는 분명해서 혼자라도 좋으니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라는 것이다.
「못해! 망할 놈의 100둔짜리 덩치가 저 밖에서 문을 막고 서있다고!」
손잡이를 잡고 좌우로 돌렸지만 덜컥거리며 반항했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으나 요지부동이다. 다급해진 나머지 어서 비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극 상은의 손님 맞는 법이라는 건 안쪽에서 칼부림이 나도 두 다리로 꽉 버티고 서서 그 누구든 못 나가게 막는 거였다. 어린애의 목소리로 명령해봤자 귓구멍을 막을 뿐이었다.
『망할!』
도로 문을 등지고 서서 앞을 보았다.
언제까지나 락연이 방패막이가 되어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점차 아래로 미끌어졌다. 타평의 눈이 퍼렇게 인광을 뿜어댔다. 나는 그대로 숨을 삼켰다.

『락연! 문제야. 문을 열 수가 없어.』
『이 자를 막으면서 동시에 제가 문까지 열 수는 없단 말입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짐승처럼 밀어붙이고 있는 타평을 막는 것도 한계였다. 찔리고 베인 상처는 이제 여덟 곳이 넘어가고 있었다. 각각의 상처는 매우 깊어서 등 뒤에까지 붉은 얼룩이 빠르게 번져가는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문이 열리지 않으니 힘 좀 써보라고 요구하는 건 옳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로막고 선 물렁살 덩치를 어떻게 설득하란 말인가.
주먹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잊고 문짝을 반복해서 때렸다.
설득이 안 된다면 쓰러뜨려야 했다. 하지만 무슨 재주로? 문짝 건너편의 사람을 나더러 무슨 수로 제압하라는 건가.
『락연! 문제야. 저 밖에서 물렁살 아저씨가!』
『뭐라도 좋으니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이쪽에서 살기를 최대한 내뿜어 건너편에 있는 사람을 제압하는 것이다. 가능은 하지만... 실행에 옮기고 싶지는 않다. 물렁살을 쓰러뜨리기 전에 요괴인 락연이 민감하게 반응할 거다. 그렇게 되면 나중까지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되어버린다. 아니, 그저 골치가 아팠다 - 라는 말로는 안 끝난다.
머뭇거리자 락연이 외쳤다.
『해요!』

두 팔을 문짝에 대고 이를 악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암흑의 천지였습니다. 두 눈을 감아도, 떠도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 눈으로 어둠이 천천히 내려왔다.
끝없이 펼쳐지는 건 죽음이 내려온 땅. 거기선 풀벌레마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귀에서 지잉, 이명이 울렸다.
생명 있음에 저주를 내렸으니 나의 외침을 뼈에 새기십시오. 무로 돌아간 민둥산. 잿더미가 되어버린 산하.
눈을 감아도, 떠도 암흑. 영혼의 껍질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려... 살아도 죽어도 안식은 없습니다.
이 어둠을 느낄 수 있습니까? 당신의 눈에 텅 비어버린 고요의 세계가 보이십니까?

강하게 생각하며 암흑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죽어가는 용. 죽음을 부르는 용. 멸망당한 대지. 생명을 잃은 고향.
그리고 나 자신도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이마와 눈두덩이가. 그리고 뺨이. 더 아래까지.
사악하고 불결한 것. 들불처럼 번져나가 저주는 계속하여 확산한다.
그렇게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검은색을 만들어 낸 나는 문 건너편으로 투사시켰다.

《그. 둬!》
락연의 몸뚱이가 펄럭펄럭 소리를 냈다. 그는 심히 괴로워했다. 상처 탓은 아니었다. 내가 심연에서 끄집어 올린 오랜 기억 속의 어둠 때문이었다. 그것은 맹독이었다. 숨 쉬기 어려울 지경으로 공기가 무거워지면서 그의 동공이 세로로 가느다랗게 변했다. 뾰족하게 보이던 치아는 순식간에 맹수의 송곳니처럼 길게 자라났고 턱은 벌어져 큰 바위라도 삼킬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어둠은 불경스러운 것들의 머리 위에서도 권능을 행사했다.
이어지는 건 비명이다. 다만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타평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문 건너편에 있는 사내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지른 건지도 모른다. 죽음은 만물에 공평하다.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아이를 밴 여자와 사산한 여자, 새끼를 기르는 짐승과 어린 짐승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수, 그것들의 종착지.
불결하구나, 불결하구나.
무언가를 뱉어내듯 입을 벌렸다. 겨우 이 정도의 어둠에 머리가 몸뚱이에서 분리가 되는 기분이다. 죽음이 내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영혼마저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그곳으로 끌려가려 했다. 중력 무중력 다시 중력. 심연에서 잠들어 있던 외눈박이가 눈을 뜨기 일보 직전이었다.
《깨어나선 안 된다.》
그 눈알에 손을 대어 서둘러 눈꺼풀을 닫았다.

체중을 실어 문을 쳤다.
《이 문에서 비켜나! 어둠에 닿고 싶지 않다면 비켜! 어둠이 삼키러 온다. 재앙이 온다. 비켜!》

내 뒤에 선 락연의 몸이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마냥 튕겨 올랐다. 그의 등이 혹처럼 부풀어 오르는게 보였다.
식칼을 쥔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더 이상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울부짖음은 이제 절규로 변한 상태다.
이 혼돈은 내가 저지른 것이다. 저들의 영혼에 생채기를 냈다. 오물을 뒤집어 쓴 타평은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그의 눈은 흰자위밖에 남지 않았다. 침이 뚝뚝 흘러 탁한 거품을 만들어냈다.

모든 백성을 참살한 왕이 있었다. 모든 생명을 전부 죽이려 한 용이 있었다.
나는 그 대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대들은 그 답을 알고 있다.

드디어 문이 빼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겨우 두세 발자국 도망치고 바닥에 쓰러진 덩치가 보였다. 사내 또한 입으로 거품을 뿜고 있었다. 충격으로 심장이 멎은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나는 락연의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기를 쓰고 걸었다. 안 된다. 무리다. 락연의 왼 팔이 길게 늘어져 괴수의 커다란 앞발처럼 변해갔다. 무게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이 와중에 날이 부러진 식칼을 쥐고 타평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우리들 뒤를 따라 나왔다. 무릎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음에도 의외로 속도가 빨랐다.
「도망쳐야 하는데.」
락연의 몸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는 달리 손가락 하나 까딱이질 않았다.
최후를 예감하며 락연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엎드렸다.
「틀렸어! 끝장이야!」

Posted by 미야

2015/07/28 10:13 2015/07/2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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