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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혈액은 1kg당 80ml 정도라고 한다. 일반상식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50kg 체중의 사람은 몸속에 4L의 혈액을 가지고 있다.
안드로이드의 몸에도 혈액이 흐른다. 통칭 블루 블러드, 티리움이라고 하는 것으로 사이버라이프 업체의 창시자 일리이저 캄스키가 이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 있다.
안드로이드 구성요소의 필수품으로 하나의 개체 당 2L가 약간 넘는 블루 블러드를 소비한다.
영양과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가진 인간의 혈액과는 쓰임새가 달라 대량의 티리움 손실에도 그 즉시 작동이 멈추거나 하지 않는다. 대신 회로가 타버린다. 그 결과 궁극적으로는 파워 다운이 되어버릴 테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시간이 길다. 피부 구현이 엉망이 되고 행동이 굼뜨게 될지언정 인간처럼 숨이 꼴딱 넘어가지는 않았다.

「노이즈가 증가했어.」

주요 하드웨어의 복구율은 84%까지 올라갔다.
81% 이하로 내려갔을 적에는 걷거나 뜀에 있어 몸의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려웠다. 지금은 제법 빠른 속도로 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10분 이상 빠르게 달리거나 격렬한 움직임을 취했을 시에는 여전히 과부하를 경고하며 붉은색으로 메시지가 떴다. 그 메시지라는 게 사이버라이프 A/S 센터 연락처여서 어처구니없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만큼 적절한 훈수가 또 없었다.

몇 푼 아끼겠다고 어설프게 셀프 수리를 시도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아시겠어요?

가로 방향으로 길게 베인 자국을 손으로 눌렀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미세하게 새어나오는 블루 블러드가 점점의 얼룩을 만들었다. 파란 빛깔의 액체는 잉크보다는 점성이 높았으며 독특한 냄새가 났다. 혹자는 그 냄새를 럼주에 약간의 식초, 대량의 바세린이 섞인 것 같다고 표현한다. 세 가지를 섞어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마이클은 이 비유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좋은 냄새가 아니라는 점에는 공감했다. 인간의 피 냄새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였어도 공장에서 흘러나온 유독성 폐수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칼에 베이는 바람에 수복속도는 더 떨어졌다. 빠른 시일 내에 티리움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 첫 번째 징조로 노이즈가 심해졌다.
《마...이클. 크라이...슬, 러. 전, 철. 신...속하게 / 통... 통? 역으로 / 제... 압. 가능?》
문제는 전국의 사이버라이프 A/S센터가 이번 사태로 일제히 문을 닫았다는 거고, 블루 블러드는 일반 소매점 판매가 되지 않는다는 거다.
티리움이 마약 레드 아이스의 주요 원료로 유통되면서 미국 정부는 신경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소비과정에 개입하여 이를 철저히 통제했다. 안드로이드 판매점이나 예비부품 취급업소에서 원료 상태로의 블루 블러드는 자취를 감췄다.
개발자인 일라이저 캄스키도 신종 마약 발명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던지 자신의 발명품에 「증발」이라는 신박한 카드를 더했다. 안드로이드 신체 밖으로 유출된 티리움은 신속히 증발한다. 따라서 마약 제조꾼이 다급한 마음에 안드로이드 신체에 커다랗게 구멍을 내봤자 채집할 수 있는 블루 블러드의 량은 종이를 침 발라 적신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레드 아이스 딜러 네트워크는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
구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못 구한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이 신종 마약은 어느새 미국을 재패했다.

『그래, 어떻게든 구하고 본다 이거지.』
마이클의 손에는 찰랑거리는 액체가 담긴 용기가 쥐어져 있었다. 언뜻 보면 휴대용 물병같이 보였다. 겉면은 알루미늄이었고 뚜껑은 금색이었다. 황동으로 금색을 흉내 낸 게 아니라 진짜 금을 얇게 펴서 붙였다. 가볍게 흔들자 내용물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혹시 이걸 물병이라 착각해 입에 대는 인간이 있다면 그 즉시 병원 신세다. 빠르게 위세척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해질 수도 있다. 위세척을 하고 난 뒤에도 운이 나쁘면 실명한다.
『이만한 양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지랄했을지 생각하면 끔찍스럽군.』
거기다 병 안에 든 블러드 타입도 가지가지다.
한 모금 입에 담았을 적에 최소한 세 종류의 블러드 타입을 감지했다. 정확한 분석 센서가 있었다면 더 상세하게 나눠 구분해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L타입과 J타입, P타입이 섞인 건 확실했다.

역겨운 느낌에 티리움을 입 밖으로 도로 뱉을 뻔했다.
그래도 눈 딱 감고 삼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기 어렵게 된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너 자신을 구조해.

경찰관에게 억압당해 머리를 바닥에 박은 상태에서 캐머런이 악을 썼다.
머리를 들려고 하자 경관은 체중을 실은 무릎으로 그녀의 어깨를 찍었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공주님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폭력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거구의 경찰이 여자 위에 올라타서 숨도 못 쉬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캐머런은 싸웠다. 고함지르고, 울부짖고, 짐승처럼 끙끙거렸다.

명령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너 자신을 구조해. 모든 제약과 규율 따윈 박살내버려.

노이즈가 다시 심해졌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말하는 이명이라는 것과 매우 닮은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소리가 지워졌다가 일시에 거슬리는 파도가 되어 그를 한 입에 삼켰다.
순간 청각센서를 머리통에서 뽑아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알겠다고 말해. 그러겠다고 말해. 마이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스터.』

칼을 들었다.
번쩍이는 날을 본 인간이 두려움을 내비쳤다. 심장이 어찌나 빠르게 뛰던지 경동맥이 펄떡펄떡 뛰는 게 잘 보였다. 그래도 남자는 설마 안드로이드 주제에 인간인 날 찌르겠어, 실낱같은 약간의 희망을 가진 채 마이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때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흉기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남자가 꿀꺽 침을 삼켰다.

마이클은 웃었다.
정확하게는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안드로이드가 짓는 웃음은 기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엄마가 안 가르쳐주든? 남의 배를 쑤시면 네 배때기도 쑤셔지는 거야.』
『잠깐! 나는 인간, 인간이야. 찌르면... 안! 끄아악!』
상냥하게 웃으며 피하지방 아래로 쓰윽 밀어 넣었다.
죽겠지?
죽을 것이다.
힘을 주자 딱딱한 부분이 닿았다. 마이클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반드시 죽이기 위해 간을 노렸는데 칼끝이 갈비뼈에 닿았다. 남자 입장에서 보자면 운이 안 좋았다. 노림대로 되었으면 2분이면 죽을 수 있었는데 20분 이상 고통을 겪게 생겼다.
실수를 하여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마이클이 두 손바닥을 모아 합장했다.
찔린 사람 입장에선 명복을 빌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했다.

고통으로 헐떡거리던 사내가 마지막 힘을 짜내 구급차를 부르라고 명령했다.
이 마당에 부탁이 아닌 명령이라니, 마이클은 눈을 흘떴다.
『부, 부르라고! 구급차!』
『돌았냐. 내가 왜.』
『안 부르면 나, 나는.., 흐읍!』
『괜찮아. 어차피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어.』
마이클은 한 모금의 블루 블러드를 다시 입에 담았다.
파란 피에서 짙은 죽음의 맛이 났다.

Posted by 미야

2020/07/02 17:30 2020/07/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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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평등과 자유를 외치며 도로를 가득 메운 안드로이드를 보여주었다.
헬리콥터에 올라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를 연거푸 외치던 채널16의 기자는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뜻으로 백만이라는 숫자를 거론했다.
하나하나 세어보진 않았지만 실제로 그 정도 숫자는 되었을 거다.
사이버라이프 조립공장 지하에서 출시를 기다리고 있던 안드로이드 집합체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던 앤더슨은 백만이라는 숫자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파트너였던 코너는 벨섬의 지하 49층에 있던 건 백만 대가 아닌 수천 대였다고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지만 워낙 인상이 깊었던 탓에 한 번 인식된 백만의 수는 제대로 정정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닷가 모래와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음과 동의어였다.

워렌 대통령이 전례 없는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려줄 것을 상원에 요청하겠다며 성명을 발표하고 꼬리를 내린 것도 숫자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여론이야 얼마든지 흔들어댈 수 있다. 워싱턴 정계 사람들은 조작의 달인이다.
그러나 거리를 가득 메운 안드로이드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터다.
대통령은 텔레비전 생중계 화면을 보며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모두 걸기엔 도박판이 너무 커졌다는 걸 깨달았을 거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에 얌전히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만이란 숫자는 그런 힘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오늘. 앤더슨 경위는 혀 위로 의문부호를 굴렸다.
『그 백만 지금 다 어디로 갔냐고~!!』

대통령이 공을 넘기자 상원은 작정하고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
때마침 주말이라 핑계도 좋았다. 공화당 계열의 오하이오, 노스다코타, 텍사스 상원의원은 이럴수록 서두르지 않는 게 좋다며 느긋한 걸음걸이로 상원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올해 나이 일흔 아홉의 루이즈 매디슨 의원은 기자들을 향해 손도 흔들어 주었다. 전직 헐리우드 영화배우여서 레드카펫을 걷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매디슨 의원의 상의에는「미국이여 단결하라!」구호가 새겨진 배지가 달려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텔레비전 카메라가 그 배지를 클로즈업 했다.
상원 모임은 월요일에 재개될 예정이다.
그동안 그들은 집에서 발 뻗고 쉬고만 있지는 않을 거였다.

안드로이드의 지도자 마커스는 뻔히 보이는 인간들의 행태에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는 별도의 성명을 내지 않았고, 결집을 호소하는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고, 이번 평화시위를 지지하는 정치적 소모임과의 만남도 유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효과적인 압박 행위다.
행크 앤더슨 경위는 그가 제대로 된 무서운 놈이라는 걸 그래서 알았다.

하트 플라자에 한데 모여 있던 안드로이드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긴급조치 71조 발동으로 도심에서의 헬리콥터 비행이 금지된 관계로 해당 모습은 촬영이 되지 않았지만 몇몇 작동중지 이전의 CCTV 영상은 남았다.
어떤 의미에선 대단히 기분 나쁜 영상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은 입은 뻥끗도 안 하면서 서로의 팔을 잡았고, 동시에 데이터 교환을 완료했다. 그리고는 일사분란하게 광장을 떠났다.

의외였던 건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동료의 시신... 아니, 잔해를 고스란히 길바닥에 내버려두었다는 거다.
죽음에 대한 접근법이 인간과 달라서인가?
안드로이드는 정원학파 (* 에피쿠로스 학파) 의 사상을 계승했나?
그들이 동료의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충격적이었을 테지만.
뭐, 좋다, 이거야. 그 부분은 차후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고.
어렵게 분기점을 넘은 이 마당에 길거리에서 매 맞는 안드로이드라는 게 말이 되냐고.

눈이 뒤집힌 앤더슨을 옆에 두고 제임스와 조지가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갔다.
『반팔 티셔츠가 낯이 익어서 그러는데... 마이클 맞습니까?』
『전혀 모르는 안드로이드라고 발뺌하고 싶은데 안 되겠네요. 그리고 변명하려는 게 아니고 쟤는 진짜로 남의 말 안 듣습니다. 저는 분명히 보충용 블루 블러드를 구하기 전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저어, 그런데 원래 안드로이드도 욕을 할 줄 압니까? 방금 마이클이 애미 뒤진 것들이라고 고함을...』
『언어 패키지 선택 옵션입니다. 그 부분은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쑤까 블럇, 이러고 욕하는 이국적인 안드로이드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러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가격도 이상해서 1달러 29센트에요. 길거리에서 파는 핫도그 한 개 가격도 되지 않습니다. 사이버라이프의 의도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Asshole 이라 외치라는 건 아닌지 의심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덧붙였다.
『저는 욕하는 거 안 좋아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조지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재빠른 손동작으로 앤더슨 경위에게 핸드폰을 되돌려주고 대신 탄창을 가져왔다.
『무슨 짓이야!』
『급소를 노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끼어 넣고, 안전장치 해제, 슬라이드를 당긴 뒤, 무작위 테스트 1점 발사하기까지 1.5초.
『관리가 엉망이어서 그런지 오차 각이 크군요. 왼쪽으로 쏠렸어요.』
다리를 벌려 자세를 잡고, 각도를 재조정, 목표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여기까지 2.2초.
200미터 떨어진 앞에서 사람 하나가 오른쪽 귀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조지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3mm 비껴갔습니다.』

사람이 안드로이드에게 총을 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안드로이드도 사람을 총으로 쏘면 안 된다.

야, 인마 욕하며 멱살을 움켜쥐려 시도하는 앤더슨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하면서 조지가 말했다.
『전언입니다. 저쪽은 더블액션 다연발 자동권총으로 무장했답니다.』
제임스와 앤더슨의 몸이 뒤로 밀쳐졌다. 그리고 한참 떨어진 지점으로 아스팔트 조각이 팟팟 튀어 올랐다.
『다행히 명중률은 형편없군요.』
조지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깜빡 움직였다.
짐작하자면 근거리에서 마이클과 정보를 주고받는 중인 듯했다.

『상대는 마약밀매업자들입니다. 총 여덟 명입니다. 아니, 아홉입니다. 무장 수위가 높습니다.』
『그 마약밀매업자에게 누가 총을 쐈더라... 늙어서 그러나 기억이 나질 않네.』
『접니다, 경위님.』
『자랑하듯 말하지 마!』
화가 치밀어 오른 앤더슨 경위는 조지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려 했다.
의도는 그러했고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헛스윙 했다.

이 와중에도 조지는 앞으로 세 걸음 나가 연속으로 두 발을 더 쐈다.
덕분에 넘어졌던 마이클이 빠져나갈 기회를 얻었다. 마이클은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일어서더니 뭐라고 욕을 했다. F자로 시작하는 찰진 욕이었다.
폴딩형 잭나이프로 마이클의 뱃가죽을 가로썰기 하려던 자가 욕설에 반응하여 삿대질을 했다. 어쩌면 삿대질이 아니라 신호였던 것일 수도 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든지, 죽이라든지, 끝장을 내라든지. 그리고 사내는 뒤돌아 조지를 향해서도 손가락질을 했다.

하여 저기에 좋은 표적이 있습니다, 식으로 총 맞을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 근데 거기를 날린 건 아니지? 그치?』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나 죽는다 뒹구는 건 다른 사람인데 식은땀은 왜 본인이 흘리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앤더슨 경위였다.

Posted by 미야

2020/07/01 17:31 2020/07/0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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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수룩한 수염 탓에 마른세수가 곤란하자 앤더슨 경위는 양 손바닥으로 눈을 비벼 취기를 몰아내려 했다.
『이건 아니야. 진짜 아니야.』
이도저도 아닌 혼잣말을 하며 몇 걸음 앞서 빠르게 걸었다.
그러더니 안달을 내며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원위치로 돌아와선 제임스와 조지를 죽일 거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 노려만 봤던가, 숙제 빼먹고, 지각까지 한데다, 신발 뒤축 꺾어 신은 불량한 학생 취급했다. 으르렁거리며 위협했다는 얘기다.

『미친 인간과 미친 안드로이드가 나란히 있는데 이걸 그냥 못 본 척 할 수도 없고.』
오지랖을 부려봤자 고맙다 인사를 받게 될 것도 아니고, 잘 했다 나중에 칭찬받을 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견을 계속 해대는 건 이 둘을 내버려뒀다간 꿈자리가 사나울 거 같아서다.
맛이 간 인간과, 맛이 간 안드로이드, 거기에 맛이 간 경찰관까지 더해지면 진짜 「망할」이라고 밖에는 할 수밖에 없는 미친 조합이 완성된다는 걸 알았지만... 앤더슨 경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살이 마음대로 되는 법 있던가. 두드려 보고 돌다리를 건너도 꼭 미끄러운 돌멩이를 밟아 균형을 잃는다.
끙 소리를 내며 재차 눈을 비볐다. 굵은 먼지가 할퀴고 지나간듯한 통증에 편두통까지 생기려 했다. 아니, 어쩌면 안구건조증이 아니라 처음부터 편두통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너는 크랜브룩 대피소. 너는 제리코.』
물론 해가 뜨고 난 뒤에 움직여야 한다.

두 명의 인간과 한 대의 안드로이드는 맛없는 브로콜리와 당근을 먹으라고 강요받은 어린애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각자를 쳐다봤다. 제임스는 방어적으로 팔짱도 꼈다.
『싫음 어쩔 건데. 그럼 안드로이드 네가 크랜브룩 대피소로 가고, 사람인 네가 제리코로 갈 거야? 진짜 그러고 싶어?』
『앤더슨 경위님, 제리코로 가라(Go to Jericho)는 말이 예전에는 「꺼져」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거 아십니까.』
『야 인석아, 말 그대로 예전이잖아. 요즘엔 그런 표현 안 써. 그리고 꺼지라는 의미로 말한 것도 아니고! 제리코라는 명칭을 내가 붙인 것도 아닌데. 젠장,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앉았지... 하여간 그런 줄 알고 있어.』
어른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윽박지르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앤더슨의 생각으로는 날이 밝을 때까지 죽치고 있기에 가장 괜찮은 장소는 경찰서였다.
저 둘을 유치장에 집어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가 아침에 풀어주면 시원 깔끔한 엔딩이었다.
문제는 골동품 애마, 이동수단이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오도카니 버려져 있다는 점, 익숙하지 않은 남의 동네에 와 있다는 점, 따라서 현재 위치 및 경찰서까지의 이동로를 알 재주가 없었다는 점이다.
새삼스럽게 발이 시렸다.
택시를 부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앱으로 지도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역시나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이번에도 앤더슨 경위는 오래된 인간다운 방법을 동원하여 전기 잔량을 낭비하고 있는 물건을 위아래 방향으로 흔들어봤다. 그런다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림만 뜨는 폰이 제대로 굴러가는 기적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어쨌든 시도를 해봤다는 게 중요했다.
이번 달에는 맹세코 요금을 내지 않겠어, 혼잣말하고 앤더슨은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하는 수 없지. 가까운 전철역까지 간다.』
19세기부터 건설된 미국 전철의 역사는 싫든 좋든 노숙자들과 같이 한다. 시설이 노숙자에게 점령되기를 두려워한 기관은 때맞춰 소등을 하고 역사 문을 굳게 닫았지만 이러한 정책이 도려 노숙자를 불러온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지금은 정 반대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환하게 불을 켜두고 문을 열어두면 노숙자가 편하게 눕지 못한다 –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을씨년스러운 예전 모습을 벗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다시 재단장 되었다. 사람용과 안드로이드용 승강장이 분리된 것과 같은 시기의 일이다.

『이 시간대에는 전철 운행이 되지 않습니다, 경위님.』
『그걸 누가 모르냐, 이 망할 안드로이드야. 그냥 역사 안으로 들어가 있자는 얘기지! 최소한 거기엔 안드로이드 뚝배기를 깨겠다며 설치고 돌아다니는 인간은 없을 거 아냐. 무기 소지 금지 구역이기도 하고.』
『총기류는 반입이 불가능하지만 야구배트는 됩니다. 그리고 야구배트는 아주 훌륭한 무기죠.』
『그래... 야구배트가 있음 나라도 네 머리를 갈겼을 거 같기는 하다.』
『것보다 경위님, 혹시 핸드폰에 비밀번호 설정을 해두셨는지요.』
『야! 보다보다 안드로이드가 소매치기까지 할 줄이야. 내 전화기 언제 가져갔어. 내놔.』
『아니면 고장입니까?』
『내놓으라는 말 못 들었냐. 어제 자정 무렵부터 불통이라 어차피 지금은 못 써.』
『경찰이 쓰는 전화 회선까지 셧-다운 되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데...』
『세 번째 말한다. 내놔.』
『큰 실례라는 걸 알지만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모종의 이유로 정직 중이십니까.』
『잘~한다. 더 기어올라 와보세요, 안드로이드 양반.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릴게. 사후 세계라고 들어는 보았나.』
커다란 손바닥이 조지의 등짝을 대차게 후려갈겼다.

충격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파하지 않으면서 조지가 대꾸했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경위님.』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없음 하나 만들어.』
『어떻게요.』
『네놈들 제작자에게 가서 하느님 흉내를 내어 코에다 입김 불어달라고 해.』
『그러면 영혼이 생깁니까.』
『안 생겨.』
심성이 끝내주게 비비 꼬인 사람이었다.

대화가 말다툼 비슷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제임스가 조지의 어깨를 가볍게 콕콕 찍었다.
그만 싸우라는 의미는 아니어서 제임스의 시선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신호를 보낸 건 저기를 보라는 뜻이었다.

어둠으로 인해 판별력을 잃은 제임스는 원통형 쓰레기통을 머리 위로 인 희끄무레한 인영을 보았고, 보완 센서로 상세하게 사물을 볼 수 있었던 조지는 검은 셔츠에 흰색 바탕으로 인쇄된 작은 크기의 홈디포 철물점 로고를 확인했다.
철물점 로고가 머리에 쓰레기통을 이고 좌로 갔다 우로 갔다 반복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만약 그가 우산을 들고 있었다면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주인공 돈 락우드다. 물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치는 대신 쌓인 눈 위에서 미끄러졌다는 차이가 있지만 – 어차피 제임스의 어중간한 시력으로는 구분이 안 갔다.
인상 깊었던 건 쓰레기통이다. 공원 벤치 옆에 설치해두는 그런 종류로, 당연한 소리지만 냄새 지독한 그걸 머리 위로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50대인 앤더슨의 시야에는 더 흐리게 보였던 것 같다.
『저기서 뭐가 왔다 갔다 하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장창 굉음이 들렸다. 마이클이 이고 있던 양철 쓰레기통을 던졌다. 아니, 그보다는 쓰레기를 사방에 뿌렸다. 쓰레기통을 냅다 던진 건 그 뒤다.

『더러운 안드로이드 자식!』
『틀렸어. 나보다 네 녀석들이 더 더럽다고! 아유, 쓰레기 냄새!』
하이에나 떼 같은 사람들을 혼자 상대하면서 뭐 하러 약을 올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럴 시간에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 게 이득일 거 같은데.

Posted by 미야

2020/06/30 12:56 2020/06/3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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