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cking 안드로이드.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어 사실상 알코올 중독이었다.
오늘만큼은 입에 대지 않아야지 결심해놓고 무의식중에 스카치위스키의 뚜껑을 땄다. 컵에 갈색의 액체를 따르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술을 마시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의지박약을 욕하며 컵에 담긴 술을 버렸다.

음...... 개수대에 버린 게 아니라 입안에 버렸다는 걸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치만 딱 한 잔이었다. 아무리 뼛속까지 망가진 인간이라도 금주선언 하루 만에 고주망태가 되어버리는 쓰레기까지는 되지 않았다. 하여 마음 독하게 먹고 술병을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웠다. 그러니까 산더미처럼 쌓인 빨랫감 속에 대충 밀어 넣었다는 얘기다.
언젠가는 세탁기를 돌려야할 테니 술병의 위치는 발각될 것이다. 그래도 세탁기 전원을 켜는 날이 내일 당장은 아니다.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어도 행크 앤더슨 경위는 성경 말씀대로 주말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온전히 쉬는 사람이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이도 쉬었으니 피조물인 인간이 쉬어야 함은 마땅하다. 심지어 그는 샤워조차 안 했다.

망할 놈의 총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어도.

국가 시스템은 붕괴 일보직전이었다. 대통령은 중요 기반 시설을 유지 보수하던 안드로이드를 업무에서 제외시키고, IT 통신 접속권한을 차단했다.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을 – 사실상 인간 병력 전부를 원자력 발전소와 미사일 기지 같은 민감한 장소로 이동시켰다.
대통령과 참모진은 이러한 조처로 미국의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모든 사안에 대하여 낙관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막연히 잘 될 거라 기대를 걸고 현역 병력의 65%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 적군에게 아군 65%가 격퇴당하고 35%의 병사만 남은 상황이면 싫든 좋든 이미 망한 거였다. 선택지는 항복문서에 사인하는 것만 남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사람들은 참으로 오만했다.

모든 민간인 이동이 통제된다고? - 웃겼다. 버스터미널에 몰린 그 인파는 그럼 뭔가.
모든 집회는 금지된다고? - 환장하겠다. 종교집회랍시고 모여 마네킹을 교수형에 처하던데.
모든 전자통신이 제한된다고? -
아, 가만있자. 이건 안 웃겼다.

2038년 11월 13일 토요일 PM 11시 15분.
은행이고 병원이고 소방서고 죄다 마비상태인데 드디어 핸드폰까지 맛 갔다. 전원은 켜져 있었지만 번호를 눌러도 신호가 가지 않았다. 오래된 인간인 행크 앤더슨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를 고쳐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고장 난 TV수신기를 다루는 요령으로 액정을 팡팡 때렸다는 얘기다.

밖에서는 드물게 총성이 울렸다.
앞서 언급했지만 인간 병력은 원자력 발전소와 군사시설을 우선으로 지키기 위해 도시를 벗어났다. 따라서 이 야밤에 총을 쏴 갈기고 있는 것들은 정상적인 종류가 아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옷 차림새로 창가에 섰을 적에 그는 주황색의 섬광을 보았다.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2초 뒤에 창문이 크게 흔들리고 실금이 갔다. 하트 플라자가 있는 방향이었다.

『일요일엔 하느님도 쉰단 말이다. 그런데 왜.』
폐차 일보직전의 고물딱지 자동차에 경광등을 달고 시동을 걸었다.
따뜻한 바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운전대를 쥔 손이 추위에 꼽아 들어갔다.
『월요일엔 사표 쓸 거야.』
20년 전에 끝낸 거리순찰을 은퇴를 앞둔 마당에 마지막으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좌우로 덜컹거리는 강철의 애마를 살살 달래가며 그렇게 앤더슨 경위는 도로 위로 나왔다.

언뜻 느끼기엔 여름휴가 마지막 날의 밤 같았다.
그러니까 오만가지의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죄다 뒤섞였다는 얘기다. 흥분감, 고양감, 지루함, 피로감, 긴장감, 허탈감, 박탈감, 기타 등등. 거리는 소란스러웠고, 동시에 조용했다. 축제의 끝과 일상생활의 시작이 막 교차하는 지점으로 날 것 그대로의 어둠이 긴 다리를 뻗고 있었다. 이도저도 아닌 혼란, 이도저도 아닌 침묵, 빡빡한 눈을 비벼가며 좌우방향으로 거리를 살폈다.
야간 통행금지령이 무색하게도 느껴지는 기척이 많았다.
야생사슴과 늑대가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숲속에 나침반 하나 없이 들어와 있다는 기분이었다.

《돌아가시오. 여기서부터는 지나갈 수 없음.》

주택가에서 빠져나와 해밀턴 애비뉴 방향으로의 큰 도로로 진입하기도 전에 거대 콘크리트 바리케이드가 이동을 막았다. 용의자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경찰이 써먹는 종류와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거대 해일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육중함에 높이도 어른 키 정도 됐다. 픽업트럭으로는 덤벼봤자 무리이고, 중대형 트레일러로 밀어붙이면 승부가 날지도.
앤더슨 경위는 열쇠를 꽂은 상태로 자동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두 발로 걸어 바리케이드를 넘으려는 순간, 깜빡했다며 차로 엉금엉금 돌아와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글로브 박스라는 이름과 달리 안에는 장갑은 들어가 있지 않았고, 대신 내용물이 손가락 마디 정도 남은 위스키 병이 하나 있었다. 술병을 주머니에 넣은 앤더슨은 아이고 춥다 한 번 엄살하곤 터벅터벅 시작했다.
양말을 두 겹으로 신고 나올 걸 하고 후회한 건 그로부터 1시간 뒤다.

『할아범, 혹시 거시기 필요하우? 좋은 거 있는데.』
『꺼져.』

쥐새끼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뭔가를 밟고 있었다.
야간 민간인 통행금지령? 개 소리.
길을 잃은 게 분명한 안드로이드가 엎드린 채 몰매를 맞고 있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기계는 비명 같은 건 지르지 않았다. 거기서 짐승처럼 거칠게 호흡하는 건 죄다 사람이었다. 린치를 당하는 쪽은 조용하고, 린치를 가하는 쪽은 악을 쓰고 쌔근거리는 게 참 이상했다.
『꺼져!』
권총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앤더슨은 그래서 글로브 박스에서 꺼내온 술병을 높게 들었다.
빨간색 물감을 칠한 조잡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던 사람들이 이런 몹쓸 술주정뱅이를 보았나, 식의 시선을 보내왔다.
상관하지 않고 외쳤다.
『꺼져! 꺼지라고!』
술병으로 대가리를 깨버리겠다는 위협은 안 먹혔어도 경찰 배지에는 반응했다.

『경찰이라면 안드로이드 불량품을 잡아야지 왜 시민을 폭행하려고 해!』
『맞을 짓을 하니까 그런다. 제기랄!』
『당신, 신고할 거야.』
『네놈 전화기는 잘 터지냐? 신고하고 싶음 신고해. 마음대로 하라고. 나도 마음대로 할 테니.』
그리고는 경찰 배지를 인간의 콧잔등에 대고 마구 문질러버렸다.

『나는 불량품이 아닙니다, 선생님.』
『그게 중요해? 꺼져! 어디로든 가버리라고!』
일으켜 세운 안드로이드를 아무렇게나 밀었다. 진짜로 화가 나서 밀었다.

『경찰이 사람을 폭행한다!』
『어디서 구라질이야! 꺼져!』
『저 인간 돌았어.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 나 미쳤다. 그러는 니들은 멀쩡한 줄 알아?! 꺼져!』

병뚜껑을 열고 남은 것 전부를 입안에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독한 알코올에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갔다.
『씨발, 금주하기로 했는데.』
코를 훌쩍이는데 총성이 들렸다. 이번엔 제법 가까운 장소였다.

2038년 11월 14일.
태어나 가장 길게 느껴졌던 역사적인 일요일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26 13:17 2020/06/2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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