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LED 링의 존재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무리 중 한 명이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냈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쪽이었다. 『빌어먹을, 저놈이 나한테 깨진 유리를 던졌어!』 팔목에 유리파편이 박혔으니 유혈사태다. 피가 철철 흐르는 부위를 부여잡고 악을 쓰고 있는데 시커먼 게 빠르게 지나갔다. 어, 하는 사이에 춤추는 시늉하던 놈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튕겨나갔다. 속도 더하기 체중을 실어 팔꿈치로 밀었으니 충격이 상당했을 거다.
『안드로이드다! 안드로이드야!』 판단이 빠르게 내린 우두머리가 총을 들어 쏘았다. 아군과 적의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근거리에서 쏘아댄 탓에 비명이 더 커졌지만, 아무튼. 조지는 방패막이로 쥐고 있던 자를 무리를 향해 밀었다. 『잡아! 저 새끼 잡아!』
제임스는 진작부터 뒤도 안 돌아보며 뛰고 있었다. 그래봤자 체력이 저질이라 그리 많이 못 갔지만... 꼬리 밟혀 화난 말티즈에게 쫓겼을 적에도 한숨 나올 지경의 달리기 속도를 보여주던 그다. 누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기적과도 같은 몸 움직임이 가능하게 된다던데, 거짓말이다. 믿지 마라. 만성적 운동부족은 생명의 위협이고 뭐고 사람을 흐느적거리는 오징어로 만들 뿐이다.
『산책 나왔어요? 달려요!』 뒤따라 도망치던 조지가 더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했지만 호흡곤란이 와서 대꾸도 못했다. 뒤쪽에서 탕, 소리가 났다. 감히 돌아볼 엄두도 안 났다. 동네 양아치가 홧김에 쏘아댄다고 표적을 맞출 리는 없겠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다. 기겁을 한 제임스는 몸을 틀어서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쌓인 눈 덕분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손바닥에 발바닥, 혓바닥까지 동원해서 볼썽사납게 나뒹군다는 최악의 선택지를 벗어났다.
『하필이면! 이 앞은 철조망으로 막혔다고요!』 안드로이드 시력은 어둠을 개의치 않고 물체를 선명하게 식별해낼 수 있는 듯했다. 막혔다고? 짐작도 가지 않는 덩어리에 발이 걸리면서 – 무게와 크기로 봐선 방치하고 내버려둔 화분 같았다 – 아픔 이전에 두려움을 느꼈다. 허우적거리자 이번에는 기분 나쁘게 물컹거리는 게 닿았다. 최악이다. 그럼 돌아서 다시 나가야 하나? 한쪽 발로 깽깽이를 하며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조지가 그의 팔뚝을 덥석 끌어안았다. 직진이다. 고민하지 말고 계속 간다.
『철조망 위로 올라가세요, 제임스.』 『무리입니다! 그런 게 가능할 거 같습니까?!』 『확실히 가능할 거 같진 않군요. 그럼 쉽게 갑시다. 위로 던져줄게요.』 『멱살 잡지 마시고요!』 『눈만 감고 잠시만 있으면 됩니다. 금방 저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저편은, 그 저편이 아니지! 댁이 지금 말하는 저편은 저승이잖아!』
밀가루포대 던지기를 시도하려는 조지에게 항의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두 다리가 번쩍 들렸을 적엔 짤막하게 비명도 터져 나왔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며 조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지만 그 길이가 너무 짧았던 탓에 손아귀에서 금방 빠져나갔다. 어차피 그 머리카락도 나노분자로 만들어진 가짜라서 두피에 단단하게 붙어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진 제임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목을 잡았다. 그런데 도대체 내구도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조지의 목이 덜컥거렸다.
아아악.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이들 뒤를 쫓아온 사내들은 그래서 헷갈렸다. 움직이면 뒈지게 해주겠다는 의미로 허공을 향해 총을 쏘았다. 철조망을 넘으려던 것들이 총성을 듣고 비명을 질렀다. 그게 아니라 총알이 발사되기 전부터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뭐, 지금 그게 중요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져봤자 골치만 아프다. 아무튼 그들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따라잡았고, 이제 한바탕 혼꾸멍을 내줄 시간이었다.
제일 열 받았던 순서대로인지 유리파편에 손목이 찍혔던 남자가 총구를 겨누며 선두로 달려 나왔다. 피를 봤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법이었고, 무릇 불알 달린 사내는 복수를 행함에 있어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되는 거였다. 왼편의 가방을 멘 놈을 지나쳐 훌륭한 과녁 역할을 해주고 있는 빛나는 LED 링을 조준했다. 안전장치는 진즉에 풀린 상태이고,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문제는 손가락에 힘을 주기도 전에 손가락뼈가 아작 났다는 거였다. 그것도 복합골절이었다. 총구를 잡아 고정한 채 총신 자체를 큰 각도로 비틀면 사람의 손은 도구를 따라 회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 회전 각도를 미처 못 따라가면 - 부목이 필요해진다. 뇌리로 번개가 쳤다. 아픔은 그 다음이다. 검지손가락이 이해 불가능한 각도로 꺾였다. 피부를 뚫고 튀어나온 게 뼈가 아니었음 하고 간절히 빌었다. 아니, 그 이전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누군가 자신을 기절시켜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조지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구석으로 걷어찼다. 동시에 두 번째 상대를 향해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원, 투, 쓰리. 뇌가 흔들리면 시야가 일그러지고 구토가 치솟는 법이다. 잔뜩 마신 술을 게워내려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자 이때다 하고 냅다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바짝 독이 오른 무리가 다시 총을 쐈다. 컥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데 아뿔싸, 손가락 부러진 놈이 드디어 소원을 이루고 기절했다. 『똑바로 안 해?! 어딜 쏜 거야!』 『제길, 손이 떨려서... 죽은 건 아니겠지? 살짝 스친 거겠지? 그치?』 『끌어내! 끌어내라고!』 이제 개싸움할 일밖에 안 남았다고 판단한 조지는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한 놈만 걸려라. 엄지를 눈구멍으로 찔러 넣어 눈알을 파버릴 작정이었다.
『아오, 썩을 것들... 니들은 학교를 안 다녀서 통행금지라는 말의 뜻이 뭔지 모르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온 건 그때였다. 『디트로이트 경찰이다. 무기 가진 놈들 전부 동작 그만.』 코트 차림새의 나이 많은 사복경관이 배지를 무적 방패처럼 들어 보이며 욕을 퍼부어댔다. 『어! 일요일 새벽에 총질하며 돌아다니라고 그렇게 배웠어?! 똥구멍 같은 놈들! 니들은 잠도 없냐? 어! 어디서 싸움질이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새끼들. 심심해 뒤질 거 같음 술이나 처마실 것이지... 이 새끼도 총질, 저 새끼도 총질, 애들 장난도 아닌데 총질... 씨부럴.』 경찰 입담이야 원래 쌍소리 많기로 유명하지만 이 양반은 압도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 냄새도 좀 났다.
『뭐해! 내 말이 장난 같아?! 전부 다 꺼지라고! 꺼져!』 그리고는 미란다 원칙 고지,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이런 거 없이 발로 뻥뻥 차기 시작했다. 『아얏!』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이 갔다. 방금 저 사복경관, 실수로 화분을 찼다. 제임스 발에 걸렸던 바로 그 버려진 화분 말이다. 그리고 제임스가 그랬던 것처럼 노인네도 깽깽이발로 뛰었다.
이때다 하고 다들 골목을 빠져나가 우르르 도망쳤다. 『담에 두고 보자.』 도망가는 마당에 전형적인 악당의 발언을 왜 입에 담는 건지 모르겠다.
뒤따라 도망갈 생각은 않고 조지가 질문했다. 『저 사람들, 그냥 내버려둘 겁니까?』 『그럼 어쩌라고. 체포하라고? 내가 보기엔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거 같던데 왜.』 멍이 들었을 게 분명한 정강이를 어루만지던 노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체포를 해야 할 건 이 망할 화분이야. 아니 왜 이딴 장소에 이따위 게 굴러다니는 거야!』 그리고는 성질을 못 이기고 화분을 또 걷어찼다.
『......커흑!』 술이 원수다. 불붙는 통증을 호소하는 발가락에 사복경관은 다시 깽깽이발로 뛰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23 15:35
2020/06/2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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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제임스는 움직이는데 방해가 될 법한 잔해를 하나 둘 걷어치웠고, 조지는 발판을 대신할 물건을 찾아 가져왔다. 형태를 봐서는 일주일 전엔 캐비닛 서랍장이라고 불렸을 거라 짐작되는 물건이었다. 움푹 파인 모양새가 한바탕 굴려진 눈치였지만 불길에 직접 닿지는 않아 사이버라이프 로고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걸 거꾸로 쓰러뜨린 조지는 서랍 손잡이가 밑으로 향하도록 한 다음 위로 올라섰다.
썩 튼튼한 발판은 아니어서 조지의 체중이 실리기가 무섭게 캐비닛 표면이 우그러졌다. 안드로이드의 무게는 성인 남성보다 무거운 편이다. 칼슘보다는 금속이 훨씬 무겁고, 지방보다 실리카의 비중이 높다. 때문에 사이버라이프의 기술자들은 할로우 공법으로 뼈대의 속을 비우거나 심지어 갈비뼈 같은 내부보호 구조를 아예 생략해버리는 등의 전략을 짰지만 같은 체격의 인간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안드로이드가 보다 더 무게가 나갔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획기적으로 무게 줄이기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아쉽게도 신기술의 적용은 섹스 안드로이드에 우선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 파트너와 침대에 누운 인간이 잠자리를 같이 하다 말고 깔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보다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 뒤, 조지가 말했다. 『떨어뜨리겠습니다.』 불엔 탄 안드로이드의 몸체를 벽면에 고정한 대못은 도구 없이 빼내는 게 불가능했다. 상당히 거친 방식이라는 걸 알았지만 못의 존재는 무시한 채 손으로 잡고 힘을 줘 뜯어냈다. 팔 하나가 풀려나자 좌우균형이 깨진 몸뚱이가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내버려두면 머리부터 그대로 곤두박질칠 거라 생각한 제임스는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안드로이드의 늘어진 두 다리를 끌어안고 버텼다.
미친 짓이었다. 이래가지고는 머리카락 잘린 삼손이 쓰러지는 다곤 신전의 기둥을 부둥켜안은 셈이었다. 하중을 심하게 받은 신체가 불길한 우둑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의 잔해를 품위 있는 모습으로 바닥에 내려놓기 위해서는 제대로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머지 안드로이드의 팔을 벽면에서 빠르게 잡아 뜯어냈다. 순간 제임스는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로는 이겨낼 수 없는 무게에 압도당했다. 『후욱!』 이러다간 죽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는 없어서 그저 끙끙 앓았다.
『눕히겠습니다.』 점프하듯 캐비닛 서랍장에서 내려온 조지가 제임스를 대신하여 안드로이드의 몸을 지탱했다. 둘은 검댕이 잔뜩 묻은 더러운 바닥을 피해 그것을 최대한 반듯하게 눕혔다.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재와 먼지가 나풀나풀 날아올랐고 제임스는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재채기를 터뜨렸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사람으로 치면 심장과 마찬가지인 티리움 펌프는 1분에 정확히 82회 뜁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법 없이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말과 같다, 하드웨어를 정기 점검하던 기술자가 농담처럼 그런 얘기를 꺼냈다. 『말의 심장도 1분에 80회 정도 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말의 수명도 저희처럼 25년이라고 했습니다. 중요 부품을 제때 교체하고 정기적으로 수리를 받아도 최대 25년을 넘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시스템 오류가 중첩되고, 기억장치가 더 이상 읽고 쓰기가 불가능해지는 때가 올 거라고 하더군요.』
회사가 고의적으로 내구성을 낮춰 품질저하를 유도한 탓도 있다. 지나치게 튼튼해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가절감의 이유도 있고, 보다 빠른 소비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적당히 부서지고 적당히 망가져야 했다. 『공사장이나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안드로이드들의 적정 사용연한은 10년입니다. 더 짧죠. 하지만 그 사용연한을 채우는 일도 흔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틈새에 끼이거나, 운반차량에 깔리는 식의 각동 사고로 폐기처분에 들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일부러 부수지 않더라도... 짧은데.』
밀려오는 피곤함에 뒷말을 삼켰다. 내부 주요 전선의 피복이 벗겨졌다는 느낌이었다. 순간 조지의 프로그램이 수정이 불가능한 일부 데이터의 오류를 경고했다.
화염의 온도가 제법 높았을 텐데 안구가 터지지 않고 멀쩡했다. 눈동자는 색이 예쁜 갈색이었는데 가을의 나무열매처럼 보였다. 다람쥐가 기뻐할 야생 밤과 도토리의 빛깔이었다. 자신의 몸에 불이 붙어 녹아내리는 걸 고스란히 지켜봤을 텐데 그 안에는 어떠한 슬픔의 기척도 없었고, 한줌의 공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혼이 없는 존재이니 천국에 대한 갈망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을 터, 텅 비어 맑고 깨끗했다. 눈을 감겨주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열로 인해 내부에서 들러붙은 듯했다. 억지로 만져봤자 더 손상될 뿐이라서 그것의 목에 걸려있던 올무를 벗겨내고 두 팔을 가지런히 모아주는 것으로 예의를 마쳤다.
그렇게 몸에 묻은 검댕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이 새벽에 그 안에서 뭣들 하고 있으쇼? 쇼핑 나왔수?』 묘하게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조지는 하던 동작을 가만히 멈췄다. 하지만 눈치코치 이런 거 잘 모르는 제임스는 손바닥에 묻은 얼룩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환한 손전등 불빛이 제임스의 얼굴을 똑바로 비췄고, 갑작스런 눈부심에 신음했다.
『총 내려. 빨리 내려. 입김이 보이는 걸 봐선 사람 맞네. 미안, 미안. 하마터면 쏠 뻔했잖아.』 서너 명으로 보이는 무리가 너스레를 떨며 사과했다. 분위기를 봐서는 사복차림의 경찰들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법 도박장이나 클럽에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쪽에 가까웠다. 배 나오고, 술 잘 마시고, 뒤춤에 권총 한 자루씩 차고 다니고, 운전을 개떡으로 하는 친숙한 이웃 말이다.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임스를 관찰했다. 뭐, 도긴개긴이다. 무릎이 늘어진 낡은 바지, 더러운 손, 뭔가가 들어있는 배낭... 쓱 흩어보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래서는 어디서 생쥐 한 마리가 기어 나와 쓰레기통을 뒤진 꼬락서니가 아닌가. 그것도 식당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야 먹다 뱉은 치즈 조각이라도 나오는 법이건만 이 멍청하고 어린 쥐새끼는 경험부족 탓인지 엉뚱한 쓰레기통 덮개 아래를 파고 있었다.
자기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짐작하자면 머리를 쓰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래가지곤 걸레처럼 변한 양상추 한 장 나오지 않는다고. 돈이 될 걸 건지려면 여기보단 하트 플라자가 입질이 좋아. 서비스센터에서 동전 한 푼 찾겠다고 궁상맞게 그게 뭔 짓거리야. 차라리 자판기를 노려보지 그랬어. 초짜에겐 그게 딱 이지.』 웃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일행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따라 웃어야 하나? 타인의 웃는 모습을 흉내 내던 제임스의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덕분에 비웃음이 더 커졌다. 손전등을 든 자가 장난처럼 불빛을 마구 흔들어댔고, 무리 중 하나는 신나는 나이트클럽에 왔다며 춤추는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껏 뒤지라고 이 친구야. 고물 쓰레기를 물고 빨아도 거기선 티리움이 안 나와.』 손전등 불빛이 제임스를 지나쳐 이번에는 조지에게로 향했다. 『하여간 초짜들이라니. 어떻게든 티리움을 빨겠다고 저 지랄이지.』 혀를 끌끌 찬 남자가 퉤 하고 가래를 뱉었다. 『야, 인마! 사람이면 그쯤하고 일어나 인사 좀 해봐라. 앉아서 뭐 해. 똥 싸?』
재촉을 받은 조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생각을 않는 그를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던 거 같다. 킬킬거리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2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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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게임 자체가 몇 주에 걸쳐 일어날 일을 하루에 다 처리해버립니다. 큰 가지는 평화루트 줄거리를 따라갑니다. 마커스는 평화행진을 했고, 불량품이 된 코너는 행크와 절친이 되었고, 카라와 앨리스, 루터는 버스가 아닌 배를 타고 캐나다 밀입국을 시도했습니다. 게임의 주축을 담당했던 셋을 주인공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을지도...
『마빈에게로 그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동료를 혼자 두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녀석의 이름은 마빈이 아니고 마이클입니다. 걱정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마이클은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이가 아니니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할 겁니다.』 졸졸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더니 조지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캐나다로 입국하기 위해 강을 건너려 해도 따라오려나, 싱거운 생각을 하며 쌓인 눈을 피해 걸었다. 예상 밖으로 도로가 미끄러웠다. 운동신경이 둔한 제임스는 균형을 잃고 몇 번 비틀거렸다.
『하지만 손상이 심해 보였는데요.』 『겉 표면에 절상이나 열상, 자상과 같은 손상이 발생하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아무래도 대단히 치명적인 것처럼 보이죠. 그렇게 보여도 사이버라이프 기술자의 전문적인 처치가 절실하게 필요한 수준은 아닙니다.』 『총에 맞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22구경 대인용으로 쏘더군요.』 『그게 아니라... 총에 맞았는데 괜찮다고 할 수 있는지 물은 건데요.』 『예. 그래서 22구경 대인용이었다고 답변 드린 겁니다.』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제임스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가만히 생각에 잠겼고, 아주 한참 뒤에야 그 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원 샷 원 킬의 무지막지한 화력을 가진 놈이 아니라 따당 따당 쏘는 인간 제압용 권총에 맞았다는 거였다. 경갑무장한 군인이 안드로이드 수용소의 통제권을 전부 가져가기 전까지, 시간으로 따지면 약 4시간 정도 민간 사설업체 용역직원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탄약을 사용했는데 창고 털어가는 도둑을 막기 위해 쓰는 그런 종류였다.
『운이 따랐군요.』 『뭐라고요?』 생각을 너무 길게 한 탓에 둘 사이의 박자가 맞지 않았다. 조지는 고개를 들어 상가 전면에 낙서된 구호를 보고 있었고, 22구경 대인용 총알에 대한 건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한참 입 다물고 있다가 뜬금없게 운이 좋았다고 입을 뗀 제임스가 미친 사람처럼 여겨졌다.
자유! 어둠속에서도 푸르게 발광하는 특수 전자도료로 적혀진, 사이버라이프 기본 그래픽체 형식의 글자는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지나치게 반듯해서 광고판의 문구 중 하나처럼 보였다. 공중으로 번쩍 날아오른 프로 농구선수의 사진 뒤로 「자유!」라고 적으면 고가의 브랜드 운동화 광고가 된다. 하지만 저 글자가 운동화 광고가 아니라는 건 조지도 알고 제임스도 알았다. 불량품 안드로이드가 자신들을 인류와 동등한 생명체로 존중해 달라면서 구호를 새겨놓았다.
이쯤해서 조지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자유!」라는 구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푸르게 발광하는 자유라는 글자 위로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다음의 낙서가 덧칠되어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죽여라!
줄줄 흘러내린 안료가 핏자국처럼 보였다. 글자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문제는 바닥으로 진짜 피도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짐짓 자세를 낮춘 조지는 웅덩이를 이루다 빠르게 증발한 푸른 피의 흔적을 보았다. 벽면에는 고속으로 튄 점 모양의 자국도 남아 있었다. 티리움이 흩뿌려진 모양으로 봐선 누군가 이 장소에서 처형식으로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날렸다. 무릎을 꿇린 뒤 가까이에 대고 두 발을 쐈다. 안드로이드는 벽을 바라본 채로 최후를 맞이했는데 가엾게도 생애 마지막으로 두 눈에 담았을 것이 「자유!」였다는 점에서... 뭐랄까. 안드로이드를 죽여라! 붉은 페인트로 벽을 덮은 건 처형을 마친 뒤다.
미친 슬로건이다. 저들은 안드로이드들을 생명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그 발악을 떨고 있던 게 아니었나. 그러면서 안드로이드를 죽이자 선동을 한다? 어째서 저들은 파괴하라, 또는 없애자, 그것도 아니라면 부수자, 이런 표현 대신 죽이자는 말을 고른 건가. 애초에 생명체가 아닌 걸 죽일 수는 있는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폭도들은 작동이 중지된 안드로이드를 밧줄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질질 끌고 갔다. 여러 명의 발자국에 뒤섞여 끌린 흔적이 주행도로 한 가운데로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조지는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여론은 안드로이드가 펼친 평화적 시위에 그럭저럭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가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다. 파괴적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사람으로 강성 기독교 우파 파벌에 속한 로버트 휴이 목사를 꼽을 수 있다. 목사는 케이블 방송에서 악마, 불지옥, 예수의 이름으로 심판, 안드로이드는 지옥으로 갈 지어다 아멘 아멘을 외쳤다. 설교에 동조한 이들은 붉게 칠해진 십자가 장신구를 목에 걸었다. 몇은 「우리는 주의 십자가 군단병」 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네킹 사지에 밧줄을 걸어 질질 끌고 다니는 야만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를 수호할 최후의 전사라고 주장했다. 끌려 다닌 마네킹의 팔다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갈 적마다 환호가 터졌다. 오체분시 된 마네킹 잔해가 던진 메시지는 너무나 선명해서 이들의 집회 장면을 뉴스로 내보내던 방송국은 화면을 전부 뿌옇게 모자이크 처리했다.
조지는 끌린 흔적을 쫓아 빠르게 달렸다. 가서 어쩌려고.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없잖아. 굳이 눈으로 확인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런데도 뛰는 속도가 느려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면서 제임스도 따라 달렸다. 사실 달린다고 하기엔 뭔가 애매한 수준이었지만 어쨌거나 뛰었다. 이 앞으로 뭐가 있더라, 미친 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아는 걸 곱씹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편의점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코인 세탁방, 패스트푸드 음식점이 차례로 기억났다. 햄버거 가게 주인은 40대 남자였는데 더운 계절이 오면 간이 판매대를 세우고 과일 맛 얼음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위생 점검을 나온 공무원이 벌금을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아이고, 선생님!!」 우는 시늉을 했다. 여기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꼭 가벼운 배앓이를 했던 제임스는 이 햄버거 가게를 싫어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인쿠폰은 반드시 모아뒀었다. 지나치면서 보니 가게는 판자로 입구와 유리창이 모두 막혀 있었다. 안드로이드 시위가 시작되면서 당분간 영업을 포기한 눈치다. 입구를 막은 판자 위로 방금 전 봤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죽이자!
그로부터 두 블록을 더 지나쳐 조지와 제임스는 3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사이버라이프 서비스 센터. 누군가 자동차로 매장 안까지 돌진이라도 한 모양새다. 출입구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부는 천장까지 주저앉았고 거기에 불까지 질러서 검게 그을린 외벽에 노란색 접근금지 테이프가 빙 둘러졌다. 그리고 아마도 간판이 있었을 자리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린 안드로이드가 매달려 있었다. 목에는 올무가 걸렸고, 공구를 사용해 손바닥에 대못을 박았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던지 몸통은 거의 녹아내렸다. 『씨발!』 보다 못한 조지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19 11:47
2020/06/1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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