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눈에 띄지 않게. 얌전히. 존재감 없도록. 사고치지 않고. 기타등등.
아침마다 정해진 구호를 외쳐가며 각별히 행동을 조심한 탓에 주변 인식도 그럭저럭 바뀌기 시작했다. 외진 창고에서 빈대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거야 변함이 없었지만「사고뭉치」로서의 등급은 하락을 계속해 삼주 가량의 시간이 흐르자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은 채 복도를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허벅지가 땅에 끌릴 정도로 비대한 몸이었다가 체중 조절에 성공하여 정상 체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쪼는 듯한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늘진 곳으로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으면 아무도 내가 그곳에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저승대부가 나오는 창고에서 청소를 한게 좋은 경험이었던 거에요.』
숙사감대부는 대단히 만족스런 눈치였다.
『어쩐지 린청 님은 역효과가 난 듯하지만.』
당지 없이 길게 풀어헤친 머리로 곳곳을 돌아다닌게 화근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모양을 한 이사실의 아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형상을 한 그를 보고 낄낄거리며 웃느라 바빴다. 하필이면 그게 또 머리카락에 대한 놀림이라서 린청도 사정 봐주지 않고 꼭지가 돌아버렸다. 결국 매일같이 주먹질이 오고갔는데 그것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입장이라 평판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쓸데없는 도전의식을 불러 일으켜 상급생까지 손을 봐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판국이라 조만간 사달이 날 상황이었다.
『이쪽은 얌전해져서 그나마 다행이지.』
칭찬을 받으니 속이 불편해지려 했다. 따지고 보면 다 내가 원흉 아닌가.
『아무튼 앞으로도 잘 해나가리라 믿어요, 안즈 님.』
여기에 격려까지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어쨌거나 하품이 나올 것만 같은 지루한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인생사, 내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날 가만두지 않는 인간이 있으니 문제다.
『여어~ 도토리.』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뺨에서 경련이 일어나려 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억지로 참고 뒤돌아 얌전히 예를 갖추었더니 신경질을 부린다.
『그거 참 지루한 인사법일세. 답지 않게 평범하잖아.』
진짜지 이해를 못 하겠다. 성인이 된 황족의 남자가 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느냔 말이다. 내가 가진 보따리 속엔 황금처럼 비싼 물건은 안 들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 같은 것도 없고, 내 엉덩이엔 꼬리도 안 달렸고, 이마엔 뿔도 안 돋았다. 그런데도 일부러 찌르고 건드리면서「재밌는 반응을 보여봐」이러고 있으니 진짜 감당이 안 된다.
나는 어중간한 미소를 지으며 비굴할 정도로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그냥 제 가던 길 가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보기와 달리 바쁜 사람이에요.
그래봤자 자손은 손가락을 까딱거려 이리 가까이 오라고 명령했다.
아... 진짜 엮이기 싫은데.
『발칙한 녀석,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기냐.』
이쪽에서 좀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자 그 또한 다소의 불쾌감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 맘대로 되는 일도 아닌데다가 지금 그의 복장이 평복이 아닌 것도 영향이 컸다. 그는 당장에라도 말 위에 올라타 전장으로 떠나도 되는 정식 군장 차림이었고, 그리고 혼자도 아니었다. 붉은색의 갑주를 걸친 사내가 뒤로 세 명이나 서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들이 얼음으로 깎아 만든 것처럼 냉기가 솔솔 풍겼다. 여기서 궁금한 건 저 차가움이 나 때문이냐 하는 거였는데... 셋 중 가장자리에 선 남자를 바라보니 마누라를 겁탈한 파락호를 앞에 두고 있다는 식으로 적개심까지 드러낸게 제법 알쏭달쏭하였다.
『어디를 보고 있누? 꼬맹아. 나는 이쪽에 있어.』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며 자손이 다소 성가신 얼굴로 일침을 놓았다.
나는 다시 손바닥을 마주비비며「그러게나 말입니다」엉뚱하게 대꾸하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처럼 기계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눈 하나는 여전히 뒷 배경으로 선 남자들을, 다른 눈으로는 자손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사팔뜨기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알이 쏘는 듯 아파와 결국 눈꺼풀을 비비고 시선의 초점을 조정해야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저를 불러 세우셨잖습니까. 용건이 있으신게 아니옵니까?』
『아, 그거.』
깜빡했다며 자손이 둥그런 뭔가를 내밀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내려다보니 그 정체는 잘 익은 복숭아였다. 아니, 그래서요. 이걸로 뭘 어쩌라고요. 나는 당황하여 얼어붙었다.
황족의 남성이 변방국에서 온 어린아이에게 손수 복숭아를 하사하시었다 - 라는 줄거리는 어딘지 모르게 함정이 있을 법해서 순진하게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과일을 받기가 두려웠다. 그렇다면 뒤로 다른 속셈이 있다고 가정을 해봐야 할 터인데 내가 받은 건 비밀 교지도 아니고 일반 복숭아다.
『...... 잘 익었네요.』
『창리궁 마마에게 인사드리고 나오는 길에 먹음직스럽게 생겼기에 내 하나 따왔다.』
그러니까 맛있어 보여서 하나 챙겼는데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손에 들고만 있었다는 거? 결국 나더러 기미를 보라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손의 안색을 읽으려 노력했다. 허나 글러먹었다. 내 재주로는 저 사내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무리였다. 아... 정말이지. 답답할 따름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군장 차림새의 사내 셋은 왜 아까부터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거냐곳.
『그럼, 실례하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한 입 베어 물고 잘 씹었다. 달콤한 육즙이 상등품 이상이었다. 입안을 후리는 상큼함에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잘 참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소인, 맛을 보니 독은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이제 안심하고 드시옵소서.』
하여 나름 최대한 공손하게 복숭아를 도로 바쳤더니 이 인간 반응 봐라.
『와하하하하~! 하하, 아하하하!』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배를 쥐고 웃음을 터뜨리는게 아닌가.
『기특하다. 네 녀석의 엉뚱함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원하신게 이게 아, 아닙니까?』
『멀쩡하게 생겨서 말은 왜 더듬누. 아니다. 잘 하였다. 넙죽 받아먹지 않고 나를 위해 기미를 보다니. 다른 놈들에게 따라 배우라 강요하고 싶을 지경이야. 그래, 맛을 보니 독은 없다고?』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옛말에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글쎄요, 일단 혀가 얼얼하다거나 손끝이 저리지는 않는데요.』
『흐음... 독에 대해 잘 아느냐?』
『그렇게까지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무취에 무색, 무향의 독이 있다는 건 모르겠네?』
『에?』
『섭취하고 보름 뒤에야 증상이 나타나는 독도 있는데.』
『에?』
『심지어 사내를 고자로 만드는 독도 있단다.』
『에?』
『나야 여러 가지 독에 면역이 워낙에 잘되어 있어서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너는 아닐텐데. 아이고, 불쌍해서 이를 어쩌나. 우리 다람쥐, 복숭아를 덥썩 베어물고 그만 고자가 되어버렸네.』
『뭐라고요?!』
『괜찮다. 남자로서의 기능을 잃으면 정궁으로 들어와 내 밑에서 일하는 내관이 되렴.』
아마도 농담이었을 것이다. 듣는 순간 소름이 돋은 걸 봐선 농담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뺨을 꾹꾹 누르더니 단 세 입 만에 복숭아를 씨만 빼고 전부 먹어버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