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소년이 햇빛에 닿은 광견병 환자처럼 덤벼들자, 이사실 굴지의 명문 이운가(家)의 열 한 번째 아들 숙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로 도망쳤...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느냐만.
이 남자의 정체가 사실은 만성피로에 찌든 관리가 아니고 자객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반응 속도는 남달라서 눈을 깜빡이고 보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쪽은 공격을 당한 숙사감대부가 아니라 린청이었다.
『천 년은 빨라!』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의 남자 형제들은 무려 스물네 명에 이르러 고위관직자의 자제 어쩌고를 떠나 형제들끼리 어릴 적부터 경쟁과 시기질투를 일삼아 엄청나게 살벌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뒷간에서 바지를 내리려는데 화살이 날아드는 일도 일반사, 덕분에 기습적 공격을 회피하고 상대방의 어깨 부위의 급소를 눌러 순식간에 제압하는 일 정도는 식은 떡먹기가 되어 무예를 배운 적이 없는 몸으로도 주먹으로 얻어맞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나, 뭐라나.

『어, 어떻게 한... 우욱.』
아무리 기를 써도 책상에 박은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나 보다. 팔로 무게를 지탱하려 해보았지만 팔뚝 근육만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킬 뿐, 노력해서 겨우 얇은 책 두께만큼만 상체를 세울 수 있었다. 언뜻 보이는 소년의 목덜미로 파랗게 핏줄이 곤두섰다.
『숙사감대부! 나에게 뭔 짓을 저지른 거요?!』
『별 거 아니오, 린청 님. 귀신산발한 채 달려든 죄 값이라 생각하소. 일각 정도 뒤에 마비가 풀릴 겁니다. 것보다 제가 과로사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제 나흘밖엔 안 지났는데 잊어버리신 겁니까?』
『잊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죽게 생긴 건 바로 나지, 당신이 아니잖아!』
『말씀드렸잖아요. 마비는 곧 풀려요. 것보다... 사내 머리 꼬라지가 그게 뭡니까. 단정치 않게.』
긴 머리를 지적당하자 린청은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저리 가! 내 머리를 만지면 반드시 죽인다.』
손을 대어 직접 만져보려던 숙희는 얼른 팔을 올려 만세 자세를 취했다. 죽이겠다는 협박이 마음에 걸려서라기보다는 그렇게나 싫어하는데 일부러 만질 까닭이 없어서였다. 으르렁거리는 개는 쓰다듬지 않고 그 성질이 한풀 꺾이게끔 내버려두는 법이다. 대신 사내는 짐짓 나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안즈 님은 어떠셨나요?』
대답은 린청이 해주었다.
『저 녀석, 기절했었어. 전부 당신 책임이야!』
『그래요? 수업 중인 교당 안으로 냄새나는 말똥을 들고 오신 분이 의외로 담이 작군요.』
보일락 말락 빙긋 웃던 그는 팡 소리가 나도록 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격려인 것도 같고, 야단을 치는 것도 같고, 달라붙은 귀신을 내쫓기 위한 행동인 것도 같고... 아무튼 가뜩이나 얇은 등가죽이 매운 고춧가루로 문지른 것처럼 화끈거렸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그 유명한 유령대부를 직접 보니.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말썽은 피우지 말아야겠다, 착하게 살자, 싸움질 하지 말자, 이런 신박한 결심이 막 솟구치지 않던가요.』
악령을 내세워 계행을 실천하는 교육자는 이 세상천지에 당신밖에 없을 거다. 이 빌어먹을 인간아.
그래봤자 비난하는 이쪽의 눈초리는 개의치 않아하는 눈치다. 둔한게 아니라 뻔뻔했다.
『뭐, 괜찮아요. 외모가 무섭게 생긴 것과는 달리 실제로 해코지를 하는 분은 아니라서. 그냥 겁을 줘서 벌 받는 아이들을 밖으로 내쫓기만 하지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데 방해를 받으면 싫은 거겠지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한 번 봤던 사람은 잘 기억해뒀다가 같은 얼굴이 두 번 연속해서 계단을 올라오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진짜로 화를 낸다고 그럽디다. 다음번엔 곱게 안 끝나요.』
곱게 안 끝나면 어쩔건데. 그 유령의 정체가 바로 난데! 나는 격심한 두통을 느꼈다.

『숙희 님도 그 유령을 직접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 저는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잘도 그랬겠다.』
『못 믿는 눈친데 진짜입니다. 그래도 제 일곱 번째, 아홉 번째 형님께서 벌을 받고 그곳으로 올라가신 적이 있지요. 우리 어렸을 시절엔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없을까, 서로 즐겁게 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소문에는 거기 다락으로 수상쩍은 유골함이 있다고도 했고. 그래서 형님들은 유령을 피해 도망치며 기를 쓰고 4층까지 올라가 보셨다고 했지요. 막상 올라가보니 하품이 나올 지경으로 별 것 없었다고... 그러면서 왜 창문으로 뛰어내려 종아리뼈를 분질러먹었나 몰라. 떠올리니 그립군요.』
『진짜로 유골함이 그곳에 있습니까?』
허리를 으쓱으쓱 흔들던 숙사감대부는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없어요.』
더 놀라운 발언도 했다.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저요.』
실제로 가본 적도 없다면서 그렇게까지 장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거든요. 법전에는 사람의 유골을 취급함에 있어 반드시 매장하라 되어 있습니다. 고인의 유골을 상자나 병에 넣어 건물의 벽이나 바닥에 숨기거나 하면 허락받지 않은 주술을 행한 죄와 고인에 대한 모욕죄를 물어 편격형으로 다스립니다. 이때 쓰는 채찍엔 구리로 만든 심지가 박혀 있지요.』
편격이라 함은 사람을 기둥에 묶은 뒤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을 일컫는다.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라 착각하기 쉬우나 때리는 도구가 살을 후벼 파는 종류라서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형 집행이 끝난 뒤 독이 올라 죽는 사람도 다수다. 이를 방지하고자 사흘 간격으로 열 대씩 나눠서 때리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벌이 무서워 아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얘긴데.
그런 이치라면 이 세상에 강간, 살인, 폭행이 여전히 만연하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두 팔을 마주 걸어 팔짱을 낀 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걸 반대로 돌려 해석하면 누군가 허락받지 않은 주술을 행하기 위해, 혹은 고인을 모욕하기 위해 유해의 일부를 그 건물 어딘가에 숨겨뒀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이사실 수도 루은에서, 그것도 황제폐하와 신룡이 코앞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잘도 그딴 짓을 저지르겠군요. 정말이라면 목숨이 여덟 개라도 부족할텐데?』
이런 종류의 대화가 불쾌하다는 걸 숨기지도 않은 그는 얼른 열쇠나 돌려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열쇠따위 알게 뭐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적손 본인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그 즉시 숙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종류로 바뀌었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군.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은 거냐, 지리가 안즈.』
집안 이름까지 포함하여 내 이름을 부른 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얘기다. 정말로 죽게 된다는 경고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열쇠는 린청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요. 꺼내 가지세요」라고 얌전히 말한 뒤 무릎을 구부려 예를 올렸다.

그날 저녁, 본국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낼 장문의 편지를 썼다.
평범한 문안 인사부터 시작하여 편지의 중간까지는 단순한 내용으로 덮었다. 하지만 안녕하셨어요, 용건만으로 붓을 잡은 것이 결코 아니었기에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주의하여 문구를 골랐다. 여행길에서 나를 죽이려고 시도한 미리노와 타평의 이름도 언급했다.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지「그들이 나에게 해준 여러 고마운 말들이 참 많았는데 잊으려 해도 내 힘으로는 잊혀지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아버지에게 꼭 전하고 싶다」식으로 빙빙 돌려 적었다. 저지른 죄가 있는 아버지는 이 말을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결론 부분에 이르러선 옷을 빌려 입는 어려운 처지라는 걸 강조했다. 수업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편안하게 자식 시집보냈다 생각하라는 말도 썼다.
「우아하게 협박하는 것도 쉽지는 않군.」
쓰던 붓을 입술과 코 사이에 끼어 넣고 엉덩이를 긁었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당신이 날 죽이려 한 걸 폭로할 수도 있으니 입막음 돈을 부치세요, 날 시집보내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배가 덜 아플 거에요. 돈을 받으면 얌전히 꺼져줄게요 - 라는 것이 줄거리였다.

15세가 되면 성인이 되어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내 결정에 따라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작정이다. 대신 다른 나에게 가서 준시를 치룰 생각이다. 여성도 관리가 될 수 있는 나라가 몇 있으니 자세히 알아본 뒤 그곳의 말단관리가 되어 편안한 노후를 노려보도록 하자.
5년... 앞으로 5년 남았다.

편지봉투에 보내는 이 이름을 적는데 지붕 위에서 새가 내려앉은 듯한 작은 소리가 났다.
바람에 기왓장이 흔들렸구나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그 기척은 모두 셋... 그들 전부가 사람이 아니었다.
이를 악문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때에는 생각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일이 더 복잡해지고 꼬인다.
5년이다. 5년만 버티자.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주문처럼 반복하여 외웠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잃어버린 왼쪽 신발 한 짝이 깨끗하게 손질된 모습으로 돌아와 문밖에 가만 놓여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6/27 11:25 2015/06/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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