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즈? 왜 얼굴을 그렇게 있는대로 찡그리고 있어? 혹시 화났어?』
『그다지.』
가뭄에 콩 나는 무료 수업 중 하나인 기본 서대륙 역사학 강좌에 참석하면서 나는 탁상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탁상의 나무 표면은 거칠고 차가웠다. 잘 떠지지 않는 퀭한 눈으로 보니 뾰족한 사금파리 같은 것으로 새긴「현의 + 미각진 = 영원한 친구」라는 낙서가 보였다. 쯧쯧 혀를 차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영원한 우정 그런게 어딨다고. 다 지랄 같은 착각이지.
책이다, 교과서다, 수업이다, 글자다 이러면서 좋아했을 내가 무기력하게 뻗어버리자 린청은 가만히 이마를 만져 열이 있는지 쟀다.
『그럼 아픈 거냐? 너는 진짜지 체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니까. 정 힘들면 숙소로 돌아가서 쉬어. 어차피...』그 뒤로「도움이라고는 쥐뿔도 되지 않는 수업이잖아」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자리에 앉은 학부생들은 저마다 하품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공짜라는 말은 다시 말해 영양가 없다는 소리와 동의어였고, 담당 교수사는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의지를 점심 도시락과 같이 포장을 해 두었다가 매번 집에다 두고 나왔다. 너무 심하다는 하소연이 저절로 나왔는데 그거야 나 같은 사람 사정이고... 여기서「기본」이라 함은 이미「가정에서 이미 배웠다」를 내포하고 있는 거라 가정학습으로 이미 배웠던 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하는 교육의 질은 자연스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이 탓에 치아가 부실하여 멋내기용 솜뭉치를 입에 넣고 있던 교수사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교과서를 펼치라고 말했고 제일 앞줄에 앉은 소년을 지목하여 소리 내어 읽으라고 지시했다. 사실상 그게 수업의 전부였다. 부연설명도 없었고, 자료를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지시를 마친 교수사는 다시 솜뭉치를 입안에 넣어 어금니가 전부 빠진 탓에 옴폭 패인 볼의 모습을 바로잡았다. 다시 말해 수업 중에 그가 일부러 입을 열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딴 짓을 하기엔 너무나도 이상적인 분위기라 대다수가 졸거나 무료함에 치를 떨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계속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였고, 린청은 대놓고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느라 바빴다.
맨 뒷줄에서는 사무월 축제를 대비해 쪽지에 적어온 노래 가사를 암기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천마는 하루 삼천리를 달린다던데 달로 떠난 님 소식은 어찌 없는가.

앞에서는 소년이 교과서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 위수의 공왕은 율령을 정비하고 중앙행정구역을 기존의 여든아홉에서 쉰다섯 주로 재정리를 하였다. 또한 관료제를 강화하였으며 관개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켜 소하의 물을 끌어올릴 용수로를 만들었고 남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개축하였는데 이는 읍성으로의 도적 침입이 끊이질 않아 민심이 나빠졌기 때문으로 남문성을 구축하길 명하고......』
몹쓸 수질성 전염병이 돈 건 왜 빼먹어 -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투덜거렸다.
『그해 니월에 남문성 흥라문을 완공하면서 외호(아치)의 상인방 중석을 끼워넣는 마무리 작업을 마침에 있어 석수 마장부리를 아래 세워두고 장석돌을 빼내기로 하였는데 평소 감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소문이 있기에 마장부리 외에도 다섯의 관리를 아래에 세워두기로 하였다... 이때 상인방 돌이 하나 떨어져... 설계가 잘못되었다는 판단 하에 유배를 보내고...』
외호가 뭔지 모르는 린청은 무슨 이야긴지를 이해를 못했다.
『뭔 소리야, 저게.』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흥라문의 모양을 네모반듯한 모양새가 아닌 뒤집어진 밥사발 둥근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걸 최종 마무리로 지지대를 빼내기에 앞서 아래로 사람을 세웠다. 행여라도 무너지면 책임을 지고 거기서 죽으라는 얘기다. 그런데 공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수나 석수와 같은 기술자들 말고 감리감독관까지 세워뒀다. 당시에 전염병으로 사회가 혼란했기에 공사 진행 또한 엉망이었다. 오죽하면 왕조차 부실공사를 염려했을까.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붕돌 하나가 제 위치에서 빠져나와 떨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전부 사형이지만... 가엾게 여겨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목숨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환수했다. 재산몰수는 당연했고 살던 집도 빼앗겨 빈 몸으로 내쫓았으니까.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집은 헐려 밭이 되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위수는 물론이고 오성에서도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메뚜기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원래는 전염병을 피해 도망친 난민이었지만... 먹을게 없어 결국은 한데 모여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그래서 성곽을 쌓았는데 이는 노역의 증가라 동원된 농민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공사는 덕분에 날림이었고, 흥라문 건축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사건이 차곡차곡 무게를 더해 위수의 난을 촉발시킨다...

낭독하여 읽는 소년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듣는 입장에선 완벽한 자장가가 되어버렸다.
『저어, 목이 너무 아픈데요.』
교수사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뒷자리를 고개 짓으로 가리켰다. 그게 대단히 모호해서 여러 명이 동시에 외쳤다.
『네? 저요?』
교수사도 어쩐지 정신 줄을 놓은 눈치다. 누가 읽어도 상관없다며 또 목을 움직여 막연히「너」라고 했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느끼며 그중 한 명이 이어 읽기에 자진했다.
『중앙에는 국가 기구로서 각 방면의 정무를 관장하는 구경을 두고, 그 위에 정치를 담당하는 승상을,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를, 감탈 역할의 어사대부 삼공을 두었다... 주례에서 맹약할 적에 삼공이 모여 소를 서른셋을 잡아 제사를 지내며 다음의 내용을 낭독하였는데 첫째, 왕은 용신이 내려주시는 것으로 충성을 다할 것. 둘째, 덕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노약자를 존경 애호할 것. 세째, 관직은 세습할 수 없으며 왕은 대부를 재판 없이 죽일 수 없다. 넷째, 나라는 재황을 막고 제방을 쌓을 것. 다섯째, 매점매석하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릴 것... 승상 현공이 죄수들을 조사하여 가벼운 죄를 지은 자를 사면하였는데...』
위수의 난이 방금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삼공 정치가 나온다? 나는 모래가 발리기라도 한 것처럼 깔깔해진 눈꺼풀을 꿈뻑꿈뻑 움직였다. 모르는 사이에 졸았던 것 같다. 시대가 200년 가량 흘렀다.

방금 전까지도 하품을 심하게 하길래 졸고 있을 거라 짐작한 린청은 나와 달리 어느새 집중하여 책을 보고 있었다. 다만 보고 있는 낱장이 낭독되고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훨씬 뒷부분이었다.
이쪽에서 보내는 시선을 알아차렸던지 책을 비스듬히 세워 내게 읽던 부분을 보여주었다.
변방의 작은 나라가 마흔 삼주 벽은이 되어 이사실에 어떻게 편입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그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여기, 그거야, 그거.」
그리고는 흥미가 동했는지 다시 교과서 읽기에 몰입했다.
벽은국 부서고서리 시오재를 피투성이 괴물로 인식한 그에겐 상당히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느껴졌으리라.

어이- 그거 순전히 뻥이다, 린청. 교과서라고 반드시 진실을 적어놓는 건 아니더라고?

거짓들. 침도 바르지 않고 내뱉은 가식의 언어들.
집어치워.

나는 부스스 일어나 뒷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명색이 수업인데 교수사의 허락 없이 교당을 박차고 나가는 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다. 옆에 앉은 린청도 당황했지만 뭐니뭐니해도 입에 솜을 넣은 교수사가 제일 많이 놀라 잔뜩 물을 먹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이오에. (이보게) 앙자 어이 가느가. (갑자기 어딜 가는가)』
나는 나흘간 지독한 설사병에 시달렸다는 식의 초췌한 안색으로 변명했다.
『몸이 아픕니다.』
린청이 주섬주섬 물건을 정리하고 내 뒤를 따라오려 하자 나는 눈짓으로 만려했다.
지금은 그저 혼자이고 싶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09 19:48 2015/07/0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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