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대부가 나오는 창고의 문을 박살내고 그 내부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들어가 어딘가로 숨겨져 있는 유골을 빼내어오는 상상을 해봤다. 전후좌우의 정황을 고려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면 정말로 그곳에 내 뼈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만... 흉악한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정체가 뭐든 조만간 해결을 봐야 할 것이다.
더하여 나는 내 거처의 지붕 위를 돌아다니는 기분 나쁜 것들의 머리 위로 시퍼런 번갯불을 내리꽂는 장면도 즐겁게 꿈꿨다. 굉음과 같이하여 부정한 것들이 전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이다. 꼴좋다. 상상 속의 나는 벼락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 안즈는 크게 주눅이 든 채 매번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따라붙는 기척이 두려워 감히 얼굴을 들어 나무 위를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크게 불면 식겁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특이체질이라고 간덩이가 커지는 건 절대 아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지켜봄을 당한다는 건 나머지 한 방울의 피까지 빨리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이었고, 앞으로 몹쓸 죄를 지을 죄인이었다. 이래선 무릎을 꿇고 어서 빌어라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미간에 또 주름이 졌어, 너.』
『향수병.』
『그런가.』
린청은 향수병을 앓아서 그렇다는 내 설명에 그럭저럭 납득하고 넘어갔다가 돌연 표정을 바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의심은 타당했다. 본국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내가 집이 그리워 향수병을 앓는다는 건 영 어색했다.
『향수병이 아니고 누가 또 괴롭히고 그런 거 아냐? 혹시 송주가 또 못된 짓을 하고 그러든?』
『괴롭힘이라...』
나는 턱받침을 하고 앉아 이글거리는 한 여름의 햇빛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노인네처럼 한숨도 나왔다.

물론 어제도 한바탕 골탕을 먹었다.
물론 그 상대는 송주가 아니다. 녀석은 자기 패거리들과 군무 연습이 바빠 나 같은 건 안중에 없다.
「여어, 꼬맹이.」
다람쥐, 꼬맹이, 도토리, 이런 거 말고 슬슬 이름으로 불러줘도 좋으련만. 최소한 부르는 호칭을 하나로 통일이라도 해주던가. 속으로는 불평했지만 겉으로는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나란 녀석도 참으로 속이 시커멓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래도 억지로 웃는게 티가 역력하니 쓸데없는 짓이었을지도.
「이 녀석은 어찌된게 늘 빈상이야. 마음에도 없는 인사는 되었고 더워 죽겠다. 목도 말라. 냉수를 가져오렴.」
그러니까 내가 왜. 어째서. 당신 주변엔 시중을 드는 이들도 없는 겁니까.
빈사국의 졸부인 우리 아버지도 손바닥만 치면 하인이 다섯은 나타났단 말입니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목덜미를 문질렀다. 왜냐하면 마실 물을 뜰 우물까지 가려면 위치한 자리에서 일각(15분)은 족히 걸어야 했고, 거기다 다시 돌아와야 하니 왕복 걸음이다. 물을 대접에 뜬 상태로 바삐 뛸 수는 없는데다 엎지르면 낭패. 그야말로 고된 심부름이다.
하지만 자손은 정말로 더워보였고 의복은 단정치 않게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땀 냄새에 섞여 말분 냄새도 강하게 풍겼다. 값비싼 좋은 향기 이런 건 맡아지지 않아서 나는 그가 지금껏 뭘 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연무장에서 검술 실력을 닦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군장 차림새도 아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서 무얼 하시었기에?」
「궁금하냐? 엎드려서 나를 모시는 내관이 되겠다고 약조하면 가르쳐주지.」
 궁금증이 그 즉시 사라졌다.
「저 같은 하찮은 자에게 마실 물을 구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래선 안 되는 까닭을 나열해 봐.」
「행여 물에 이상한게 섞이기라도 하면...」
「왜? 심술이 난 나머지 내게 배앓이가 나는 약이라도 먹이고 싶으냐? 괜찮다. 허락한다. 어지간하면 다 마셔주마. 갈증이 심해서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구나.」
「저어, 그보다 제게는 급히 수업이... 다른 사람에게 시키시면.」
「네놈이 여차하면 땡땡이를 친다는 거 다 안다. 수업 핑계는 안 통해. 맨날 싸돌아다니는 주제에.」
「제가 걸음이 느려서... 오래 걸릴 텐데요.」
「100년까진 안 걸리잖아. 말대답 따박따박 할 시간에 후딱 다녀와!」

나는 징징거리며 우물가로 뛰어갔다...가 요구한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황족인데 우물에서 바로 떠서 마실 물을 올려선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허둥거렸다. 그렇다고 정궁까지 가서 높으신 이가 마실 물이 필요하니 달라고 해보랴. 한바탕 곤장질을 당할 터, 그보다 내 걸음으로는 정궁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크아악! 실수했다. 이를 어쩌지! 」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어지간하면 다 마셔주겠다는 자손의 말을 떠올리고 얼른 손뼉을 쳤다.
「소방! 그리로 가자!」
소방에 이르러 물을 달라 크게 외치니 머리에 두건을 쓴 이가 문간에서 바로 튀어나와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물이 가득 든 죽통을 내밀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미칠 지경이었음에도 궁금한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너는 천리안이라도 가졌느냐?」
「눈은 안 좋습니다. 대신 귀가 아주 좋지요.」
예의 이가 뾰족뾰족 드러나서 나를 무진장 겁먹게 만들었던 하수였다.
나는 뚫어져라 그 자의 입을 주시했는데 이번에는 특별나게 톱날처럼 튀어나온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 자의 이빨 모양에 정신이 팔려 내가 영 움직이려 하질 않자 그는 쓰게 웃으며 채근했다.
「서두르셔야지요. 그분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됩니다.」
「아, 그렇지.」
「피로하실 것 같아 안에 과일즙을 조금 섞었다 고하여 주십시오. 독은 안 들었습니다.」
「설사약을 넣었다고 해도 상관없는데.」
「섞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안 듣습니다.」 사내는 단정히 말하고는 부드럽게 내 어깨를 밀었다.

다시 왔던 길을 힘들게 달려 죽통에 든 물을 자손에게 올렸더니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한 입에 쭉 들이켰다.
그런데 다 마시고 퉷 하고 뱉었다.
「에이. 뒷맛이 달아 영 개운치 않군.」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길게 내밀어 불평하기에 사실을 고하였다.
「죽통을 준비한 자가 말하길 피로하실 것 같아 과일즙을 섞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나는 당황했다. 그 자의 이름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솔직히 소방에서 일하는 자가 맞는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저어... 이름은 잘.」
「짜증나. 그러니까 뭐냐, 방금 이 몸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준 물을 마셨단 말이지. 그거 불쾌하군. 나는 네가 뜬 물을 원한다. 차가운 물! 다시 가져와.」
「에엑?!」
「직접 떠와!」
왜 나만 갖고 그래요오오오오~!! 비명을 질러대며 다시 소방으로 차박차박 뛰었다.
어유, 제기랄. 빈사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었는데.
다시 물을 가지고 돌아오니 누구처럼 땀 투성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여 더위를 먹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유, 옷 좀 갈아입고 그래라. 어린놈이 몸에서 쉰내가 막 나고 그럼 되겠냐.」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자손은 짐짓 자기 코를 막고 나쁜 냄새가 난다며 나를 골렸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뛰어온 걸요.」
「그래서 땀이 났다?」
「예.」
「그럼 나와 같이 사이좋게 목간이라도 같이 할까?」
「......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사양하겠습니다.」
이상. 무릎으로 얼굴을 파묻고「괴롭힘을 당하다」회상을 종결하였다.

오전 내내 달궈진 흙으로부터 비읏한 내음이 피어올랐다. 물을 뿌리면 달군 금속이 내는 치익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너무 뜨거워 풀들도 기운을 잃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열기에 신이 난 건 벌레들뿐이다.

Posted by 미야

2015/07/13 19:48 2015/07/1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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