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12

내키는대로 자유롭게 끄적거리고 있는 낙서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걸 번호를 붙여가며 계속 하고 있는 거지. 일부는 드라마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는 건 지어냅니다.


『어머나, 해롤드!』
여자는 무섭다. 반갑다며 방긋 웃어도 어쩐지 여자는 무섭다.
속으로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저 여자는 루트가 아니다. 저 여자는 루트가 아니다.
리스만큼이나 키가 커도 그녀는 7cm 굽의 힐을 신고 있었다. 평균치 신장의 핀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아야 한다. 굴욕감 그런 건 모르겠고 척추 고정술을 받은 뒷목이 땡기며 아파왔다. 통증은 필연적으로 그의 뺨 근육을 굳게 만들었다.
어색하게 굳은 핀치의 표정에 훤칠한 키의 숙녀가 멈칫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쪽의 눈치를 살펴왔다.
『저 매그예요. 기억 안 나세요? 같은 회사에서 9년간 같이 근무했었잖아요.』


물론 기억하고말고. 위장취업을 했었던 IFT 산하의 서버관리 업체에서 책상 두 개 건너편에서 일하던 여자다. 자녀가 두 명 있고 남편은 갑상선 암으로 3년간 투병하다 사망했다. 간병일도 그렇지만 사별 경험이 워낙에 끔찍스러워 사귀는 남자가 있어도 재혼은 아예 생각을 안 했다. 불치병을 앓던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상당히 괴롭다. 그리고 그 죽음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매그는 거의 지옥 밑바닥 근처까지 내려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핀치는 매그가 복도 구석에 숨어 울음을 삼키는 걸 훔쳐 본 기억이 있다. 마스카라가 번져 그녀의 눈물은 새카만 빛깔이었다. 어쩐지 그런 그녀의 처지가 불쌍하게 생각되어 회사 차원에서 아이들 교육비를 지원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애들은 크게 말썽 부리는 일 없이 잘 자랐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도로시, 남자 아이의 이름은 스티브다. 그들이 키우던 개의 이름은 맥스다.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치는 건망증 핑계를 댔다.
『아, 매그. 이제 생각납니다. 제가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이거 정말 우연이군요.』
핀치가 반색을 표현하자 매그 또한 손뼉을 쳤다.
『그러게요. 이렇게 만나기도 하네요. 잘 지냈어요? 해롤드. 그만둔다는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모두 걱정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 좋네요. 안색도 더 좋고. 건강이 나빠져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때요? 이제 좀 괜찮아진 거예요?』
『뭐,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위장취업을 나갔을 적에 핀치는 일부러 직장 동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컴퓨터나 좋아하는 괴짜 - 사람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지 않고 - 카달로그 쇼핑이나 즐기고 - 울증이 있는 병신 같은 상관에게 맨날 야단만 맞고 - 술도 못 마시는 샌님 - 매력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독신남 - 스스로 더러워진 팬티를 세탁하는 구질구질한 남성 - IT 찌질이라는 이미지는 굳건해서 친구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책상 칸막이는 높았다. 점심은 늘 혼자서 먹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목례로 인사를 하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 - 쉬우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주변 동료들의 얼굴들은 하나 둘 변해갔고, 적당한 시간을 채우면 다른 장소로 옮겨갔다. 가끔 사귐성이 좋아 같이 야구 경기를 보자며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적마다 핀치는 미스테리한 권한을 행세하여 상대의 부서를 재배치시켰다. 그는 상륙이 불가능한 독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접을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안부를 걱정하는 사람은 늘 있어왔다.
『해롤드, 건강해보여서 정말 기뻐요.』
그들의 선의는 해롤드에겐 언제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다.


「헤이, 버디. 인간은 모두 별이야.」
「별?」
「최신형 로켓을 타고 평생을 가도 절대로 닿을 수 없지. 모두가 외롭고 고독해.」
「음...」
「하지만 쓸쓸해하지 마. 너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면 된다고. 별은 모두 저곳에 있고 너는 그걸 언제나 볼 수 있어. 별들은 모두 반짝반짝 빛나면서 나는 이곳에 있어요, 잘 있어요, 당신은 어때요, 나도 사랑해요, 이러고 신호를 보내지. 그래서 저건 카시오페이아.」
「것보다 추워 죽겠어, 네이슨.」
「.......... 넌 정말 분위기 깨는데 일가견이 있구나, 해롤드.」

별이다.
닿지 않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이번만큼은 가식을 접고 환하게 웃었다.
『당신이 건강해 보여서 나도 기뻐요, 매그.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Posted by 미야

2012/10/30 09:32 2012/10/3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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