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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7)

「10년만 더 젊었으면...」
무심코 거기까지 생각하고 리스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정말로 죽어버릴 작정이었다. 술을 마셨고, 그것도 매우 심하게 마셨고, 잠을 자지 못했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심신이 망가져가는 상황에서 높은 곳에서의 투신을 고려하거나 질주하는 트럭 앞으로 몸을 던지는 계획을 세우곤 했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어 - 임종을 앞둔 노인네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꿈뻑거리며 재활용 종이박스로 세운 길거리 임시 텐트에 몸을 눕히곤 했다. 그러면서 소원을 빌었다. 죽고 싶다, 빨리 죽고 싶다, 하루에 10년씩 시간이 흐르면 일주일 뒤엔 해골만 남을 터이니 누군가 태엽을 빨리 감아 날 끝장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은 약해진 체력을 원망하며 나이를 거꾸로 먹는 방법은 어디 없나 이러고 있으니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다.

《리스 씨?》
『...타겟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대기 중입니다.』
무선 통신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핀치의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리고 망원렌즈 조작에 다시 집중했다. 오랜 시간 계속된 잠복 탓에 팔이며 다리며 안 아픈 곳이 없었으나 그와 교대를 해줄 다른 인원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집중력을 잃는 일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13시간 내내 식사도 못하고 가랑비에 쫄딱 젖어가며 상대를 미행하는 건 악마 같은 모래 폭풍을 견뎌내며 시가전에 임했던 군 복무 시절과 비교하면 그나마 양반이라고 할 수 있었고...
『엣취!』
높은 장소에서 머리를 조준하고 있는 저격병의 존재 유무보다 혹시 감기에 걸린 건 아닌가를 신경 써야 한다니, 이 얼마나 나태하고 늘어진 팔자인가.

이번 번호의 주인은 기간제로 계약한 학교 선생님이었다.
나이는 마흔 일곱으로 미혼, 결혼 경력 없음. 이름은 조나단 버터워스, 보스턴 출신이고 가족으로는 결혼해서 LA로 이주한 누이 한 명이 있다. 전공은 영문학,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했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시를 썼다. 1989년도부터 1992년에 걸쳐 쉴라 미러라는 여성 가명으로 통속소설 시리즈물을 다섯 편 썼다. 이쪽은 의외로 선전했는데 화성에서 온 미래 경찰과 섹시한 여대생 콤비의 활략을 그린 SF 액션물이라고 한다. 궁금한 마음에 리스는 핀치에게 읽어본 적 있느냐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도저도 아닌 김 빠진 콧소리만 돌아왔다. 그런 일반적 평가를 작가도 인식했는지 1992년 이후로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부모로 받은 유산이 제법 됩니다, 미스터 리스.》
양친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 거액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보험금과는 별도로 원래 양친이 중소규모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상속받은 재산 외에도 25만 달러의 신탁예금이 있습니다. 본인이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당장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치만... 허, 씀씀이가 크네요. 이번 달에도 거의 1만 달러를 인출했어요. 의무화된 CTR(현금거래보고)을 피하려고 뒷자리가 좀 빠졌지만요.》
계속되는 핀치의 설명에 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트라도 대여했답니까? 선생 주변에서 요트 같은 사치품은 못봤는데요.』
《협박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미스터 리스. 이런 식의 출금 기록이 1998년부터 여럿 됩니다. 문제는... 비정기적 패턴을 보인다는 거죠. 2002년에서 2004년까지는 단 한 번도 거액 인출을 하지 않았거든요. 반면 2008년에는 두 번 거액 출금이 있었고요.》
『협박범이 3년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핀치.』
《글쎄요. 다른 사람을 협박해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그는 농담을 농담 같게 안 하는 습성이 있다. 덕분에 리스는 웃으면 될 포인트를 놓쳐버렸다.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 거예요. 혹시 누이 클레이에게 돈을 준 건 아닌가요?』
답변은 번개처럼 빠르게 돌아왔다.
《여동생 클레이의 계좌를 보고 있는데요, 이쪽엔 눈에 띄는 거액 입금 내역이 없어요.》
『그럼 선생이 그 돈으로 거액의 쇼핑을 즐겼다는 건가요. 아니면 도박?』
《그건 리스 씨가 알아내야 할 부분으로 보입니다... 흠.》

희미하게 이어진 하품 소리에 시계를 흘깃 보았다. 자정을 넘어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핀치는 졸린 모양이었다. 평소 커피에 의지하지 않는 만큼 졸음을 이겨내는 무기는「의지력」하나밖에 없을 터, 리스는 슬슬 핀치를 쉬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가 지키고 있을 겁니다. 핀치는 가서 눈을 붙이고 오세요.』
《괜찮습니다. 아직 조사할게 남았습니다.》
리스는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덕분의 핀치의 눈은 늘 빨갛다. 지금도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닐 거다.
『무리를 하면 내일 움직이는데 지장이 생깁니다.』
《지금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보고 있습니다.》
『착하죠? 말 들어요... 핀치.』
피곤함 탓에 하품이 나오는 사정은 이쪽도 비슷했으나 리스는 고집을 부렸다.
『가서 쉬십시오.』

조나단 버터워스는 에너자이저였다. 직장인 학교에서 일찌감치 나와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저곳을 계속 방문하며 움직였다. 가게 다섯 곳을 들러 친구가 아님이 분명한 사람을 여럿 만났고, 저녁에는 술집에 가서 1시간동안 앉아 있었다. 동석한 사람은 없었고 대화를 나눈 사람도 없었다. 상당히... 이상하다. 장소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서 제각각 움직이는데 지금까지 접촉한 사람이 여자가 다섯 명, 남자가 두 명... 그들 모두 전화는 하지 않는다. 신발가게 앞에서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가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버터워스는 읽지 않고 소매춤에 메모를 넣었다. 인사도 안 하고 여자가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제 다시 버터워스는 방향을 돌려 세 블록 떨어진 곳의 4층 높이의 사무실 건물로 향했고, 정체 모를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는 두 시간 뒤에는 차를 몰고 다운타운 밖으로...
『그만 집으로 가라. 제발.』
따라다니던 리스가 체력 부족을 호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스 씨? 버터워스가 만났다던 사람들 중 전송해준 사진으로 두 명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고용주 또한 황소 고집이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두 개의 자판을 동시에 두드리고 있었다.
《앨런 싱어... 마흔 두 살. 미들 이스트 고등학교에서 심리 상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자녀가 한 명 있네요. 언젠가 같이 일했던 적이 있는 동료인 걸까요? 마이클 슬러셔... 이쪽은 제빵 기술자... 학교에 납품하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성실한 납세자로 평범한 시민입니다. 일단 앨런 싱어의 음성 사서함을 해킹해 보겠습니다만... 솔직히 그들 모두가 어떤 관계로 묶여 있는지 추측하기가 어렵군요.》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으로만 판단해선 안된다.
앨런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스치듯 지나가는 사내에게 비밀스럽게 쪽지를 건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었다. 리스는 그게 썩 좋지 않은 종류라고 직감했다.
『버터워스가 차에 올라타 이동합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리스는 서둘러 어두운 골목에서 나와 세워두었던 자동차로 뛰어갔다.
『긴 밤이 될 것 같습니다, 핀치.』
《조심하세요.》
졸음을 억지로 삼킨 핀치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Posted by 미야

2012/05/14 13:25 2012/05/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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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6)

육군 심문관으로 활동했던 경력은 형사 생활에 그다지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군에서의 경력은 제대와 동시에 끝, 경찰관으로서의 경력과는 어디까지나 별개의 것 - 뉴욕은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활개치는 전쟁터가 아니었고, 뱃지를 든 경찰관과 철모를 쓴 군인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규범에 매여 있었다. 사막을 벗어나자 그녀의 이력은 빛이 바랬다.

그렇다한들 카터는 큰 불만이 없었다. 진정한 유능함이라는 건 서류에 몇 줄로 요약되어진 글자 따위로 구체화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경험, 그리고 거기에 따른 깨달음이 더 가치 있었다. 그래서 테러리스트들을 심문하던 시절 같은 건 다 잊었다. 카터는 유능한 형사가 된 자신의 현 모습에 만족했고 살인 사건 수사관으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카터 형사님?』
따라서 상대방의 표정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짓는 건 경찰로서의 직관에 맡겼다.
『공원을 산책하기엔 참 좋군요. 날씨가 좋습니다.』
포로를 심문하던 시절의 음습한 독사 같던 자신은 접어야 할 것이다.
『제게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요.』
경계심을 잔뜩 드러낸 안경 쓴 중년 사내를 윽박지른다고 하늘에서 공짜 맥도널드 햄버거가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겠다... 몸을 빙글 돌린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식의 겉치레 인사는 생략한 채 좀 걷자는 의미의 턱짓을 하고 핀치를 지나쳐 걸어갔다.

기본적으로는 이 사람을 신용한다.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면 답변하기가 곤란하다. 다만... 피부 아래에서 본능이 속삭이는 것이다. 저 사람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임을.... 평소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건 분명하지만 - (해킹이나 신원 도용은 중죄다. 게다가 얄밉게 생긴 이 남자에겐 영유아 납치 경력도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남자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 어쩐지 그를 체포하는 건 옳지 않다고 여겨졌다.

다리가 불편한 남자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카터는 걷는 속도를 늦췄다.
일찌감치 따가워진 햇살이 여름의 무더위를 흉내냈다. 긴 소매의 옷이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날씨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다수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참을성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은 콜라 같은 청량 음료나 얼음을 넣은 커피 같은 걸 악세서리처럼 손에 붙이고 있었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조깅 중인 사람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저어.., 형사님?』
더위와 체력 부족을 호소하던 사내 또한 숨을 헐떡였다. 양복 상의 안에 청남색의 베스트까지 입고 있어서 아무래도 아스팔트의 열기를 못 견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묘한 부분에서 고집은 있어 남들처럼 상의를 벗으려 하지 않았다.
글쎄다. 그게 단순히 고집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카터는 곁눈질로 그의 등허리 부근을 살펴보았다. 문득 저 남자의 허리에 의료용 보조 기구가 채워져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일반적인 건 아니나 그런 종류의 장비를 착용한 사람들은 기구를 감추기 위해 옷을 두껍게 입는 버릇이 있다. 뚱뚱한 여자들이 헐렁한 원피스를 선호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형사님?』
남자가 거듭 카터를 불렀다.
불안해 보이는 시선과 달리 입은 웃고 있다. 억지 웃음이다.
키터는 괜히 뜸 들이는 걸 그만두었다.

『존은 괜찮나요?』
카터의 질문에 사내가 보일락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는 긁히거나 칼에 찔리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멍든 곳 없이 건강합니다. 언제나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죠. 그런데...』여기서 잠시 침을 삼켰다.『이게 지인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질문인지, 아니면 저를 보자고 한 이유인지를 질문해도 될까요?』
카터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이죠, 미스터 엠버 경고. 되고말고요. 하지만 그쪽은 이미 그 답을 알고 계시죠?』
『어... 음.』

상대방의 미소가 더욱 어색해졌다. 초등학교 어린애의 손놀림으로 가위질하여 풀로 붙인 듯한 모양새였다. 그 뻔한 가짜 웃음에 반응, 카터는 무표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카터는 거짓말의 냄새를 맡으면 인상이 험상궂게 변하곤 했다. 으르렁 소리만 내지 않을 뿐이지 사나운 핏볼과 마찬가지였다.

『뭐예요. 여전히 존은 통제 불능 상태인 건가요.』
『유감스럽게도 잠시 그런 일이 있었죠. 지금은 괜찮습니다. 존이 연방 보안관 브래드 제닝스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건 카터 형사님도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알아요. 그 망할 가정 폭력범을 암매장하는 대신 멕시코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죠. 그런데 당신 표정이 왜 그 지경인 거죠.』
『그야 형사님이 절 미스터 엠버 경고라고 불렀으니까요!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럼 대신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예전에 쓰던 가짜 이름 버뎃으로 부를까요.』
카터는 눈썹에 잔뜩 힘을 주었다. 용의자를 윽박지를 적의 버릇이었지만 카터는 자신에게 그런 버릇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어린 아들을 혼내킬 적에도 눈썹에 힘을 주곤 했다. 숙제도 하지 않고 게임을 한다거나, 허락도 없이 늦은 밤에 친구 집으로 놀러간다거나...

『그거 알아요? 로열 맨하튼 호텔에서 프로급 암살자에게 당한 시신이 나왔어요. 수사는 통제되어 언론에 보도되지 못한 채 윗선에서 가져가 버렸고요. 이유가 왜인지 아나요? 죽은 사람이 당신 동료에게 총을 쐈던 에반스 요원이었다고 하더군요.』
미스터 엠버 경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어, 카터는 그래서 속으로 부르르 떨었다.
『FBI의 도넬리 요원이 형사님께 뀌띰을 해줬군요.』
『도넬리는 존의 짓이라고 생각해요.』
『카터 형사님도 존이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알게 뭐예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아는 것이라곤 존이 CIA 요원을 죽일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것과, 그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을 하면 당신 말도 안 듣는다는 거예요.』
『하지만 저와 당신은 존이 일부러 스노우 요원이나 에반스 요원을 찾아가 총구를 겨누지 않는다는 걸 알죠. 존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요. 존은 그런 사람이 아니죠. 하지만...』
카터의 표정이 굳었다.
『도넬리 요원은 그런 걸 몰라요. 멀지 않아 그는 존을 체포할 겁니다.』

멀지 않아 그런 날이 온다. FBI는 세금을 낭비하는 바보 집단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 운명의 날에 그녀는 도넬리에게 협조하여 존을 체포해야만 한다.
『그것이 뉴욕 시민이 나에게 부여한 의무입니다.』
카터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투로 안경 쓴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존을 도울 수 없어요.』
그래서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이다.
『당신이 존을 도와야 해요.』
전력을 다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그럴 수 있겠어요?』

남자는 그렇다, 아니다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오른손으로 자신의 심장 뛰는 부위를 누르며 이번만큼은 거짓으로 점칠된 미소를 지웠다.

Posted by 미야

2012/05/13 14:50 2012/05/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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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5)

커다란 창문 밖으로 콜롬부스 공원의 한적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깅복 차림새로 산책을 하는 젊은이,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들, 마작판을 기웃거리며 훈수를 두는 머리 벗겨진 남자... 그리고 백내장으로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재주껏 장기를 두고 있는 장님의 노인까지.

자신이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핀치 또한 공원 풍경을 내려다보았을까, 하고 리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 경우 의문을 갖는다는게 우습다. 반드시 그랬을 테니까.
그렇다면 핀치는 장님 노인과 틈틈이 장기를 두던 그의 머리 정수리를 알아보았을 터.

별안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창문에서 급히 몸을 떨어뜨렸다.
리스는 자신의 눈이 핀치의 시야와 겹쳐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의 뒷통수를 사진에 담는 카메라 렌즈라도 된 그런 감각이랄까... 불쾌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낯설다... 아니, 신기한 것도 같다. 그렇다면 나는 핀치가 된 것인가, 손가락을 들어 눈가를 더듬어 만졌다. 왜냐하면 핀치와 달리 리스에게는 모양을 바로잡아야 할 안경이라는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용하던 기존의 안전가옥은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2개월치 월세를 이미 선불한 상태여서 관리인인 중국인 여자는 그 점을 매우 섭섭하게 여겼다. 영어가 서툰 그녀는「분명히 기간 남았다. 하지만 환불 어려워. 경기 나빠. 모두가 곤란해요.」라고 말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짜증을 내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갑작스런 통보에 당황한 것이리라.
관리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차피 그는 돈 문제로 곤란함을 겪지 않았고, 그의 고용주는 마르지 않는 수수께끼의 자금줄을 소지하고 있다. 한달치 월세따윈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핀치는 아예 리스가 머물렀던 건물 자체를 통째로 구입해버릴 것이다. 비록 부동산 투자라는게 그가 선호하는 재테크 방식이 아니긴 해도 말이다.

돈 문제가 해결됨을 깨닫고 긴장이 누그러진 중국인 관리인은 좁은 원룸을 두리번거렸다.
『어머. 급히 서두르는 사람. 알리지 않고 벌써 짐을 옮겼군요, 카터 씨.』
세간이 거의 없는 황량한 풍경에 그녀가 오해했다. 보이는 건「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렵니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주전자와 냄비 하나가 전부인데 아무리 혼자 사는 홀애비라도 그보단 살림이 더 많은 법이다.
리스는 모호하게 웃으며 옷걸이에 걸어둔 검은색 코트를 챙겼다. 실은 그 코트가 그가 가져가야 할 짐의 전부라는 걸 설명할 수 없었기에 막연하게 웃는게 최선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부인.』
『천만에. 당신은 좋은 세입자. 얌전하고. 부지런한 카터 씨, 다른 곳 가서도 돈 벌어. 많이 벌어. 행복하세요.』
그녀는 밑둥이 탄 주전자를 재빨리 품속에 넣곤 동양의 인사법대로 허리를 숙였다.

그렇다고 박스터 거리에 위치한 아파트로 바로 옮겨갈 수는 없었다.
리스는 평소 세 곳의 안전가옥을 번갈아 사용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다란 창문이 많이 달린, 사방이 노출된 넓은 장소에선 긴장을 풀고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하는 수 없어 그곳에서 다섯 블록 아래로 내려가 또다른 원룸을 구했다.
먼젓번과 비슷한 크기였고, 이번 관리인은 후스코와 얼굴이 똑닮은 60대 사내였다.
남자는 이름이 뭔지 묻지도 않은 상태에서 당장 손을 내밀어 한달치 월세를 요구했다.
『1,300달러. 현금만 가능하오.』
순간 옆집에서 갓난아기가 보채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물의 벽은 종이짝처럼 얇았고, 못질을 하면 반대편까지 구멍이 뚫릴 지경이었다. 잠결에 발길질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아이가 별종이라 그렇소.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지.』
방음이 엉망이라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관리인은 그렇게 투덜거렸다.
『천주님께 맹세코 밤에는 조용한 편이오. 그러니 푼돈 깎을 생각일랑 집어치우시구랴.』
작은 천사 레일라에게서 났던 분유 냄새를 떠올리며 리스는 지갑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열 세장 꺼냈다. 그는 아기들이 내는 소리를 싫어하지 않는다.

핀치는 한동안「할 말이 있어요」표정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사생활을 매우 존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거기로 이사했어요, 안 했어요 이러고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요」직구를 던질 배짱 또한 없었다. 고민하고, 눈치보고, 자책하고, 멋대로 짐작하고 - 마침내 입술을 안쪽으로 깨물며 이렇게 말했다.
『인테리어나 가구는 리스 씨 마음대로 바꾸셔도 됩니다.』
핀치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볼펜으로 향해 있었다.
『페인트 칠을 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부탁은 하지 마세요. 나는 다리가 아파요.』
그리고는 놀란 리스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재빨리 화제를 바꿔버렸다.
『어제 말씀드린 마가렛 아처 씨의 은행 거래 내역을 찾아봤습니다. 특별하게 큰 금액이 들어오거나 나간 기록은 보이지 않았어요. 금융 사기는 아닌 것 같네요. 남편과 공동 개설한 연금 저축도 큰 문제는 없어 보여...』

다 듣지 않고, 리스가 호기심에 질문했다.
『어떤 색을 추천하고 싶나요, 핀치?』
그는 아직 핀치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정렬의 빨강? 아니면 상큼한 노랑?』
발끈한 핀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욧!』

박스터 거리에 위치한 그 아파트에는 열쇠를 단단히 채워두었다.
그리고 열쇠는 CIA나 FBI, 혹은 NSA 녀석들이 찾지 못할 장소에 잘 숨겨두었다.
그곳은 존의 비밀의 장소다.
아니, 핀치와 리스, 두 사람의 비밀 장소다.
비밀을 유지하고자 리스는 지금부터 나중까지 그곳을 아예 방문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2/05/09 15:17 2012/05/0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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