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 of interest (14)

순서 엉켰음 (풀 자신 없음), 분량 적음, 끈적임 없음.


별 생각 없이「굿 나잇, 핀치」인사했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은 20시 40분이 좀 넘은 시간이었고, 따라서 표면적인 뜻만 따진다면「좋은 저녁입니다」인사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모든 말에는 숨겨진 뉘앙스가 있는 법이며, 이 경우엔 포근한 이부자리, 그리고 세트로 붙는 굿 나잇 키스라는게 있다.
아니나 다를까, 꼬장꼬장한 품성의 보스가 대놓고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본 리스는 불현듯 누가 그에게 맛없는 시금치를 억지로 먹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아니면 브로콜리. 그것도 아니면 당근...

『저는 당근을 좋아합니다, 미스터 리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라며 잔소리하던 핀치는 순간 혀를 깨물었다.
리스는 온몸을 떨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의 고용주는 당근을 좋아함. 수첩에 적어놓고 내일 모레까지 음미할 기세다. 핀치는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녹황색 야채를 저주했다.

『그보다 오늘은 옷차림이 달라 보이는군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아무거나 고르고 보았다.
뭐, 솔직히 말해 핀치는 리스가 무슨 옷을 입던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몸에 꽉 끼는 청바지를 입어도 괜찮고, 엉덩이가 흘러내리는 반바지를 입어도 괜찮다. 코를 쥐게 만드는 노숙자 차림새였어도 싫은 소리 하지 않았을 거다. 그들에게는 사전에 정해놓은 드레스 코드라는게 존재하지 않았고, 위장을 위해서라면 우주복이라도 구해 입어야 할 판국이다. 그러니 맨날 입던 검정색 양복이 아닌, 생소한 가죽 재킷을 입고 나타났다고 수선을 떨 까닭이 없다. 이건 그저 순수하게 화제 전환용 멘트일 뿐이다.
『재킷이 리스 씨에게 잘 어울립니다. 보기 좋은데요.』

리스는 여분의 의자가 많음에도 핀치의 왼편 부근에서 서성이며 흥, 콧소리를 내었다.
그는 핀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걸 즐긴다. 콧소리 또한 기분 좋을 적의 버릇이다.
『요즘은 합성 피혁도 천연 저리가라로 감쪽 같단 말예요. 아무튼 당분간은 양복을 입지 않으려고 해요.』
『왜요.』
『6개월간 카터가「수트 입은 남자」에 관심을 두고 집요하게 따라다닌 여파가 남았더군요. 무슨 도시 전설이 되어버린 듯해요. 심지어 만남 수집가처럼 제 이야기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생겼어요. 이름은 벡스턴이고,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전 권으로 구입해 서재에 진열해두고, 도넛을 먹으면서 뱃살을 걱정하는 평범한 순찰 경관입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내이고, 저에 대해「4층 높이의 건물을 장비 없이 맨손만으로 오르는 남자 - 옷차림은 양복」으로 여기고 있어요.』

핀치의 눈썹이 2층 높이로 올라갔다. 아니, 그보다 길어 2층 반 높이였다.
『재밌군요.』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습니다, 핀치. 그 순찰 경관은 어설픈 솜씨로 비번인 날에 카터를 미행까지 했어요. 호기심에 수트 입은 남자 이야기를 확인하려고 말이죠. 미행을 눈치 챈 카터는 그가 일라이어스의 지시를 받은 부패 경찰이라고 착각했고, 하마터면 그를 잡을 뻔했어요.』
핀치에게 흰머리가 늘었군, 속으로 생각하며 다음 이야기를 덧붙였다.
『최소한 오른팔을 꺾었습니다.』
이제 리스는 핀치의 오른편 부근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조명 탓일지도 모르겠다. 각도를 달리하니 거슬리던 흰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벡스턴은 오해였다고 주장했고, 카터는 자신의 물리적 행동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그래도 카터의 의심은 덜 풀렸어요.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다 눈에 띈게 도합 다섯 번이 넘는데다가 그가 목격된 장소가 벡스턴의 순찰 구역과 맞지 않았으니까요. 카터는 신중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당신은 카터의 부탁을 받고 벡스턴의 뒤를 조사한 겁니까.』
순간 리스는 묘한 기시감에 당황했다. 핀치의 저 표정... 비슷하게 닮은 걸 최근에 본 적이 있다. 그게 어디였더라... 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번개처럼 깨달았다. 가게에서 동양인 바텐더가 그에게 관심을 기울였을 적에 벡스턴이 지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소똥 개똥 말똥구리...」지분대는 욕설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술잔에 든 얼음이 달그닥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이곳은 술집이 아닌 도서관이고, 의자에 앉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해롤드 핀치다.

『당신의 보스는 접니다. 카터 형사님이 아니고요.』
핀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서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고 목소리 톤을 제대로 꾸밀 줄 알았다. 더하기는 +, 빼기는 -, 곱하기는 *, 나누기는 /, %s는  문자열의 시작 주소을 받아 null 값이 입력될 때까지 문자들을 입력받는 서식 문자... 방금 전에 말한 내용이 졸음을 부르는 종류라고 해도 그런가보다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도 감정 전부를 삭제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핀치는 재빨리 부차적 공략을 펼쳤다. 쉽게 말해 리스가「핀치, 화내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요」입을 떼기도 전에 다른 화제로 갈아탔다.

『미겔과 스롤란의 새 신분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썩을 고용주.
핀치는 무뚝뚝하게 업무 이야기만 계속했다.
『스롤란이라는 이름이 캄보디아 어로「사랑」이라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미겔이 그 어린 창부에게 한눈에 반한 까닭이 어쩌면 이름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란이라고 이름을 바꿨더니 미겔이 변심했더라 이런 줄거리는 아니었음 좋겠군요. 이쪽은 현금이 든 봉투입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약간의 여비도 같이 준비했습니다. 국경을 넘자마자 임산부가 빈털터리가 되어선 곤란하니까요. 그건 그렇고 자기 아기를 가진 여자를 죽이려고 든 포주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미스터 리스.』

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차분하게 설명하고 싶었다. 결코 변명이 아니다.
「카터가 저에게 부탁한게 아닙니다. 카터는 부탁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냥 알아서 한 거예요.」
그러나 핀치의 두 귀는 막혀 있었고 새 신분증과 현금이 든 봉투가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계획이 있습니다. 곧 처리하죠.』
하는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입 다물고 그에게서 내용물이 든 봉투를 건네받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2/05/24 11:29 2012/05/2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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