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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 : 공주님, 위험해

어느날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축 늘어진 삼겹의 뱃살이 보였습니다...

공주님, 위험해!

냉동식품 미야쨩 프레젠트


하루 8시간씩, 정해진 휴일도 없이 필립오넬 황태자와 같이 국정을 보고 있다.
그렇게 과로사의 위협에서 어푸 헤엄치고 있건만 놀랍게도 만성적 운동 부족이랍신다.
힘들어 생긴 눈 밑의 다크 서클도 못 봤느냐며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지만 곳간에 차곡차곡 쌓이는 쌀푸대 - 가 아니라 뱃살을 보면 왕실 담당의의 지적도 그리 틀린 것만도 아니다. 비록 몸은 축났어도 운동 부족인 것이다.
하긴, 매일 앉아서 정신 없이 펜대만 굴리고 있으니 얇아지는 건 손목과 발목 뿐이다. 매일 먼 거리를 이동하며 리나 일행과 야생 멧돼지 사냥에 목숨을 걸었던 옛날과 비교하면 운동량은 현저히 작다.
어디 보자, 아멜리아는 슬픈 표정으로 주판을 끌어당겼다. 악당을 응징한다며 15분간 슉슉 주먹질하면 소비되는 총 칼로리의 량은 189. 점심으로 먹은 치즈 해물 스파게티 - 585 칼로리가 약오르지롱 하며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같다. 이어지는 건 긴 한숨 뿐이다. 저울이 한쪽으로 와지끈 기울어진다.

최근 드레스가 작아졌다.
그녀를 돌보는 유스티아 부인은「공주님은 성장기니까요」라며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슬프게도 공주의 키는 그리 자라지 않았다. 옷의 길이가 짧아진 것이 아니다. 허리가 작다, 등의 버클을 채울 수 없다, 가슴이 꽉 조인다, 패티코우트 및 코르셋을 모조리 새로 장만해야 한다, 기타등등. 직설적으로 말해 드레스의 품이 작아진 것이다. 이는 곧 = 살쪘다, 라는 것.
옷장을 모조리 불사르고 싶은 욕구가 펄펄 솟는다.

국무대신과 얘기하다 말고 참고로 삼을 서류를 들쑤시던 필립오넬 전하를 향해 공주는 애원했다.
『아바마마.』
『왜 그러느냐?』
『정의의 용사 놀이를 저와 딱 30분만 같이 해주시면 안될까요.』
『아앗, 허리 통증이...;; 허억, 나이가 들어선지 갑자기 엽구리가...;;』
시간을 못 내어 정말로 미안하다는 걸 이상하게 표현하는 필립오넬 황태자였다.

어쨌든 정의의 용사 놀이는 열 한 살에 이미 졸업했다. 목에 보자기를 걸치고 날아라 호빵맨 흉내를 내는 건 12세 미만 소년, 소녀에게나 가능하다는 법이 있... 어라. 있던가 아니던가.
『뭐였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네.』
아멜리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공주는 굵게 생긴 표준 법전을 찾아 서가를 뒤졌다.
아, 저 맨 윗줄에 있다. 그럼 발돋음을 하고 팔뚝 운동 삼아 꺼내어 보자.

『법령으로 딱히 정해진 건 아니고 어린이 생활 준칙으로 38년 전에 폴 대공 전하의 명으로 포고된 적이 있습니다. 명판으로 만들어 어린이 신관 학교와 기초 능력 학습소에 보급하려던 걸 예산 낭비라며 지금의 폐하께서 적극 말리셨지요. 참고로 그때 나온 준칙 5번은《어린이는 높은 곳에서 절대로 뛰어내리면 안 됩니다》였습니다. 정의의 용사 놀이에 한창 열중하던 필립 오넬 황태자님이 발끈하여 크게 반발했던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죠. 자아, 공주님? 그러니까... 후호호, 후호~ 쮸쮸쯧.』
바빠 죽겠는데 딴 짓은 하지 말아달라면서 에른스트 보좌관이 오리 궁둥이 쫓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아멜리아를 책상 쪽으로 몰아갔다.

올해 29살의 에른스트 보뉘는 평민 출신이다. 내세울 것 없는 빵가게 아들이면서 왕궁에 시도 때도 없이 들락날락대며 추경 예산안 짜는 일에 머리를 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자타 공인 천재다. 오늘에 이르러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어린이 생활 준칙 5번이 뭔지를 여지껏 꿰고 있는 걸 봐라.「그게 정말이예요?」라고 반문할 맛도 나지 않는다.
공주는 불만에 가득차 - 내 엉덩이는 오리 궁둥이가 아니란 말이닷! - 다시 펜대를 잡았다.

『세일룬의 북서부 지방으로 가뭄이 2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의 작물 현황도 형편 없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농촌 지역으로 구제금을 신속히 풀어야 합니다.』
『지하수 개발은 어쩌죠, 에른스트. 이미 예산의 120%를 초과 사용했군요.』
『이 이상 계속하면 땅이 꺼질까 염려가 되니 농부들더러 반석에 구멍을 더 내라 권장할 수 없습니다. 비상 제한 급수 체계를 갖추고 무지 급한 곳에만 마법사를 파견하는게 차라리 낫겠습니다.』
에른스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숫자로 가득 채워진 보고서 용지 40매를 아멜리아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올려다 놓았다.
『아울러 채소의 가격이 팍팍! 올라갈 터이니 곡물 가격 안정 보조금도 적극 활용을...』
더하기 50매 용지 추가다.

공주는 더위를 느끼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맨날맨날맨날맨날...×200 숫자만 읽어대느라 머리만 아프다.

두통이 심해졌다.
『머리가 무거우니 좀 쉬었다 하죠.』
『그럴까요. 그럼 오후의 차를 지금 마시도록 하지요. 유스티아 부인을 부르겠습니다.』
아멜리아의 표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기에 에른스트는 그 말에 쉽게 동의했다.
하지만 공주는 차를 마시는 것보단 맑은 공기를 들이 마시고 싶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각설탕을 두 개 넣은 프림 커피는 205Kcal.
주판알을 튕기다 재차 한숨 쉬었다.

근위병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허락된 쉬는 시간은 앞으로 30분.
몸이 찌푸드하다.
가볍게 몸 풀기 체조라도...
으쌰~ 하고 옆구리 굽히기 동작을 하던 공주는 갑자기 충동질되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정도로 살이 빠지겠어? 빠진다고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자기 기만이지.
아멜리아는 무엇에 씐 사람인양 복도를 쿵쿵 달리기 시작했다.
30분 빠르게 달리기로 252칼로리를 소비할 수 있다. 그러니 달리고 보자.

『아앗, 공주마마?! 왜 갑자기?!』
『그렇군!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공주님께서 악당을 쫓고 계신다! 무얼 하고 있는 거냐! 달려라!』
남의 이목을 깜빡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수십 명의 근위병들이 창을 들고 일제히 따라 달려나오고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다.
『공주님이 달리고 계신다! 큰일이다. 큰일인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어 공주가 달린다는 건 나라의 위기를 의미한다.
식은땀이 나려 한다. 갑자기 멈추어 서서「별 거 아닙니다. 나무 그림자를 보고 착각했어요」라며 웃는다고 해결이 될랑가. 에잇, 모르겠다. 공주는 정말로 악당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뛰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다리가 꼬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발목이 사큰거리든 말든 죽어라 달렸다.

『아멜리아씨. 여기 계셨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제로스가 모처럼 좋은 걸 가지고 오랜만에...』
복도를 돌자 익숙한 단발머리가 상냥히 웃고 있었다. 손에는 오랜만에 훔쳐낸 귀한 전리품 하나를 들고 있는 채였다. 평소 눈 감고 다니는 신관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뭔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속으로 죄송합니다, 라고 외쳤다. 물론 겉으로도 외쳤다.
『미안하지만 제로스씨! 모두를 위하여 잠시만 악당이 되어주세요!』
『예?』
『왕실 근위병들도 같이 덤비자! 세일룬 만세!』
『우와아! 아멜리아 공주님이 침입자를 찾아냈다!』
『여기는 세일룬 궁정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시민 여러분. 지금부터 아멜리아 공주님께서 수수께끼의 침입자를 평화주의자 크러쉬 기술로 무찌르는 멋진 장면을 생중계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 말을 마치자마자~ 아앗~ 멋지게 날았습니다~!! 끝내주는 펀치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은 제로스는 화가 단단히 나서 제르가디스의「엄마랑 아기랑, 특선 이유식 100선」책에서 꺼내가지고 온 말린 네잎 클로버를 도로 자기 가방에 넣어버렸다.
인사도 없이 사라진 걸 보면 뿔딱지가 제법 났던 것 같다.

『궁정에서 뛰면 안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난리가 났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달려온 유스티아 부인 역시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마마님이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공주는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식사량을 줄이십시오!』

말이 쉽지.
부담스런 스테이크를 절반 정도 남겼더니 요리장이「그렇게 맛 없는 요리를 만든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면서 식칼로 할복이라도 할 태세를 보였다. 제자들이 흥분한 그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자 이번엔 왕궁이 무너져라 울었다.
여기까지도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몰라 민망할 지경인데 다음날 아침 왕궁으로 들어온 에른스트는 얼마나 배가 부르면 음식을 남기는 거냐며 겁 대가리 없이 눈을 흘겼다.
『쌀 한 톨에 깃든 신이 모두 몇 분인지 알고는 계십니까! 음식을 남기다니. 그런 천벌 받을.』
하는 수 없이 점심은 꾸역꾸역 모두 먹어 치웠다.
요리장과 에른스트는 그제야 만족스런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나 좀 도와줘~!!
툭 튀어나온 삼겹의 뱃살을 내려다보던 아멜리아는 자신이 일생일대 대 위기에 빠졌음을 실감했다.

Posted by 미야

2006/08/01 15:44 2006/08/0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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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뮤 2006/08/02 21:50 # M/D Reply Permalink

    이,,이런,,, 아멜리아, 리나와 헤어진 후로 그런 고생을!!

  2. Yuri 2006/08/03 20:57 # M/D Reply Permalink

    만세 ! 저는 시즌 2가 제일 좋답니다!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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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10

서관에 알림글을 올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분들이 다수인 듯하여.
칸자카 하지메씨의 원작 설정과 다릅니다. 여기서 [시즌]으로 나누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팬픽션 작업에서의 보조 개념입니다. 슬레이어즈 1기, 넥스트, 트라이를 생각하시고「그건가?」라고 짐작하시면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1기 : 신마전쟁으로부터 시작해서 리나 인버스가 가우리를 만나기 바로 직전까지의 시간대
2기 : 리나 인버스 대 모험기 시절
3기 :《죄는 반복된다》시기
4기 : 리나 인버스 사후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누군지도 모를 인간들이 우굴거리는 글이 싫으신 분은 모쪼록 패스하십시오.


낮잠을 자는데 꿈에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과일을 깎으면 딱일 것 같은 짧은 날의 칼을 들고 벽장에서 나타났고, 남자는 불쏘시개를 쥐고 식탁 아래서 벌떡 일어섰다.
어차피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자들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기왕 나타날 바엔 절세 미녀가 발가벗고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하고 내심 바랬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꿈이다. 그래서 잠자코 내버려 두었다.

세계는 칙칙한 회색이었고, 소리는 깊은 우물 속에서 들려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왕왕 울렸다. 묵직한 돌이 눈꺼풀에 씌워져 방해가 되었다. 그렇고 말고. 눈이 이상하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 본 손바닥이 곰 발바닥에 악어 이빨을 촘촘히 달아놓은 형상이다. 손바닥 가운데를 세게 누르자 표범의 어금니처럼 생긴 손톱이 스프링 장치가 달린 무기처럼 튕겨 나왔다.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의 자신의 것이 아닌 손이었다.
불쾌감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슬슬 불안해지려 했다.
남자는 속으로 반복하여 되뇌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왜 꿈에서 깨어나질 못하는 걸까.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저 신사답게 모자를 고쳐 썼을 뿐이다. 그런데 불쏘시개와 함께 식탁 아래서부터 떠오른 청년은 눈가가 벌개져선 안타까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등으로 얼굴을 북북 문질러대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10년도 전에 유행이 지난 모자를 여태껏 쓰고 있는 내가 불쌍하냐.
입을 열어「가난은 죄가 아니니 동정은 그만둬」라고 말하려 했다.
《파르픗픗...》
망할 꿈이었다. 혀가 돌덩이처럼 굳어 이상한 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꼭 얼간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노력해서 혀를 ㄴ자로 굽혀 얼~ 소리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혀를 베어가기라도 했는지 혀 굴리는 소리는커녕 어와 아 발음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소가 오랜 여물질 끝에 커억 하고 트림하는 소리밖엔 나오지 않았다.
창피해서 트림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고 싶었다. 하여 더욱 힘 주어 끄억거렸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그것이 요란한 방구 소리였다고 해도 별 상관 없는 눈치였다. 자기네들끼리 심각해져선 끄억 소리엔 반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선 말이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방법은요.』
『없다.』
그렇게 대답하고 꿈속의 여자는 차분히 몸을 돌려 계단쪽으로 향했다. 동작으로 보아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걸 불쏘시개 청년이 황급히 붙잡고 말렸다.
『잠깐만요. 그냥 떠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어쩌고요!』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남은 여생을 포기한 채 평생 저 반인반마와 같이 살아줄테냐? 그럴 자신 없잖아. 아니면 기적을 만들어 사람으로 돌아가게 만들거냐? 네가 신이야? 아니잖아. 할 수도 없으면서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어? 웃기지 마.』
『또 모르잖아요. 어딘가에 방법이...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만 억지 부려. 방법 같은 건 없다니까.』
열려진 문 저편으로부터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등지고 선 여자의 머리카락 속으로 한줄기 빛이 통과했다. 피부가 빨갛게 핏빛을 띄고 반짝반짝 빛났다.

유나가 알기로는 반인반마 분리법이 성공한 사례는 지금껏 딱 한 번밖에 없다.「되낳기(*)」라는 고대의 방법이다. 모체로부터 인간의 부분만을 태아의 모습으로 만들어 체내 밖으로 출산한다. 이를 돌려 말하면 자궁을 가지고 있는「여성」에게만 그 시술이 가능하다. 누군지도 모를「되낳기」시술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문제 이전에 다리 위로 붙어 있는 고환부터 손봐야 한다. 치마만 두르면 성별이 바뀐다면야 도전해볼만도 하지만. 그럴 일이 절대로 없다는 점에서 유나는 일찌감치 손을 들었다.
지금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고민하는 건 바보 짓이다. 그건 시간 낭비다. 반대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고민하는게 훨씬 낫다.
유나는 커다란 장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에 둘러맸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훨씬 고약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이 데몬으로 변해갈지 모른다. 머뭇거릴 짬은 없다.

순간 데몬으로 변한 남자가 축농증 심한 킁킁 소리를 냈다.
만약 그가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저 콧소리는 어떠한 단어였을까 하고 유나는 생각해봤다.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자 한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것은 어쩐지 감기 걸린 강아지의 재채기 소리를 닮아 있었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이 답답하다. 구강 구조가 극적으로 변한데다 혀까지 움직이지 않으니 모음이고 자음으로 발음은 죄다 불가능. 그가 다시 부지런히 킁킁 코를 훌쩍였다.

『연필을 쥐어주면...』
그라바스가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저 커다란 손에 연필을?』
『아아, 무리겠죠.』
『무리고 말고. 쇠 몽둥이를 쥐어도 즉석에서 박살날 터인데 무슨 재주로 연필을 잡나.』
핀잔만 들었다. 그라바스는 필답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한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집밖으로 도로 나왔다. 결국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엔 없었다. 그래서 걷는 걸음이 곱절은 빨라졌다.

『대단한 마법사의 짓이었다고 해도 주민들 전부를 데몬으로 바꾸진 못했을 겁니다.』
『맞는 말씀.』
하급 요마를 조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왕실과 계약한 톱 클래스의 마법사도 수십 마리의 데몬을 조종하려면 진이 다 빠진다고 했다. 입장이 반전되어 거꾸로 불러낸 데몬에게 공격당해 죽을 수도 있다. 쥐나 고양이를 데몬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인쇄소에서 광고물 찍어내듯 대량으로 양산했다간「어서 나를 잡수시지요」사태로 악화될 여지가 크다. 실제로 소환된 데몬이 주인을 죽이고 달아나는 일은 대단히 잦다. 데몬에겐 의리나 충성 같은 개념이 없다. 힘으로 눌리면 얌전하게 있지만 기회만 왔다 싶으면 순식간에 뒤돌아 이를 드러내고 마법사를 죽인다.
구제불능의 낙제 점수를 받은 적이 있는 마법사라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
자살을 결심한게 아닌 이상 수 백명을 한꺼번에 데몬으로 바꾸어 바깥에 풀어놓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다수의 사람들이 어딘가에 갇혀 있겠군요.』
『...』
그라바스의 의견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유나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것이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걸까. 그라바스는 의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 저기요? 바람의 방향에 무슨...』
『아아, 이건 그냥 버릇이다.』
그녀는 슬쩍 멎적은 얼굴을 했다.
『북풍이 부는 건 무섭거든.』
『북풍?』
『별 거 아닌, 개인적인 징크스 같은 거랄까.』
거기까지 말하고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남에게 설명을 하고 싶은 눈치는 아니다. 자신의 약점 같은 것이라 대놓고 떠벌리고 싶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많은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감시하려면 어디가 좋을 것 같아?』
그라바스는 머뭇거림 없이 즉답했다.
『학교 운동장이오.』
『우와. 그거 엄청 특이하군. 너희 나라에선 곧잘 그렇게 하나?』
『그런 건 아니고요. 일단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아둘 수 있는 장소는 그리 흔한게 아니잖아요. 가둔다, 감시한다 그러면「감옥」을 떠올리는게 먼저긴 해도 이런 규모의 마을 유치장 안엔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긴 힘들죠.』
『일리는 있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테라에는 버젓하게 생긴 초등학교 운동장이라는게 없다. 사막 마을에서 자라는 어린 아이들의 숫자는 땡볕에서 피어난 에델바이스만큼이나 희귀한 법이니까. 좋은 환경을 찾아 세 번이나 이사를 감행한 맹자의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낳은 사막의 여자들은 젖먹이를 데리고 곧바로 초원 지대로 빠져나간다. 연약한 아기들에게 사막의 열기와 데몬의 입냄새는 살인 무기와도 같은 법이다.
따라서 학교 운동장은 빼고... 유나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을 이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집합시킬 수 있을 것. 훤히 뚫린 광장은 안되고... 벽과 지붕이 있을 것. 출구를 통제할 수 있고, 그 출입문에 열쇠가 있을 것... 아!』
이거다 하고 생각나는 곳이 딱 하나 있다.
돌아보니 그라바스도 같은 걸 떠올린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달리고 있다.

사막 사람들은 성당에서 두손모아 신에게 기도할만큼 물러터지지 않았다. 물이 급해지면 기우제를 지내는 대신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우물부터 파고 본다. 신심은 바닥을 때려 지나가는 열 여섯 소녀를 강간하고도 천벌을 받을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강간범을 벌 주는 건 정의의 여신이 아니라 피해자 소녀의 부모다. 분노한 아버지가 돌을 들어 강간범의 머리를 친다. 여기서 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저 지고한 하늘의 뜻은 사막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럴지언정 사막 사람들에게도 성당은 필요하다. 머리가 깨진 강간범의 시체를 묻으려면 영원의 향불을 흔들어줄 사제가 있어야 한다. 죽음의 영역에 속한 자들을 검은 안식의 대지로 인도하기 위한 절차도 밟아주고, 행여나 좀비가 되어 돌아다니는 일 없게끔 시체 단속도 해주고.
그래서 믿음은 없어도 성당은 꼭 짓고 본다.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장소를 빌려 토론도 할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단 훨 낫다. 마침 이형제회(異形際會) 사제단(*)에서 포교를 목적으로 보란 듯이 돈까지 쥐어주니 님도 보고 뽕도 딴다.

일행은 이형제회의 상징인 심장을 꿰뚫은 세 개의 검을 찾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끔찍한 고난을 상징하는 그 문양이 새겨진 돔 지붕이 분명 마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밥사발 모양의 둥근 지붕을 얹는 건 엄격히 따져 대륙 남동부 스타일로 사막에선 어울리지 않는다. 흘깃 보기만 해도 덥다. 그러나 그게 또 묘미다. 청동 덮개를 단단히 씌워 그 안은 극강 찜통이 되었을지언정, 신의 날개는 더위와는 상관 없이 지붕에 내려 앉을 터이니 이거야말로 이형제회의 진정한 상징이다. 그까짓 더위가 다 뭐라냐. 사제는 웃통을 벗어던지며, 사각이는 소금 투성이의 몸으로「쉬피드의 영광이여, 이땅에 얼른 내리소서」하고 열심히 경을 외운다.

『저쪽이예요!』
큰 길을 따라 15분 가량을 달리자 사람의 손을 탄 키 작은 나무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더하기 풍선을 닮은 둥그런 돔.
슬라브로 편편한 지붕을 얹은 술집은 간판을 빼면 평범한 가정집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유나는 고집을 부려가며 돔 지붕을 얹은 건축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지붕은 훌륭한 표지판이 되어 그들의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인도했다. 전광판에 네온싸인으로 번쩍번쩍 화살표를 달아놓은 것 같다. 왼쪽으로 돌아 다시 직진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고 또 뛰었다.
흘깃 뒤돌아보니 모자를 쓴 데몬 아저씨가 어적대며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
바람에 날아가랴 한손으로 모자를 누른 채 구두도 신지 않은 발로 모래를 박찼다.
그가 도움을 줄 것인지, 아니면 방해가 될 것인지는 당장 판단이 쉽지 않았다.

유나는 잠시 생각했다가 손가락 셋을 높게 들었다.
『각자 한 바퀴 조심해서 돌아본다.』
그라바스가 제일 먼저 반응,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오른쪽으로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데몬은「나도?」라는 식으로 잠시 움찔거렸다가 눈치껏 그라바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유나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길을 따라 빠르게 걷다 넙죽 엎드렸다.
사막은 이래서 짜증난다. 널린게 고운 모래이다보니 몸을 숨기기에 도움이 되어줄 은폐물이 별로 없다. 높은 담벼락이 있기를 하나, 심어진 나무가 크기를 하나, 바위가 있나.
몸에 잔뜩 묻은 누런 흙먼지가 그나마 시야를 교란해주고 있을 뿐이다.
흙으로 목욕하는 참새인양 그래서 잔등으로 모래를 일부러 끼얹었다.
그 자세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 관찰해봤다.

높이가 제법 되는 건물이었다. 네모난 장식 기둥 둘이 입구 양쪽으로 세워져 든실한 느낌을 전달했다. 유리로 끼운 창문이 없어 튼튼한 요새 같다. 그나마 달린 창문엔 두꺼운 판자 덧문이 내려져 있다. 환기를 위한 구멍은 한참 위로 뚫려져 있다. 그것도 어린애 손목 굵기라서 그다지 도움이 되어줄 것 같진 않다.
지붕 위로는 수상한 기척은 없는 듯하고.
시험삼아 작은 돌을 집어 아무렇게나 훌쩍 던져봤다.
모서리에 숨어 있던 그라바스가 이에 반응, 재빨리 화살을 쏘는 동작을 취하면서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퓽- 하고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날아가면서 조약돌이 공중에서 퍽 하고 부셔졌다.

유나는 얼른 손을 들었다.
『워워, 나야. 공격하지 마.』
『미안합니다, 유나. 좀 긴장해서...』
『두 번 긴장했다간 사람 잡겠군. 그나저나 한 바퀴 빙 돌아보니 상황이 어떤 것 같나?』
『글세요... 일단은 조용합니다만.』
『...일단은?』
『문제가 하나 있어요. 입구를 마법으로 봉쇄해놔서 아무리 지랄해도 열 수가 없게 생겼어요.』
라고 말하면서 그라바스는 턱을 움직여 성당 입구를 가리켰다.


* 되낳기 : 「그 여자의 왼쪽 눈동자」편 참조... 라고 해도 서관에 아직 미등록. 우와악!
모태를 마물로, 인간을 태아로 해서 출산과 함께 반인반마를 분리시킨다. 출산시 모태는 반드시 죽으며, 유감스럽게도 완벽 분리는 되지 않는 듯하다. 모태를 인간인 여성으로 하는 건 인간의 자궁이 마물을 품기엔 너무 약해서 불가능하다고 한다. 가장 궁금한 점은 되낳기에「씨앗」이 필요한 건가 아닌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일단은 처녀생식일 거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 이형제회 : 결계 밖에서 생성된 독특한 종교 집단. 쉬피드가 죽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신의 대리인 역할을 자처한다. 때문에 대단히 엄격하며, 까다롭고, 도덕 우월주의적이다. 민간인들에게까진 그 엄격함을 강요하지 않지만 사제들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품격을 잃으면 결코 안 된다.
지상으로 살아 있는 신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신앙의 목적으로 대륙 남쪽에선 왕족보다 이형제회 사제의 지위가 더 높은 경우가 많다.
항마전쟁 직후, 거룩한 숙녀라고 불리우는 불사자가 카타트 산맥에서부터 남하하여 이형제회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장에 세 개의 칼이 교차하여 찔러박힌 그림이 그 상징이다. 의미는 고난.

Posted by 미야

2006/07/17 18:57 2006/07/17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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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9

싸움엔 이골이 난 사람 둘이서 데몬 한 마리를 두고 긴장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좁은 실내 공간 - 그것도 땅을 파고 만든 집구석에서의 싸움은 전투의 프로라고 해도 질겁하기 마련이다. 적이 입구를 가로막으면 당장 포위된다. 그게 싫어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처럼 지붕을 뚫어야 지상으로 달아날 수 있는 상황에선 도주 이전에 토목 공사가 먼저다.
여기서 입장을 반전시키겠다며 맞장 뜨는 사태에 이르면 더 고약해진다.「모두 덤벼!」라고 외치며 무기를 활짝 들었는데 실수로 팔꿈치로 벽기둥을 치고 만다. 아파서 눈물이 쏙 우러나오는 가운데 이번엔 머리 위로 화분이 미끌어진다. 짜증에 겨워 미친 사람처럼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보니 좁은 복도에 사람 셋이서 이도 저도 못한 채 꽉 껴있다... 뭐, 대충 그런 것이다.

사방이 훤하게 뚫린 들판에서 싸우는 법과, 방구석에서 지지고 볶는 법은 서로 같지 않다. 맘대로 활개치고 움직였다간 낭패를 당하기 딱이다. 유나는 신중하게 구석으로 몸을 감추고는 그라바스에게 손짓으로 수신호했다.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는 건「몸을 깔아라」라는 의미.
V자를 그린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가리키는 건「적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라」라는 뜻.
코를 만지며 이를 드러내는 건「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이쪽의 신호를 기다려」라는 얘기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용병들이나 알아 먹는 수신호를 그라바스가 정확히 이해했을련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키는대로 얌전히 허리를 굽히고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갔으니 다행이다. 벽장 그늘 속으로 소리 없이 잠수하던 유나는 그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딴 걸 무기로 써먹겠다며 불쏘시개를 쥐었을 적엔 정말 대책 없었다만, 납작 엎드린 자세로 유나 쪽을 쳐다보며 입 모양만으로「알았음!」이라 대답하는 걸 봤을 적엔 착한 아이라고 마음 껏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내가 한다. 넌 나서지 마」
입만 뻥긋거려 재차 뜻을 전달한 뒤, 허리춤에서 사냥용 손톱 검을 꺼내들었다.
괴물의 멱을 따기엔 우습다 싶도록 날이 짧다. 모르는 바 아니다. 이 나이프는 어디까지나 토끼나 사슴을 잡기 위한 무기일 뿐이다. 겉보기에도 가늘게 몸매가 빠진 주방용 식칼처럼 생겼다.
하지만 이런 집구석에서 트롤을 베는 장검을 빼들고 신나게 휘둘렀다간 필연적으로 대들보가 꺼지게 되어 있다. 무너지는 천장에 깔리고 싶다면야 맘대로 활개치고 돌아다녀도 괜찮겠지만...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자기 또한 깔려 죽은 삼손의 복수극은 어딘지 처량맞다. 그래서 유나는 일찌감치 장검을 쓰는 건 포기하고 오른손에 나이프만 쥐었다.

쉬이이- 하고 데몬이 긴 숨을 토해냈다. 개구리가 일주일은 썩은 듯한 악취에 머리가 다 아파왔다.
「......」
초조해 하는 그라바스가 코를 틀어 쥔 모습으로 유나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손등으로 턱을 탁 하고 치는 동작으로「계속 기절해 있어」라고 명령했다.

《츳, 크르르... 츳》
일단 냄새를 맡는 듯했다. 코를 킁킁대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유나는 데몬의 코가 막혔거나, 내지는 별 쓸모 없는 감각 기관이길 빌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놈들은 원래 냄새를 잘 맡는다. 다른 곳을 잠시 기웃거리다가 그들이 몸을 숨긴 주방 쪽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걸 보아 아마도 사람의 냄새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라바스는 들킬새라 몸을 더욱 낮췄다. 유나는 바짝 긴장한 채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데몬 특유의 무겁게 다리를 끄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해도 유나는 단검을 쥔 상태에서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회는 단 한 번. 재빨리 급소를 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돌로 만든 석상인양 가만히 있으면서 수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는게 좋았다.

《크, 쉬이이... 픗》
어둠 속에서 데몬은 무척이나 천천히 움직였다. 밝은 곳에서 금방 어두운 곳으로 들어온 탓인지 눈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손을 엉거주춤 내밀었다. 한 3, 4초간 그렇게 움직이지 않다가 팔을 휘저었다. 가까스로 물체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건지 툭툭 하고 찬장을 둘러봤다. 서툴게 더듬대는 손길에 소금통이 쓰러졌다. 푸쉿- 하는 콧김 뿜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그런데... 어랍쇼. 찬장?
숨어 있을 사람을 찾는다면서 찬장을 뒤진다라. 어쩐지 데몬 답지 않은 행동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데몬은 뚜껑 달린 냄비를 꺼내 품에 손에 쥐려고 했다. 우악스럽게 생긴 괴물의 손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동작이다. 우동 면발을 끓이면 딱일 것 같은 냄비는 애시당초 사람 손에 맞게끔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괴물이 만지자 연약한 냄비는 순식간에 움푹 찌그러졌다.
《푸쉬이-》
저 소리가 한숨으로 들린 건 단순한 착각만은 아닐 터.
누가 봐도 고개를 푹 숙인 것이 분명한 데몬은 망가뜨린 냄비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채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 아주 한참동안 데몬의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화를 내는 것도 같고, 당황한 것도 같다.
마침내 등을 돌린 괴물은 식탁 위로 찌그러진 냄비를 내려놓았다. 식탁 밑에 숨은 그라바스는 그 덕분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식탁 다리가 와들거리자 질겁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데몬은 이번엔 썩은 스프가 든 접시를 집어 한숨과 함께 개수대로 가져갔다. 눈치로 보아 설거지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 딴에는 최대한 살짝 내려놓는다고 했을 것이다. 그치만 말 그대로 더러운 접시는 힘껏 내동댕이쳐진 셈이었고, 어쩔 수 없이 개수대 안에서 와장창 소리를 내며 쪼개어졌다.

『어이.』
유나는 오른손에 단검을 쥔 채로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하지만 공격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칼날이 보이지 않게끔 뒤로 가게 고쳐 쥔 자세부터가 달랐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
데몬은 유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특이한 녀석이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대신, 푸쉿- 하고 숨을 쉬었다. 그게 또 매우 피곤해 하는 숨 소리라서 유나는 순간적으로 데몬에게 의자를 권할 뻔했다.
누가 알면 우스워 죽는다고 했다. 데몬에게 의자라니.

『기껏해야 천만분의 일의 확률일 터인데... 데몬으로 변한 사람 중 사람이었을 적의 인격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신, 사람이었을 때의 기억이 돌아온 거지? 그래서 무리에서 도망쳐 예전에 살던 집으로 온 거야.』
혼란스러웠을 거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되지 않고.
그 와중에 떠오른 건 밖으로 나오면서 문을 잠구지 않았다는 사소한 기억이다. 하여 황급히 집으로 달려온다.

둘러보니 집구석은 난장판.
여전히 머리는 멍하다. 그래도 일단 어질러진 집안 정리부터 하자며 냄비와 접시를 쥐고 본다. 변해버린 손으로는 접시를 닦는다는 식의 섬세한 동작은 무리라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만졌더니 부셔졌다 -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괴물에게도 표정은 있었다. 어째서 - 라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당황한 사람이 곧잘 그렇게 하듯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예전에는 머리카락이었을 분명한 털을 당나귀처럼 생긴 뾰족한 귀 뒤로 넘기면서 매만졌다. 그것이 대단히 인간적인 동작이어서 유나는 마음이 아팠다.
따져 묻는 듯한 시선을 피해 세 부분으로 조각난 깨어진 접시로 눈을 돌렸다.
『꿈이라 믿고 싶으면 믿어. 어차피 운 좋게 기억은 돌아왔어도 육체는 옛날의 모습으로 다신 못 돌아가. 사술에 걸려 한 번 요마가 되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의 당신은... 괴물이다.』
순간 데몬이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아가 화가 난 사람 다수가 그러하듯,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려고 했다.
유나는 고개를 여전히 옆으로 돌린 자세 그대로에서 재빨리 손톱 검을 위로 차 올렸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반응한다. 번개 같은 속도였다. 시커먼 손톱에 닿은 칼날이 날카로운 쨍 소리를 냈다.
『그만둬. 실수로라도 날 잡고 흔들었다간 내 몸이 둘로 쪼개질 거야.』
쪼개진다는 말에 데몬은 펄쩍 뛰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람이라고요?!』
식탁 아래서 그라바스가 머리를 번쩍 세웠다.
덕분에 꽤나 커다란 쿵, 소리가 울렸고 가냘픈 신음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과거형으로 사람이었다 - 고 해야지, 이 경우는. 그나저나 머리는 괜찮나.』
『제 머리가 문젭니까. 저 데몬이 사람이었다니, 말도 안됩니다!』
치 떨리는 아픔보다 놀람이 더 컸다. 볼록 튀어나온 혹을 감싼 채 소리를 지르는데 무릎이 휘둘거릴 정도로 아파하는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고 하기엔 그 울림이 제법 컸다.

『그럴 리 없습니다. 하급 요마의 혼을 사람에게 씌워 데몬으로 만드는 주술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법이 대수냐. 법과 맹세, 그리고 물 떠먹는 바가지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예, 깨지기 위해 존재하지요.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이런 짓을 저지를 실력의 마법사는 현재 대륙 안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라바스는 말꼬리를 흐려가며 입에 침을 발랐다.
사람을 괴물이나 요정, 타 생명체와 합성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서와 주술서는 지난 수 십년간 급격히 소실되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끊임 없이 기록을 찾아 불사른 탓이다.
보존되는 숫자보다 망가져가는 속도가 더 빠르면 당연히 기술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꿈도 못 꾼다. 한 번 배웠던 것도 헷갈리는 판국에 옛날에 읽었던 책은 어디로 숨었는지 도통 찾을 길이 없다. 가슴이 답답해져 버려진 유적의 우물까지 파보지만 이미 과거의 영광은 흔적조차 안 남았다. 그라바스가 잘 모르지 않는 그「누군가」씨가 개인적 복수심을 담아 오랫동안 염원했던 바 그대로, 하이 클래스의 인체 합성 기술이 무너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불가능? 그럼 우리 눈앞에 서있는 이 존재는 뭐란 말이냐. 사기냐? 환상이냐? 아님 인형의 탈을 쓴 거냐.』
유나는 검을 다시 옆구리에 차면서 코웃음을 쳤다.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그라바스의 안색은 보기 좋게 헬쓱해졌다.
『마, 맙소사. 그럼 우리가 마을 밖에서 마주쳤던...』
석연찮던 마물의 그 피 색깔이, 짐짐하던 촉감이 떠올랐다. 토기가 올라오려 했다. 그라바스는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단단하고 무거운 무엇인가가 뒷통수를 확 잡아챘다 다시 패대기질을 쳤다.
그것들을. 그들을.
자르고, 찌르고, 밟고, 쓰러뜨렸다.

『내, 내가 사람을 죽였단 말예요?!』
『사람이었던 걸 - 이라고 고쳐 말해라.』
무덤덤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유나는 계속해서 쉭쉭 소리를 내는 데몬을 향해 발자국 도장이 선명하게 남은 모자를 내밀었다.

나흘 전만 해도 자신의 것이었을 모자를 받아쥔 괴물은 한숨 섞인 콧김을 길게 내뿜곤 머리에 점 찍는다는 기분으로 모자를 올려다 썼다. 그것이 대형 판다 곰이 어린애의 생일 모자를 빼앗아 쓴 형상인지라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입가에 달린 솜털 하나만 살짝 흔들고 사라져 그라바스는 어느새 울상짓는 예의 표정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괴물이 모자 챙을 정성껏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고 그는 정말로 울려고 했다.

Posted by 미야

2006/07/10 13:33 2006/07/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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