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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6

해골 무늬 밸트와 마법사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 라고 굳은 어조로 일장 연설을 막 시작하려던 찰나, 유나는 길이 3척이 넘는 장검을 빼들고 45° 각도로 베어 올렸다.
100m 트랙을 40초에 뛰는 굼벵이가 있는가 하면, 단 10초만에 돌파하는 육상 선수 칼 루이스도 있는 법이다. 아직도 능선 너머에서 어슬렁거리는게 다수였지만 재빠르게 움직이는 성질 급한 몬스터들 가운데 일부는 벌써 코 앞으로 닥쳐 누런 침을 흘려대고 있었다.

『타핫!』
무게라는 걸 전혀 모르는 동작이었다. 얼핏 봐선 마분지 뼈대에 은박지만 살짝 바른 연극 무대용 소품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은박지라면 렛셔 데몬의 가슴이 세로로 갈라지진 않을 터, 그것도 절단면이 흐트러짐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깨끗하다.
여자는 피를 빼지 않은 신선한 돼지의 창자처럼 생긴 것을 밟고 재차 검날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울음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마물이 긴 손톱을 휘둘러댔다. 그걸 살짝 피하면서 이번엔 검 손잡이를 아래로 하여 내리찍어 렛셔 데몬의 무릎을 두동강이 냈다.

돌아다 보니 이부는 미친 사람처럼 티카티카 새의 궁둥이로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멀뚱히 남은 청년이「해골 밸트...」라고 말을 흐렸다.
태워서 돌려보내기엔 이미 늦었다. 유나는 치잇 소리를 내고 검을 고쳐 잡았다.

『할 말은 많지만 상황이 이러니 긴 이야긴 나중에 하자. 지금은 이것만 기억해라. 넌 열심히 네 앞가림만 해라. 날 돕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버려.』
『엄호하겠습니다.』
순간 부웅- 하고 은백색의 검날이 그라바스의 머리통 바로 위를 날았다.
자신의 머리카락 몇 올이 그대로 잘려나가는 걸 보고 그라바스는 서둘러 외쳤다.
『그렇게 하고 말고요! 암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무서운 여자다. 검을 쥐는 방식도 그렇지만 그 냉정함이라는 것을 맨 정신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다. 머리를 순식간에 도려내고 움직임이 멎은 데몬을 발로 찬다. 한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가로로 무기를 휘둘러 흉부를 망가뜨리고, 측면으로 돌아 옆구리로 칼집을 넣어 치명상을 입힌다. 계산된 동작이자 동시에 무의식에 가까운 현란한 칼춤이었다.
자신 이외엔 아군이 없다. 모두가 적이다. 따라서 몰살시키려 하려 함에 머뭇거림이 없다. 잘려진 몬스터의 머리가 땅에 수북히 쌓여간다. 뼈를 쪼개고, 살을 가르고, 힘줄을 절단낸다. 커다란 검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날렵하게 뛴다. 닿는 족족 해체된다. 그러고도 만족이 되지 않아 읏샤, 하고 도끼질을 하여 찍어 넘긴다. 소의 염통 같은 것이 얼굴을 향해 쏟아져도 표정엔 변화 한 점 없다. 오물을 닦아낼 생각도 않고 손잡이를 차올려 괴물의 턱을 박살냈다.

흐르는 피에 여자의 발이 살짝 미끌어졌다. 그라바스는 놀라 이름을 불렀다.
『유나! 조심해요!』
『계속 떠들면 입을 꿰매버린다. 집중할 수 없잖아.』
돌아오는 대답이 엄청 퉁명스럽다.
자세를 가다듬고 심호흡, 뜨거운 숨을 삼키고는 곧장 돌격하여 세 마리의 데몬을 더 쓰러뜨렸다.

『숫자가 너무 많아.』
날린 바람의 화살이 다섯 발이다. 여섯 발째를 준비하다 말고 그라바스는 도리질했다.
이제 화살은 안 된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폭발하는 데몬의 찌꺼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다. 덕분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짜증을 내며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순간 괴성과 함께 코앞으로 괴물의 날카로운 어금니가 보였다. 기겁하여「여행의 수호자」를 방어하며 휘둘렀다. 이빨 조각이 튀면서 비싼 값을 주었다는 나무 봉 또한 따악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얼씨구?』
어이가 없어 부러진 나무 봉을 내려다 보았다. 무게만 있음 뭘 하나, 속이 터엉 비어 있다.
거짓말 같아 한쪽 눈을 감고 부러진 단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 봤다.
실망이다. 피리로 만들려고 조각도로 속을 파다 실패한 어중간함이다.
신성수 플라군이란 나무는 - 정확하게는 신성수 뿌리에서 다시 키워낸 자녀목이지만 - 대나무와 사촌이었나. 돈이 아깝다. 그라바스는 칫 소리를 내곤 부러진 반토막 중 하나를 땅에 버렸다.
『언젠가 사일라그에 갈 일이 생기면 그곳 사람들에게 더 튼튼한 물건을 만들라고 한바탕 야단을 쳐야겠어. 이런 불량품을 특산품이라고 팔아먹다니, 양심에 털 났다. 털 났어.』

입술을 삐죽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바람과 대기의 정령, 내 친구 바바라는 내 손에 모여 나를 지키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라.』
동시에 오른 팔로 슉- 하고 맹렬한 기운이 솟구쳤다.
정령 바바라가 만들어낸 칼날은 모양이 금방 물에서 건져 올린 국수 가락처럼 흔들거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그 날카로움은 금속으로 만든 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모양만 가지고 타박하지 말자. 기술만 잘 넣으면 튀긴지 일주일이 넘은 딱딱한 도넛은 물론이고 바위도 벨 수 있다.
이엽~! 하고 팔을 둥글게 움직였다. 단단한 몬스터의 피부가 잘려지는 촉감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고급 종이를 잘 드는 가위로 잘라낼 적의 감각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별안간 기분이 나빠져 앞으로 내지른 팔을 도로 거두었다.
악취는 그렇다치고 인간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체액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원래 렛셔 데몬의 피는 검다. 그런데 이것은 제법 붉다.
『무슨 영문으로...』
손가락으로 비벼봤다. 끈적임 또한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데몬의 피는 말라붙은 포도 쥬스와 비슷하다. 이건 훨씬 묽고, 맑다. 된장 찌개가 썩은 듯한 고약한 악취를 빼면 데몬의 피라고 보기 어려웠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데 엉덩이로 강렬한 킥이 날아들었다.
『아욱! 놀랐잖아요.』
『딴 짓이냐, 그라바스. 괴물에게 씹혀 먹히고 싶다면 계속 그러고 있어.』
그제야 눈치챘다. 유나의 발 아래로 토막난 데몬 두 마리가 추가로 더 쓰러져 있었다.
『멍청하게 있지 마라. 정면으로 돌파할 거야. 따라오지 못해도 두고 간다.』
장검으로 데몬의 배를 찔렀다. 푸욱 하고 살을 찢는 소리가 났다. 그걸 비틀어 다시 빼내는 대신, 검의 손잡이를 도움닫기 발판인양 힘차게 밟고 점프했다. 솟구쳐 오르는 유나의 등으로 보이지 않는 날개가 파닥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태양을 가렸다.
이대로 달나라까지 단번에 날아가려는 건가.
놀란 그라바스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천녀의 그림자라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살육이라는 죄를 지은 천인은 하늘로 오름을 허락받지 못하고 다시 지상으로 떨어졌다.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중력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다시 지배받게 된 천녀는 착지하면서 무게가 실린 오른 발로 몬스터의 몸에 꽂혀진 검의 손잡이를 재차 밟았다. 체중에다 운동 에너지까지 더해졌다. 몬스터의 몸을 세로로 찢어발긴 흉기는 땡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라바스는 발가락까지 굳는 것을 느꼈다.
저 장면, 이미 본 기억이 있다.
순간 환청처럼 칭얼대는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부, 나에게도 그거 가르쳐줘.
- 따라하면 죽여버린다.

스승은 화가 단단히 난 어조로「안돼」라고 즉답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전부를, 아니 알고 있는 그 이상을 가르쳐 주고자 하던 스승이「알려고 하지 마라」고 단칼에 거절한 것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기술 자체가 어려워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실력이 늘어 허공에서 공중재비를 맘대로 돌게 되었을 적에도 스승은 기술 전수를 거부했다. 뿐만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재차「따라하면 죽여버린다」고 강조했다.

『정말로 두고 간다, 그라바스!』
『예! 예!』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심호흡을 하고 가방을 단단히 고쳐맸다. 여기서 뒤쳐지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유나는 자신의 사전엔 망설임이란 단어가 없다는 투로 이미 한참을 앞서 나가고 있었다. 까딱하다간 버림 받게 생겼다. 그라바스는 주먹을 질끈 쥐고 유나를 따라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구두끈이 도중에 풀리는 일 없기를 기도했다.

『카오오~!!』
『적당히 해줘, 데몬 씨. 난 맛이 없다고.』
정면에서 아구를 쩍 하고 벌린 렛셔 데몬은 앞발을 들고 덤비는 곰보다 훨씬 박력 있다.
오금이 하나도 저리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 그래도 침착하게 상대의 공격 리듬을 읽으며 갈퀴짓을 하는 손톱을 피했다. 싸늘한 촉감이 뺨을 비껴가자 그라바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반토막난「여행의 수호자」로 렛셔 데몬의 눈을 찔렀다.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동작이었다. 속이 빈 나무 조각으로 데몬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일류 검객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빠른 판단과 정확함, 그리고 두둑한 배짱이 요구된다. 긴장하여 눈꺼풀을 깜빡 움직이는 날엔 되려 이쪽이 씹혀 먹힌다. 나아가 치고 빠지는 결정적 순간을 놓치면 안된다.
『으라차!』
무기로서 딱 한 번 멋진 활약을 펼쳤으니 이제 아쉬움이나 후회, 나아가 원한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이때다 싶자 절반만 남은「선물」을 데몬의 눈에 찔러박은 채 손을 놓아버렸다. 영원히 안녕... 언젠가 사막으로 바다 만큼의 큰 비가 내리면 말라버린 나뭇가지에서 새 싹이 돋아날지 모른다. 그러면 데몬의 시체를 양분 삼아 제2의 신성수 플라군이 성지에서 뿌리를 내리게 될 터. 그것은 무척이나 멋진 광경일 것이다.

『왼쪽으로 돌아라!』
뛰는 속도를 늦춘다 싶었는데 다 까닭이 있었다. 유나는 그라바스의 목덜미를 잡고 왼쪽을 향해 강하게 밀었다. 그러면서 어미 새가 독촉하며 쪼아대듯 피부를 때렸다.
『왼쪽, 왼쪽!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쪽!』
『나는 바보가 아녜요, 유나.』
『바보가 아니라면서 그렇게 좌우를 두리번거리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왼쪽이 어딘지를 몰라 그러는게 아닙니다. 기척이 있어요. 멀지 않은 곳으로!』
머리 수는 열 다섯에서 스물 정도... 이번엔 사람이다.
그렇다고 반색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탕- 타앙-
질겁하며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데몬으로는 부족해서 이번엔 화약입니까.
숨이 턱에 차 오르도록 뛰면서 그라바스는 이를 갈았다.
울리는 소리로 보아 비록 그 총구가 이쪽으로 향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다.
위기는 한 번에 하나씩. 모듬 세트 위기 상황이라는 건 결코 정의롭지 않다. 실수로 큰 파도에 휩쓸렸는데,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식인 상어가 나타났고, 하늘에선 천둥 번개가 치고, 지나가던 배에서 대포를 쏘아대면「너무하잖아」소리밖엔 안 나온다.

『세상 쓴 맛을 덜 봤군. 운명은 심지어 대포를 쏘아대는 배의 선장을 악명 높은 해적 애꾸눈 잭으로 설정하기도 하지.』
쓰게 웃으며 유나가 다시 그라바스의 목깃을 잡았다.
『이번엔 오른쪽, 오른쪽. 숟가락으로 밥 먹는 쪽!』
『왼손으로 밥 먹는 사람은 헷갈려서 어쩌라고 설명을 그딴 식으로... 그러지 말고 그냥 지그재그로 알아서 뛰죠.』
 개처럼 헐떡이며 제안을 해봤다.
썩 괜찮았던 것 같다. 잠시 생각하던 유나가 그렇게 하자며 엄지손가락을 척- 들었다.
하여 두 명은 각자 반대 방향으로 맹렬하게 달려나가면서 힘차게 모래를 박찼다.

Posted by 미야

2006/06/26 16:07 2006/06/2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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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29 19:13 # M/D Reply Permalink

    아마 리나의 기술이었겠죠.. 강하고 거침없는 유나의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합니다. 도약하는 유나를 천녀라고 묘사한게 인상깊었어요.(랄까 이미 그라바스는 코가 꿰인것 같은데요^^) 전투동작의 아름다움 외에도, 숙명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고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그런 유나의 운명을 암시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힘껏 도약하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아름답죠. 다시 읽어보니 그냥 지난친 생각인것 같습니다.--; 들려보니 두편이 올라와있어 굉장히 기쁩니다:)

    1. 미야 2006/06/30 12:03 # M/D Permalink

      리나의 기술은 아닙니다... 더 말하면 네타가 되기 때문에 함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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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5

다가오는 땅거미가 흉악하다. 머리카락이 쭈삣 서려고 했다.
정면 돌파는 미친 짓, 그렇다면 얼마나 돌아서 가야 안전할지를 재빨리 생각했다. 머리 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근방으로 제법 커다란 바위산이 하나 있다. 그 바위산을 끼고 길게 우회하면 반 나절의 시간이 낭비된다. 그래도 그곳 지형은 커다란 S자로 휘어져 있어 살아 있는 사람 냄새를 맡고 광분하는 몬스터를 기술적으로 따돌릴 수 있다.
그렇게 하는게 좋겠다고 판단을 내리기가 무섭게「360° 뒤돌아 잽싸게 튀기」를 시도하며 고삐의 왼쪽 줄을 세게 당겼다. 말귀를 알아들은 티카티카 새가 튼튼하게 생긴 앞발을 높게 들었다.

『시간 낭비다. 주변을 빙빙 돌아도 상황은 엇비슷할 걸. 테라는 포위되었다.』
삐걱 소리를 내는 썰매에서 단번에 뛰어내린 여자는 익숙한 태도로 이부에게 은전을 수 십 던졌다.
『여기까지 왔으면 되었다. 이 앞은 걸어서 가마. 이건 수고비다. 넣어둬라.』

손바닥에 놓여진 차가운 감촉에 이빨 날카로운 몬스터는 잠시 잊었다.
테라까지는 아직 꽤 거리가 남았다. 그 수고비 치고는 너무 많다.
과불유급이라 했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그 사랑스러운 것들을 주머니에 넣을 생각을 못하고 이부는 어째서 - 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누군가 나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찾거든 절대로 모른다고 해라.』
『얼씨구?』
『본 적이 없습니다 - 라고 말하는 거다.』
흐응, 그러니까 은전은 순수한 수고비가 아니라 더하기 입막음 값이었나 보다.
이부는 반짝반짝 빛나는 동전 하나를 허공에 던졌다가 도로 낚아챘다. 오랜 관록이 붙은 동작엔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똑바로 간다고 해도 걸어서라면 1시간도 더 걸릴 터인데... 아프신 아버님께 술 한 잔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시체가 되어버리면 곤란하잖소. 뜨끈한 날씨도 그렇고 저놈들 분위기가 영 아닌데 괜찮겠어? 아가씨.』
『괜찮지 않다고 하면 더 태워다 주려고?』
『고렇겐 못하지.』
『그럼 묻지를 마.』
『미안하오. 그럼 잘 가오. 그건 그렇고, 젊은이 당신은 여기서 왜 내리슈.』

덩달아 부산을 떨며 가방을 챙기는 그라바스를 향해 이부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가방만 끌어내리는게 아니다. 젊은이는 지갑을 열어 은 전 두 개까지 꺼냈다. 환장하겠다.
『착각했어. 댁이 내릴 곳은 여기가 아니야. 다시 올라 타. 목적지까지 총알 같이 데려다줄 터이니.』
『아뇨. 여기서 내릴 겁니다. 일정을 바꾸겠습니다.』
『뭐?』
『성지로 가면 은화 넷을 주겠다고 약속했더랬죠? 마음이 바뀌어 성지까진 가지 않았으니 양심껏 그 절반만 받아요. 그리고 이건...』
연달아 은전 두 개가 하느님의 축복과 같이 이부의 손아귀로 추가로 떨어졌다.
『부탁 하나만 할게요. 혹시 누군가 나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찾거든「테라로 갔습니다」라고 알려주세요.』

왜들 이래! 이부는 울컥해서 매운 고추를 어금니로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헷갈리잖아!』
여자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라고 했고, 총각은「맞다, 게보린~」을 외치라고 했다. 아니, 그 반대로 아가씨가「맞다, 타이레놀~」이고 총각 쪽이「영구 없다」던가. 아니면 두 명 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머리를 흔들며 짜증을 냈다. 손아귀에 은전이 가득인데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의견을 통일하면 안 될까. 둘 다 봤거나, 아니면 둘 다 못 봤거나.
당장 자리를 떠야 한다는 걸 잊고 이부는 갈등했다. 실수라도 하여 거꾸로 대답하는 날엔 주머니에 든 은전이 무쇠로 만든 장화로 변해 그를 땅바닥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머리가 흙바닥에 닿는 순간, 심판관의 원망스런 목소리가 양심을 향해 속삭일 거다.
왜 헷갈려. 너 머리 나쁘냐. 머리 무지 나쁘지.
아이큐가 50이라 인정할 순 없다.
환장할만한 이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이부는 실랑이를 하며 청년을 잡았다.

『잔소리 집어 치우고 썰매에 올라 타. 어딜 도중에 내려. 댁은 나랑 같이 성지로 간다. 아무렴 내가 300마리에 육박하는 데몬 떼거리 앞에 손님을 떨궈놓고 줄행랑을 칠 거 같냐. 사람 잘못 봤어.』
『왜 나만 잡아요! 저쪽은 내렸잖아요!』
『잡을만 하니까 잡았어. 댁은 무기도 없잖아.』
『무기가 없긴.』
이를 증명한다며 가방을 열어 뭔가를 찾았다.

처음엔 식칼이라도 꺼내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드러난 물건은 나무로 만든, 2단으로 접히는 봉이었다. 최대로 펼친 길이는 1미터, 마른 걸레질을 꼼꼼하게 해서 반들반들 윤기가 돈다. 신혼 집 주방 창문 커튼 봉으로 쓰면 딱이겠다. 애들 장난하는 나무 막대기와 비교하자면 거기서 거기다. 몬스터를 상대로 승부를 걸어봄직한 듬직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아이들이 과제를 빼먹었을 적에「죽을래, 아님 숙제할래」위협용으로 휘두르면 적당할 것 같다.
이부는 막대기와 그라바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순간 귀에서 마른 소금이 사각 소리를 냈다.

농담도 심하다.
이부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여자가 선수를 쳤다.
『사일라그의 신성수 플라군의 자녀목 가지를 깎아서 만든「여행의 수호자」라는 상품이군.』
『앗! 이걸 아십니까.』
『반갑게 말할 것도 없다. 그걸 모르면 간첩이니까.』
『멋지죠? 친한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귀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너... 그 물건의 사용법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거냐.』
『알다마다요.』
그라바스는 나무 봉을 멋지게 들고「가면 용사 드래곤 핑크」의 자태를 흉내냈다.
자! 덤벼라, 악당! 정의의 용사가 널 용서하지 않겠다.
옆으로 누운 8자로 휘두르자 꿀벌이 날갯짓하는 붕붕 진동음이 났다.
『여행의 수호자라니, 이름도 근사하지요? 이참에 멋지게 휘둘러볼 생각입니다.』

자세는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만... 유나는 실소했다.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군.』
잘 모르겠다. 그라바스는 머리를 긁었다. 이걸 휘두르는데 설명서부터 읽어야 하나. 대장간에서 파는 장검엔 설명서가 붙지 않는다. 검집에서 유려한 은빛의 몸체를 꺼내기 전에 필히 그 설명서를 읽어야 한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다.
방금 다듬은 날이 날카롭습니다. 실수로 손을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엉뚱한 사람을 향해 휘두르는 일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이 주의 사항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모든 민, 형사상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단단한 바위 및 골렘 등을 향해 내리쳐 발생하는 물건의 파손에 대해서는 제조사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기타등등.
『설명서요? 이런 걸 휘두르는데 설명서를 읽어야 합니까?』
『이리 줘봐라.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쳐 주겠다.』
유나는 어린애로부터 봉을 빼앗아 들었다.

1, 나무 봉을 지면 위에 똑바로 세운다. 이때 균형을 잘 잡는 기술이 필요하다.
2, 살짝 손가락을 떼고 나무 봉이 우연한 방향으로 쓰러지길 기다린다.
3. 15분을 기다려도 쓰러지지 않으면 1번부터 다시 시작하는데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4, 나무 봉이 쓰러진 방향을 향해「이쪽입니다! 신탁이 내려졌습니다!」라고 말한다.
5. 그리로 걸어간다. 이때 뛰어도 무방하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다.

달팽이가 토악질한 광경을 방금 전에 목격한 듯한 그라바스를 뒤로 하고 유나는 시범을 끝마쳤다.
『이상이다.』
『우와악~! 이거 뭐야아아~!! 막스밀리엄! 날 물 먹인 거야아아아~?!』
『설명서를 자세히 읽지 않은 네가 잘못이다. 비싼 걸 선물한 사람을 왜 욕해.』
『그치만, 그치만! 막스밀리엄 말이 반드시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제발 옆으로 새지 좀 말고 목적지까지 똑바로 가라는 뜻이었겠지. 짐작컨대 여차하면 도중에 마차에서 내리거나, 무리에서 혼자 빠지거나, 말 없이 다른 배로 갈아타고 그랬지? 그대의 행적이 훤히 보인다. 오죽했으면 지인이 이런 걸 다 선물했을까.』
『그려요. 난 길 잃어버리는게 취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어디 두고 보자! 3계급 강등이닷!』

이를 갈아대는 청년 앞에서 유나는 쌀쌀맞게 말했다.
『두고 보자고 하지만 말고 이참에 본국으로 당장 돌아가. 여행의 수호자까지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신탁을 내리고 있잖아. 이쪽이다. 어서, 어서! 네가 착한 마음에 날 도우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네가 있으면 오히려 걸치적 거린다.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바보를 돌보는 취미는 나에겐 없다. 돕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자! 썰매에 다시 올라타라. 앞으로 좋은 여행이 되길 빌겠다. 상냥한 별빛이 그대와 함께 하길.』
『있어요.』
그러겠다는 대답으론 안 들린다. 유나는 가만히 눈썹을 찡그렸다.
『다시 한 번 더 말해라.』
『데몬과 싸운 적이 있어요.』
『미니 슬라임?』
『농담 아닌데.』
유나는 그라바스의 어깨로 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의 키는 엇비슷해서「찍어 누른다」는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기백이라는 것이 있다. 선명한 적갈색의 - 마치 경동맥에서 힘차게 뿜어져나와 막 굳기 시작한 인간의 피와도 같은 빛깔을 가진 그녀의 눈동자가 짙은 어둠을 뿜었다.
『나도 장난 아니다, 그라바스. 해파리 미역과 장난쳤다고 렛셔 데몬에게 덤벼도 되겠거니 생각하면 안된다. 혹시 죽고 싶은 건가. 자살 방법치곤 창의적이지만 칭찬해줄 생각은 들지 않아.』
『내가 왜 죽고 싶어 한다는 겁니까, 유나. 난 앞으로 인구에 회자될 멋진 사랑을 할 겁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사부님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습니다. 그 전까진 죽으라고 해도 못 죽어요.』

표정을 달리하고 맨 손으로 화살을 쏘려는 듯한 동장을 취했다.
『모든 생명을 키우며 대지를 품는 어머니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유나의 표정도 덩달아 달라졌다. 저것은 카오스 워드, 마법 주문이다.
『바람과 대기의 정령, 내 친구 바.바.라.는 내 손에 모여 적을 무찌르는 화살이 되어라.』

바람의 정령을 친한 척하며 바.바.라.라고 불렀다는 건 둘째다.
쉬익- 하고 순식간에 공기가 몰려들었다. 그라바스는 적당히 기다린 다음, 퉁 하고 화살을 쏘는 동작을 취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화살보다 천 배는 위력적이다. 압축 공기 덩어리에 맞은 렛셔 데몬 다섯의 머리가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마법사였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크게 동요한 유나는 눈을 동그랗게 했다.
『그런데 왜 검정 망토를 안 걸치고 있지? 마법사라면 목 깃을 세운 검정 망토를 입어야 하잖아. 더워서 벗은 건가. 하지만 가슴이 훤히 보이는 셔츠는? 오망성의 문신은? 가죽으로 만든 부츠는? 해골 무늬가 들어간 밸트는?』

어디서「마법사는 이런 겁니다」라는 불량 설명서라도 읽은 건가.
바람으로 만든 두 번째 화살을 날리기 전에 그라바스는 허리를 삐긋했다.
뭡니까, 그 해골 무늬 밸트라는 건!

Posted by 미야

2006/06/23 12:00 2006/06/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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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25 02:13 # M/D Reply Permalink

    어디서 설명받은거죠, 저런 악취미의 마법사; 혹시 이 시대에는 마법사가 드문걸까요. 아무것도 없는데 화살을 쓰는게 멋졌어요! 엄청 강력하고 특별한 무기같은 인상을 준달까-.-; 그라바스는 금속을 못쓰는 사람답게(?) 부드럽고 온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것 같아요. 게다가 낭만적이고. 유나랑은 완전히 반대군요. 하지만 동시에 곧고 의지가 강해서 굉장히 멋져요. 부드러운 카리스마... 두 사람이 이뤄낼 멋진 조화가(혹은 투닥거림?)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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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4

실사판 세일러 문을 보면 쇼크로 재기 불능이 될지도... 중얼중얼. 어쨌거나 슬슬 심각한 모드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걱정.


『4개월 전이다. 사막에서 환몽석을 캐던 인부 하나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급사한 것은...』
『하아?』
그라바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뜨거운 사막에서 연장 들고 횡재를 노리는 사람 다수가 인생 종장을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작업장의 온도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고, 여차하면 몬스터가 출현하고, 동업자를 등쳐먹는 못된 인간들이 각다귀처럼 깔려 있다.
차라리 식인 상어떼에 둘러싸여 진주 조개를 캐고 만다. 이보다 더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직업이 딱히 없는지라 환몽석을 캐는 작업 인부들의 삶의 수준은 누가 뭐래도 최하다.
술에 쩔었고,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고, 몸에는 빈대 붙고, 식생활은 엉망.
따라서 당장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쓰러진다고 해도 그렇게 어색하진 않다.

『단순한 심장마비가 아니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혹시 순수하게 공포에 질려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나. 그런 자의 얼굴은 혈전 탓에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사망한 자와는 차이가 커.』

혀 뿌리가 다 보이게끔 크게 벌려진 입은 죽은 다음에도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댄다. 부릅뜨고 죽은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눈꺼풀이 감기지 않는다. 팔뚝에 난 잔털은 모두 곤두서있고 앵두 크기로 줄어든 고환은 매우 딱딱하다. 피부는 새파랗기까지 해 시체를 염하는 사람들까지 겁에 질리게 만든다.

유나는 눈을 가늘게 하고 말을 이었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해서 마을로 시체를 끌고는 왔지만 워낙에 모습이 흉흉해서 아무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속칭「막짱」이라 부르는 인부들의 우두머리가 자비를 털어 장례식을 치러주겠다고 나서기 전까지 구석에서 거적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썩어갔다니까 말 다했지.』

하찮고, 외로운 인생이었다. 죽음을 슬퍼할 일가 친척이나 가족은 없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던 소지품은 순식간에 정리되었고, 사막의 열기에 미라처럼 바짝 말라붙은 몸뚱이는 방금 세탁한 와이셔츠인양 두 번 접혀 싸구려 관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워낙에 속물인 인간들이다보니 관 뚜껑에 못을 박기 전에 사자의 옷가지를 뒤져 돈이 될 법한 금붙이라도 있나 확인하려 했던 모양이야. 덕분에 죽은 인부가 오른손으로 뭔가를 꽉 쥐고 있다는 걸 발견했지. 검붉은 빛을 띈, 불투명한 작은 돌이었다.』
『설마... 환몽석?』
『그게 말라붙은 비둘기 똥일 리는 없잖아. 막짱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겠지. 죽은 사람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라 여기고 오그라든 사자의 손아귀에서 억지로 돌을 빼냈다더군. 싸구려 관 값이라도 벌자는 수작이었지. 덕분에 사람들은 장례 한 번에 시체를 다섯 구나 치워야 했다.』
『다섯?! 다섯이나?!』
『하나같이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러대다 스스로 두 눈을 뽑고 절명했다더군. 어떻게 생각하나, 그라바스. 이들이 무엇을 보았기에 자기 눈을 손톱으로 후벼파다 결국은 심장이 터졌을까?』

일부 환몽석은 과거의 일을 끊임 없이 반복해서 보여준다. 막대한 고차원 에너지에 휩쓸린 나머지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왜곡된 상태로 남았기 때문이다.
돌을 들고 있으면 15년 전에 사막을 가로질러 간 붉은 꼬리 도마뱀의 족적이라던가 30년 전에 가느다란 이슬비가 내리던 풍경이 인쇄된 그림처럼 떠오른다. 흉악한 강도를 만난 여행자가 칼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라던가, 어딘지 모르게 어리둥절해 보이는 오크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돌 속에 묶여진 시간은 이렇다 할 특징도 없이 제각각이다. 언젯적 모습인지도 짐작 못할 넓은 평원을 봤다는 사람도 있다. 그냥 단순 무식하게 까맣게만 보이는 환몽석도 있다고 한다.

단, 아주 드물게 그중에는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는 극단적인 기억을 품고 있는 돌이 있다.
에톨로지나 왕국에 있는「재앙석」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만지면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여자가 마당에 빨래를 너는 모습이 보이고「칼 갈아~ 가위 갈아~」라는 장사꾼의 호객 소리가 가까이 들린다.
그러다 개가 미친 듯이 짖기 시작하고... 엄마를 찾으며 젖 먹이 아이들이 운다.
휘잉 하고 바람이라도 부는 듯한 이상한 기척에 여자가 불안해 하며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는다.
동시에 시야는 가까이에 태양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얗게 변하고...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가 사방으로 천둥치며 딱 8초간 지속된다.
마의 8초다. 이 소리를 들은 다수가 발광한다. 그래서 재앙석.
지금은 사원 지하에 여덟 겹으로 봉인되어 일반인의 접근 자체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라바스는 신음하며 팔짱을 꼈다.
얘기만 들어보면 이건 재앙석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 눈을 뽑으려 했을 정도의 격렬한 감각이다. 버티지 못해 심장이 멎거나, 혹은 터진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딱 하나다.
지금까지 그 존재의 가능성을 두고 갑을박론을 멈추지 않았던...

『나라면 그 흉측한 걸 집게로 집어 우물 밑바닥으로 집어 던졌을 거야. 그런데 테라 마을 멍청이들은 그걸 사막 한 가운데에 파묻어버리는 대신, 은으로 만든 상자에 고이 모셔놓곤「4만 크로바기네부터 시작해 보지요. 거기 신사분께서 방금 5만 크로바기네 부르셨습니다」라고 떠들어댔다. 만지기만 하면 죽는 돌을 가지고 흥정을 붙이다니, 나로서는 감히 흉내도 못 내겠어.』

성마가 어떻게 땅으로 내려왔는지에 대해서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뚜렷이 밝혀진 바가 없다.
역사 연구가들은 리나 인버스라는 대 마도사가 나름대로 연구 중이던 신마 융합 주문에 실패, 신과 마가 동시에 마도사의 몸을 집어 삼켰고, 그 결과로 주변 8km 반경 전부가 그라운드 제로가 되어버렸다고 추정하고 있다.
살아 남은 목격자도 없고, 여기에 대해 증언하려는 자도 없다. 그나마 남은 약간의 역사적 파편들도 신족의 교란 작전 탓에 신빙성을 잃었다. 무엇이 사실인지 지금에 이르러선 아무도 모른다.
일부 마도 학자들은 신마 융합 주문으로는 그런 결과가 결코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부엌에서 냄비를 꺼내 토마토 페이스트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만 집이 폭발했다 - 라는 식의 줄거리는 말도 안된다는 거였다. 냄비를 태우면 태웠지 집이 왜 날아가냐, 듣고 있으면「과연」이란 소리가 나오는 주장이다. 어떠한 마법 주문으로도 신이나 악마를 구현화시킬 수 없다는 마도사 스즈라메키의 절대 영역 침범 불가침 이론을 꺼내지 않더라도 수수께끼는 더욱 깊어진다.
냄비를 부뚜막에 올려놓고 가열했더니 요리의 신이 내려왔어요 -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끝내주는 냄비가 있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어떨까.
신마 강림의 순간을 고스란히 집어 삼킨 환몽석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요리의 신이 강림하는 냄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5만 크로바기네따윈 문제가 아니다.

침을 꼴깍 삼킨 뒤, 그라바스는 꽉 막힌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거, 제법 돈 되겠는데요.』
얼굴을 찡그린 유나는 잠자코 손을 들어 철부지의 뒷통수를 따악~ 하고 쳤다.
『우...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헛 나왔습니다. 무시해 주세요.』
그라바스는 얼른 용서를 구하고 손으로 욱씬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뭐, 아픈 머리통은 그렇다 치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걸 만진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해서야 그게 성마 강림 기록의 돌인지 저주의 돌인지 알 재주가 없잖아요.』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죽음의 돌은 된다.』
『에?』
『베개맡에 살짝 놓아두기만 하면 간단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나중에 돌을 치우면 증거도 남지 않지. 사이즈도 적당해서 더도 말고 물에 불려진 강낭콩 크기다. 나라면 비싼 돈 주고 암살자를 고용하느니 하녀 한 명을 매수해「이걸 주인 나리의 침실에 몰래...」라고 말할 거다. 해볼만 하겠지?』
『그, 그런!』
『뭘 그리 놀라나. 순진하게스리. 이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잖아.』
『서, 설마, 당신! 그런 까닭으로 그 돌을 사러 테라로 가는 겁니까. 비싼 값을 주고 암살자를 고용하느니 어리고 순진한 하녀를 꼬셔 남의 베게 밑에 그걸 감춰두기 위해?!』
에 - 지금 뭐라고 -
『다, 당신은 악당인 겁니까?! 그건 겨, 결코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 제기랄. 이럴 적엔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 멋지게 뛰어내려야 하는데 부근엔 풀 한포기 자라지 않고 있으니 난감하군.』

이해 불가능. 여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했다.
없으니까 그렇다치고. 무슨 영문으로 당장 나무 위로 올라갔다 뛰어내려야 하는 건데?
『이봐? 진정해. 흥분을 가라앉혀. 나는 사람을 죽이는데 뱀 독 같은 건 쓰지 않아. 그럴 필요가 어딨어? 베어버리면 끝인데.』
그리고는 누가 봐도「끝장」인 자신의 커다란 검을 집어 올렸다.
『게다가 나는 마법사도 아니라서 미완성 신마 융합 주문 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알겠어? 나에게 있어 그 돌은 무용지물이나 다를 바 없단 말이다. 이름도 모를 암살자들의 밥줄을 걱정할만한 착한 성격도 아닌데다 서쪽 도시로 마왕을 강림시키고 싶어 미친 것도 아니라고. 이미 말했잖아. 그런 건 우물 밑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싶다고. 그러니 쓸데 없는 망상은 그만 두고 그쪽에 있는 내 가방이나 이리로 던져라.』
『네?』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다, 그라바스.』
『헤어져? 여기서?』

순간 썰매가 미끌어지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치는 가운데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밖을 살폈다.
좋지 않았다. 능선으로 뭔지 모를 시커먼 그림자가 좍 깔려 있다. 거기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기척에 민감해진 티카티카 새가 발악하며 도리질했다.
『이 정도로 몰려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뭔 일이랴. 렛셔 데몬이 300마리쯤 되겠어.』
이부가 걱정하며 입으로「치치」소리를 내어 발버둥치는 새를 달랬다.

Posted by 미야

2006/06/21 15:33 2006/06/2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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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ya 2006/06/24 11:06 # M/D Reply Permalink

    시리즈 본격 재개하셔서 정말 기쁩니다. 유나 참으로 멋있게 자란 것 같네요. 근데 유나와 그라바스라니.. 이놈의 괴로운 연줄은 참으로 얼키고 설키는군요. 이 시리즈 참으로 재미있고 매력있지만 보고 있는 마음이 편치는 못해요. 간간이 암시하셨던 대로 둘의 운명이란 게 분명코 비극일텐데...ㅠㅠ
    미야님의 최대 강점은 절륜한 문장력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갖기힘든 초고급 상상력이라구요. 이런 재능을 초야에 묻고 있는 것이 아깝습니다. 나중 오리지널 소설을 쓰셔서 미야님 책이 정식으로 서점에 걸리는 날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제일먼저 사볼테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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