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퍼내추럴 2기 방영 기념, 아이구 멋져라 딘 - 그게 슬레이어즈완 무슨 상관이래? ※
폭풍우가 가까이 오려는지 멀리서 우르르 하고 대기가 크게 진동했다. 좁은 마차 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리나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피곤에 지쳐 오래 전에 이미 잠든 것이 분명한 이 작은 인간의 여자는 조건반사적으로 날카롭게 기를 세웠다. 반대편에 앉은 쿼터 엘프는 덩달아 놀랐는지 두꺼운 눈꺼풀을 올려 어디서 불이 났다는 투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예민하다. 바닥에 바늘이 떨어져도 이 사내는 어디서 산적이라도 굴러왔느냐며 긴장한다. 『계속 주무세요. 두분 다. 별 거 아닙니다.』 순간 덜컹거리며 마차가 좌우로 흔들렸다. 다시금 불편한 잠에 빠진 리나의 고개도 좌우로 흔들렸다.
『마차 여행은 불편해.』 『맞아.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쑤셔.』 『몽둥이로 얻어맞은 거 같아.』 『머리도 무겁고.』 『어깨도 찌푸드드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마부의 외침에 4인승 합승 마차에서 서둘러 내린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가볍게 맨손체조를 하는 동작이 수수깡 인형처럼 뻣뻣한 걸 보면 그것이 단순히 입에 발린 불평만은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궁둥이에 풀 발랐다며 딱딱한 마차 의자에서 다섯시간동안 옴짝달짝 못했다. 걷는 것도 싫다며 어린애마냥 뛰어다니는 이들에겐 분명히 고행이었을 것이다. 『맞아, 고행. 고통이 수반되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수신관.』 오랜만에 진실된 소리를 입에 올렸다며 그녀는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 느낌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리나는 까치발을 하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키가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어, 리나님?』 그렇게 때리면 아파요, 라는 뉘앙스를 담아 리나의 손이 닿은 어깨죽지를 어루만졌다. 어깨를 치는 동작은 보통 친밀함의 표시라던데, 어쩐 일인지 그녀의 친근감 표현은 살짝 증오와 닮아 있다. 묘하게 배구의 강 스파이크 동작을 닮은, 바퀴벌레를 향해 슬리퍼를 휘둘러댈 적의 박력마저 머금은. 덕분에 그녀가 툭툭 칠 적마다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질 지경이었다. 『저어, 제게 무슨 악감정이라도...』 『바보 같은 질문이군. 당연히 악감정이 있지. 날 귀찮은 일에 끌어당긴 주제에 감히 그런 소리가 나와?』 『어머머! 나는 죄 없어요. 제르가디스씨의 편지만 리나님에게 전달했을 뿐인데 왜 화살이 나에게...』 『편지 좋아하시네. 남의 일기장을 몰래 찢어 봉투에 넣으면 그게 편지가 되냐?! 이 위조범아!』 그렇게 대꾸한 뒤, 그녀는 마족인 나조차 에그머니나 몸서리칠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거 참 희안하다. 제르가디스가 보낸 것처럼 꾸민 편지가 실상은 그의 일기장에서 맘대로 뜯어낸 거라는 걸 이 작은 인간의 여자는 무슨 재주로 알았을까. 가짜로 만든 서명도 완벽했는데. 하다못해 봉투 안으로 조그마하게 그려넣는 그만의 식별 그림 - 네잎 클로버 문양까지 베껴왔는데 리나는 속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속냐. 냄새가 다르다고, 냄새가.』 알면서 속아주는 일도 짜증난다며 리나는 내 허벅다리를 향해 킥을 넣었다.
『하여간에 열불 나 죽겠어.』 주변을 흘끔거리다 말고 리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요즘 같은 겨울엔 해가 빨리 저문다. 성질 급한 장사치들은 벌써부터 등롱을 준비하고 나와 저녁 장사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여관 이름이 적혀진 등롱을 본 리나의 발걸음은 한층 빨라졌다. 곳곳에「빈방 없음」이라는 푯말이라도 걸렸다는 듯이 불안한 눈치다. 망토의 깃을 세우고, 재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돌았다. 그런 그녀의 뒤를 커다란 키의 금발 사내가 아기 새처럼 부랴부랴 따라갔다. 『잘 봐, 가우리. 미행이라도 붙으면 곤란하니까.』 『알았어, 리나.』 아기 새는 착하게 대답했다.
점차 인적이 드물어지고 있다. 메로엔은 비교적 작다고 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 큰 대로변에서 벗어나자 눈에 보이는 간판의 숫자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통행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다시금 좁은 골목으로 방향을 틀면서 가우리는 마나님이 분부한 그대로 곁눈질로 뒤쪽을 살폈다. 따라오는 사람은 안 보인다.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안전하다. 그러니까... 나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방심하면 곤란해. 상대는 프로라고.』 괜찮을 거라는 내 말을 말을 단칼에 부정하면서 건물 벽에 사람의 손가락 뼈가 붙어 있다는 투로 주의하여 살폈다. 고개를 들어 머리 꼭대기 위로 함정으로 설치된 그물은 없는지까지 확인했다. 바로 그때 냐옹~ 하고 어딘선가 도둑 고양이가 성가시게 울어댔다. 리나는 화들짝 놀라서는 벽쪽으로 바짝 붙었다. 방부제에 절여진 붕어 대가리가 튀어나왔어도 저렇게 놀라진 않을 것 같은데. 『어쭈?! 웃어?!』 그녀는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린 나를 보고 화를 냈다. 『다 까닭이 있는 거야. 상대는 프로, 그것도 프로급 고스트 헌터들이란 말이다.』
여기서 나는 잠시나마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스트 헌터들은 말 그대로 유령을 잡는 사람들이다. 성질 나쁜 정령, 도깨비, 악령 등등을 특수한 기술로 퇴치한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이들의 기술은 사람에겐 별 소용이 없다. 이쪽에서 벌벌 떨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뭐, 가끔씩 호주머니가 궁진해진 나머지 대혼살상 기술을 대인살상으로 바꿔 현상금 수배범을 추적하는 것으로 전업하는 고스트 헌터들도 있는 건 같긴 하다만... 이런 자들은 딱 잘라 말해 2류다. 수영 선수가 참치를 낚시한다며 설치는 꼴이라서 일 마무리도 영 신통치 않다.
『이봐, 제로스.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꼭 현상금 수배범인 것 같잖아.』 『어? 아닌 겁니까?』 『이눔이! 감히 어디다 대고 물음표를 붙여! 이 큐트하고, 상큼 발랄하고, 콱 깨물어주고 싶은 미소녀가 가까운 곳에 있는 새마을금고라도 털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어... 은행은 털지 않았지만 마을 회관 지붕은 확실히 무너뜨렸잖습니까. 저번 주에도 아스테의 신전 담벼락을 실수로...』 『허어! 그건 마법으로 복구시켜 놓았으니까 패스. 그것도 탁월하신 나의 미적 센스까지 곁들여 아주 훌륭하게 고쳐놓았다고.』 『과연 그럴까요. 쥐약 먹고 찌그러진 텔레토비 동산 스타일로 복구시켜 놓았으니 지금쯤이면 그쪽 사제들이 삽과 망치를 들고 도로 무너뜨렸을 걸요. 어떤 놈이 이랬어, 잔뜩 원망하면서요.』 『뭐얏?! 쥐약 먹고 찌그러진 텔레토비 도옹~산?!』 주먹이 부웅 하고 허공을 갈랐다. 타이슨의 핵주먹이다. 이를 재빨리 피하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제로스~! 임마!!』 『다음에요, 다음에 맞아드릴게요. 지금은 최우선적으로 하실 일이 따로 있으시잖습니까.』 그리 말한 뒤, 벌레가 한 입 맛있게 베어먹은 그림이 걸린 술집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여기가 우리가 들릴 1차 목적지다. 어깨로 문을 열고 신중한 표정으로 내부를 살폈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뿌연 담배 연기 탓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적은 것으로 봐선 내 추측이 아마도 맞을 것이다. 가게 이름만 알고 덥썩 찾아온 나에겐 자세한 정보가 부족했지만 얼핏 봐선 인기가 없는 가게인 것 같았다. 의자는 불편해 보이고, 조명은 너무 어둡다. 특히나 이 썩은 고구마 같은 냄새... 후욱,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맞은 편으로 돈 계산을 하는 주인과 음식 값을 흥정하는 손님 둘이 보였다. 가게 주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손님 중 하나가「젠장맞을!」이라 거칠게 욕하며 바지 주머니를 바깥까지 뒤집어 은화 둘을 꺼냈다. 솔직히 놀랐다. 한끼 식사비치곤 무지 많다. 저 사람들도 리나처럼 엄청난 대식가일까. 아마도 점심으로 돼지 세 마리를 잡았나 보다.
『돼지 세 마리를 잡아? 너, 바보지.』 리나는 확신하며 코웃음을 쳤다. 『바보 아닌데요.』 불쾌해하며 부정했다. 『바보가 아님 뭐냐. 얼간이냐?』 그녀는 속 뒤집어지는 비웃음을 띈 채로 손가락 하나를 딱 하고 튕겼다. 『여보셔? 주인장. 주문 받으쇼.』 회색으로 더러워진 앞치마를 펄럭이며 술집 주인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워째 표정이 안 좋다. 손님 왔다고 반색하는게 아니고 이건 흡사 곰 잡는 산적 등장이시다. 『네놈들은 누구냐.』 서비스 정신은 국밥에 말아먹은 사내는 오히려 윽박질렀다. 이에 아랑곳 없이 리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위스키 버본, 토니 칵테일, 버찌 맥주, 샤르키... 그녀가 손바닥을 마주 부볐다. 『닥치고 주문이나 받으쇼. 사과 주스와 오렌지 주스를 각각 50% 섞은 것으로.』 술집 주인의 눈이 땡그래졌다. 『뭐? 주스? 정신 나갔군. 여긴 술집이야.』 『그래요? 그럼 오렌지 주스와 사과 주스를 각각 50% 섞은 것으로.』 『그게 뭐야. 순서만 바꿨잖아.』
난 그가 버럭 화낼 거라고 짐작했다. 쟁반을 도끼처럼 휘둘러 리나의 머리를 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사내는 짜증 반, 성가심 반, 주머니에서 네모반듯하게 접혀진 하얀색 종이를 꺼내 리나의 손안에 쥐어주었다. 『여기는 술집. 주스는 이곳으로. 언더스탠드?』 『감사합니다.』 메모지를 깃발처럼 들고 리나는 짧게 손바닥을 흔들어 인사했다.
밖으로 나온 난 무지 궁금했다. 『뭡니까? 그걸로 용무는 다 끝마친 건가요? 그 남자가 준 종이는 뭐였습니까?』 『한 번에 하나씩만 질문해라. 어쨌든 그 가게에서 볼 일은 끝났다.』 『그 메모지는요?』 『직접 확인해볼래?』 그녀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며 술집 주인이 준 메모를 나에게 바로 건내주었다.
← 4, + 2, ↑ 3, ○○○ ○
이게 뭐야아~!! 지금 장난하는 거야?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메시지였음에도 리나는 한 눈에 그게 뭔지 알아차린 것 같다. 답답하다며 머리를 긁지도 않았고, 종이를 땅에다 던진 뒤 구둣발로 밟지도 않았다. 『제르가디스씨가 남긴 메시지라는 건 알겠습니다. 필체가 낯익어요. 하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 『간단해. 술집에서부터 우로 4번째 건물, 그 건물 출입구에서 시계방향으로 두 번째, 3층의 방. 노크는 딴딴딴 따.』 『에.』 제르가디스는 아무래도 어둠의 세계에서 너무 오래 썩었다. 이런 식으로 만남을 약속하는 건 폭력단 조직원들이나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검사인 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하다니. 그냥「프랑기스 여관 305호」라고 하면 잇몸에서 피가 철철 나는 것도 아니잖아. 기가 막혀 쥐고 있던 메모지를 꾸깃 구겨버렸다. 『제로스. 지금 너, 구기고 있는게 아니라 가방에 집어 넣고 있잖아.』 『그야 나중에 활용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르니까요. 언젠가 이런 식으로 적혀진 메모지를 발견하게 되면 이걸 참고삼아 해독해야 할 거 아닙니까.』 당연한 걸 왜 묻는지 모르겠다. 아울러 리나가 메모지를 이리 당장 내놓으라고 화내는 까닭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술집으로부터 왼쪽으로 세 번째 위치한 프랑기스 여관으로 향했고, 모두를 대표해서 이몸이 305호의 방에 똑똑똑, 똑, 하고 독특한 리듬으로 노크했다.
약 12초 뒤, 찰칵 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열렸다.
『여어, 제르가디스씨. 부디 이 제로스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십시오. 당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소중한 구원병을 이끌고 멋지게 돌아왔습니다.』 나는 놀란 얼굴을 한 키메라를 향해 짓궂게 윙크부터 하고 보았다.
Posted by 미야
2006/11/02 14:07
2006/11/0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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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이 나빠졌다고 불평했더니「나이는 못 속이는구나」하고 피식 웃었다. 턱에 수염도 나지 않는 날 갖고 영감님 취급하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내 눈이 나빠진 건 야밤에 책을 너무 읽어댄 탓이지 결코 나이 탓이 아니라는 말씀. 아울러 내가 영감님이면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인 리나 또한 할망이 된다. 나는 그 점을 강조했다.
『넌 우리들의 나이 차이가 수백 살은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리나의 눈이 호떡처럼 땡그래졌다. 『당연하지! 최소한 넌 나보다 삼백 년은 꿇었어.』 옛날 귀족들 방식으로 오목한 차 받침에 뜨거운 오퀴드를 조금씩 부어 마시는 날 보고 그녀는 강조하여 말했다. 『이봐, 제르. 요즘 누가 그딴 식으로 차를 마시냐. 관뚜껑 열고 부활한 뱀파이어나 그렇게 마시겠다. 멀쩡한 찻잔은 냅두고 차 받침을 입에 대고 홀짝거리는 건 도대체 어디 사는 누구에게 배웠어. 혹시 레죠에게 배웠어?』 『그치만 단풍나무 수액을 끓여 만든 오퀴드는 대단히 뜨거워서...』 『으헛! 뜨거!』 『너처럼 일반 커피 마시듯 하다간 필연적으로 혀를 데운다고.』 한쪽 눈만 지긋이 뜨고 나는 그렇게 쏘아주었다.
어쨌든 최근에 현대어로의 번역에 열중하고 있는 수할마타의 마법서 필사본은 당분간 보자기에 싸두기로 결정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그것도 오래되어 잉크가 바랜 필사본은 가뜩이나 피곤한 눈엔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무명씨로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문제의 필사자는 대단히 성의가 없었다. 처음 몇 장은 힘주어 또박또박 썼지만 이내 본색이 드러나 지렁이가 토악질을 해놓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휙 하고 미끌어진 잉크자국도 하나 둘이 아니다. 그렇게 지겨울바엔 차라리 베끼질 말 것이지, 쏘는 듯한 통증을 호소하는 눈꺼풀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욕설을 퍼부은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댁도 참 이상허우. 욕은 뭐하러 해요. 그냥 깔끔하게 태워버리면 되지.』 분서갱유가 생활화된 망할 놈의 마족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태평한 소리나 지껄였다. 『태워?』 『아님 환경을 생각하여 분리수거를 하시던지요. 오래된 종이는 특수 보존 처리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잘못 소각하면 포름알데히드라는 독성 물질이...』 『잠깐, 잠깐. 마족이 무슨 까닭으로 환경을 염려한다는 거야. 너, 쥐약 먹었어?』 『아하, 쥐약을 드신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이지요. 스할마타의 마법서라니오. 그건 골렘을 만드는 기초 마법서 중의 기초 아닙니까. 당신 같은 실력자가 애들 동화책 같은 걸 열심히 읽겠다고 코가 비뚫어지다니, 이 제로스는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코가 거기서 왜 비뚫어지냐. 코가 아니라 눈이다.』 누구에게 배워와서 그런 건지 묘하게 박자가 어긋나는 마족의 말 표현법을 정정해주며 이마를 찌푸렸다. 코가 비뚫어져? 난 술을 마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기초 마법서를 읽으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법으로 정해놓기라도 했던가. 하여간 저놈의 참견쟁이는 별 걸 가지고 타박한다.
『하여간에.』 제로스는 노려보는 이쪽 분위기엔 상관 없이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놈의 등 뒤로 빨간 머리카락의 마도사가 슬리퍼 한짝을 쥐고 그림자 병풍처럼 존재하고 있음이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질문은 그녀의 의지에 의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대단히 질기고 폭력적인 의지다. 제로스는 코코아잔을 입에 가져갔다가 조금은 불한안 듯한 표정으로 옆쪽을 흘깃거렸다. 아무리 마족이라고 해도 슬리퍼로 머리를 맞으면 기분이 꼴꼴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그는「리나님이 시키는대로 잘 하고 있다고요」라고 입간판을 써서 머리 위로 높게 올렸다. 게다가 그 입간판 아래로는「여기서 슬리퍼 던지면 반칙」이라는 P.S 글귀까지 적혀 있었다.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웃을 거 없어요. 폭격시 그 피해 반경엔 당신도 에누리 없이 들어가니까. 나만 맞을 거 같아요? 당신도 죽는 거예요. 그나저나 스할마타의 마법서는 왜?』 녀석은 계속하여 초조해하면서 코코아잔을 만지작댔다. 『왜라니.』 『그 책은 당신이 찾는 사과 주스 추출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텐데요.』 남들이 들으면 농산물 조합을 제일 먼저 연상하겠지만 여기서 그가 말한 사과 주스 추출법은 있는 그대로의 과즙 추출법 얘기가 아니다. 사과 주스와 레몬 주스를 섞은 액체에서 오로지 사과 주스만을 뽑아내는 방법, 그러니까 키메라로 합성된 내 몸에서 인간 부분만을 분리해내는 방법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제로스는「골렘 만들기 마법서」는 나의 비원인「키메라 분리술」과는 별 상관이 없는 거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아, 그래. 상관은 없겠지. 그치만 만드는 법을 상세하게 알고 나면 효과적으로 골렘을 부수는 법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골렘을 부순다? 옳커니.』 『어이? 이야기 도중에 가방은 갑자기 왜 뒤져.』 『부순다면서요. 자요, 망치. 머리 굴리지 말고 단순하게 가세요. 골렘을 부수는덴 이게 최곱니다. 힘 줘서 땡~ 소리가 나도록 후드려 패봐요.』 『이봐?』
망치를 빼앗아 네 머리통을 갈겨줄까,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물어봤다. 제로스는 약하게 쳇, 소리를 내곤 쥐었던 망치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치만「키메라를 처치할 수 있는 아까운 기회를 놓쳤어」라는 눈빛을 띄고 있는 마족보다 내 신경을 더 자극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과자를 먹으면서 화~ 하게 웃고 있는 가우리였다.
웃는 낯짝엔 침도 못 뱉는다는데 왜 긴장하는 거냐고? 그 말이 맞다면 배트맨 시리즈에서 조커라는 악당 캐릭터가 어떻게 나왔겠어. 싱글벙글 웃는 얼굴도 때로는 무섭다. 착하게 생긴 이 금발의 검사의 두뇌가 요구르트로 만들어진 이상 본의아니게 피해를 주는 일은 허다하다. 하여 나는 바짝 긴장했고, 입가로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사내가 주섬주섬 꺼내는 물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며칠 전에도 눈이 침침하다느니 말했었지? 내 이럴 줄 알고 좋은 걸 준비했어. 자, 받아. 제르가디스.』 『뭐냐, 이건.』 『시장에서 샀어. 그거 파는 아저씨 말이 이것만 있으면 눈이 환해진대. 잘 안 보이고 눈앞이 침침하다 싶으면 그걸 써.』 심플한 검정의 뿔테다. 반짝거리는 새 안경이다. 가우리는「나, 착하지」라는 듯이 웃었다. 안경을 만지작대다말고 흥 하고 콧김을 뿜었다. 다 좋다 이거야.
『돋보기 안경이잖아.』 『응?』 『너도 내가 나이 삼백 살의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응?』 『뭔가 핀트가 어긋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응? 뭐가 어긋났는데?』 거기서 반문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이 멍충아.
『그러니까...』 『지금의 것까지 합하면 열 번은 물어봤을 거다, 의사 선생.』 『이상해서 질문드리는 겁니다. 팔뼈가 부러진 건 이해가 갑니다. 갈비뼈에 금이 갈 수도 있지요. 아주 멋지게 넘어지셨으니까요. 여관방 2층 계단에서부터 굴러 시장 어귀까지 정신 사납게 굴러갔다고요. 그런데 그게 뭐시다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질 않았다. 침 한 번 삼키고 의사는 열 한 번째 질문했다. 『..........돋보기?』 『시끄럿!』 『할아버지 안경이라도 훔친 겁니까?』 『시장에서 돈 주고 샀다!』 『정말로? 그럼 당신 아이큐는 얼마?』 『시끄럿!』
가우리가 위문 선물로 가져온 파인애플 깡통을 움켜쥐고 나는 버럭 고함만 질러댔다.
Posted by 미야
2006/10/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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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웬수야~!!』 앙칼진 고함 소리와 같이 해서 슬리퍼가 날아왔다. 제로스는 슬리퍼의 운동 궤적을 계산하고 재빨리 왼쪽으로 턱을 돌렸다. 그치만 슬리퍼는 그런 제로스를 따라 왼쪽으로 귀신같이 방향을 틀었고, 오늘도 난 맞는구나 한숨 짓는 것과 동시에 퍽 하고 먼지가 피어 올랐다. 리나가 던진 것이 항공 모함을 뺨치는 신발이 아닌, 그보다 훨씬 가벼운 슬리퍼였다는 점에 그저 만족하도록 하자.
『이잉! 제가 리나님 돈을 떼먹기를 했나요, 아님 해꼬지를 했나요. 웬수라는 표현, 맘에 안 듭니다.』 『싫어? 그럼 정정하지. 이 철천지 웬수야!』 옆구리에 한쪽 손을 얹은 채 리나는 악을 썼다. 『도대체 세일룬 국립 도서관에 가서 뭔 짓을 저지른 거야?! 앙?!』
뭘 하긴. 무녀 둘이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조기 성교육을 하고 있길래 호기심에 참관하고 왔을 뿐이다. 『요즘은 정말 빠르더군요. 일곱 살 아이들 앞에서 암술이 어떻네, 수술이 어떻네, 수정이네 하면서 땀을 빼고 있더라고요. 덕분에 전「최신판 대륙 도서관 순례」8월호를 빌리는 것도 잊었습니다.』 리나의 왼손에 여전히 쥐어져 있는 슬리퍼 한짝을 경계하며 제로스는 자세히 설명했다. 『무녀들은 스케치북에 그림까지 그려서 애들에게 보여줬어요. 암술과 수술이 만나 씨앗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라면서 꿀벌이 날아가는 걸 손짓으로 묘사하면서요.』 『하.』 『맹세하는데 전 뒤에서 얌전히 보고만 있었습니다.』
고놈의 맹세 삼천번만 하면 바다가 육지 되겠다. 리나는 실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얌전히 보고만 있었어? 웃기지 말라고 그래. 어리둥절해 하는 맨 뒷줄의 아이 앞에서 피식- 웃고는,「왜 웃는 건데요? 사제님」이라며 궁금해 하는 아이에게「저건 다 거짓말이랍니다」라며 바람을 잡았잖아! 리나는 음울한 표정을 지어가며 슬리퍼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왔다. 움찔, 하고 제로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아이는 양배추에서 태어나는 거예요」라며 속 보이는 장난을 걸고, 무슨 놈의 심술보가 발동했던지「혹시 어제 저녁에 양배추 샐러드를 먹었나요? 그럼 기다리던 동생은 영영 태어나지 못하겠네요」라고 말해 겁 먹게 만들고! 얌마! 그게 철 들은 어른이 할 짓이냐?!』 『철이 왜 머리에 듭니까. 망간도, 마그네슘도 마찬가지죠. 중금속이 머리에 쌓이면...』 『시꺼.』 리나는 악당을 응징하기 위해 슬리퍼를 높게 들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을 든 것도 아닌데 우리의 마족 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어깨 속으로 숨겼다. 그치만 말이다. 꽤나 억울하다. 가우리에게 물어봐라. 양배추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거다.
『그렇죠? 양배추에서 아기는 태어나는 거 맞죠?』 『어... 학이 물어다 주는 건 아니고?』 우리의 순진한 쿼터 엘프는 제로스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봐! 학이 물어다 준다잖아!』 리나는 반박할 여지를 일찌감치 봉쇄하고 한층 더 으르렁댔다.
여러분? 아기는 학이 강보에 싸서 물어다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천을 오염시켜 학이 사라지면 인구 감소률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어요. 인구가 줄면 급속 고령화 사회가 되어 위기 상황이 도래하게 되어요. 세금은 늘고, 사회 활력은 감소하고, 경제가 위축되어요. 그렇게 되고 싶어요? 되기 싫죠? 그러니까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거예요. 자, 노트에 옮겨 적으세요. 내일을 위해 학을 보호하자. 아셨죠?
마족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암술, 수술 타령을 하던 무녀들도 저 지경까진 아니었다. 꿀벌의 날개짓을 흉내내며, 모호하게, 뭉떵그려서, 대충 이렇겠거니 얼버무렸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거시기 하다. 그런데 리나는 꿀벌이 알을 낳았다는 식으로 우기고만 있다. 제로스는 흥미를 잃어버린 표정을 하고 의자에 엉덩이를 기댔다.
날 야단치는 것도 좋지만... 잘 하는 짓입니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 아기 만드는 법을 모르는 서방 탓에 아차하다간 처녀 과부로 늙어 죽게 생겼다는 건 잠시 잊었군요, 당신.
『뭐, 양배추에서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치고.』 『안 태어난다니까.』 『어쨌든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메론 내지는 수박에서 아기가 태어나도 괜찮습니다.』 마족은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생선 상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다만 궁금했을 뿐입니다. 뽀뽀가 뭔지도 모르는 일곱 살 어린 아이들에게「아기는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거예요」라는 교육이 왜 필요한지가요.』
음, 그건 말이지... 리나는 난처한 듯이 이마를 긁었다. 그리고 잠시 손에 쥔 슬리퍼를 물에 젖은 걸레인양 뒤틀었다. 이걸 무어라 설명하면 얼굴이 점잖아질려나. 하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모르던 철부지 시절에 언니의 방문을 노크하고「언니, 탐폰이 뭐야?」라고 물었을 적에 루나는 멎적게 웃기만 했다. 웃기만 했던가. 모닝스타를 들어 적의 머리를 쳤다. 그렇다면 나도 철퇴를 들어...
『우왓! 들지 마요!』 『들지 마? 그럼 묻지를 마.』 리나는 가볍게 대꾸하며 몽둥이처럼 치켜 올린 슬리퍼를 도로 내렸다. 『어쨌든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말이지, 제로스. 애들은 단순하잖아? 그래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몸이 왜 다른지를 두고 싸우곤 해. 너는 왜 촌스럽게 쭈그리고 앉아서 오줌을 누니 - 뭐하러 그렇게 곤란해 보이는 살색 막대기를 다리 사이에 끼고 있니 - 이런 식이지. 그래서 선생님들은 서로 욕하고 싸우지 말라고 미리미리 가르치는 거야.』 『정말이예요?』 『정말이라니. 거기서 어떻게 반문이 나오냐. 성별이 없는 마족 나으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어렵나?』 『어렵네요. 남자와 여자의 생김새가 다르다는 점을 아동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꽃가루를 다리에 묻힌 꿀벌 사진과 복숭아 씨앗 단면을 보여준단 말예요?』 『인간은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거기까지 말한 리나는 슬리퍼를 가지고 야구 배트, 내지는 모닝스타를 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나서 일주일 뒤의 일이다. 해왕 다루핀이 무보수로 기꺼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속칭「마족 카페」라는 곳으로 마족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무슨 일인데 집합 명령이 떨어진 겁니까? 해왕님.』 『내가 안 불렀다. 수신관이 불렀지.』 하루종일 계속된 테이블 행주질에 지친 마왕님께선 턱짓으로만 제로스를 가리켰다. 문제의 수신관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꽃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여러분? 꽃에는 꿀벌이 날아들어요. 자, 그럼 귀찮은 벌레는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요. 예! 바로 그겁니다. 파리약을 가져오세요. 이렇게 한 번만 쉭~ 하고 약을 뿌려주면?』 『질문입니다. 위협을 받으면 새로운 여왕 벌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요.』 『그럴 적엔 여왕 벌까지 신속하게 처치하면 되지 뭐가 불만이오. 하여간!』 『하여간이고 두여간이고 간에... 꽃과 꿀벌이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수신관님.』 『마족도...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에?』 다들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제로스는 싱긋 웃으며 행주를 가지고 야구 배트, 내지는 모닝스타를 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 리나에게 이상한 거 배워오지 말게, 수신관.
Posted by 미야
2006/09/27 14:18
2006/09/2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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