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이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지만 덜컹 소리도 안 났다. 1mm도 안 움직인다. 혹시나 싶어 이번엔 아까와는 반대로 밀어도 보았다. 뭐냐, 이것은. 모양만 문이고 실상은 벽이다? 의심해가며 손등으로 똑똑 두둘겼다. 『극사실주의 터치로 벽에 물감으로 그린 거라면 나무 두드리는 맑은 소리는 나지 않지요.』 그라바스의 지적에 한쪽 귀를 가져가 울리는 소리를 직접 확인해봤다. 하여 그림일 거라는 가설은 아깝다 생각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리 오너라~ 열려라 참깨. 안 열어주면 쳐들어 간다.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을 해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폭탄을 던져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견고함을 자랑하며 혓바닥을 베에 내밀었을 뿐이다. 슬슬 약이 오르려 했다. 유나는 접착제로 고정시켜 놓은 듯한 출입구를 노려보며 검을 빼어들었다. 사람처럼 두 귀가 붙어있지 않은 나무 문이 그런다고 자세를 달리할 리 없지만... 또 아나. 『이얍!』 에이, 손해만 봤다. 손목만 저렸다. 찌잉 하고 독특한 통증이 어깨까지 타고 올라왔다. 골렘을 무 자르듯 하는 검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다니, 과연 마법은 대단하다.
『원래 긴급재난시 피난처용으로 만든 곳입니다. 간단히 부수어지면 체면이 서지 않겠지요. 맷돌로 치거나 불을 질러도 저 상태론 꼼짝 안 할 겁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마법사를 불러와 봉인 해제를 시키거나, 아니면 안에서 얌전히 열어주길 기다리거나, 포기하고 다른 출입구를 찾아봐야겠지요. 셋 다 쉽진 않겠네요.』 『확실히 쉽지 않겠어. 그렇담 너의 그거... 는 안 통하겠나.』 「그거」라고 말하면서 유나는 화살을 쏘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라바스는 이렇다는 말 없이 멎적게 웃기만 했다. 안 통하는 거군. 유나는 이상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건물의 지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데몬씨는 어디로 갔나? 뒤쪽을 살피러 그라바스와 같이 사라져선 여지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 우물에 빠졌나 싶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면 굴뚝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답시고 용을 쓰다 중간에서 꽉 끼어버렸... 우에, 싫다. 옴짝달짝 못하게 되어「데몬 살려~!!」를 외치는 장면을 상상하다 말고 급히 팔뚝을 긁었다. 정말로 끼어버렸다면 오늘 저녁은 바싹하게 잘 구워진 데몬 훈제다. 그것도 역겨운 소시지 냄새를 풍기는... 막힌 굴뚝을 소제할 청소부는 아마 평생 소시지 같은 건 입에 대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아서요, 유나.』 굴뚝 속에서 소시지가 되어버릴 데몬씨까진 생각 못했다. 하지만「지붕을 통해 접근해본다」건 고민해봤다. 그녀를 따라 지붕으로 시선을 가져간 그라바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둥글게 생긴 지붕 위에서 무슨 재주로? 용케 밥사발 위로 올라갔다 해도 2분을 채 못 버틴다. 뾰족 지붕에선 그래도 박공에 매달리고, 기와에 손톱을 틀어박고, 빗물통에 엉덩이를 걸치고 나는 미쳤소이다 소리도 지를 수 있다. 하지만 둥근 지붕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붙잡고 매달릴 건덕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불을 지르려고 횃불을 던져 올려도 스륵 미끌어져 떨어져 버린다. 횃불이 그러니 사람도 스륵 떨어진다. 단연 최강. 모양을 저렇게 만든 까닭은 단지 심미적 요소 때문이 아니다. 신발 바닥에 쇠못을 촘촘히 박아넣고 난 뒤에는 모르겠다만. 지금처럼 평범한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 있는 상황에선 꿈도 꾸지 않을란다.
하여 그라바스는 정색하며 도리질했다. 『차라리 지붕을 무너뜨리는게 낫죠.』 『맞는 말이다.』 『에.』 『무너뜨리자.』 이봐요, 언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런 끔찍한 대사를 읊는다는 점에서 이 여자의 출신 성분이 의심스럽다. 무너뜨려? 지붕을? 화약도 없이?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찻집에 가면 설탕 단지라는 것이 있지.』 『여기서 설탕 단지가 왜 나옵니까.』 『앞질러가지 말고 잘 들어봐라. 뚜껑이 있는 설탕 단지에 스푼을 끼어넣곤 주먹으로 스푼 머리를 팡 내려치는 거야. 그럼 단지 뚜껑이 멋지게 날아가면서 안에 든 설탕이 위로 확 솟구치지.』 『그런 몹쓸 장난을... 청소는 어쩌라고. 유나는 어렸을 적엔 나쁜 어린이였군요.』 『나? 아냐. 내가 아니고 찻집 아르바이트생이 그랬다.』 『에? 그런 짓을 하고도 짤리지 않는 아르바이트생도 있답니까. 간도 크군.』 『크고 작고 이전에 다루핀 그 자에겐 아예 간이라는게 없는데.』 『에.』
상황 A와 B를 이해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그라바스를 뒤로하고 유나는 여전히 설탕 단지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저 건물이 거대하게 확대된 설탕 단지라고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둥근 돔 지붕 바로 아래로 튼튼한 스푼을 끼워 넣고는... 주먹으로 팡.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지렛대의 원리에 따르면 기다란 막대기 하나로 별을 움직일 수 있다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가르쳤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문제는 결코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막대기와, 힘줄 돋아난 튼튼한 주먹일 터. 그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나머진 과학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럼 결정했다. 적당한 막대기를 구하여 보자.
그라바스는 앗 소리 질렀다. 말리려 했는데 늦어버렸다. 이것이 정답이다 싶자 유나는 자신의 장검을 달 표면에 박힌 전설의 롱기누스의 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큰 숨을 들이마시고 그대로 으라차차, 은빛의 흉기가 쏜살같이 날아가 단단한 외벽에 쩡 소리를 내며 박혔다. 앗싸, 성공. 여자는 만족해하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막대기는 구했다.』 『우앗! 구하긴 뭘 구했다는 겁니까!』 벽에 박힌 칼날은 아직까지도 특유의 울림 소리를 내며 부르르 진동하고 있다. 그라바스는 질린 나머지 머리를 감싸쥐었다. 만만치 않은 높이에, 공략이 결코 쉽지 않을 거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저놈의 무시무시한 흉기를 냅다 던져버려? 그게 제대로 된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이냐! 『아무리 팔뚝이 굵다고 해도 그렇지! 튕겨나오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안 튕겨나왔으니 되었다.』 『되긴 뭐가 되었다는 겁니까. 저기서 도로 뽑아내는 일도 장난이 아닐텐데. 어휴!』 『장난 아니긴. 긍정적으로 사고해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저기에 박힌 검 손잡이 위로 200마리의 코끼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럼 설탕 단지 뚜껑은 뻥 소리를 내며 날아갈 걸.』 『코끼리 200마리?! 그것도 차곡차곡?! 그런게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화가 잔뜩 나서 악을 쓰는 청년의 어깨로 그녀가 차분히 손을 얹었다. 그런데 어랍쇼. 어쩐지 눈빛이 짖궂다. 『물론 가능하지 않지, 그라바스.』 『아앗?!』 그제서야 퍼득 깨달았다. 『날 놀린 겁니까?!』 『그걸 이제 깨달았나. 생각보다 바보로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유나는 싱긋 웃었다. 『여기서의 요점은「지렛대」가 아니지. 봤어? 칼이 박혔다구. 중요한 건 흠집도 나지 않던 출입문과는 달리 저 위엔 방어 마법이 안 걸려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물리적으로 공략이 가능하다는 것!』 찍고, 때리고, 두둘기고, 걷어차면 어떻게든 구멍이 생긴다. 유나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 하는 청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잘 조준해서 쏴.』
천벌 받을 짓을 저지른다며 고함을 질러대는 한 다스의 주민들을 상상했다. 난 이제 큰일 났어, 현상금 수배범 포스터에 내 얼굴이 올라갈 거야, 곡괭이로 무장한 사람들이 머리를 노릴 거야, 천인공노할 악당이 되어버린 거냐며 화가 난 할머니가 비스퍼랑크를 날릴 거야... 끙끙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퓽 소리와 함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화살이 날아갔다. 몬스터를 박살낸 적은 많다. 해적선을 침몰시킨 적도 있다. 성당을 공격한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쾅 하는 굉음과 같이 해서 벽돌이 떨어져 나갔다. 그라바스는 코를 간질이는 먼지에 콜록 기침하면서 두 번째 바람의 화살을 연달아 쏘아 올렸다.
유나는 쏟아져 내리는 파편에도 아랑곳 없이 2층 높이 가량을 단숨에 올라갔다. 손바닥에 파리 끈끈이 접착제라도 발랐나 싶을 지경이다. 발목에 힘을 주고 팔을 위로 쭈욱 뻗는다. 맨손 암벽 등반 대회 우승자가 선생님이라 부르며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도 남겠다.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는 것도 잠시다. 옆구리에서 재빨리 단검을 꺼내 크랙 사이로 억지로 밀어넣었다. 그걸 손잡이처럼 잡고 상체를 끌어 올렸다. 어디에선가 와지끈 소리가 들렸다. 쳇 하고 혀를 차면서 피가 나는 손을 아픔에 겨워 오무렸다.
『유나, 전 밧줄이 없어 못 따라 갑니다!』 난 스파이더맨이 아니거들랑요 - 라는 하소연을 삼키면서 그라바스가 악을 썼다. 『기다려주진 않는다. 맘대로 해.』 쌀쌀맞은 언니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그리 대꾸하며 힘을 실은 왼발로 깨어진 벽돌을 마구 걷어찼다. 따라오든, 따라오지 않든. 애초부터 그녀는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것이 편하다.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후욱.』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쓰라리다못해 격렬한 통증을 호소하는 오른손을 쳐다봤다. 가운데손가락 손톱이 꺾여져 절반이나 없어졌다. 쓴 웃음을 지어가며 벽에 꽂힌 장검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피투성이. 붉디 붉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
몸무게를 실어 억지로 올라탔다. 제법 큰 덩어리의 회벽 조각이 떨어져 나가면서 검날과 같이 그녀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Posted by 미야
2006/08/25 15:10
2006/08/2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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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걸 좋아하니 요리를 잘 하면 오죽 좋으랴만은, 실상은「맛 없어 도저히 못 먹겠다」위험 수준에서 겨우 한 걸음 뗀 정도이다. 돌멩이도 가뿐히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이 미각을 담당하는 혀를 압박(협박)하여「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랄까.
짜고, 맵고, 달고, 싱겁고, 닝닝하고, 구수하고, 텁텁하고, 찝찔한 맛이 한데 버무려진,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의 맛이었다. 마나님이 조리한, 말린 토끼를 넣은 스프를 숟가락으로 휘젖다 잠시 맛을 보던 가우리는 엑- 하는 표정이 되어 이마를 찌푸렸다. 냄새는 그만하면 괜찮은데 혀에 닿는 스프는 워째 톡톡 엽기 캔디 비슷하다. 누린내 제거를 위해 넣은 향초가 상하기라도 했나, 아님 소금을 덜 넣어서 이러나. 불쾌하게 입맛을 다시고 도로 뚜껑을 덮었다. 당근을 1mm 두께로 썰어낼 줄은 알아도 간 맞추는 일은 쥐약이다. 따라서 리나를 대신하여 소금통의 내용물을 한 숟갈 덜어 냄비 속으로 집어넣어도 될련지 자신이 없다. 그러니 15분 정도 더 끓이는 동안 그 맛이 지금보다 괜찮아지길 간절히 기도해보자. 또 아나. 쉬피드가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 둘이 먹다 까무라칠 환상의 스프가 완성될지. 비나이다, 비나이다. 가우리는 냄비 앞에서 정성을 다하여 합장했다.
제로스는 엎드려 절까지 하려는 가우리를 맘껏 흉봤다. 그들 세계의 신이 이미 죽어 백골이 되었다는 점은 무시하더라도 쉬피드가 인간 먹거리에 관심을 보였을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인간이 염소처럼 건초를 먹는다 해도 그런가보다 넘어갔을 거라는 확신마저 든다. 과거, 샤브라니구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또한 자기 자신밖엔 몰랐다. 그러니까 대륙 곤드와나를 바다 밑으로 수장시켰음에도 그 대단하신 여신은*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쉬피드는 요리의 신이 아닙니다.』 『그럼 요리의 신은 누구인데?』 정말로 궁금하다며 물어보는 순진한 쿼터 엘프 청년을 향해 마족은 손가락을 흔들며 거짓말을 했다. 『쯧쯧. 여지껏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 유명한 분을. 요리의 신은 마이클 조던이라는 분입니다.』 『그렇군. 알려줘서 고마워. 그럼 마이클 조던님? 토끼 고기 스프를 맛있게 만들어 주세요.』 그 뻔한 거짓말에 쉽게 넘어가 요리의 신이 아닌 농구의 신에게 빌고 보는 가우리였다.
어쨌거나 자꾸 열면 누린내가 나니 그러지 말라는 가우리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마족은 기어코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생물도 아닌 주제에 이상한 곳에 흥미를 보이곤 하는 제로스다. 보글보글 끓는 맛있는 육수에 군침을 흘릴 것도 아니면서 손가락을 찍어 직접 맛을 보는 기행도 서슴치 않는다. 뿐만 아니다. 뭔가 재료가 모자른다 싶으면 과감하게... 퐁당. 근방에서 잡아온 것이 분명한 메뚜기를 통째로 집어 넣었다. 어디까지나 진지한 표정으로... 퐁당. 요리는 도전이다. 모험심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가야 한다.
『이놈의 자식이.』 살인보다 더 끔찍한 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행위. 세 번째 메뚜기가 스프 냄비 속으로 다이빙 하는 걸 목격한 리나는 숟가락을 부러뜨리려 했다. 서슬 퍼렇게 이마에 돋아난 힘줄~♡ 절반은 찌그러진 억지 미소가 아슬아슬하게 입가에 걸렸다.
제로스는 펄쩍 뛰었다. 『앗! 리나님! 언제 오셨습니까?』 『언제 오시긴요. 적당한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지금 왕림하셨습니다.』 『그러십니까.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리나의 목소리가 즉각 확장되었다. 『이보게, 수신관. 자네는 저승 갈 적에 뭘 가지고 가나. 저승 길 도시락으로 내가 메뚜기 반찬 싸줄까. 아~앙?! 이게 어디서 먹는 걸 갖고 장난을!』 『장난이라뇨. 이것은 어디까지나 값 싸고 (들판에서 잡기만 하면 되어요. 무료입니다!) 질 좋은 단백질 영양 공급원입니다. 날로 먹어도 괜찮고 익혀서 먹으면 한층 고소한 미감이라는 것이...』 리나는 변명 같은 건 듣기 싫다며 숟가락으로 마족을 마구 때렸다. 『죽어줘. 제발 죽어줘~!!』
예토 평지 - 초원 지대 델커라에선 먹거리가 귀하다. 뻥 뚫린 들판을 가로질러가는 아메리카 들소떼 - 일명, 맛있는 고기 - 같은 건 여기엔 없다. 1년 내내 땡볕이다가 우기가 되면 작정하고 비가 퍼붓는다. 흙을 갈퀴로 파헤치는 미친 빗줄기가 그치면 그 다음엔 찔끔거리는 오줌 빗방울이 어쩌다 메마른 땅을 위문한다. 큰 물이 땅에 깃든 영양분을 모조리 쓸려보낸 뒤엔 비가 요만큼도 안 내리는 악순환의 반복 탓에 난쟁이 똥자루 나무 사이로 비실대는 풀들만 자라나 사람은 물론이고 몸집 큰 동물이 살아가기엔 환경이 영 편편치 않다. 100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던데 정신 차리고 보니 코 앞으로 사막이 진출해 있다. 기후는 계속 건조해져 앞으로 30년 뒤엔 풀조차 나지 않을 거란다. = 식자재는 무지 희귀하다.
『누구는 전갈도 튀겨서 먹는다고 하던데. 치이.』 리나로부터 숟가락으로 맞은 뺨이 얼얼했다. 일부러 잡아가지고 온 메뚜기 서른 여덟마리를 도로 풀숲에 풀어주면서 제로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잡는 건 한나절인데 풀어주는 건 1초밖엔 안 걸린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서글픈 마음에 - 마나님 먹을 식량이 달아난다 - 도망치려던 메뚜기 뒷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눈치는 삼단이다. 리나는 허리를 굽혀 신발 끈을 푸는 시늉을 해보였다. 미사일처럼 날아올 신발이 두려운지라 마족은 얼른 메뚜기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놈아! 차라리 곰을 잡아와.』 『곰은 초원에선 살지 않아요. 대신 살고 있는 건 도마뱀이나 사막 쥐, 내지는 뱀...』 『그럼 도마뱀을 잡아와.』 『오~ 도마뱀은 드실 수 있어요?』 『내가 미쳤냐?! 먹진 않아. 대신 가죽을 벗겨서 동전 지갑으로 만들지.』 말투가 워째 영 살벌하다. 제로스는 그 가죽이 벗겨지는게 도마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닐까 염려되었다. 어쩌면 확신이다. 그녀가 눈빛으로 제로스의 살갗 상태를 잘 살피고 있음이다. 하여 짤막하게 에그머니낫 비명 지르고 두 팔로 가슴을 껴안았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는 옛 말은 있지만 마족의 사정이라는 건 잘 모르겠다. 빈약하여 껍질도 얇은데 과연 남길 수 있을까? 가죽...
그걸 가재미눈으로 야리면서 리나는 제로스 몫의 접시로 국물에 퉁퉁 불은 - 스프에서 건져낸 메뚜기 세 마리를 올렸다. 『허억.』 『뭐여, 그 얼굴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라며.』 『마족에겐 단백질은 필요 없는데요.』 『그럼 정정하마. 이건 단백질이 아니야.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망할, 젠장, 이걸 날 더러 먹으라는 것이냐」라는 것이다. 먹는 방법? 눈물을 매달고 이로 아작아작 씹으면 되지. 못 먹겠다거나, 남기겠다거나 식으로 나오기만 해봐.』 리나는 주먹을 쥐어보이고 위협했다. 『달 나라까지 날려보낸다.』 협박이 무서워 제로스는 포크를 쥐고 삶은 메뚜기의 배 부분을 푹- 찔렀다. 윽, 누런 국물.
『그나저나 졸탄 남작이 봤다는 환상의 호수는 이 먼지 바닥 어디에 콕 숨었을꼬.』 국물에 충분히 불렸음에도 말린 토끼 고기의 육질은 형편 없었다. 구두 밑창을 씹는 기분으로 열심히 어금니를 움직이며 리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도록 배가 고팠음에도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려 하질 않았다. 이러다 토하겠다 툴툴대며 냄새 나쁜 국물을 코를 쥐고 호륵 마셨다. 토하진 않았지만 구역질이 났다. 웩 소리내며 한참을 헐덕였다. 『천천히 드세요. 안 뺏어 먹어요.』 『관심 꺼.』 『저런, 리나님 화났다.』
졸탄 남작은 허풍선이 남작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많은 여행기담은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책 100선 반열에 훌륭히 올라가 있다. 그만큼... 남작의 여행담엔 과장이 많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사슴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더란다. 걱정하며 모닥불을 피우고 큰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데 눈보라가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러다 동사하겠다 걱정하며 얼굴을 드니 꽁꽁 얼어붙은 산 정상으로 눈이 풀 바른 편지봉투인양 한곳에 뭉치기 시작했다.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눈뭉치는 번쩍이는 성으로 둔갑했다. 남작은 이게 어연 기적이냐 해가며 황급히 성문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자비를 베풀라 하소연하며 얼음으로 만들어진 문고리를 두둘겼다. 그러자 안에서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오크 둘이 나와 정중하게 어서 오시라 허리를 숙이더라나.
순 뻥. 리나의 얼굴 가죽이 일그러졌다. 호랑이 팬티를 입은 오크가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보라고 그래.
『그 허풍선이가 쓴 책을 믿고 여기까지 나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그 맛 없는 걸 우걱우걱 먹어 치우면서 가우리가 한 마디 했다. 『어디까지나 이리 와보자고 말을 꺼낸 건 너라고.』 『아아, 그랬지.』 『왜 그랬어?』 『그건 말이지, 가우리. 뭔가 마음에 걸리는게 있었거든.』
졸탄 남작이 쓴 여행기는 모두 열 다섯. 리나가 찍은《마법의 호수로 가라앉은 마왕 검》편은 그중에서 여덟 번째 책이다. 『무엇이 걸린다는 건지요. 전작과 비교해서 그렇게 큰 차이는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삶은 메뚜기에서 떨어져나온 대왕 더듬이를 접시 밖으로 버리면서 제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나를 흉내내어 남작의 책을 하품을 참아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본 터다. 책장을 다 넘기기까지 이걸 불태워 말어 하고 얼마나 갈등했던지. 끝내주는 허풍은《마왕 검》편에서도 유감없이 등장, 책은 하루 아침에 별이 두 번이나 뜨면서 요정이 떼로 나타나 울라불라 댄스를 추고, 모두의 환호성과 함께 마왕 검은 호수에서 불쑥 떠올라 뜨거운 수증기를 발생시켰다 - 라고 적고 있었다. 애들도 안 믿는다. 포크로 접시를 훼적대면서 제로스는 코웃음 쳤다.
『맞아. 동화야.』 리나는 간단히 긍정했다. 동시에 반박했다. 『그치만 다른 여행담과는 달리《마법의 호수로 가라앉은 마왕 검》여행기엔 묘한 구석이 있다니까. 이를테면「나, 졸탄 남작은 웅장한 테오베의 검은 비문을 서쪽으로 하여 바라보며 말을 타고 사흘 반 나절을 내리 걸었도다. 말들이 피곤을 호소하여 시종 멜부르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을 적에 기적처럼 얕은 강 사츠가 나타나 모두 앗싸 좋구나를 외치고...」라는 구절. 사츠 강은 실제 지명이야. 단, 그때도 이미 건기에는 물이 흐르지 않었어.』 『실제 지명이라는게 뭐가 어때서요. 남작이 지도를 보고 모험을 상상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건기엔 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얕은 강이야. 지도에 그게 나올 것 같아? 물 흐르는 자국만 있어선 이름 날리는 지도 제작자도 어지간한 이상 빼먹기 쉽지. 이방인이 그걸 강이 아닌「갯물」취급을 했을 적엔 더더욱 그래.』 『그렇다는 건 남작이 사츠 강을 직접 보았을 확률이 높다는 거겠군요.』 『아니면 그 사츠 강을 잘 아는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거야.』 『여덟 번째 여행기는 전작과 달리 완전 뻥은 아니라는 것?』 『바로 그거야. 거기다 단 하룻만에 별이 두 번씩 뜨고 졌다고 했지?』 『예, 그랬죠.』 『처음엔 나도 이 부분이 동화적 허구라고 생각했어. 그치만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남작이 여덟 번째 여행담을 출판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 집필에 반년에서 1년이 걸렸다고 가정하고 천문박사에게 확인해봤지. 내 짐작이 맞았어. 천문박사는 비슷한 시기에 대단한 일식이 있었다고 했어. 그래서 하늘이 새카맣게 어두워졌고 대낮임에도 별이 보였던 거야. 덕분에 남작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별을 볼 수 있었던 거였지.』 『그거 말 되네요, 리나님.』 『말만 되나. 그림도 되어요.』 『그래서 요정들의 울라불라 댄스도 사실일 거라는?』 『그가 봤던 것이 보통의 요정이 아니라 일종의 결계 붕괴 현상이었다면 간단하게 설명이 된다구. 때는 일식. 계약과 맹세의 주문이 깨어지기 쉬운 조건 아니겠어? 땅도 흔들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난리 부르스를 추더라 식의 내용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마법 현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밖엔 이해할 수밖에 없었겠지.』
리나는 스프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이건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계가 붕괴되면서 한 자루의 검이 기적인양 튀어 나온다. 앗싸, 마왕 검~! 파워 레인저의 포즈로 리나는 숟가락을 높게 들었다. 『봉인까지 되었던 거라면 대단한 마력 검일 지도 모르잖아? 조사해볼 가치는 그래서 충분하지.』
분위기 좋을 적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제로스는 서글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검이 아니라면?』 『으엉?』 리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제로스를 향해 돌아보았다. 『뜨거운 스증기가 발생하였다 - 라는 부분이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마법 검이 수증기를 발생시킨답니까. 스팀 다리미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의심이 드는 것이다. 거기다 상대는 환상 작가 졸탄 남작이시다. 『지반 틈새로 뜨거운 지하수가 솟구쳤고, 그걸 한 자루의 검이라고 묘사했다면?』 『에이, 싫다... 졸탄 남작이 그렇게 유려한 시적 표현으로 우릴 기만하려 했겠어?』 『그럼 이 표현은 무엇으로 설명하시렵니까.「하얗게 쭉 뻗은 길이는 약 15미터이나 그 기운을 폭발시켰을 적엔 30미터에 달하였다」이래선 가우리씨라고 해도 쥐고 휘두를 수 없습니다. 이건 검이 아녜요. 물기둥 같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 이크!』 마나님 도끼 눈을 뜨고 쳐다본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 입 다물라. 하여 제로스는 얌전히 삶은 메뚜기를 입에 넣었다. 내가 무어라 했는감요. 그러니 거기 있는 소금통이나 주시구랴. 이 메뚜기는 간이 영 싱겁소.
리나는 소금통을 애원하는 마족은 무시한 채 가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가우리? 내가 꼭 멋진 검을 찾아줄게.』 『응.』 『정말이야. 진짜로 찾아줄게. 너의 실력에 걸맞는 검을 꼭 내가 쥐어줄게.』 『그럼 고맙지.』 『그런데 공짜로는 안 되고 한 달에 대여비 금화 다섯 냥 받고 빌려줄게.』 『리나. 나 그럴 돈 없어.』 『그럼 금화 한 냥!』 『...』 『안돼? 그럼 은화 닷냥!』 『차라리 날 그냥 죽여.』 『인심 팍팍 쓴다! 은화 한 냥!』
수중에 칼도 없는데 장난부터 치는 그들이었다.
Posted by 미야
2006/08/11 16:43
2006/08/1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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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요. 더워 죽겠어. 이러다 진짜 죽겠어... 다루핀과 만담 커플을 이루는 골디는 슬레이어즈 오리지널이 아닙니다. 슬레이어즈에서 골디라는 녀석이 나왔던가 고개를 갸웃하시는 일 없기를 바랍니당. ^^ 그가 주인으로 있는 마족 카페는 이전에도 여러번 나왔으니까 설명은 생략할게요.
마족들도 카드를 갖고 놀 수 있느냐 의아해 하진 말아주기 바란다. 그들에게도 놀이 문화가 있다. 20년 전까진 체스가 인기였다. 그 전에는 오목이었고, 그 전전에는 부르마블 게임이 대 유행이었다.
『자! 카드 한 장 받으시고, 넘기시고.』 룰은 초 간단하여 단순한 도둑잡기 게임 비슷하다. 모양이 동일하고, 숫자가 연속되는 카드 다섯 장을 모두 모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예를 들면 스페이드의 4부터 8까지 모으면 윈 카드가 된다. 마찬가지로 하트의 2부터 6까지 모아도 윈 카드다. 『누가 클로버의 5를 가지고 있는 거냐. 모으는 녀석 있으면 날 위해 포기해.』 『그런 걸 상세하게 물어보는 건 반칙이다, 인석아.』 『게임 시작 전에 그런 말을 한 녀석은 없잖아. 그럼 반칙은 아닌 거야. 내 말이 맞지?』 손에 가지고 있는 다섯 장의 카드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패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각자 눈을 굴리고 있다. 게임 자체는 어린애 장난 같아도 분위기 만큼은 강마전쟁 시절만큼 치열해서 커다란 아몬드 눈에 녹색의 파리 눈알이 정신 사납게 돌아갔다. 너무 핑핑 돌아 팽이가 얼음판에서 고속회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윈 카드!』 그들 중 하나가 회색의 촉수를 꺼내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망할. 마부아스! 너 지금 여섯 장이나 가지고 있잖아!』 『여섯장? 어랍쇼, 이게 어디서 돋아났지?』 『자꾸 짜증나게 하면 마흔 여덟 개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버린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아싸, 그렇담 이번엔 내가 윈 카드!』 『얌마! 기다려. 지금 윈 카드 부른 놈이 어느 놈이야!』 『저, 접니다. 해왕님.』 『취소해. 아직 난 하트의 8을 갖지 못했어.』 『그런 억지가!』 『정 억울하면 네가 나 대신 마왕이 되던지. 자! 그럼 나에게 카드 한 장 넘기시고... 좀 전에 윈 카드 부른 건 무효다. 아니라고 하면 알지?』
무효라는게 대관절 무엇인데요. 무 밭에서 효자가 나왔다는 건가요, 아님 無(무)자에 성낼 哮(효)를 달아 성내지 말라는 뜻인 건가요. 아몬드 눈알은 꽤나 억울했던 것 같다. 살기등등 마왕님께 감히 개기진 못하겠고, 그렇다고 어렵게 모은 카드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몬드의 커다란 눈이 옆으로 힐끔 돌아갔다. 나는 못해도 당신이라면 한 마디 할 수 있잖아요 - 하면서 애원을 담아 골디를 바라보았다.
구석에서 혼자 차갑게 식힌 맥주를 마시고 있던 골디는 코웃음부터 쳤다. 가뜩이나 기분이 꼴통인데 저놈의 마왕까지 짜증을 유발시키고 있다. 용병질에 뼈가 굳으신 몸께서 감히 실수라는 걸 했다. 돌격 도중에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덕분에 팔이 분질러졌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만 했는데 어느 멍청이 마법사가 호의를 베풀어 리커버리 주문을 걸어주는 바람에 S자 모양으로 뼈가 잘못 붙어 버렸다. 아차 하는 사이에 검을 쥐지 못하는 팔 병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후방으로 급히 돌아와 군의관에게 휘어버린 팔을 보여줬더니만...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하는 말, 더 이상의 치료는 쓸모가 없고 잘못 붙은 뼈를 망치로 기냥 부러뜨려야 한댄다.
얼어죽을, 빌어먹을, 젠장맞을. 기분이 상한 골디는 용병 길드에 위약금을 지불하고 그 날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입에 수건을 단단히 물고 뼈가 잘못 된 팔을 망치로 걍 후려 갈겼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골디는 남태평양 저기압이다. 『임마, 마왕.』 그러니까 초반부터 욕설이다.
『이래선 게임이 되질 않잖아. 다른 녀석이 윈 카드를 부를 적마다 어떻게든 토를 달아서 무조건 무효화시키면 어쩌자는 거야.』 심지어 초록색 코딱지를 일부러 카드에 묻혀 부정을 저질렀다며 우기기까지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아가미 달린 마족에게 코딱지가 다 뭐냔 말이다. 붕어 코딱지라는 거 들어는 봤나. 기운이 없어 흥 소리도 나지 않는다. 『자네, 계속해서 그딴 식으로 굴면 수신관이 되어 버린다.』 아싸, 충격 발언. 촉수 마족에게서 뒤집어진 카드 한 장을 넘겨받던 다루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수왕부에서 난리가 난 것이 두어 달 전이다. 수왕 앞으로 머리통 일부가 날아간 제로스가 나타나 술 취한 인간인양 헤롱거리면서「아이쿠, 수왕님~」하고 넙죽 엎드렸다는 것이다.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아이의 머리가 2/3나 날아갔으니 돌부처라는 별명엔 아랑곳 없이 수왕이 쇼크를 먹은 건 당연지사. 아울러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를 두고 마계가 발칵 뒤집혔다.
「내가 잘랐는데요.」 맛이 간 것이 분명한 제로스는 히죽 웃으면서 경련을 일으키는 두 다리를 바닥에 죽 폈다. 「그런데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진 않네요.」 그러면서 단검을 들어 오른쪽 눈자위 부근까지 또 한 번 길게 찢으려 했다. 미치광이의 비릿한 미소를 띄우고 제로스는 이미 머리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여기요. 이 머리에 불편한 이물질이 하나 들어가 있어요. 이히히. 그걸 파내고 싶은데 잘 되질 않아요. 가끔씩 내가 아닌 것 같아요. 남의 머리가 내 몸뚱이에 달라붙었어요. 고장 났어요, 고장 났어. 이히히.」 술주정 하듯 중얼대던 혼잣말 그대로 녀석은 어딘가 고장난게 분명했다.
끔찍하게 망가졌던 머리가 한달 만에 (외모적으로) 원상복구되자 녀석은 부리나케 인간계로 달아나선 리나 인버스 궁둥이 뒤로 달라 붙었다. 그리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웃고 또 웃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가식적인 미소 따위가 아니라... 좋아서 웃은 것이다.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참견쟁이 다루핀은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야단쳤다. 그까짓 인간 계집애에게 집착이라는 걸 하지 마라. 그리곤 수신관의 머리통을 앞뒤로 거칠게 흔들어대며「고장난 나사야, 빠지거라」라며 외쳤던 것이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골디는 눈을 야렸다. 『그때와 똑같이 이번엔 내가 말해주랴? 그까짓 카드 게임에 집착이라는 걸 하지 마라, 마왕아. 말로 부족하면 네 머리통도 흔들어주마. 고장난 나사야, 빠지거라 주문도 걸어주지.』 다루핀은 창백해졌다. 『흐, 흔들면... 자네 파, 팔 아프지 않겠나.』 『아프지. 아직 뼈가 붙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당연히 아프고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디는 친우의 고장난 대갈통을 고치고자 천천히 (깁스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윈 카드 누가 불렀어. 아몬드 눈알 너냐?! 너냐?! 제기랄, 네가 이겼다! 이겼다니까!』 불도저 골디 앞에서 마왕은 재빨리 게임 오버를 선언했다.
Posted by 미야
2006/08/07 16:32
2006/08/0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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