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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3

화나게 만들면 글이 나오는 거냐고 정색하며 묻진 말아주세요. 린젤에서의 코멘트 탓에 기분이 나빠져서 자기 멋대로 엉뚱한 버닝을 한 건 맞습니다만... 계기는 그렇다치고 간만에 즐거운 기분으로 쓰고 있습니다. 정말 정말 즐겁습니다. (<-푼수)
아, 그리고 먼젓번에 댓글로 적었다 지웠는데 여기서 그라바스보다 유나가 연상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왕자님이 연상의 여인에게 어떻게 코가 꿰였는가 하는 거랍니다.


평범한 보통의 마부는 말을 다루면서 워워, 내지는 이랴,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게 사막으로 장소가 바뀌면 쮸쮸, 내지는 피피가 되어버린다. 썰매를 끌고 달리는 짐승이 말이 아닌 새다. 이 동네에선 말이나 당나귀가 알아듣는 소리를 내며 고삐를 잡아당겨선 일이 되지 않는다. 워워(멈춰)를 워워(점프~!)라 잘못 알아들었다고 새의 머리를 몽둥이로 칠 수도 없잖는가.
『자, 어디 한 번 멋지게 달려보자. 쮸쮸~!!』
외지인들은 이 광경에서 필연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 것도 때와 장소가 있다. 그라바스는 소리내어 웃기는커녕 반대로 창백해졌다. 이부가「쮸쮸~」하며 새의 발걸음을 독촉하자 모래 위를 미끌어지는 속도가 거짓말처럼 빨라졌다. 그 와중에 돌부리에 걸려 썰매의 몸체가 휘청였다. 눈앞이 아찔해진다.
앞서 이부는 말했다. 어떤 사람은 멀미를 일으킨다 - 확실히 그럴 법하다. 그라바스는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고자 손으로 얼른 입가를 막았다. 뜨거운 대기와 총알 썰매의 환상적 궁합! 머리가 목 위로 제대로 붙었는지, 아님 궁둥이에 붙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티카티카 새가 발톱으로 박차는 모래가 뒤로 앉은 이의 정면으로 쳐들어온다. 거의 끼얹는 수준이다.
가는 모래 탓에 콧구멍과 입은 따갑지, 속은 울렁거리지, 이 와중에 태평스럽게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황량한 사막 풍경을 감상하는 짓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

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개울가에서 세수도 해봤다. 갑자기 쳐들어온 산적떼와 미친 듯이 싸운 일도 있다. 산불이 난 산등성이에서 맨 발로 달리기도 해봤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수십 미터 아래로 번지 점프도 해봤다.
그래서 여간한 일에 얼굴색이 달라질 리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무엇 하나 장담해선 안된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안색이 새파랗군. 토할 것 같으면 상체를 숙여라.』
안절부절해 하는 그라바스와는 달리 여자는 총알 속도로 달려나가는 썰매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익숙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에 의한 자기 통제다. 추락하는 비행기에 앉아도 - 이 세계에 비행기가 있느냐 묻지는 말고 - 부처님처럼 고요할 거다.
『이보시오들? 많이 흔들릴 거요, 이 부근엔 바위가 많아서리.』
이부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덜컹- 하고 썰매가 높게 튕겨 올랐다가 내려 앉았다.
그라바스는 혼비백산하여 눈을 감았다. 이러다 통째로 뒤집히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자존심은 잊고 몸을 옆으로 기울여 가장자리를 꽉 잡고 매달렸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썰매가 한층 더 요란하게 좌우로 요동을 쳤다.
사람 살려. 목구멍 안까지 비명이 꽉 찼다.

『썰매를 모는 실력이 대단하군.』
유나의 혼잣말에 그라바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실력이 좋아? 그 반대가 아니고?
그치만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평온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면「이부 = 유명 배우와 함께 라스베가스 밤 거리를 활보하는 롤스로이스 자동차의 운전자」라는 공식도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흔들림이 없는 XX 침대 광고 장면이 생각나려 한다. 뜨거운 찻잔을 들고 있어도 옆으로 물 한방울 안 흘릴 거다. 썰매에서 튕겨나가는 일 없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그라바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이 어찌나 이질적으로 보이던지 그라바스는 유나가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라 주장해도 그대로 믿을 지경이었다.

『정말로 외계인은 아닐 것이고...』
『음?』
정말로 궁금해졌다. 저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당신은 엘프입니까?』
엉뚱한 질문이었다. 유나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니. 내 귀는 뾰족하게 생기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드래곤인지요.』
『그럴 리 없지. 내가 드래곤이었다면 날개를 펼치고 사막을 가로질러 한 번에 날아갔을 것이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질문이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보통의 모험가 같지 않아서 그럽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검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고요.』
『흐응. 평범함이라고 했나, 젊은이. 그렇게 따지만 그쪽도 평범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지.』
그렇게 말한 유나는 그라바스의 손을 재빨리 잡아 올렸다.

뽀얗다 못해 하얗게 빛이 나는 손이다. 굳은 살도 박히지 않았고, 관절이 울퉁불퉁 하지도 않다.
뒤집어 손바닥을 가볍게 쓸어봤다. 모양과는 달리 감촉이 약간은 뻣뻣하다. 어쩌다 걸레를 들고 먼지 묻은 책걸상을 손수 닦았나 보다. 하지만 장담컨대 손 도끼를 들고 장작을 직접 팬 적은 없다.
그렇다는 건 부농, 혹은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어려서「도련님」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것인데... 그「도련님」께서 시종 하나 데리지 않고 성지 부근을 어슬렁 거린다는 건 상식 이하다.
성지 부근의 사막은 질 나쁜 모험가에 트롤이나 오거 같은 괴물이 떼를 지어 득시글 거리는 곳이다. 그런 곳을 양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 혼자서 돌아다닌다는 건「빨리 날 잡아 잡수」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 하룻만에 가지고 있는 짐은 모조리 빼앗기고, 윤간당하고, 죽도록 얻어 맞고, 저급 마물의 먹거리가 되어 버린다. 한가닥 한다는 모험가들도 그래서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다. 이곳은 최강의 육식 공룡인 티라노사우르스가 우굴거리는 태고의 정글과도 같다.
『다섯 발걸음에 한 번씩 몬스터와 마주친다는 장소다. 성지를 순례하러 온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호위꾼을 다섯 정도는 고용하고 나타나는게 맞지. 그런데도 혼자. 그것도 변변찮은 무기 하나 없이.』
절대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는 점에서 유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너야말로 드래곤인 거냐?』

흘깃 쏘아보니 그라바스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호오, 정말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정곡을 찔려 당황한 건가. 괜찮다. 비밀로 해주마. 그대가 드래곤이라고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여, 여, 여성이 먼저 제 손을 잡은 건 처음인지라!』
『음?』
『소, 손을 놔주시겠습니까.』
『어랍쇼. 설마... 부끄러운 건가.』
『으아아~ 놔주세요오~!!』

귀까지 빨개진 반응이 귀엽다. 심술을 담아 손바닥에 쪽- 하고 키스 하는 시늉을 해봤다. 놀리는 보람이 있어 펄쩍펄쩍 뛴다. 유나는 간만에 - 정말로 오랜만에 하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음 소리에 놀라 새를 몰던 이부가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크 소리가 나왔다.
아버님께 마지막 술 한 잔 올리러 간다는 여자가 도중에 통쾌하게 웃으면 이상하게 생각되겠지.
유나는 쏘옥 우러나온 눈물을 닦고 그라바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놀려대서 미안하다, 젊은이.』
『젊은이가 아니라 그라바스요.』
『그랬던가... 그럼 다시. 나의 무례함을 사과하겠다, 그라바스.』
완전히 거꾸로다. 보통은 여자 쪽에서 눈치를 보며 색골 중년의 노골적인 시선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어가지 않던가. 그런데 이번엔 정 반대로 여자를 경계하여 남자 쪽에서 슬금슬금 피하고 있다.
이거 참 재미있게 되었다. 유나는 짖궂은 표정을 하고 떨고 있는 그라바스를 응시했다. 이참에 허벅지라도 쓰다듬어 볼까나... 했다가 그거야말로 성희롱에 강제 추행이라는 점을 떠올리고 참았다.

유나는 자세를 다시 바로하고 예의 56억 7천만년동안 기나 긴 묵상에 들어간 부처님을 흉내 냈다.
『말려들게 하지 않으마.』
무슨 말인지 부족한 제 작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유나의 말에 보인 그라바스의 반응은 그러했다.
『무슨 뜻인지...』
『있는 그대로의 뜻이다. 말려들게 하지 않겠다. 너는 가고자 하는 길을 가면 된다. 성지로 관광을 하러 온 것이라면「생존자 마을」에 들려 적당히 기념품이라도 사라. 단, 거기서 장사꾼들이 권하는 말린 오크 가죽은 사지 않는게 좋을 거다. 바가지 상술은 그렇다치고 냄새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더군. 넌 미처 모를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순진한 얼굴이니 이참에 벗겨 먹자고 달려드는 사람도 많을 터인데 무엇을 보여주던지간에 15 크로바기네 대륙 통화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버텨라.』
『저기요?』
『좋은 물건이 있으니 같이 가서 보자고 하면 거절해라. 십중팔구 납치범이거나 유괴범, 강간범이다. 따라가면「운이 안 좋았습니다」정도로는 일이 안 끝난다.』
『이봐요?』
『목이 마르지 않느냐며 물병을 내밀면 밀봉된 새 것 이외엔 죄다 거절하는게 좋다.』
『여차하면 약을 타서 먹이려 한다는 건 나도 잘 압니다. 그나저나 이보슈.』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몸을 부딪쳐오는 사람의 다수가 소매치기다. 사과하는 척하며 주머니를 털어가니 조심해야 한다. 가방은 항상 앞으로 매고 다녀라. 길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으면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까 똑바로 걷도록 하고...』
『이봐요, 언니!』

이쯤해서 말꼬리를 잘랐다.
그라바스는 정색을 하고 유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반대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무슨 일에 말려들게 될 거라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테라가 난리통이라고 이부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테라로 가는 겁니까. 테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대답하기 싫었던 것 같다. 유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나를 똑바로 봐요!』
여성에게 손을 잡혔다고 수줍어하던 청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기백에 유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대로 내가 당신과 같이 테라로 가게 되면... 무슨 일에 말려들게 됩니까.』
『말려들지 않는다. 너는 나와 같이 테라로 가지 않는다. 테라에는 나 혼자...』
『말씀하십시오.』
『저런. 보기와는 다르군. 고집이 상당하잖아.』
『그런 말은 옛날부터 들어왔습니다.』
『그건 자랑이 아니지.』

여자는 후우-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있을 거라는 설명으론 부족한가.』
『부족하다고 하면 더 설명을 해주실 겁니까, 유나.』
『아니. 시시콜콜 다 말해주면 발을 빼고 싶어도 빼지 못하게 되니까 말할 수 없다.』
『이미 한쪽 발을 잡아당긴 건 그쪽입니다.』
『그것은 틀린 표현이다. 난 너의 발이 아닌 손만 잡아당겼다.』
여자에게 손을 잡혔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는지 그라바스의 뺨이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특히나 손바닥을 천천히 쓸어내리던... 아니, 아니! 지금 그걸 떠올려 뭘 하겠다고!
『뭐, 손을 잡아당겼다고 치고.』
헛기침을 하고 어렵게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한쪽 손을 잡아당겼다는 건 부정 못 하는 거죠?』
『이상한 아이군.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넌 마치 곤란한 일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살면 제 수명을 못 누려.』
『제 손금은 이미 보셨겠지요. 생명선이 무지 길어 막판에 노망 날까봐 걱정입니다.』
『길이는 그렇다치고 중간에 뚝뚝 끊기던데...』
『저런. 손금 같은 걸 믿습니까? 그건 미신입니다.』
『이봐? 아까와는 태도가 다르잖아. 그리고 손금 이야길 꺼낸 건 그쪽이 먼저야.』
『그러니까 제 목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자! 어디까지 얘기를 했었죠?』

일이 이렇게 되면 아주 입을 싹 다물기도 힘들어진다.
여자는 조금 망설였고... 마침내 다 기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조물조물 속삭였다.
『네?』
『...라고 했다.』
『죄송하지만 잘 못 들었습니다.』
『이잇! 그게 나왔다고 했다.』
『뭐가요. 콧털이?』
당황해서 콧구멍을 얼른 어루만지는 그라바스를 보고 여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누가 콧털이라고 했나!「그 여자」의 흔적이 나왔다고 했지!』
『그 여자?』
『눈치가 없군. 이 동네에서「그 여자」하면 딱 하고 떠올려야지.』
『설마...』
『이제 알았나. 성마(聖魔) 다. 성마 리나 인버스다.』

Posted by 미야

2006/06/18 22:29 2006/06/18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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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2

"화톳불의 노래" 와는 시기가 연결되지 않아요.


『사막으로 나가는 건가.』
괴물을 잡는 장검을 가진 자가 목소리를 크게 했다.

이부와 청년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눈빛으로 열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교환했다.

「이런 식으로 등장한 것치고 정상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키는 나만한데 아직 변성기도 겪지 않은 목소리네. 도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야.」
「저놈의 검은 왜 저리 크담.」
「머리 꼭대기까지 후드를 눌러쓰고 눈만 빼꼼 내밀고 있으니 수상한 사람 같잖아.」
「사막 안내자는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이면 우리 쪽으로...」

출발 준비를 끝마친 사막 썰매를 흘끔 쳐다본 소년이 다시 말했다.
『돈은 후하게 쳐 주겠다.』
자신의 말이 한 점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었던지 소년이 제법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쥐고 흔드니 쩔렁 소리가 난다. 싸구려 구리붙이나 자갈을 넣어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동으로 만든 대륙 통화이거나 은화다. 그것이 돈 주머니임을 확신한 - 게다가 주머니에 든 금액이 상당하다 - 이부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원하시오.』
『테라로 가고 싶다.』
젠장맞을.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부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못 가오.』
『어째서?』
『먼저 온 손님과 가는 방향이 다르오.』
『사막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
『사막은 사막인데 같은 사막이 아니오.』

염연히 다르고 말고. 한쪽은 관광지고 다른 한쪽은 전쟁터다. 이부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머리를 긁어댔다. 모험가들을 데리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과 당장에라도 폭탄이 날아올 것 같은 험한 곳을 돌아다니는 건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일부러 위험한 걸 자처하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먹여 살려야 할 처자도 있... 이쯤해서 이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으~앗!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으니 먹여 살릴 처자가 없잖아!
가느다란 개미 허리를 가진 꿈 속의 마누라를 상상하며 이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언제 장가들어 토끼 같은 자식들의 재롱을 보나.
『다른 안내자를 찾아보시오. 나는 선약이 있소.』

그래도 소년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사막으로 나가는 건 맞지?』
『그렇수다만...』
『방향이 같은 곳까지라도 태워주게. 도중에 내리라고 하면 군소리 않고 얌전히 내리겠네.』
짐작컨대 이부와 같은 반응을 보인 사막 안내자들을 한 다스는 미리 만났던 것 같다. 돈을 보여줘도 싫다고 한다. 두 배, 세 배, 아니. 다섯 배로 준다고 해도 모르는 척한다. 그러니 구걸하고, 애원하고, 떼를 써본다. 소년의 말투엔 절박감이 묻어 있었다.

이부는 난처해하며 머리를 더 심하게 긁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라니까. 말을 하면 좀 알아 들어라, 이 찐드기 같으니라구.
그리고는 옆에 선 청년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하고 있소.」
「에?」
「싫다고 해, 어서. 동행하기 싫다고 말하라고.」
「나, 나는... 그, 그런...」
「난리통에 휩쓸리고 싶냐구. 그러니까 말해.」
마지못해 젊은이가 입을 벌렸다.
『에, 나는 그러니까...』

하지만 그 전에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눌러쓰고 있는 후드를 벗어내리자 새빨간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흘러내렸다.
저주스런 불꽃의 빛깔이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곤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이부의 눈이 접시가 되었다.
여자다.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자였다. 냉정하게 굳게 다문 입술이, 그리고 곧게 뻗은 콧날이 오아시스의 바람 같다. 크고도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멋지다.
천진난만한 외모에 숨겨진 잔혹함이 참을 수 없게 매혹적이다.
이부는 자신이 생전 처음 여자를 보는 얼뜨기처럼 뺨을 붉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리를 같이 한 청년 역시 정신을 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매우 천천히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도중까지만이라도 괜찮네. 나는 그저... 몸져 누우신 아버님께 마지막으로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어서... 흑!』

눈물을 삼키는 소리에 반응, 이부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사막 썰매에 실은 짐 꾸러미를 한편으로 치워 자리 하나를 급히 만들었다. 비싸다는 새 방풍 마스크까지 어디선가 찾아 꺼내놨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어서 빨리 타도록 하십쇼~!」라고 말했다. 엉겹결에 동행이 생긴 젊은이가「그렇다고 내 가방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항의해도 가뿐히 씹었다. 적이 포탄을 바가지로 퍼부어도 기어코 뚫고 지나가 보리라. 성난 사자가 울부짖어도 전진하리라. 이부는 흥분하여 출발의 깃대를 높이 올렸다.
『테라로 갑니다~! 테라~』

예나 지금이나 미인계가 장땡이다. 거기다 초선의 눈물이 더해지면 천하의 여포도 동탁을 배반한다. 그것이 눈물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바른 침이라 해도 남자들의 마음은 가볍게 부셔진다. 보태어 슬픈 미소를 살짝 지어라. 그 누가 항복을 선언하지 않고 버티리.

사막 썰매에 올라타자마자 도로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는 여자를 보고 청년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거, 이거.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
사막 썰매 지붕에는 뜨거운 햇살과 자외선을 반사하는 특수 코팅 차양막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티카티카 바위 새는 닭처럼 생긴 외모와는 달리 말보다 빠르게 달린다.
이걸 다시 말해보랴. 발가벗고 온갖 난리를 피워대도 사막 썰매에 타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엔 잘 안 보인다. 뭔가 온다 싶어 뒤를 돌아다 보면 이미 휙- 하고 저 만큼 앞을 지나간다. 따라서 썰매에 탄 사람이 제대로 옷을 입었는지, 아님 홀딱 벗었는지를 가려내려면 올빼미보다 더 커다란 눈과 엘프의 눈썰미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드를 깊숙이 눌러썼다는 건...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구린 곳이 많다는 거다.
내기를 해도 좋다. 저 여자는 초원을 걸어도 자기 발자국을 지워가며 앞으로 나아갈 거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이나 알고 그러십시다.』
포장도 뜯지 않은 여자의 새 방풍 마스크와 토사물 찌꺼기가 달라붙은 자신의 처량맞은 마스크를 번갈아 쳐다보던 청년이 퉁퉁 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라바스요. 댁은?』
『유나.』
언제 울먹였느냐며 그 목소리엔 떨림이 없다.
순 사기꾼. 그라바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거 압니까?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마지막 술을 올리는 겁니다.』
당연하다.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에게 술을 먹이는 멍청이 짓을 누가 하냐. 혼수상태의 환자인 경우엔 더더욱 못 한다. 설마하니 코에다 튜브를 꽂고 술을 들이붓지는 않을 것이고... 그딴 짓을 저지르면 그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뭐, 술 냄새가 코가 아프도록 진동한 나머지 데리러 온 저승사자가 이마를 찡그리며「술이 깰 즈음에 다시 오겠네」라고 한다면야 시도해볼만은 하겠지만.
그럴 일이 절대로 없다는 점에서 생애 마지막 술은 장례식에서 올리게 된다.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똑 부러지는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셨다.』
『어랍쇼. 방금 전에는 몸져 누우셨다고 했잖아요. 분명히 그랬다고요.』
『2분 전에 돌아가셨다.』
『우와~. 무지하게 솔직한 언니네.』

「댁이 잘못 듣고 착각한 거예요」라고 잡아떼지 않고 완곡어법으로「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다」이라 인정한다. 그라바스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싸우려던 의지를 꺾었다. 솔직한 사람에겐 약해진다. 하여 여차하면 사막 썰매에서 여자를 끌어내리려던 계획은 백지로 돌리고 이부가 잔뜩 쌓아올린 짐 꾸러미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부의 썰매는 3인승이다. 그래도 워낙에 실린 짐이 많아 두 사람이 앉아 있기엔 좁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여자가 좀 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게중에 가장 작아 보이는 짐을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최대한의 편의를 여성에게 양보했다.
여자에겐 잘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얘기다.

여자는 조금은 놀란 눈치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
『아뇨. 이럴 적엔「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유나.』
『내 엉덩이는 작다. 나보다는 자신을 걱정해라.』
남자의 말투를 쓰면서 유나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과시하듯 자신의 장검을 들었다 놓았다. 그렇다고 여차하면 베어버리겠다는 위협은 아니고... 저 동작의 의미는 아마도 자신은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라는 뜻일 거다.
오히려 여자는 그 반대를 생각하는 듯했다.
남자답지 못한 좁은 어깨와 팔뚝, 그리고 보들거리는 손. 냄새가 심하다고 마스크를 멀리하는 소심함...
유나는 이부가 꺼낸 새 마스크를 그라바스를 향해 툭 던졌다.
『이걸 써라.』
애 취급에 꼬맹이 취급.
그라바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며「이건 또 뭡니까~」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이럴 적엔「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거다.』
당했군.
그라바스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여자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Posted by 미야

2006/06/17 10:53 2006/06/1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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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19 21:03 # M/D Reply Permalink

    오아시스의 바람같다, 크으... 유나미스는 어렸을적부터 미인이었던것 같아요. 맞나요?; 기억나는게,그.. 여관 아주머니의, 유나어린이의 허벅지에 대한 감상. 광활한 사막에 불꽃같은 붉은 머리가 휘날리면 정말로 멋지겠죠. 강한언니!!! 정말 좋아요!! 마지막 대화는 터미네이터 생각나요. 꼭 저렇게 돌려줬었죠.. 유나미스는 굉장히 굳세고 단단한 아가씨로 자랐군요. 그래도 그 말빨;은 역시 리나의 핏줄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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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 풀무불의 노래 1

겉 딱지는 슬레이어즈라고 해도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1기 및 4기라고 라벨을 붙인 녀석은 전부 그렇습니다. [죄는 반복된다] 이후로 일부 내용이 연결됩니다. 아차, 이거... 큰일났군. [죄는 반복된다] 글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서관에 없습니다. 기억에 의존하여 주세요. 죄송혀요.
기분전환용 현실도피입니다. 짐짐하신 분은 가볍게 패스~


첫 번째 감상은 덥다.
두 번째 감상은 무지 덥다.
세 번째 감상은 미치도록 덥다.
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나더러 지금 죽으라는 거니.

혀를 내밀고 숨을 껄떡거려도 나무 한 그루 서있지 않은 땡볕에서의 체감 온도는 섭씨 38도를 기록하고 있다. 억 소리도 나오지 않아 눈만 감고 부처님 알라를 찾았다. 여기서 알라가 누구냐고 묻지 말도록. 대답할 기운도 없다. 정 궁금하면 이글거리는 저 하늘 위의 태양에게 가서 따져라.

『여어~ 젊은이. 지금쯤 물을 마시는게 좋을 걸.』
『생각 없어요. 생각만 해도 메슥거려요.』
『그래도 억지로라도 마셔두는게 좋아. 아니면 나중에 기절해서 모래밭에 생으로 파묻힌다.』

초보 여행자들에겐 지옥과도 같은 경험일 거다. 사막 기후엔 이골이 난 이부에겐 이까짓 더위는 껌이나 마찬가지지만 초원 지대를 거쳐 성지까지 순례하는 보통의 인간들에겐 생으로 화장당하는 듯한 끔찍한 날씨다. 바위 사이즈의 티카티카 새의 큼지막한 알이 통째로 익어나간다. 보호 장비 없이 함부로 돌아다녔다간 2시간 내로 탈수증을 일으키고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맨 살을 내놓으면 저녁에 화상으로 물집이 잡힌다. 징그러울 정도로... 뜨겁다.

이부는 오랫동안 모래 바람을 맞아 노랗게 탈색이 되어버린 눈동자로 사막을 지긋이 응시했다.
낙원은 고사하고 지옥을 그대로 베껴온 듯한 저 풍경이 신이 강림한 땅의 참 모습.
주변에 자리한 모든 생명을 말살하고 나서야 신은 하계를 떠났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지금도 생명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따위가 신이야? - 하고 이부는 의심했다.
그래도 참배객들에겐 저 지옥이야말로 살아 역사하는 신앙의 표적이라니 놀랍다.

『메슥거리면 소금 사탕을 입에 넣고 있게. 어지럽다 싶으면 이미 늦어. 주의해야 할 걸세.』
『추, 충분히 주의하고 있어요.』
충분히 주의하긴. 개뿔.
그제야 사탕 봉지를 털어 소금 알갱이를 입에다 넣는 젊은이를 보고 이부는 혀를 끌끌 찼다.
여행 가이드로부터 미리 설명을 들었음에도 곧잘 잊어먹는다는게 문제다. 수분과 염분 섭취를 게을리하면 말 뼈다귀가 될 거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를 해도 너무 더운 나머지 머리가 백지가 되어버린다. 덕분에 호주머니에 소금 사탕을 산더미처럼 넣어두고, 옆구리에 물이 충분히 든 수통을 꿰고 있음에도 털썩 - 하고 대자로 쓰러지는 여행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갖고만 있음 뭘 해. 입에다 털어 넣어야지.
이부는 눈을 가늘게 하고 피부가 하얀, 외지인이 분명한 청년을 쳐다봤다.
도중에 기절한다에 동전 하나를 건다.

『자, 그래서?』
『그래서라니오?』
『자네, 사제야?』
오랜 여행에 바짓단은 헤어졌다. 그러나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고급품이다. 십중팔구 가난한 농민의 아들은 아니다. 벼루에 먹을 꽤나 갈아댔을 것 같다. 부드러워 보이는 손바닥은 노동을 해보지 않은 손이다.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 역시 곡괭이, 망치, 도끼, 기타등등의 도구와는 담 쌓았다. 거기다 착하게 생긴 외모가 확신을 더한다. 때가 꼬질거리는 옷을 벗기고 사제들의 시에를 뒤집어 씌우면 배경으로 청명한 목탁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이참에 고개를 숙이고 축복을 내려달라고 빌어볼까. 이부는 사람 좋게 웃었다.
『아니면 사제 지망생?』

젊은이는 손사레를 치며 따라 웃었다.
『아뇨, 아뇨. 왕잡니다.』
『응?』
『왕자라고요. 중이 아니라 왕자예요.』
기절한다에 동전을 걸었던 걸 취소한다. 저 정도의 넉살이라면 우물에 빠뜨려도 안 죽는다.
왜냐고? 주둥이가 둥둥 떠오르니까.
마음에 든다. 재밌는 농담에 목젖이 보여라 껄껄 웃어대면서 이부는 청년의 어깨를 쳤다.
오랜 고행과 금식으로 얼굴이 시쳇빛이 된 사제들은 농담이라는 걸 모른다. 그런 인간들을 끌고 사막을 방황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연옥의 유황 향기를 맡게 된다. 반면 이런 손님을 만나면 즐겁다. 물기 하나 없는 자갈 밭에서도 모험가들의 하프를 뜯으면서 생쥐의 노래를 부른다. 라라라 하고 반복되는 하밍 소리에 피곤도 잊는다.
이부는 기분이 좋아져서 티카티카 새의 고삐 조임새를 신나게 잡아당겼다.
예감이 괜찮다. 이번 성지 순례는 썩 훌륭할 것 같다.

『저~런. 정말로 왕자인데. 안 믿어주네.』
『하하하! 그러면 나는 시바의 여왕일세. 자, 그만하고 슬슬 출발 준비를 해보지. 여기서 머뭇대며 시간을 보내면 까딱하다 집에도 못 가게 될 걸세. 요즘엔 테라 쪽이 워낙에 시끄럽기 때문에 서두르는게 좋아. 아니면 내란에 휩쓸려 폭탄에 맞는다구. 성지 순례도 조만간 금지될 거야.』

폭탄이라는 단어에 청년이 움찔했다.
『내란? 폭탄?!』
『아아, 이 동네 사정이 워낙에 거칠어서 말일세. 그렇게 되었네.』
그렇게 대꾸하면서 이부는 최종적으로 사막 바위 새의 눈에 가리개를 씌웠다.

성지엔 풀 한포기 나지 않는다. 대신 환몽석이라는 고가의 보석이 나온다.
무채색에 반투명한 이 돌은 무지막지한 고열에 바위나 나무 같은 것이 1, 2초라는 짧은 시간에 녹아서 만들어진 보석이다. 대략적으로 둥글고 시커먼 이물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모양만 따지면 볼품 사납다. 그래도 신이 강림하면서 부차적으로 생겨난 물질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만만치 않은 고차원 에너지가 그 속에 녹아 있다고 한다.
돌을 가지고 있으면 환상이 보인다. 더러는 마력이 증폭한다고도 한다. 이부는 믿지 않지만 가사 상태의 사람의 손에 돌을 쥐어주면 소생한다는 말도 있다.
너무 뜨거워 숨 쉬기조차 힘든 땅으로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환몽석을 캐고, 그걸 팔고, 다시 빼앗기 위해.

이부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사람이 모이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나? 다툼이 생긴다네.』
공식적으로 성지는 어느 나라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성지를 오작가작 하는 인간들은 타국의 지배를 받는다. 이게 문제다.
『돈은 권력을 불러. 권력은 다시 돈을 부르고. 이 둘이 짝짜궁하면 아주 골치가 아파. 어중이 떠중이까지 끼어들어 아주 쓰레기통이 되어버리지. 테라는 요즘 난리도 아냐.』

그렇다고 해도 남의 일이다.「생존자 마을」출신인 이부는 다른 마을 일엔 깊게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트롤이 깃발을 흔들며 단체로 지나가도 쳐다보지 말아라 - 라고 그의 아버지는 가르쳤다. 다른 마을에서 학살이 벌어진다 해도 그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일이다. 남의 동네로 흐르는 피다. 왜 그걸 가지고 고민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를 내며 진흙탕 게임에 끼어들면 어리석은 원숭이가 될 뿐이다.

『오히려 당신이 성직자 같네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젊은이가 말했다.
『어? 내가?』
『우리의 문제를 대신 처리 해달라 엎드려 신에게 기도만 하죠. 문제는 인식하고 있지만 결코 해결 의지는 보이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성직자.』
밝게 웃으면서 꽤나 시니컬한 이야기를 주워 삼킨다. 이부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젊은이를 다시 봤다.
순둥이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이부는 조금은 경계하며 젊은 손님에게 방풍, 방사용 마스크를 내밀었다.
사막의 모래 먼지를 뚫고 지나가려면 거미줄처럼 가는 실로 촘촘히 짠 특수 마스크가 필요하다. 이걸 뒤집어 쓰면 대단히 덥다. 그러나 폐에 모래가 가득 쌓여 죽는 것보단 낫다.

『나는 괜찮아. 나는 자유인이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혀를 조심하게. 성직자라면 하느님 다음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자네의 그런 발언을 그냥 넘기려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죠. 정곡을 찔린 나머지 화내겠죠.』
『화만 낼까. 권위 의식에 찌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꼬집는 말을 용납하지 않아.』
『알았어요, 주의할게요. 충고 고마워요.』

청년은 산뜻하게 말하고 이부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마스크를 뒤집어 썼다. 그러니까 단추를 풀고, 뒤로 넘겨서, 이 부분을 둘로 접고, 얼굴에다... 그러고 나서 곧 후회했다. 누군지도 모를 여러 사람이 번갈아 사용했을 마스크에선 시큼털털한 악취가 났다. 뭡니까, 이건~ 이라 절규하며 재빨리 벗었다. 경악하여 자세히 보니 말라붙은 토사물 찌꺼기도 묻어 있다.
이부를 힘차게 노려봤더니 딴짓한다.
『가끔 사막 썰매를 타면서 멀미를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그럼 세탁을 해놨어야지요!』
『그 천은 시노아 타천충의 특수한 체액으로 짠 거야. 물에 넣어 빨면 망가져.』
『그럼 새것으로...』
『비싸.』
싫으면 관두라지, 하면서 이부는 씹는 담배를 어금니로 질겅 물었다.
『그깟 냄새에 성지 순례를 포기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저어, 그게 말이죠. 뭐가 문제인가 하면...』

대답을 다 못 마치고 젊은이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엉겹결에 이부도 청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더러운 방풍 마스크는 잊어버렸다.
무지막지한 장검을 꿰찬 소년이 태양을 등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Posted by 미야

2006/06/16 12:44 2006/06/1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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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19 19:54 # M/D Reply Permalink

    세상에. 복제당한 그 아이, 눈알이 뽑혔던 그 아이, 맞죠? 다시 볼 수 있게될줄 몰랐어요. 얼마나 기다렸는줄 몰라요. 미야님의 오리지날 매우 격하게; 환영합니다. 미야님의 세계가 어서 완성되길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한사람입니다.그 이후의 이야기들도 차차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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