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 풀무불의 노래 9

싸움엔 이골이 난 사람 둘이서 데몬 한 마리를 두고 긴장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좁은 실내 공간 - 그것도 땅을 파고 만든 집구석에서의 싸움은 전투의 프로라고 해도 질겁하기 마련이다. 적이 입구를 가로막으면 당장 포위된다. 그게 싫어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처럼 지붕을 뚫어야 지상으로 달아날 수 있는 상황에선 도주 이전에 토목 공사가 먼저다.
여기서 입장을 반전시키겠다며 맞장 뜨는 사태에 이르면 더 고약해진다.「모두 덤벼!」라고 외치며 무기를 활짝 들었는데 실수로 팔꿈치로 벽기둥을 치고 만다. 아파서 눈물이 쏙 우러나오는 가운데 이번엔 머리 위로 화분이 미끌어진다. 짜증에 겨워 미친 사람처럼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보니 좁은 복도에 사람 셋이서 이도 저도 못한 채 꽉 껴있다... 뭐, 대충 그런 것이다.

사방이 훤하게 뚫린 들판에서 싸우는 법과, 방구석에서 지지고 볶는 법은 서로 같지 않다. 맘대로 활개치고 움직였다간 낭패를 당하기 딱이다. 유나는 신중하게 구석으로 몸을 감추고는 그라바스에게 손짓으로 수신호했다.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는 건「몸을 깔아라」라는 의미.
V자를 그린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가리키는 건「적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라」라는 뜻.
코를 만지며 이를 드러내는 건「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이쪽의 신호를 기다려」라는 얘기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용병들이나 알아 먹는 수신호를 그라바스가 정확히 이해했을련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시키는대로 얌전히 허리를 굽히고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갔으니 다행이다. 벽장 그늘 속으로 소리 없이 잠수하던 유나는 그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딴 걸 무기로 써먹겠다며 불쏘시개를 쥐었을 적엔 정말 대책 없었다만, 납작 엎드린 자세로 유나 쪽을 쳐다보며 입 모양만으로「알았음!」이라 대답하는 걸 봤을 적엔 착한 아이라고 마음 껏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내가 한다. 넌 나서지 마」
입만 뻥긋거려 재차 뜻을 전달한 뒤, 허리춤에서 사냥용 손톱 검을 꺼내들었다.
괴물의 멱을 따기엔 우습다 싶도록 날이 짧다. 모르는 바 아니다. 이 나이프는 어디까지나 토끼나 사슴을 잡기 위한 무기일 뿐이다. 겉보기에도 가늘게 몸매가 빠진 주방용 식칼처럼 생겼다.
하지만 이런 집구석에서 트롤을 베는 장검을 빼들고 신나게 휘둘렀다간 필연적으로 대들보가 꺼지게 되어 있다. 무너지는 천장에 깔리고 싶다면야 맘대로 활개치고 돌아다녀도 괜찮겠지만...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자기 또한 깔려 죽은 삼손의 복수극은 어딘지 처량맞다. 그래서 유나는 일찌감치 장검을 쓰는 건 포기하고 오른손에 나이프만 쥐었다.

쉬이이- 하고 데몬이 긴 숨을 토해냈다. 개구리가 일주일은 썩은 듯한 악취에 머리가 다 아파왔다.
「......」
초조해 하는 그라바스가 코를 틀어 쥔 모습으로 유나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손등으로 턱을 탁 하고 치는 동작으로「계속 기절해 있어」라고 명령했다.

《츳, 크르르... 츳》
일단 냄새를 맡는 듯했다. 코를 킁킁대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유나는 데몬의 코가 막혔거나, 내지는 별 쓸모 없는 감각 기관이길 빌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놈들은 원래 냄새를 잘 맡는다. 다른 곳을 잠시 기웃거리다가 그들이 몸을 숨긴 주방 쪽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걸 보아 아마도 사람의 냄새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라바스는 들킬새라 몸을 더욱 낮췄다. 유나는 바짝 긴장한 채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데몬 특유의 무겁게 다리를 끄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해도 유나는 단검을 쥔 상태에서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회는 단 한 번. 재빨리 급소를 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돌로 만든 석상인양 가만히 있으면서 수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는게 좋았다.

《크, 쉬이이... 픗》
어둠 속에서 데몬은 무척이나 천천히 움직였다. 밝은 곳에서 금방 어두운 곳으로 들어온 탓인지 눈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손을 엉거주춤 내밀었다. 한 3, 4초간 그렇게 움직이지 않다가 팔을 휘저었다. 가까스로 물체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건지 툭툭 하고 찬장을 둘러봤다. 서툴게 더듬대는 손길에 소금통이 쓰러졌다. 푸쉿- 하는 콧김 뿜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그런데... 어랍쇼. 찬장?
숨어 있을 사람을 찾는다면서 찬장을 뒤진다라. 어쩐지 데몬 답지 않은 행동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데몬은 뚜껑 달린 냄비를 꺼내 품에 손에 쥐려고 했다. 우악스럽게 생긴 괴물의 손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동작이다. 우동 면발을 끓이면 딱일 것 같은 냄비는 애시당초 사람 손에 맞게끔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괴물이 만지자 연약한 냄비는 순식간에 움푹 찌그러졌다.
《푸쉬이-》
저 소리가 한숨으로 들린 건 단순한 착각만은 아닐 터.
누가 봐도 고개를 푹 숙인 것이 분명한 데몬은 망가뜨린 냄비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채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 아주 한참동안 데몬의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화를 내는 것도 같고, 당황한 것도 같다.
마침내 등을 돌린 괴물은 식탁 위로 찌그러진 냄비를 내려놓았다. 식탁 밑에 숨은 그라바스는 그 덕분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식탁 다리가 와들거리자 질겁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데몬은 이번엔 썩은 스프가 든 접시를 집어 한숨과 함께 개수대로 가져갔다. 눈치로 보아 설거지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 딴에는 최대한 살짝 내려놓는다고 했을 것이다. 그치만 말 그대로 더러운 접시는 힘껏 내동댕이쳐진 셈이었고, 어쩔 수 없이 개수대 안에서 와장창 소리를 내며 쪼개어졌다.

『어이.』
유나는 오른손에 단검을 쥔 채로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하지만 공격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칼날이 보이지 않게끔 뒤로 가게 고쳐 쥔 자세부터가 달랐다.
『기억이 돌아온 건가.』
데몬은 유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특이한 녀석이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대신, 푸쉿- 하고 숨을 쉬었다. 그게 또 매우 피곤해 하는 숨 소리라서 유나는 순간적으로 데몬에게 의자를 권할 뻔했다.
누가 알면 우스워 죽는다고 했다. 데몬에게 의자라니.

『기껏해야 천만분의 일의 확률일 터인데... 데몬으로 변한 사람 중 사람이었을 적의 인격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신, 사람이었을 때의 기억이 돌아온 거지? 그래서 무리에서 도망쳐 예전에 살던 집으로 온 거야.』
혼란스러웠을 거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되지 않고.
그 와중에 떠오른 건 밖으로 나오면서 문을 잠구지 않았다는 사소한 기억이다. 하여 황급히 집으로 달려온다.

둘러보니 집구석은 난장판.
여전히 머리는 멍하다. 그래도 일단 어질러진 집안 정리부터 하자며 냄비와 접시를 쥐고 본다. 변해버린 손으로는 접시를 닦는다는 식의 섬세한 동작은 무리라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만졌더니 부셔졌다 -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괴물에게도 표정은 있었다. 어째서 - 라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당황한 사람이 곧잘 그렇게 하듯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예전에는 머리카락이었을 분명한 털을 당나귀처럼 생긴 뾰족한 귀 뒤로 넘기면서 매만졌다. 그것이 대단히 인간적인 동작이어서 유나는 마음이 아팠다.
따져 묻는 듯한 시선을 피해 세 부분으로 조각난 깨어진 접시로 눈을 돌렸다.
『꿈이라 믿고 싶으면 믿어. 어차피 운 좋게 기억은 돌아왔어도 육체는 옛날의 모습으로 다신 못 돌아가. 사술에 걸려 한 번 요마가 되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의 당신은... 괴물이다.』
순간 데몬이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아가 화가 난 사람 다수가 그러하듯,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려고 했다.
유나는 고개를 여전히 옆으로 돌린 자세 그대로에서 재빨리 손톱 검을 위로 차 올렸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반응한다. 번개 같은 속도였다. 시커먼 손톱에 닿은 칼날이 날카로운 쨍 소리를 냈다.
『그만둬. 실수로라도 날 잡고 흔들었다간 내 몸이 둘로 쪼개질 거야.』
쪼개진다는 말에 데몬은 펄쩍 뛰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람이라고요?!』
식탁 아래서 그라바스가 머리를 번쩍 세웠다.
덕분에 꽤나 커다란 쿵, 소리가 울렸고 가냘픈 신음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과거형으로 사람이었다 - 고 해야지, 이 경우는. 그나저나 머리는 괜찮나.』
『제 머리가 문젭니까. 저 데몬이 사람이었다니, 말도 안됩니다!』
치 떨리는 아픔보다 놀람이 더 컸다. 볼록 튀어나온 혹을 감싼 채 소리를 지르는데 무릎이 휘둘거릴 정도로 아파하는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고 하기엔 그 울림이 제법 컸다.

『그럴 리 없습니다. 하급 요마의 혼을 사람에게 씌워 데몬으로 만드는 주술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법이 대수냐. 법과 맹세, 그리고 물 떠먹는 바가지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예, 깨지기 위해 존재하지요.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이런 짓을 저지를 실력의 마법사는 현재 대륙 안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라바스는 말꼬리를 흐려가며 입에 침을 발랐다.
사람을 괴물이나 요정, 타 생명체와 합성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서와 주술서는 지난 수 십년간 급격히 소실되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끊임 없이 기록을 찾아 불사른 탓이다.
보존되는 숫자보다 망가져가는 속도가 더 빠르면 당연히 기술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꿈도 못 꾼다. 한 번 배웠던 것도 헷갈리는 판국에 옛날에 읽었던 책은 어디로 숨었는지 도통 찾을 길이 없다. 가슴이 답답해져 버려진 유적의 우물까지 파보지만 이미 과거의 영광은 흔적조차 안 남았다. 그라바스가 잘 모르지 않는 그「누군가」씨가 개인적 복수심을 담아 오랫동안 염원했던 바 그대로, 하이 클래스의 인체 합성 기술이 무너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불가능? 그럼 우리 눈앞에 서있는 이 존재는 뭐란 말이냐. 사기냐? 환상이냐? 아님 인형의 탈을 쓴 거냐.』
유나는 검을 다시 옆구리에 차면서 코웃음을 쳤다.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그라바스의 안색은 보기 좋게 헬쓱해졌다.
『마, 맙소사. 그럼 우리가 마을 밖에서 마주쳤던...』
석연찮던 마물의 그 피 색깔이, 짐짐하던 촉감이 떠올랐다. 토기가 올라오려 했다. 그라바스는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단단하고 무거운 무엇인가가 뒷통수를 확 잡아챘다 다시 패대기질을 쳤다.
그것들을. 그들을.
자르고, 찌르고, 밟고, 쓰러뜨렸다.

『내, 내가 사람을 죽였단 말예요?!』
『사람이었던 걸 - 이라고 고쳐 말해라.』
무덤덤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유나는 계속해서 쉭쉭 소리를 내는 데몬을 향해 발자국 도장이 선명하게 남은 모자를 내밀었다.

나흘 전만 해도 자신의 것이었을 모자를 받아쥔 괴물은 한숨 섞인 콧김을 길게 내뿜곤 머리에 점 찍는다는 기분으로 모자를 올려다 썼다. 그것이 대형 판다 곰이 어린애의 생일 모자를 빼앗아 쓴 형상인지라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입가에 달린 솜털 하나만 살짝 흔들고 사라져 그라바스는 어느새 울상짓는 예의 표정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괴물이 모자 챙을 정성껏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고 그는 정말로 울려고 했다.

Posted by 미야

2006/07/10 13:33 2006/07/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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