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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Orion 07

또 한 번 타협과 양보의 의미로 좋아하는 카세트 테이프의 록 음악 듣기를 포기한 딘은 잔잔한 라디오 방송을 찾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물론 그런다고 샘의 불만이 크게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부패한 통조림처럼 잔뜩 부풀어 있지는 않았다. 대신 넓은 가슴께로 두 팔을 X자로 깍지를 끼고는 유리창 너머를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지구상에 언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딘은 운전에 집중했고, 샘은 그 운전에 집중하는 딘을「없는 사람」취급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게 아니라면 온몸의 뼈가 발밑으로 흘러내리도록 딘의 어깨를 쥐고 마구 뒤흔들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단순히 기진맥진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임팔라에 딘과 샘이 함께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일정한 직업도 없는 딘이 운전하기엔 1967년도 세비 임팔라는 분수에 넘치는 차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고인지, 아님 단순한 질투인지 분간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고풍스런 클래식 차는 실제로 과잉의 보살핌을 요구했고,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어쩌다 부품이 망가지기라도 하는 날엔 꽤 많은 돈을 잡아먹었다. 한 번은 숫자가 대단히 많이 적힌 청구서를 받아들고 눈이 튀어나온 적도 있다. 덕분에 은행을 털어야하나 고민도 해봤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싸구려 수입차를 구입하는 걸 고려해 보는 건 어떻겠냐며 중고차 매매인이 손바닥을 부비며 알아서 달려왔을 정도다.
「진짜로 은행을 털 수는 없잖습니까. 여기 손님에게 딱 맞는 10개월 무이자 할부가 있습니다.」
아줌마들이나 마음에 들어 할 중고 스포츠 밴을 소개하던 대머리 사내는 이런 말도 했다.
「임팔라 옆 좌석에 멋진 여자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는 것도 좋지만요, 이 미니 밴 뒤에서 편하게 섹스하는 것도 썩 괜찮답니다. 보기와는 달리 안쪽 공간이 제법 넓어...」
연락처가 인쇄된 명함이 입속에 가득 차는 바람에 하던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틀렸다. 여자를 꼬시기 위해 임팔라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옆 좌석에 배꼽티를 입은 늘씬한 미녀를 태우고 해변가 도로를 질주하는 취미는 딘에겐 없었다. 꼭 타고 싶다 졸라대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 직접 운전대를 잡아보면 안 되겠느냐 우는 소리를 내는 남자들 만큼이나 많았지만 딘은 그때마다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며 거절했다.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옆자리에 누군가가 있으면 불편했다. 뭐랄까. 비유하자면 엄지손톱 아래로 박힌 고약스런 이물질처럼 느껴졌달까, 때문에 기분 좋게 웃으며 맛있는 햄에그 샌드위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빨리 제거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곤 했다. 때로「없애버리고 싶다」충동이 너무 커 실제로 살인으로 이어진 적도 있다. 딘은 그들이 내는 숨소리가, 코를 만지는 작은 손짓이, 가죽시트를 덥히는 체온 전부가 못 마땅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곁눈질로 샘을 훔쳐보았다.
미안하지만 마지막 말은 바꿔야겠다.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렇지 않은 인간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딱 한 명만 빼고.

『피곤하면 눈 감고 자도 좋아, 샘.』
『안 졸려.』
샘은 오전의 뜨거운 땡볕 아래서 고통에 처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했다.
『피곤하지도 않아.』
요컨대 빈큼따윈 없으니 헤집고 후빌 생각은 일찌감치 관두라는 의미인 듯했다.
『눈 감았다 도로 뜨니 몸에 튼튼한 밧줄이 감겨있었다 - 줄거리는 안 반갑다고.』
『흐음. 내가 그렇게 할 것처럼 보이니?』
그렇게 보인다, 안 보인다의 답변 대신 샘은 이렇게 못 막았다.
『꿈도 꾸지 마.』
『아이고 무서워라.』
농담으로 넘기는 태도에 샘이 발끈했다.
『진짜야!』
어쩐지 그 느낌이 첫 데이트에 나온 여자가「갑자기 키스하려고 하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협박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럴 적에 웃으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 때문에 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했다.

『있잖아. 혹시 레드 제플린의「트래블링 리버사이드 블루스」라는 곡 알아?「렘블 온」과 같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야.』
『뭐?』
샘은「이건 또 뭔 수작질이야」라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바짝 당겨 자세를 똑바르게 했다.
인정한다. 얼간이 같은 발언이었다. 그래서 심드렁한 어조로 화제를 바꿨다.
『배가 고프면 말해. 편의점에서 산 땅콩 초콜릿 바가 몇 개 남았거든. 그런 걸로 끼니를 때울 수 있느냐 따진다면 할 말은 없지만 공복에 먹으면 정신이 맑아져. 어때. 먹을래? 물론 너에게 치명적인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면 하는 수 없고.』
샘은 기가 막힌다며 코웃음을 쳤다.
『맙소사. 다음엔「지루하면 이거라도 읽어」그러면서 포르노 잡지를 던져주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난 안 지루해.』
『말의 요점이 틀렸어, 딘.』
샘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해서 대화는 다시 끊겼다.

전혀 심심하지 않다는 말과는 달리 지루한게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굳이 싫다는 상대에게 딘은 다시 말을 붙였다.
하긴, 색이 지워져 흑백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길죽한 나무와 가로등이 전부인 살풍경 앞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긴 하다. 늦은 새벽이라 반대편으로 마주보고 달려오는 차도 보이질 않았다. 어쩌다 다른 세계와의 경계선에 뚝 하고 잘못 떨어진 듯한 착각도 불러 일으켰다.
『만약에 말이야...』
도중에 어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만약에 내가 시체를 어디에 숨겼는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음 넌 어떻게 할래?』
『뭐?』
『생각해보니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뭐야, 그 말은... 지금 돈을 달라 요구하는 거야?』
샘이 불쾌하게 인상을 찌푸린 것만큼이나 딘도 불쾌해졌다.
『만약에 라고 했잖아! 그리고 난 가난한 대학생에게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할 만큼 절박하지 않아. 마약이나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겠다, 돈이 없어 쪼들린 적은 없어.』
『그러니까 왜 여기서「만약에」라고 토를 다는 거냐고! 그 말은「시체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내 마음이 바뀌면 그럴 수도 있지. 흥! 안 그래?「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10년 뒤에 말해줄게」이래도 다 내 맘이라고.』

마냥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 놓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것이 딘을 한 대 치고 싶어서인지, 아님 자신의 머리를 세게 때리고 싶어서인지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지금 나더러 10년씩이나 기다리라고?!』
『오오~ 바로 그거야, 샘. 거기에 계속 앉아 10년을 기다리는 거야. 나는 이렇게 운전을 하고... 무리일까? 그 전에 어쩌면 둘이서 나란히 악성 치질에 걸려버릴지도. 그건 좀 끔찍하겠다.』
샘의 표정이 굳었다.
물론 치질을 염려해서는 아니었다.

『있잖아. 만약에 말이다.』
『제기랄. 또「만약에」?!』
『소리는 그만 질러, 샘. 난 바로 네 옆에 앉아있다고. 바락거리지 않아도 잘 들려.』
『듣기 싫단 말이야! 그「만약에」라는 말!』
그만하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한 장소에 에이미의 시체가 없음 넌 어떻게 할래?』

이런 경우엔 도발하는 사람이 나쁘다.
샘은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그의 이성이 지배권을 행사하기엔 다소 무리였다. 뭔가가 울컥했고, 동시에 저 밑바닥에서부터 빨간불이 점등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먹을 쥐고 있었고, 게다가 주먹은 딘의 뺨에 닿아 있었다. 아니, 여기서 닿았다는 표현은 살짝 어폐가 있다. 닿기만 해선 주먹이 얼얼할 리 없으니까.

타이어가 지면을 긁는 소음을 내며 차체가 차선을 벗어났다.
당연한 거 아닐까. 운전 중인 사람을 때려선 안 된다고 교통 법규에 나와 있다.
뭐? 찾아보니 그런 건 안 보인다고? 법규고 뭐고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 아닌가!

턱이 돌아간 것 같다는 충격은 둘째로 하고 딘은 허겁지겁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 도랑으로 빠지지 않고 원래의 차선으로 돌아가려면 바짝 긴장해야 했다. 그런데 핸들을 너무 꺾었다. 의도와는 달리 차체가 S자 곡예운전을 펼쳤다. 안 되겠다 싶어 브레이크를 밟았다.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몸이 앞으로 쏠렸다. 기울어지다 못해 뒷바퀴가 들뜬다 싶었다. 당황하여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 차가 기적적으로 멈춰섰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건 잠시였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지만 샘은 듣고 있지 않았다. 다만 신경질적으로 안전벨트를 풀려고 버둥거렸다. 그는 벗어나려고 했다. 차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 모습에 딘은 숨을 멈췄다. 얼굴을 맞았다는 사실도 있지만 딘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로 해서 폭발했다. 한 손으로 샘의 멱살을 잡았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쥐었다.
『만약에, 만약에 라고 했잖아!』
『알아! 딘은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난 그 소리가 듣기 싫다고 했어!』
샘은 또다시 딘을 때리려고 했다. 정확하게는 발버둥에 불과했지만 - 운이 좋아서였는지, 아님 나빠서였는지 팔꿈치가 딱 소리를 내며 방금 전에 주먹으로 맞은 부위를 가격했다.

이번 건 위험했다. 딘은 진짜로 화가 났다. 손바닥을 들어 샘의 뺨을 짝 때렸다.
때문에 누구의 피 맛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듯한 기세로 쏘아봤고, 전쟁을 치루듯 머리를 부둥켜 쥐었고, 격렬하게 입술을 겹쳐 눌렀다.

이것은 증오다. 틀리지 않다. 배려라던가 부드러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키스였다. 물어뜯고 탐했다. 당한 만큼 갚아준다. 서로의 혀를 구속하기 위해 전투적으로 움직였다. 그렇다. 이것은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다. 딘은 자신의 혀가 샘의 목구멍을 전부 틀어막을 정도로 충분히 길지 않음에 분노하며 미끌어져 달아나는 샘의 혀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어깨를 잡은 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힘차게 반격하며 딘의 입안으로 깊숙이 침범하여 다량의 타액을 흘려보냈다.
지는 건 싫다. 이대로 질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입을 떼어낸 사이, 손바닥을 치켜든 딘은 샘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그보다 더 빠르게 샘이 딘의 뺨을 짜악 갈겼다. 욱씬거리는 통증은 곱절로 커졌고, 딘은 어쩌면 이 싸움에서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고통에 차 신음소리를 흘리는 입술을 향해 샘이 덤벼들어 깨물었다. 애무하며 깨무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어뜯는 수준이었다.
피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딘은 흥분했고, 이성을 잃었다. 증오에 차 자신을 노려보는 샘에게 모든 걸 내던지며 돌진했다. 체중을 실어 밀치면서 샘의 입안으로 혀를 깊이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흥분한 샘이 그 혀를 강하게 빨아올렸다.

Posted by 미야

2009/04/13 00:43 2009/04/13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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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아이렌드 2009/04/13 07:57 # M/D Reply Permalink

    도발이...진짜 도발이 되고말았군요. (얼쑤~!)

  2. T&J 2009/04/13 09:58 # M/D Reply Permalink

    으아아아-전 감이 잘 맞는 걸까요?
    왠지 올라와 있을 것 같더라니-ㅋㅋㅋㅋ
    이로써 월요일 아침을 과격하게 시작하게 되는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격상으로나 덩치상으로-물론 이부분에선 딘이 좀 밀리지만, 몸싸움에선 딘이 질 것 같지 않아요-비등한 위치의 두 남자가, 이렇게 감정을 밀고 당기다 확 달려드는 건 언제봐도 흥미진진해요-ㅋ
    뭔가 늘어날대로 늘어난 고무줄을 팅-하고 끊어먹은 느낌이 드는 글이네요-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1. 미야 2009/04/13 11:25 # M/D Permalink

      T&J님은 골쪽방에 놀러오신지 얼마 안 되셨나보다옹. ^^ 아는 사람은 다 알긔요. 이곳의 정상 시스템은 "주말극장" 이라는 걸요. 주중에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고, 토요일엔 차라리 날 죽여 이러고 낮잠, 일요일 저녁이 되면 출근하기 시려 비명을 질러가며 다닥다닥 자판을 찍습니다. 몸 상태가 안 좋거나, 특별한 사정이 생겼거나, 아님 게임 삼매경에 빠지면 "묻지 말아욤" 이러면서 도망가지만 일주일에 A4지로 세 장(만) 쓴답니다.

  3. T&J 2009/04/13 14:33 # M/D Reply Permalink

    아아-그런 건가요?어쩐지 매주 월요일쯤에 소설이 올라온다고 생각했,,,,,,;
    저 골쪽방 온 지 그래도 3,4개월을 됐을 텐데.;;;;;;딘샘 소설도 미야님 덕분에 알게 됐는걸요....그런데도 모르는 건 문제 있는 거?;;;;하하;;그동안은 연재중인 소설보다 예전 연재작들 읽어서 그런가봐요-아, 암튼, 늘 소설 잘 읽고 있습니다. 슈내에 관한 다른 포스팅들도요^^

  4. 나마리에 2009/04/14 14:27 # M/D Reply Permalink

    물고뜯고 짓누르는 키스 너무 좋지않겠습니까?
    후끈 달아오르는군요. 두근두근두근

  5. 시크 2009/04/16 22:32 # M/D Reply Permalink

    확실하게 책임져주시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도 그저 울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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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Orion 06

다른 사람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강도로 돌변한 마약 중독자로 착각된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넘어갈 수밖에.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제시카를 옆으로 밀치고 옷장을 열었다. 여벌의 옷가지가 필요하다. 현금도 있어야 할 것이고...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무엇보다 여차하면 써먹을 강력한 스턴 건이나 후추 스프레이 같은게 절실했다.
제기랄, 이 마당에 후추 스프레이? 샘은 계집애처럼 생각하는 자신에게 절망했다. 총을 든 상대방에게 꼴사납게 최루액을 분사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앞이 캄캄해졌다. 지금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은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성의 치한 격퇴 미션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무슨 일이야? 샘. 방금 브래디에게 전화해서 이리로 와달라고 했어.』
『그랬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제시카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이며「문제 없음」을 강조한 샘은 지난 여름에 캠핑을 위해 장만했던 등산용 나이프를 찾아 벽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통조림이나 따던 싸구려 칼로 신통한 일을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라면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는 거였다. 그거라면 몰래 숨겨뒀다가 비장의 카드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제임스 본드가 악당 골드 핑거 앞에서 만년필을 빙자한 고성능 레이저 장치를 꺼내드는 것처럼 폼 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추 스프레이보단 양반이었다.

『샘?』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그러니까 침실로 돌아가 누워.』
『자기는 지금 여행용 가방을 꾸리고 있는데 나더러 지금 잠이나 자라고?』
제시카의 목소리는 녹슨 쇠붙이처럼 거칠었다. 걱정한 것만큼이나 짜증도 나는 모양이었다.
『어느 여자가 이런 상황에서 발 뻗고 누워 태평스럽게 잠을 청할 수 있겠어!』
「날 똑바로 봐」명령하며 그녀가 어깨를 경직시켰다.

샘은 그제야 그녀의 벌겋게 젖은 눈자위를 알아차렸다. 아닌 척해도 눈물을 쏟은 흔적은 그렇게 쉽게 감춰지는게 아니다. 여자를 울렸음을 깨닫자 마음에 가책이 왔다. 샘은 남자였고, 무릇 남자라면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하여 꾸준히 설교를 들어왔다.

『오, 맙소사. 아니야, 맹세코 정말 아니야. 이건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
『정말로?』
『왜 반문하는 건데. 내 말을 못 믿어? 하지만 진짜야. 지금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음, 가족 문제야. 고향 집에 갑자기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어. 아버지가 몇 주 집을 비우고 혼자서 사슴 사냥을 나가셨는데... 어, 아무래도 날짜 관념이 무뎌지신 모양이야. 모시러 가야 할 것 같아.』
「내가 가면 해결될 거야」라고 서둘러 말을 덧붙인 뒤, 그녀의 불안감을 잠식시키기 위해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니까 브래디에게 이리로 올 필요 없다고 다시 전화해. 알았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거짓으로 웃었다.
당연히 제시카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고 샘을 쳐다봤다. 마술과도 같은 천리안의 능력이 없더라도 그 입가에 패인 보조개가 싸구려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몸에서 나는 악취를 감추려고 향수를 덕지덕지 뿌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미소는 달콤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나에게 뭘 숨기는 거야.』
『숨기는 거 아니야, 제스.』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샘은 가면과도 같은 웃는 얼굴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 밤에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뿐이야.』
제발 이해해줘 - 샘은 나름 필사적이었다.
『어쩔 수 없어. 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약속해.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지퍼가 열린 갈색의 가방을 곁눈질하며 제시카가 질문했다.
『알았어. 그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사흘 혹은 약 일주일 간, 확실히 그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야.』
『일주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 질렀다.
『로스쿨 면접은 어쩌고!』
『그 전까지는 반드시 돌아와. 아무렴 내가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왔던 걸 이렇게 포기할 것 같아? 난 그런 멍청한 놈이 아니야.』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다, 금방 해결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방금까지의 샘의 말들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거짓말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이야기만큼은 진심이었다.

반드시 돌아와. 그러자 몸에서 기운이 빠졌고,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사랑해, 제스.』
등이 뻐근해지도록 세게 껴안으면서 샘이 말했다.

『탑승해주신 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안전밸트를 착용하여 주십시오. 보면 아시겠지만 안전밸트는 좌석의 오른편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조수석에 올라타는 샘을 향해 딘이 썰렁한 농을 쳤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샘은 이렇다 할 반응을 일절 생략한 채 - 그것도 웃자고 한 농담이라고 - 들고 온 가방을 뒤편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쳇, 재미없어. 2년 전에는 깔깔거리고 잘만 웃었으면서.』
대학에 가겠다고 가출했던 샘을 차에 태워줬을 때에도 지금처럼 농담을 했었던 모양이다.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은 기억을 하고 싶지 않다. 안전밸트를 끼우는 척하며 고개를 숙인 샘은 기계적이고도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발광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엔 없었다.
『좋아요. 그럼 둘이서 사랑의 도피를 떠나볼까요.』
허나 딘은 눈치도 없게 계속해서 허튼 소리를 지껄였고, 샘은 언제 폭발할지 모를 시한폭탄을 아랫배에 품은 기분이었다. 죽음의 시곗바늘이 짤깍짤깍 움직였다. 아니, 밑바닥에서부터 덜덜덜 진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한 건 임팔라의 엔진이었다. 70년대에 생산된 무거운 강철의 차체는 부드럽게 회전하며 진입로를 벗어났다.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긴장 풀어. 지금 죽으러 가냐?』
돌연 샘은 평생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한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지금 죽으러 가는 거냐고 물었어? 그와 비슷하거나, 아님 그보다 더 나쁘다 생각하는데.』
샘이 뿜어내는 분노의 오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딘은「어쩌면」이라 말하며 가볍게 응수했다. 동시에「아닐 수도 있고」후렴구를 붙이며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겉으로만 보자면 샘의 귀로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열중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핸들을 치는 동작엔 규칙적인 리듬이 실려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샘. 시체는 아직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그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문제야?!』
『그~럼~!! 게다가 넌 그 여자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과 같이 있잖아.』
고속도로 진입로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을 곁눈질하던 딘이 느슨한 태도로 발을 뻗어 악셀레이터 패달을 조작했다.
『넌 시작부터 운 좋게 점수를 10포인트나 따고 들어가는 거라고.』

불 꺼진 가게 담벼락으로 누군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를 해놨다.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새삼스럽게 실소가 나왔다. 10포인트고 30포인트고 여기서 점수는 중요하지 않다. 경찰이 에이미의 시체를 발견하는 즉시 샘의 밝게 빛나는 장밋빛 미래는 끝장이다. 그들은 그녀의 입안에서 찢어진 작은 천 조각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것이고, 법적으로 공인된 봉투에 넣어져 범인이 남긴「가장 유력한」증거물로 해당 관리부서로 옮길 것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끼친다. 밀봉 테이프가 부착된 그것은 언젠가 샘의 목을 자를 것이다. 도끼로 내리치는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살인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지금도 경찰이나 군인은 의무적으로 지문을 등록하고 있다.
100년 뒤에라도 시대가 바뀌면 DNA 등록마저 의무화될지도 모른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보다 국가의 안보를 우선시하는 애국법 제창자들은 어쩌면 그 시기를 100년이 아닌 50년 뒤로 앞당길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백발이 성성한 은퇴 변호사의 DNA가 미해결 살인사건의 증거와 동일하다고 밝혀지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씀.
거기다 이것이「꾸며진 증거」라는 걸 과연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가 문제다. 반대로 증거 조작을 하는 경찰이 스캔들을 일으키는 판국이다. 1994년 아내 니콜을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기소된 OJ 심슨 사건에서도 피 묻은 양말과 장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논란이 일었다. 채집된 심슨의 혈액은 1.5리터 줄어들어 있었고, 장갑을 찾아낸 마크 퍼맨 형사의 경력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믿지 않았다. 영화배우로 전향한 전 미식축구 선수는 운이 좋았다.

『호오, 미래의 변호사 나으리는 경찰을 불신하는 편인가.』
딘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의왼데. 그래서 2년 전에도 마리아 윌튼의 시신을 트렁크에서 옮기는 걸 눈으로 목격했으면서도 모텔 주인을 꼰지르지 않았던 거니?』
샘은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정면만 응시했다.
『어차피 경찰이 네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어처구니없게도 딘은 분개하는 기색이었다.
『나쁜 놈들! 하나 같이 멍청하고 게을러 빠져선!』
경찰들이 유능하고 부지런하면 가장 낭패를 당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면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참을성이 바닥났다. 심호흡을 하고, 셋을 세고, 다시 여섯을 세고, 다시 열둘의 숫자를 세었음에도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젠장. 좀 닥칠 수 없어?!』
그 정도로 딘이 주눅이 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오히려 샘이 화를 내고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게 마음에 드는 눈치다.
『저런! 우리 새미가 기분이 별로인가 보구나. 이거라도 들을래?』
그리고는 골동품 가게에서 통째로 들고 오기라도 한 모습의 구닥다리 테이프를 보여주었다.
메탈리카, 모터 헤드, 블랙 사바스...
그것도 정식으로 발매된 카세트 테이프가 아니다. 플라스틱 뚜껑에 적혀진 제목들은 모두 손으로 쓴 것들이었다. 직접 녹음해 라벨을 붙인 듯했다.
『요즘에 누가 그런 걸 듣는다고. 전부 쓰레기 록이잖아.』
『이거 왜 그러시나. 세기의 명곡을 그렇게 폄하하면 예술이 울어.』
찰칵, 하고 테이프가 세팅되었다. 그 즉시 AC/DC의 시끄러운 소음이 자동차 안에 가득 찼다.
다른 의미에서 딘은 샘을 죽이려고 아주 작정한게 분명했다.
세기의 명곡 좋아하네. 엄격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있잖아. 제리코까진 멀어. 물론 난 도중까지만 널 태워다줄 거지만... 가는 내내 너와 말다툼 하고 싶진 않아.』
협상과 포용의 의미로 카세트 테이프의 볼륨을 작게 한 딘이 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가슴이 무너져내릴 정도로 남자다웠다.
샘은 딘을 노려보던 걸 얼른 멈추고 밋밋한 가로등 불빛만이 전부인 도로로 시선을 돌렸다.

Posted by 미야

2009/04/05 23:30 2009/04/0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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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렌드 2009/04/06 08:47 # M/D Reply Permalink

    .......애증의 도피군요. 맘에 드는 상대를 옆자리에 꿰어채운건 좋은데... 가는 내내 족족 저렇게 직직 예쁘게도 긁어주시다니... 횽님의 사랑은 참 사람을 미치게 만드시는구만요. (덕분에 순진했던 샘희는 내내 비취모드..하악~)

  2. T&J 2009/04/06 09:32 # M/D Reply Permalink

    와우, 왠지 업뎃됐을 것 같아서 들렸는데 아침부터 횡재군요~~^-^
    새삼 제스가 불쌍해지는 건 저뿐?
    어떻게됐든 두 남자야 사랑의 도피를 떠났고...ㅋㅋㅋㅋㅋ쇼에선 그녀의 죽음으로 샘이 사냥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소설에선 어떨지 기대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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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Orion 05

건조기에서 막 꺼낸 흰색 셔츠가 알록달록한 분홍색으로 탈바꿈한 걸 보고 나서야 부주의하게 섞여 들어간 빨간 손수건의 존재를 깨닫는 법이다. 작동 완료를 알리는 기계음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무료하게 잡지를 들여다보던 과거의 철없음이 그저 원망스럽다.
「생각이 짧았어.」
딘은 샘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몇 호인지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가 여자 친구와 동거하고 있다는 것도, 심지어 그녀의 이름이 제시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일까?
캠퍼스는 넓다. 사람도 많다. 보안도 형편없다. 그 안을 정체불명의 이방인이 오랫동안 휘젓고 돌아다녀도 눈에 띄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약간의 발품을 팔면 법학과 공부벌레 샘 윈체스터에 대해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다. 방정맞은 입방아를 찧어대는 사람은 주변에 널렸다. 그들에게서 좋아하는 단골 가게가 어디인지, 잘 먹는 점심 메뉴가 뭔지를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샘이 친구를 많이 사귄다는 것, 중독인가 싶을 정도로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 장래 희망이 변호사라는 것도 역시... 더 이상 겁쟁이 코요테로 남아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전부.
이쪽에서 자랑하듯 신나게 떠벌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사냥감이 행동방식을 바꾸면 사냥꾼은 거기에 맞춰 올무를 손본다. 예전 방식을 고집해봤자 산짐승이 자진해서 덫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궁리하며 미끼를 바꾸고, 과거와는 다른 모양으로 함정을 판다. 그리하여 쫒기는 쪽이나, 잡으려는 쪽이나 죽을 힘을 다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샘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딘이 지금 의도하는 건 뭐지?
함정을 파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

에이미 웰치가 행방불명된 건 언제였더라. 나흘 전? 아님 닷새?
시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실종 상태다.
하지만 딘은 그녀를 죽였다고 말했다.
자! 생각해, 생각해내라고, 샘 윈체스터. 미국 내 비합법적인 장의사는 모두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사막 한 가운데나 호수 밑바닥으로 숨겨지는 시체는 1년에 과연 몇 구나 될까. 이곳 캘리포니아에도 시체를 가져오면 은밀히 처리해주는 업자가 있을까? 쓸만한 장기는 해부해서 팔고, 필요하지 않는 부위는 소각로에 태워서... 뺨에서 핏기가 가셨다. 완벽하게 왁스가 칠해진 검은색 임팔라가 장의용 운구차처럼 느껴졌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이미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똑바로 누워 있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해서 어쩌면 딘은 운반하기 쉽게끔 미리 그녀의 몸을 토막냈을지도 모른다. 얼음을 가득 채운 비닐봉투에 하얀 팔뚝을 넣고... 머리 따로, 다리 따로...

미친개처럼 소리치고 싶은 욕구와 뒤돌아 달아나고픈 충동이 샘을 괴롭혔다.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 질러.』
딘은 그런 샘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대는 걸 보고 싶군...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혀가 빠져나와 입술 가장자리를 적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되면 오기가 발동해서라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

신경질적으로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샘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딘이 임팔라 트렁크를 열었다.
눈을 부릅뜨고 보기 흉한 모습으로 그 속에서 죽어있을 여자를 상상한 샘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 허둥대는 모습에 딘은 낄낄거리고 웃었다.
『심하다고, 컬리지 보이. 도대체 뭘 상상한 거야.』
크렁크 안은 어떤 의미로는 평범했다. 햄버거 포장지 같은 지저분한 생활 쓰레기가 있었고, 묵직한 공구 상자가 있었다. 기름때가 묻은 걸레가 그 옆으로 굴러다녔고, 그 안쪽으로 납작하게 주저앉은 봉투가 하나 보였다. 얼핏 봐선 음료수나 감자칩 같은 먹거리를 사서 그대로 던져 넣은 모양새다.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았고, 무게도 무척 가벼워 보였다.

『받아.』
『...』
『폭탄 아니야. 안 터져. 만진다고 죽거나 하지도 않아.』
샘은 딘이 건네려는 물건을 거부했다.
『죽은 그 여자의 소지품... 내 말이 맞지?』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딘은 실실 웃던 걸 멈추고 급격히 인상을 썼다.
『그거 고약하네! 넌 여자가 이런 걸 입을 거라 생각하니?!』
봉투에서 꺼낸 건 남성용 캐주얼 스웨터였다. 새 것은 아니었고, 헌옷을 모아두는 상자에서 끄집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대단히 구질구질했다. 소매가 닳았고, 밑단 일부가 크게 찢어졌다. 샘도 덩달아 인상을 구겼다. 사이즈가 대단히 커서 옷의 원래 주인의 체격을 짐작가게 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여자는 못 입는다. 아니, 현대 미국인을 괴롭히는 불치병 - 비만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못 입을 것도 없겠으나 아무튼 에이미 웰치와는 거리가 멀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그녀는 마른 체격으로 키가 168cm에 불과했다. 에이미가 저 푸른 스웨터를 입었다면 옷에 깔려 허우적거리는 꼬락서니가 되었을 것이다. 멋 내기에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유행도 아닌 빅 사이즈 옷을 여봐라 하고 입는 여자는 없다고 봐야 옳다.

딘은 스웨터의 양 어깨 부분을 쥐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것보단 이 옷, 네 눈에 익지 않냐?』
그의 말투에 기묘한, 그리고 짓궂은 장난기가 묻어나왔다.
『어디서 봤을까요?』

그가 살았던 고향에서는 옷이라는 건「튼튼한 옷감, 성실한 바느질, 정직한 가격」3대 원칙을 준수해야만 했다. 모양이나 색깔을 따지는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으로 샘의 옷장에는 고만고만한 셔츠와 바지가 걸려있었다. 여느 십대 청소년답게 샘 또한 텔레비전 주인공들이 입고 다니는 비싼 청바지와 운동화를 꿈꿨지만 그런 것들은 자신의 용돈으로는 손에 쉽게 넣을 수도 없을뿐더러 물건의 가치를 알아줄 주변의 시선도 많지 않았다. 말썽쟁이 강아지 셀리 앞에서 최고급 재킷을 뽐내어봤자 돌아올 대답은「왈왈~!」이거 하나밖엔 없었다.
『여자 친구는 어쩌고 웬 강아지?』
『데이트에 관심이 많았다면 전액 장학금이 가능했을 것 같아?』
쏘아붙이는 말에 딘은 항복의 표현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요컨대 멋쟁이 재킷보단 싸구려 스웨터가 샘의 스타일이었다.

눈두덩이를 세게 문지르다 주먹으로 이마를 툭툭 쳤다.
『그건 내 옷이야.』
『옳으신 말씀.』
『그때...』
기분이 괜찮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아니오」라고 딱 잘라 대답할 거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바싹 마른 입안이 아팠다. 세계의 표면이 뒤로 벗겨져 나가면서 지금 이 순간「과거」라는 놈이 이빨 투성이의 아가리를 벌렸다.
『우리가 만났던 그날...』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안 된다. 샘은 공격조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신, 내 가방을 뒤졌어?』
딘은 야유하듯 눈을 굴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엄청 좀스러운 놈처럼 들리잖아. 물론 나중에 네 가방을 뒤졌던 건 맞지만... 그건 나중이고. 미안하지만 조금 더 앞쪽입니다. 기억을 더듬어야겠어, 새미.』

해가 지자 기온이 내려갔다. 계속해서 걷고 있었기에 땀이 났지만 머잖아 그것도 과거형이 되어버릴 것이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다는 건 상식이다. 그래서 푸른색 스웨터를 겹쳐 입었다.
검은 시보레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샘은 바위를 치던 모세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캘리포니아로 가려고 하는데요. 방향이 비슷하다면 도중에까지라도 태워주지 않을래요?」
1970년대에 생산된 구형 자동차라 유리창을 아래로 내리려면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려야 했다.
「헤이! 어디로 간다고?」
「캘리포니아요!」
목적지와 방향이 같은 차를 찾는데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스웨터를 입어 몸을 따뜻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

다시금 소리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고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으러 갔다. 종종걸음을 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눈앞의 가게로 향했다. 신중하게 뒤편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가게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계산대 앞에도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잡아채듯 집어든 전화기는 먹통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딘에게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갔다. 뒤편은 숲이어서 썩 훌륭한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서두르다가 나뭇가지에 소매춤이 걸렸어. 올이 튿어진 건 그 때문이야.』
달빛이 밝았다. 바람의 냄새와 혀 아래로 씹히던 모래까지 모두 기억난다.
『목덜미 부위의 천이 늘어난 건 당신 때문이고.』
쇠파이프로 맞아 다리를 다친 샘을 주차장까지 질질 끌고 돌아왔다. 식품 저장고에서 초콜렛을 한웅큼 꺼내든 어린애처럼 그는 웃었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푸른색 스웨터를 벗겨냈다. 안쪽에 입었던 셔츠로는 손목을 묶었다. 바지를 끌어내렸고, 속옷을 찢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계속해서 교성을 질러댔다. 그 자세에서 엉덩이만 위로 쳐들고 음란하게 흔들었다. 완전히 맛이 가서 빨리 빨리, 더 안쪽으로, 어서 어서, 졸라댔다. 남자와의 경험은 처음이었는데도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쾌락에 몸부림치며 끙끙거렸다. 강제로 벌려진 그곳으로 무리하게 침입해오는 남자의 성기에 완전히 취해버렸다.
「계속 그러다간 목이 다 쉬어버리겠다.」
뒤에서 허리를 붙잡고 탐욕스럽게 찔러대던 딘이 혀를 끌끌 찼다.
「이거라도 물고 절조 있게 참아봐. 좀 아깝잖아?」
그렇게 해서 입에 물려졌던 건 맨 처음 벗겨졌던 푸른색 스웨터였다.

『그동안 갖고 있으면서 한 번도 빨지 않았어.』
딘은 들고 있던 스웨터를 이리저리 뒤집었다.
『오우, 이 얼룩은 네 침 자국일까?』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닌, 순수한 의문 같기도 했다.
『정액일지도 몰라.』
손가락으로 색이 변한 부분을 지적하며 샘의 의견을 구했다.
『아니면 그저 눈물일 수도 있겠지. 어떻게 생각해?』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아까부터 배가 꾸룩거리고 아팠다. 샘은 입을 꾹 다문 채 한때 자신의 거였던 스웨터를 노려봤다.

어쨌든 딘은 샘의 침묵을 일종의 대답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맞아. 아무려면 어때. 이제와 그런 건 상관없겠지. 그러니까 돌려줄게.』
『.......... 필요 없어.』
『여기까지 가져온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받아.』
『필요 없다고 말했어.』
『그거 참 쌀쌀맞네. 왜 그래, 이 부분이 찢어진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딘의 눈이 위아래로 번들거렸다.
『하지만 맹세코 내 잘못은 아니야. 정 야단을 치고 싶다면 그 에이미라는 여자를 탓하라고. 살쾡이처럼 옷을 뜯어먹은 건 그 여자지 내가 아니거든. 진짜야!』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샘은 거의 덤벼들다시피 해서 스웨터를 빼앗아 들었다.
『이, 이걸로 그 여자의 입에 재갈을 물렸어?!』
딘은 쉽게 대답했다.
『응.』
『그, 그렇다면 찢겨져나간 나머지는...』
『글쎄. 주의 깊게 찾진 않았지만 추측하자면 그 여자의 목구멍 속에 지금도 계속 있을 걸.』

사냥감이 행태를 바꾸면 사냥꾼은 거기에 맞춰 올무를 손봐야 한다.
그렇고말고. 쫒기는 쪽이나, 잡으려는 쪽이나 죽을 힘을 다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Posted by 미야

2009/03/29 23:39 2009/03/2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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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렌드 2009/03/30 07:33 # M/D Reply Permalink

    ..........졸지에 공범이 되는 셈인가요, 아 횽님...ㄷㄷㄷ

  2. T&J 2009/03/30 08:43 # M/D Reply Permalink

    정말 헐....................이라는 말밖에는 안 나옵니다.
    미야님 글빨한 한 번 더 놀라구요,,,우우우...ㅜㅡㅜ
    한 편, 한 편 새로 업뎃될 때마다 놀라게 되는 소설 같아요.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은 두 사람이, 또 그만큼 매력 있어서 글을 읽는 것이 즐거워요.
    늘 잘 읽고 있습니다.

  3. 청포도알 2009/03/31 23:08 # M/D Reply Permalink

    헐....ㄷㄷㄷㄷ 졸지에 범인 내지는 공범 되나요??? 저도 시체있을줄 알았는데...ㄷㄷㄷ 딘 나쁜놈이군요 ㅎㅎ

  4. 나마리에 2009/04/02 10:19 # M/D Reply Permalink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5. 시크릿~ 2009/04/02 22:46 # M/D Reply Permalink

    허헣.. 미야님 정말 짱이에요 헐래미
    한순간에 딘샘으로 돌아서게 만드셧네요
    책임져주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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