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fanfic] Orion 06

다른 사람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강도로 돌변한 마약 중독자로 착각된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넘어갈 수밖에.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제시카를 옆으로 밀치고 옷장을 열었다. 여벌의 옷가지가 필요하다. 현금도 있어야 할 것이고...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무엇보다 여차하면 써먹을 강력한 스턴 건이나 후추 스프레이 같은게 절실했다.
제기랄, 이 마당에 후추 스프레이? 샘은 계집애처럼 생각하는 자신에게 절망했다. 총을 든 상대방에게 꼴사납게 최루액을 분사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앞이 캄캄해졌다. 지금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은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성의 치한 격퇴 미션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무슨 일이야? 샘. 방금 브래디에게 전화해서 이리로 와달라고 했어.』
『그랬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제시카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이며「문제 없음」을 강조한 샘은 지난 여름에 캠핑을 위해 장만했던 등산용 나이프를 찾아 벽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통조림이나 따던 싸구려 칼로 신통한 일을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라면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는 거였다. 그거라면 몰래 숨겨뒀다가 비장의 카드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제임스 본드가 악당 골드 핑거 앞에서 만년필을 빙자한 고성능 레이저 장치를 꺼내드는 것처럼 폼 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추 스프레이보단 양반이었다.

『샘?』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그러니까 침실로 돌아가 누워.』
『자기는 지금 여행용 가방을 꾸리고 있는데 나더러 지금 잠이나 자라고?』
제시카의 목소리는 녹슨 쇠붙이처럼 거칠었다. 걱정한 것만큼이나 짜증도 나는 모양이었다.
『어느 여자가 이런 상황에서 발 뻗고 누워 태평스럽게 잠을 청할 수 있겠어!』
「날 똑바로 봐」명령하며 그녀가 어깨를 경직시켰다.

샘은 그제야 그녀의 벌겋게 젖은 눈자위를 알아차렸다. 아닌 척해도 눈물을 쏟은 흔적은 그렇게 쉽게 감춰지는게 아니다. 여자를 울렸음을 깨닫자 마음에 가책이 왔다. 샘은 남자였고, 무릇 남자라면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하여 꾸준히 설교를 들어왔다.

『오, 맙소사. 아니야, 맹세코 정말 아니야. 이건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
『정말로?』
『왜 반문하는 건데. 내 말을 못 믿어? 하지만 진짜야. 지금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음, 가족 문제야. 고향 집에 갑자기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어. 아버지가 몇 주 집을 비우고 혼자서 사슴 사냥을 나가셨는데... 어, 아무래도 날짜 관념이 무뎌지신 모양이야. 모시러 가야 할 것 같아.』
「내가 가면 해결될 거야」라고 서둘러 말을 덧붙인 뒤, 그녀의 불안감을 잠식시키기 위해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니까 브래디에게 이리로 올 필요 없다고 다시 전화해. 알았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거짓으로 웃었다.
당연히 제시카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고 샘을 쳐다봤다. 마술과도 같은 천리안의 능력이 없더라도 그 입가에 패인 보조개가 싸구려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몸에서 나는 악취를 감추려고 향수를 덕지덕지 뿌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미소는 달콤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나에게 뭘 숨기는 거야.』
『숨기는 거 아니야, 제스.』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샘은 가면과도 같은 웃는 얼굴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 밤에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뿐이야.』
제발 이해해줘 - 샘은 나름 필사적이었다.
『어쩔 수 없어. 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약속해.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지퍼가 열린 갈색의 가방을 곁눈질하며 제시카가 질문했다.
『알았어. 그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사흘 혹은 약 일주일 간, 확실히 그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야.』
『일주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 질렀다.
『로스쿨 면접은 어쩌고!』
『그 전까지는 반드시 돌아와. 아무렴 내가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왔던 걸 이렇게 포기할 것 같아? 난 그런 멍청한 놈이 아니야.』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다, 금방 해결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방금까지의 샘의 말들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거짓말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이야기만큼은 진심이었다.

반드시 돌아와. 그러자 몸에서 기운이 빠졌고,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사랑해, 제스.』
등이 뻐근해지도록 세게 껴안으면서 샘이 말했다.

『탑승해주신 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안전밸트를 착용하여 주십시오. 보면 아시겠지만 안전밸트는 좌석의 오른편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조수석에 올라타는 샘을 향해 딘이 썰렁한 농을 쳤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샘은 이렇다 할 반응을 일절 생략한 채 - 그것도 웃자고 한 농담이라고 - 들고 온 가방을 뒤편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쳇, 재미없어. 2년 전에는 깔깔거리고 잘만 웃었으면서.』
대학에 가겠다고 가출했던 샘을 차에 태워줬을 때에도 지금처럼 농담을 했었던 모양이다.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은 기억을 하고 싶지 않다. 안전밸트를 끼우는 척하며 고개를 숙인 샘은 기계적이고도 냉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발광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엔 없었다.
『좋아요. 그럼 둘이서 사랑의 도피를 떠나볼까요.』
허나 딘은 눈치도 없게 계속해서 허튼 소리를 지껄였고, 샘은 언제 폭발할지 모를 시한폭탄을 아랫배에 품은 기분이었다. 죽음의 시곗바늘이 짤깍짤깍 움직였다. 아니, 밑바닥에서부터 덜덜덜 진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한 건 임팔라의 엔진이었다. 70년대에 생산된 무거운 강철의 차체는 부드럽게 회전하며 진입로를 벗어났다.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긴장 풀어. 지금 죽으러 가냐?』
돌연 샘은 평생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한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지금 죽으러 가는 거냐고 물었어? 그와 비슷하거나, 아님 그보다 더 나쁘다 생각하는데.』
샘이 뿜어내는 분노의 오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딘은「어쩌면」이라 말하며 가볍게 응수했다. 동시에「아닐 수도 있고」후렴구를 붙이며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겉으로만 보자면 샘의 귀로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열중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핸들을 치는 동작엔 규칙적인 리듬이 실려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샘. 시체는 아직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그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문제야?!』
『그~럼~!! 게다가 넌 그 여자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과 같이 있잖아.』
고속도로 진입로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을 곁눈질하던 딘이 느슨한 태도로 발을 뻗어 악셀레이터 패달을 조작했다.
『넌 시작부터 운 좋게 점수를 10포인트나 따고 들어가는 거라고.』

불 꺼진 가게 담벼락으로 누군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를 해놨다.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새삼스럽게 실소가 나왔다. 10포인트고 30포인트고 여기서 점수는 중요하지 않다. 경찰이 에이미의 시체를 발견하는 즉시 샘의 밝게 빛나는 장밋빛 미래는 끝장이다. 그들은 그녀의 입안에서 찢어진 작은 천 조각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것이고, 법적으로 공인된 봉투에 넣어져 범인이 남긴「가장 유력한」증거물로 해당 관리부서로 옮길 것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끼친다. 밀봉 테이프가 부착된 그것은 언젠가 샘의 목을 자를 것이다. 도끼로 내리치는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살인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지금도 경찰이나 군인은 의무적으로 지문을 등록하고 있다.
100년 뒤에라도 시대가 바뀌면 DNA 등록마저 의무화될지도 모른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보다 국가의 안보를 우선시하는 애국법 제창자들은 어쩌면 그 시기를 100년이 아닌 50년 뒤로 앞당길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백발이 성성한 은퇴 변호사의 DNA가 미해결 살인사건의 증거와 동일하다고 밝혀지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씀.
거기다 이것이「꾸며진 증거」라는 걸 과연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가 문제다. 반대로 증거 조작을 하는 경찰이 스캔들을 일으키는 판국이다. 1994년 아내 니콜을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기소된 OJ 심슨 사건에서도 피 묻은 양말과 장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논란이 일었다. 채집된 심슨의 혈액은 1.5리터 줄어들어 있었고, 장갑을 찾아낸 마크 퍼맨 형사의 경력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믿지 않았다. 영화배우로 전향한 전 미식축구 선수는 운이 좋았다.

『호오, 미래의 변호사 나으리는 경찰을 불신하는 편인가.』
딘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의왼데. 그래서 2년 전에도 마리아 윌튼의 시신을 트렁크에서 옮기는 걸 눈으로 목격했으면서도 모텔 주인을 꼰지르지 않았던 거니?』
샘은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정면만 응시했다.
『어차피 경찰이 네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어처구니없게도 딘은 분개하는 기색이었다.
『나쁜 놈들! 하나 같이 멍청하고 게을러 빠져선!』
경찰들이 유능하고 부지런하면 가장 낭패를 당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면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참을성이 바닥났다. 심호흡을 하고, 셋을 세고, 다시 여섯을 세고, 다시 열둘의 숫자를 세었음에도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젠장. 좀 닥칠 수 없어?!』
그 정도로 딘이 주눅이 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오히려 샘이 화를 내고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게 마음에 드는 눈치다.
『저런! 우리 새미가 기분이 별로인가 보구나. 이거라도 들을래?』
그리고는 골동품 가게에서 통째로 들고 오기라도 한 모습의 구닥다리 테이프를 보여주었다.
메탈리카, 모터 헤드, 블랙 사바스...
그것도 정식으로 발매된 카세트 테이프가 아니다. 플라스틱 뚜껑에 적혀진 제목들은 모두 손으로 쓴 것들이었다. 직접 녹음해 라벨을 붙인 듯했다.
『요즘에 누가 그런 걸 듣는다고. 전부 쓰레기 록이잖아.』
『이거 왜 그러시나. 세기의 명곡을 그렇게 폄하하면 예술이 울어.』
찰칵, 하고 테이프가 세팅되었다. 그 즉시 AC/DC의 시끄러운 소음이 자동차 안에 가득 찼다.
다른 의미에서 딘은 샘을 죽이려고 아주 작정한게 분명했다.
세기의 명곡 좋아하네. 엄격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있잖아. 제리코까진 멀어. 물론 난 도중까지만 널 태워다줄 거지만... 가는 내내 너와 말다툼 하고 싶진 않아.』
협상과 포용의 의미로 카세트 테이프의 볼륨을 작게 한 딘이 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가슴이 무너져내릴 정도로 남자다웠다.
샘은 딘을 노려보던 걸 얼른 멈추고 밋밋한 가로등 불빛만이 전부인 도로로 시선을 돌렸다.

Posted by 미야

2009/04/05 23:30 2009/04/0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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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렌드 2009/04/06 08:47 # M/D Reply Permalink

    .......애증의 도피군요. 맘에 드는 상대를 옆자리에 꿰어채운건 좋은데... 가는 내내 족족 저렇게 직직 예쁘게도 긁어주시다니... 횽님의 사랑은 참 사람을 미치게 만드시는구만요. (덕분에 순진했던 샘희는 내내 비취모드..하악~)

  2. T&J 2009/04/06 09:32 # M/D Reply Permalink

    와우, 왠지 업뎃됐을 것 같아서 들렸는데 아침부터 횡재군요~~^-^
    새삼 제스가 불쌍해지는 건 저뿐?
    어떻게됐든 두 남자야 사랑의 도피를 떠났고...ㅋㅋㅋㅋㅋ쇼에선 그녀의 죽음으로 샘이 사냥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소설에선 어떨지 기대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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