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fanfic] Orion 05

건조기에서 막 꺼낸 흰색 셔츠가 알록달록한 분홍색으로 탈바꿈한 걸 보고 나서야 부주의하게 섞여 들어간 빨간 손수건의 존재를 깨닫는 법이다. 작동 완료를 알리는 기계음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무료하게 잡지를 들여다보던 과거의 철없음이 그저 원망스럽다.
「생각이 짧았어.」
딘은 샘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몇 호인지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가 여자 친구와 동거하고 있다는 것도, 심지어 그녀의 이름이 제시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일까?
캠퍼스는 넓다. 사람도 많다. 보안도 형편없다. 그 안을 정체불명의 이방인이 오랫동안 휘젓고 돌아다녀도 눈에 띄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약간의 발품을 팔면 법학과 공부벌레 샘 윈체스터에 대해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다. 방정맞은 입방아를 찧어대는 사람은 주변에 널렸다. 그들에게서 좋아하는 단골 가게가 어디인지, 잘 먹는 점심 메뉴가 뭔지를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샘이 친구를 많이 사귄다는 것, 중독인가 싶을 정도로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 장래 희망이 변호사라는 것도 역시... 더 이상 겁쟁이 코요테로 남아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전부.
이쪽에서 자랑하듯 신나게 떠벌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사냥감이 행동방식을 바꾸면 사냥꾼은 거기에 맞춰 올무를 손본다. 예전 방식을 고집해봤자 산짐승이 자진해서 덫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궁리하며 미끼를 바꾸고, 과거와는 다른 모양으로 함정을 판다. 그리하여 쫒기는 쪽이나, 잡으려는 쪽이나 죽을 힘을 다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샘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딘이 지금 의도하는 건 뭐지?
함정을 파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

에이미 웰치가 행방불명된 건 언제였더라. 나흘 전? 아님 닷새?
시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실종 상태다.
하지만 딘은 그녀를 죽였다고 말했다.
자! 생각해, 생각해내라고, 샘 윈체스터. 미국 내 비합법적인 장의사는 모두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사막 한 가운데나 호수 밑바닥으로 숨겨지는 시체는 1년에 과연 몇 구나 될까. 이곳 캘리포니아에도 시체를 가져오면 은밀히 처리해주는 업자가 있을까? 쓸만한 장기는 해부해서 팔고, 필요하지 않는 부위는 소각로에 태워서... 뺨에서 핏기가 가셨다. 완벽하게 왁스가 칠해진 검은색 임팔라가 장의용 운구차처럼 느껴졌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이미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똑바로 누워 있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해서 어쩌면 딘은 운반하기 쉽게끔 미리 그녀의 몸을 토막냈을지도 모른다. 얼음을 가득 채운 비닐봉투에 하얀 팔뚝을 넣고... 머리 따로, 다리 따로...

미친개처럼 소리치고 싶은 욕구와 뒤돌아 달아나고픈 충동이 샘을 괴롭혔다.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 질러.』
딘은 그런 샘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대는 걸 보고 싶군...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혀가 빠져나와 입술 가장자리를 적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을 거야.』
이렇게 되면 오기가 발동해서라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

신경질적으로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샘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딘이 임팔라 트렁크를 열었다.
눈을 부릅뜨고 보기 흉한 모습으로 그 속에서 죽어있을 여자를 상상한 샘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 허둥대는 모습에 딘은 낄낄거리고 웃었다.
『심하다고, 컬리지 보이. 도대체 뭘 상상한 거야.』
크렁크 안은 어떤 의미로는 평범했다. 햄버거 포장지 같은 지저분한 생활 쓰레기가 있었고, 묵직한 공구 상자가 있었다. 기름때가 묻은 걸레가 그 옆으로 굴러다녔고, 그 안쪽으로 납작하게 주저앉은 봉투가 하나 보였다. 얼핏 봐선 음료수나 감자칩 같은 먹거리를 사서 그대로 던져 넣은 모양새다.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았고, 무게도 무척 가벼워 보였다.

『받아.』
『...』
『폭탄 아니야. 안 터져. 만진다고 죽거나 하지도 않아.』
샘은 딘이 건네려는 물건을 거부했다.
『죽은 그 여자의 소지품... 내 말이 맞지?』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딘은 실실 웃던 걸 멈추고 급격히 인상을 썼다.
『그거 고약하네! 넌 여자가 이런 걸 입을 거라 생각하니?!』
봉투에서 꺼낸 건 남성용 캐주얼 스웨터였다. 새 것은 아니었고, 헌옷을 모아두는 상자에서 끄집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대단히 구질구질했다. 소매가 닳았고, 밑단 일부가 크게 찢어졌다. 샘도 덩달아 인상을 구겼다. 사이즈가 대단히 커서 옷의 원래 주인의 체격을 짐작가게 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여자는 못 입는다. 아니, 현대 미국인을 괴롭히는 불치병 - 비만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못 입을 것도 없겠으나 아무튼 에이미 웰치와는 거리가 멀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그녀는 마른 체격으로 키가 168cm에 불과했다. 에이미가 저 푸른 스웨터를 입었다면 옷에 깔려 허우적거리는 꼬락서니가 되었을 것이다. 멋 내기에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유행도 아닌 빅 사이즈 옷을 여봐라 하고 입는 여자는 없다고 봐야 옳다.

딘은 스웨터의 양 어깨 부분을 쥐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것보단 이 옷, 네 눈에 익지 않냐?』
그의 말투에 기묘한, 그리고 짓궂은 장난기가 묻어나왔다.
『어디서 봤을까요?』

그가 살았던 고향에서는 옷이라는 건「튼튼한 옷감, 성실한 바느질, 정직한 가격」3대 원칙을 준수해야만 했다. 모양이나 색깔을 따지는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으로 샘의 옷장에는 고만고만한 셔츠와 바지가 걸려있었다. 여느 십대 청소년답게 샘 또한 텔레비전 주인공들이 입고 다니는 비싼 청바지와 운동화를 꿈꿨지만 그런 것들은 자신의 용돈으로는 손에 쉽게 넣을 수도 없을뿐더러 물건의 가치를 알아줄 주변의 시선도 많지 않았다. 말썽쟁이 강아지 셀리 앞에서 최고급 재킷을 뽐내어봤자 돌아올 대답은「왈왈~!」이거 하나밖엔 없었다.
『여자 친구는 어쩌고 웬 강아지?』
『데이트에 관심이 많았다면 전액 장학금이 가능했을 것 같아?』
쏘아붙이는 말에 딘은 항복의 표현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요컨대 멋쟁이 재킷보단 싸구려 스웨터가 샘의 스타일이었다.

눈두덩이를 세게 문지르다 주먹으로 이마를 툭툭 쳤다.
『그건 내 옷이야.』
『옳으신 말씀.』
『그때...』
기분이 괜찮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아니오」라고 딱 잘라 대답할 거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바싹 마른 입안이 아팠다. 세계의 표면이 뒤로 벗겨져 나가면서 지금 이 순간「과거」라는 놈이 이빨 투성이의 아가리를 벌렸다.
『우리가 만났던 그날...』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안 된다. 샘은 공격조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신, 내 가방을 뒤졌어?』
딘은 야유하듯 눈을 굴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엄청 좀스러운 놈처럼 들리잖아. 물론 나중에 네 가방을 뒤졌던 건 맞지만... 그건 나중이고. 미안하지만 조금 더 앞쪽입니다. 기억을 더듬어야겠어, 새미.』

해가 지자 기온이 내려갔다. 계속해서 걷고 있었기에 땀이 났지만 머잖아 그것도 과거형이 되어버릴 것이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다는 건 상식이다. 그래서 푸른색 스웨터를 겹쳐 입었다.
검은 시보레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샘은 바위를 치던 모세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캘리포니아로 가려고 하는데요. 방향이 비슷하다면 도중에까지라도 태워주지 않을래요?」
1970년대에 생산된 구형 자동차라 유리창을 아래로 내리려면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려야 했다.
「헤이! 어디로 간다고?」
「캘리포니아요!」
목적지와 방향이 같은 차를 찾는데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스웨터를 입어 몸을 따뜻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

다시금 소리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고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으러 갔다. 종종걸음을 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눈앞의 가게로 향했다. 신중하게 뒤편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가게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계산대 앞에도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잡아채듯 집어든 전화기는 먹통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딘에게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갔다. 뒤편은 숲이어서 썩 훌륭한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서두르다가 나뭇가지에 소매춤이 걸렸어. 올이 튿어진 건 그 때문이야.』
달빛이 밝았다. 바람의 냄새와 혀 아래로 씹히던 모래까지 모두 기억난다.
『목덜미 부위의 천이 늘어난 건 당신 때문이고.』
쇠파이프로 맞아 다리를 다친 샘을 주차장까지 질질 끌고 돌아왔다. 식품 저장고에서 초콜렛을 한웅큼 꺼내든 어린애처럼 그는 웃었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푸른색 스웨터를 벗겨냈다. 안쪽에 입었던 셔츠로는 손목을 묶었다. 바지를 끌어내렸고, 속옷을 찢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계속해서 교성을 질러댔다. 그 자세에서 엉덩이만 위로 쳐들고 음란하게 흔들었다. 완전히 맛이 가서 빨리 빨리, 더 안쪽으로, 어서 어서, 졸라댔다. 남자와의 경험은 처음이었는데도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쾌락에 몸부림치며 끙끙거렸다. 강제로 벌려진 그곳으로 무리하게 침입해오는 남자의 성기에 완전히 취해버렸다.
「계속 그러다간 목이 다 쉬어버리겠다.」
뒤에서 허리를 붙잡고 탐욕스럽게 찔러대던 딘이 혀를 끌끌 찼다.
「이거라도 물고 절조 있게 참아봐. 좀 아깝잖아?」
그렇게 해서 입에 물려졌던 건 맨 처음 벗겨졌던 푸른색 스웨터였다.

『그동안 갖고 있으면서 한 번도 빨지 않았어.』
딘은 들고 있던 스웨터를 이리저리 뒤집었다.
『오우, 이 얼룩은 네 침 자국일까?』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닌, 순수한 의문 같기도 했다.
『정액일지도 몰라.』
손가락으로 색이 변한 부분을 지적하며 샘의 의견을 구했다.
『아니면 그저 눈물일 수도 있겠지. 어떻게 생각해?』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아까부터 배가 꾸룩거리고 아팠다. 샘은 입을 꾹 다문 채 한때 자신의 거였던 스웨터를 노려봤다.

어쨌든 딘은 샘의 침묵을 일종의 대답으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맞아. 아무려면 어때. 이제와 그런 건 상관없겠지. 그러니까 돌려줄게.』
『.......... 필요 없어.』
『여기까지 가져온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받아.』
『필요 없다고 말했어.』
『그거 참 쌀쌀맞네. 왜 그래, 이 부분이 찢어진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딘의 눈이 위아래로 번들거렸다.
『하지만 맹세코 내 잘못은 아니야. 정 야단을 치고 싶다면 그 에이미라는 여자를 탓하라고. 살쾡이처럼 옷을 뜯어먹은 건 그 여자지 내가 아니거든. 진짜야!』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샘은 거의 덤벼들다시피 해서 스웨터를 빼앗아 들었다.
『이, 이걸로 그 여자의 입에 재갈을 물렸어?!』
딘은 쉽게 대답했다.
『응.』
『그, 그렇다면 찢겨져나간 나머지는...』
『글쎄. 주의 깊게 찾진 않았지만 추측하자면 그 여자의 목구멍 속에 지금도 계속 있을 걸.』

사냥감이 행태를 바꾸면 사냥꾼은 거기에 맞춰 올무를 손봐야 한다.
그렇고말고. 쫒기는 쪽이나, 잡으려는 쪽이나 죽을 힘을 다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Posted by 미야

2009/03/29 23:39 2009/03/2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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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렌드 2009/03/30 07:33 # M/D Reply Permalink

    ..........졸지에 공범이 되는 셈인가요, 아 횽님...ㄷㄷㄷ

  2. T&J 2009/03/30 08:43 # M/D Reply Permalink

    정말 헐....................이라는 말밖에는 안 나옵니다.
    미야님 글빨한 한 번 더 놀라구요,,,우우우...ㅜㅡㅜ
    한 편, 한 편 새로 업뎃될 때마다 놀라게 되는 소설 같아요.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은 두 사람이, 또 그만큼 매력 있어서 글을 읽는 것이 즐거워요.
    늘 잘 읽고 있습니다.

  3. 청포도알 2009/03/31 23:08 # M/D Reply Permalink

    헐....ㄷㄷㄷㄷ 졸지에 범인 내지는 공범 되나요??? 저도 시체있을줄 알았는데...ㄷㄷㄷ 딘 나쁜놈이군요 ㅎㅎ

  4. 나마리에 2009/04/02 10:19 # M/D Reply Permalink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5. 시크릿~ 2009/04/02 22:46 # M/D Reply Permalink

    허헣.. 미야님 정말 짱이에요 헐래미
    한순간에 딘샘으로 돌아서게 만드셧네요
    책임져주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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