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오쿠림바(오쿠린바)는 슈카와 미나토의「꽃밥」책에 수록된「오쿠린바」에서 빌려온 모티브입니다. 자질구레한 세부의 정확성을 놓고 얼레리 꼴레리 하진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런데 아무래도 그놈의 담배에 수상한 약이 발려져 있었던게 분명하다. 연기를 빨다 말고 갑자기 멍해졌다. 길게 튀어나온 담뱃재가 치마폭으로 곧장 떨어지고 있는데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돌연 라바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귀옆으로 새파란 핏줄이 솟구쳤다. 어느새 눈동자가 사라지고 드러난 건 온통 흰자위 뿐이다. 카악, 짐승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고개가 뒤로 꺾였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가 제멋대로 허공을 걷어찼다. 『딘! 큰일이야. 간질 발작인가봐!』 머릿속으로 온갖 무시무시한 줄거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샘은 놀라서 라바의 몸을 붙잡으려 했다. 저러다 잘못하여 혀라도 깨무는 날엔 죽을 수도 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안타까워서 와와 소리를 질렀다. 지식의 가장자리를 더듬어봐도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뾰족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가만히 서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바닥에 편안히 눕혀보자. 정 뭐하면 911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샘? 당장 그 손 치워라. 여기서 잘못 건드리면 동티가 난다고.』 『지금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딘. 이거 안 보여? 할머니가 아프다고!』 『아프긴. 잘도 귀신들리고 있구먼.』 『에?』
딘이 혀를 끌끌 차는 것과 동시에 라바의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여전히 눈동자는 뒤로 돌아간 상태이다. 의식이 없는 것이 분명함에도 다시금 담배를 쥔 손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빨았다. 잠시 뒤, 코로 하얀 연기가 빠져나왔다. 공기가 빠진 뺨이 오목하게 들어가면서 자르르 근육이 떨렸다. 노인의 입가로 알 듯 말 듯 오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필터 부분을 질겅거리며 씹다 말고 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게 꼭 포커 테이블에 앉은 신사가 오랜 숙고 끝에「500을 베팅하겠네」라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딘은 살짝 실소했다.
『맛을 느낄 수 있습니까? 스테이플러씨.』 스테이플러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불리워진 라바가 인상을 찡그렸다. 『전혀. 죽어서도 담배 맛을 볼 수 있겠구나 내심 기대했는데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아. 뭐랄까,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지붕 위 안테나가 고장나 화면이 하나도 안 나오는 것 같으이.』 『허어라. 그거 대단히 유감이군요.』 그리고 차갑게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단순히 담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면 당신은 진짜 천치 바보 얼간이오. 그런 식으로 절차를 생략한 채 영매의 몸을 억지로 차지하면 살아 있는 사람이 받는 부담은 상상을 초월한답니다. 한 달치 생명줄을 단시간에 갉아먹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요. 가뜩이나 나이 많은 노인네에겐 치명적이지요. 이걸 다시 말해볼까요. 당신은 지금 명백한 살인 행위를 하고 있어요.』
딘의 책망에 죄책감을 느낀 것 같다. 노인은 천지창조 이후부터 계속 그렇게 해왔다는 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게 너무나 괴로워하는 모습인지라, ① 당장 늙은이의 머리 꼭대기로 성수를 끼얹는다. ② 짜디 짠 소금 가루를 입안에 빈틈 없이 꽉꽉 채워넣는다. ③ 후추로 코를 자극하여 세 번 재채기를 하게 만든 뒤에 오른쪽 엄지 손톱으로 바늘을 찔러넣는다, 는 계획을 보류하고 그가 하는 말을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내가 이 할멈의 목숨을 갉아먹었다니, 차마 못할 짓을 저질렀군. 그치만 변명하자면 다른 방도가 없었네. 이 여잔 끝까지 자네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치만 내 귀여운 손주가 엄청난 위험에 빠졌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얌전히 저승으로 돌아가는 건 나중이야.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움을 구해야만 했네. 이 여자가 안 된다고 결사 반대를 해도 이 말은 꼭 해야 하겠어.』 그리고나서 쥐어짜듯 다음의 단어를 토해내었다. 『오쿠림바!』
아쉽게도 전혀 모르는 낯선 단어였다. 게다가 그 단어를 꺼낸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도 감이 안 잡혔다. 샘은 자신의 수직 스프라이트 셔츠를 만지작대다 말고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저어, 죄송하지만 오쿠림바가 뭐죠.』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던 노파의 얼굴이 샘에게 가서 멈추었다. 흰자위만 남은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뭣이?! 자네들은 그런 쪽으로 전문가라며! 나보다 아는게 훨씬 많을 것 아닌가! 이거 큰일이군. 전문가가 거꾸로 그게 뭐냐 반문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아하, 그거요~」하고 손가락을 튕긴 뒤에「아주 간단히 처치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이제 염려하지 마세요, 스테이플러씨」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런 제기랄.』
냉장고 속에 들어간 바퀴벌레 잡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잘도 처치할 수 있겠다. 멀직히 물러서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있던 딘이 킁 하고 콧구멍을 벌릉거렸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헐리우드 영화 산업을 비난할 수밖에 없겠다. 특수한 은으로 만들어진 영험한 부적을 들고 사악한 정령을 어렵지 않게 퇴치하는 그놈의 잘난 배우들 덕분에 이쪽 업계의 일을 무슨 족집게로 흰 머리카락 뽑아대는 것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나오는 실정이다. 마귀가 진실로 흰 머리카락이면 오죽 좋으랴만, 알고 보면 쇠심줄보다 더 질긴게 악령이다. 게다가 뭔 재주로 오만가지 악령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있느냔 말이다. 인도의 신만 해도 추정으로 약 4억 8천만에 이른다. 한 곳에 모아두고 1번부터 차례대로 구령을 붙여보라 부탁하면 아마 수백 년은 족히 걸릴 거다. 이들을 배에다 태워 대서양을 건너려 시도하면 인원수 초과로 심해로 가라앉기 딱이다. 러시아워의 맨하턴 전철과 비교해도 이쪽이 우세하다.
『4억 8천만?!』 타고 가는 비행기에 벼락이 내리꽂혔다며 스테이플러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 정도 가지고 놀라다니, 딘은 허풍을 섞어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기다 이집트와 그리스 쪽의 신들, 티벳의 악령까지 더하면 태고적 인구 센서스 조사가 되어버려 과부하로 컴퓨터가 다운되지요.』 『오우!』 『그치만 좋은 소식도 있군요, 스테이플러씨. 하나는 당신이 그것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요긴한 힌트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때 라바의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전화기 버튼을 아무렇게나 누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어떻게 보면 피아노 건반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얼씨구 하는 표정으로 노인이 자기 팔을 내려다 보았다. 의지와는 다르게 멋대로 움직이는 손에서 스테이플러는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노파의 몸을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황급히 입술에 침을 바르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속눈썹이 다시금 파르르 떨렸다. 갈라진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퍼붓는 노인의 말은 지나치게 빨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라바가 날 자기 몸에서 내쫒으려 하고 있네. 상황상 길게는 말 못하겠군. 얘기가 엉망이겠지만 잘 들어주었음 좋겠네. 자네들이 찾아야 할 건 오래된 종이라네. 1942년 태평양의 남브리스타 군도에서 죽어가는 전쟁 포로에게서 내가 강제로 빼앗은 거지. 그 자는 그걸 오쿠림바의 물건이라고 했네. 언뜻 봐선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겼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끔찍한 건 세상에 둘도 없을 걸세.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멀리해야 할 그런 거라네. 내가 어리석었어. 진작에 불태워버렸어야 옳았어. 하지만 나는 그걸 손으로 만지기조차 무서웠다네. 그래서 보지도 않는 성경책에 끼워두고 2005년 9월에 내가 죽기까지 평생동안 남 모르도록 깊숙이 숨겨두었지. 그런데 나 죽은 다음이 문제가 되었지 뭔가. 그 종이의 원 소유자가 그걸 되찾겠다고 저승에서조차 벼르고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 하악!』 배가 아프다며 몸을 구부렸다. 고통에 겨워 노파의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허벅지가 뒤틀리면서 근육의 경련이 한층 더 심해졌다. 반격이 시작된 모양이다. 마지막이다 싶자 스테이플러는 악을 쓰며 한층 더 크게 외쳤다. 『아직은 안되오, 라바! 조금만 더, 더 말하게 해주시오! 지금 그 자는, 그 청년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손주 체스터에게 달라붙어 있단 말이오! 제발 부탁이네! 그 자를 막아주게! 성경책은 요양원에서 내 유품을 처리하면서 딸인 베버리에게 건네주었을 거야. 체스터에게 씌인 자가 먼저 그걸 발견하기 전에 자네들이 찾아서 없애버리게! 명심해야 하네. 조심해야 해. 오쿠림바의 그것을 소리내어 읽으면...!!』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어깨를 경직시키며 몸을 비틀었다. 발가락이 장작불에 타들어가고 있다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눈동자가 기름 바른 당구공처럼 앞으로 돌아왔다 다시 뒤로 넘어갔다. 의자 손잡이를 할퀴며 엉덩이를 펄쩍펄쩍 움직였다.
라바가 죽어라 악을 썼다.『크앗! 내 몸에서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명심하게, 젊은이! 그걸 소리내어 읽는 날엔 귀 열린 사람은 누구랄 것 없이 죽게 되네!』 『당장 주둥이 닥치고 꺼져! 멍청한 영감탱이!』 『그것이 사람을 죽인단 말일세! 이렇게 애원하네. 내 손자를 구해줘!』 『나갓!』
노파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가 도로 수축했다. 순간적으로 샘은 밀봉된 쥬스 뚜껑을 딸 적에 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텔레비전 광고에서 나오는 선명한「펑~」소리였다. 그러나 쥬스 뚜껑 비슷한 것도 주변엔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환청이었다. 한참만에 고개를 똑바로 든 노인의 얼굴로 붉은 코피가 흐르는게 보였다. 노파가 저주의 욕말을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코밑을 닦았다.다행히 량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 보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벌겋게 얼룩진 소매를 노려보던 노파는 걸죽한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케엑, 살아 있었다면 결혼해달라 요청했을 거라는 말은 취소야. 빌어먹을 개새끼.』 이마로 땀이 번들번들하다. 트랙 열 다섯바퀴를 다 돌고 바닥에 주저앉은 운동 선수처럼 기진맥진해서 소파 깊숙이 가라앉았다. 헐떡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입에서 시큼한 단내가 났다. 그래도 정신이 맑아졌는지 회색의 눈동자로 약간의 생기가 돌아왔다.
스테이플러가 성공적으로 진압당했음을 확신한 딘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갑작스럽게 몸을 빼앗긴지 거진 2분이 경과했다. 그 정도면 명줄에 큰 영향은 없을 터, 일주일 동안 꼬박 침대에 누워 지독한 독감을 앓았다고 치면 될 거다.
『지금 기분은 어때요? 라바.』 『쓰벌. 사실대로 말해줘? 개떡이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군요. 알았어요. 우린 당장 여기서 나갈테니 당신은 좀 쉬세요. 대신 묘지에서 파온 흙을 조금 놓고 갈테니 토마스 스테이플러씨가 또 수상한 짓을 할 것 같으면 그때는 용서고 뭐고 맘대로 뒤집어 엎으세요.』 『뭣이?! 인석들아! 지금 묘지에서 파낸 흙이 문제야?!』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지치기도 한 노인은 윈체스터 형제를 향해 애꿎은 슬리퍼를 던졌다. 그리곤 꽉 잠긴 목소리로 애원했다. 『너희들, 아무 것도 못 들은 거다. 내 말 알겠어?!』 『예이, 예이.』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고! 저놈의 망할 영감이 한 이야긴 모두 잊는 거다. 절대로 끼어들지 마. 혹시라도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존에게 찢겨 죽어. 알겠어? 잊어버려!』
그래봤자 이미 늦었다. 샘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오쿠림바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 건지를 궁금해 했다. 그 옆에서 딘은 태평양의 남브리스타 군도가 어디 쯤 있는 것인지, 아울러 섹시 비키니 걸이 해변가에서 알로하를 외쳐줄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얀 백사장에서... 오우, 허리 부근이 뻐근해지려 한다. 그래서 딘은 동생이 멋진 아가씨라도 되는 양 쳐다보며 씨익 웃어버렸다.
Posted by 미야
2007/01/08 21:12
2007/01/0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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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 속의 사다코 놀이나 다시 하십시다. 혼자, 조용히, 그리고 재미있게 놀자는 것이 평소에 제가 그토록이나 부르짖은 캐치플레이즈 아니었습니까. 우물 뚜껑을 덮고 망상을 즐기도록 합시다. 이 글은 회개, 구원, 심판 3부작의 2편입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의 모티브는 슈카와 미나토의「꽃밥」에서 빌려옵니다. ※
이런 종류의 아파트는 폐쇄성 강한 소 왕국이나 마찬가지다. 우주 요새도 아닌데 공용 출입구에 단단한 철판을 덧댄 걸 보라. 전기요금 고지서를 가지고 온 우편 배달부까지도 적으로 간주, 바깥에 세워두곤 비무장을 확인하고저 셔츠를 뒤집어 보라 명령할 거다. 제복을 입은 도어맨이 지키고 선 최고급 맨션보다 더 까다롭다. 외부인의 접근은 일절 금지된다. 아무렇게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큰코 다친다. 토지를 지배하는 여왕의 윤허가 있기 전까진 경찰이고 하느님이고 건물 안으로의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신분증을 내밀고「○○○에 사는 아무개씨에게 용건이 있으니 이 바깥 대문이나 열어주시죠」라고 거드름을 피워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최소한 5년 전부터 같은 모자와 같은 복장으로 피자를 배달해온 가게 종업원이 아닌 이상 돌아올 답은 하나다. 《여긴 아무도 안 살아요.》 인터폰 너머로 냉큼 대답하는 목소리에 딘은 이럴 줄 알았다며 이마를 만졌다. 『아무도 안 살아? 그럼 안에서 잘도 대꾸하는 댁은 누구요.』 《글세요, 나는 누구일까요.》 지금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짐승의 이름을 묻는 거냐. 수수께끼는 김전일보고 풀라고 해라. 복잡한 건 딱 질색이라며 딘은 막무가내로 벨을 다섯 번 더 눌러댔다. 『마담 라바가 전화해서 먼 길을 달려왔으니까 당장 문이나 열어,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야. 귀신 잡는 흰둥이가 길바닥에서 시끄럽게 떠들기에 멀리 내쫓았다고 할멈에게 가서 잘도 떠들어 보시지?』 《.......... 윈체스터?》 그제서야 철컹 소리를 내고 육중한 무게의 도어가 열렸다. 왕국 공식 통행증이 드디어 떨어졌다며 딘은 잔뜩 긴장한 동생 쪽을 향해 눈짓했다.
자동 록이 풀린 공용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좁게 만들어진 가운데 통로를 두고 양쪽으로 101호와 102호가 보였다. 그 중에 아파트 관리인이 사는 집은 아마도 101호인 듯 싶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당장에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색으로 젋은 흑인 여자 하나가 101호 앞에서 당당히 버티고 서 있으니까 하는 소리다. 바람을 피다 들킨 남편도 아니건만 샘은 그녀의 사나운 시선 앞에서 오금이 다 저렸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면 당장 면도날로 확 그어버린다는 투다. 얼마나 살기등등하던지 남의 멀쩡한 염통에 칼집을 넣어 저녁 만찬에 내놓을 국을 끓이고도 남겠다. 여자는 천천히 걸어가는 그들 형제를 쏘아보며 뒷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샘은 그녀가 진짜로 흉기를 쥐고 있는 건 아닌지를 걱정하며 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제법 깊어 보이는 소매와 볼록한 호주머니가 그런 근심에 불을 질렀다.
살집이 통통하니 오른 젊은 여자는 그런 샘이 가소롭다며 콧방귀부터 뀌었다. 『흥! 귀엽군.』 딘이 지지 않고 맞장구쳤다. 『당연히 귀엽지. 내 동생이거든.』 그리곤 손을 흔들며 곧장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라바의 집은 205호라고 했다. 딘은 주먹을 들고 205호라고 적혀진 문짝을 두 번 쾅쾅 찍었다. 순간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 흔한 TV 소리 하나 안 새어나왔다. 수챗구멍에 물 흘러가는 소음조차 싹 지워져 불가사의한 정적만이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희미하게 남은 동양적인 향이 코를 자극했다. 매캐한 커리이에다 약초를 여럿 뒤섞은 냄새였다. 코를 킁킁거리다 말고 샘은 이마를 찌푸렸다. 부두교 사제의 집을 찾아갔을 적에도 이와 비슷한 냄새를 맡은 기억이 있다. 톡 쏘면서도 들쩍지근한게 속이 울렁거렸다. 갑자기 제시카가 먹어보라 호기심에 권하던 중국의 월병 과자의 맛이 입에 맴돌았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구토가 치민다. 얇은 벽을 타고 정체를 알 길 없는 불가사의한 냉기가 솟구쳤다. 차가운 곤약이 피부에 닿은 느낌이다. 덕분에 어깨가 오싹해져 샘은 상체를 부르르 떨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복도 조명등까지 깜빡깜빡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딘이 문짝을 다시 세게 두드렸다. 『라바! 마담 라바! 빨랑 문 열어봐요. 라바!』 『젠장, 이놈의 다리가 이런 때 말썽을... 누구요?』 한참만에야 안쪽에서 슬리퍼를 끌며 걷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철커덕 하고 체인이 풀리면서 회색의 눈동자가 살짝 벌려진 문틈 사이로 나타났다. 전화 목소리로만 상대방을 알고 있던 샘은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반토막밖에 되지 않는 작은 키에, 마르고 뒤틀린 체구가 만성적 영양실조를 의심케 했다. 관뚜껑에 못이 쾅쾅 박히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주글주글한 피부는 윤기를 잃어 폐차장에 가득 쌓여진 고무 타이어를 연상시켰다. 백내장을 오래 앓았는지 수정체가 혼탁했다. 샘은 할머니가 자신의 망가진 눈으로 자신들이 누구인지 과연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말라붙은 장작개비 같은 손으로 골동품임이 분명한 돋보기까지 쥐고 있었다. 안경알이 얼마나 두꺼운지 콧잔등에 올리는 순간 코가 주저앉게 생겼다.
『요즘은 사정이 생겨 손금을 보지 않아, 젊은 양반들.』 친절함은 요만큼도 섞이지 않은 쉰 목소리로 그녀가 짜증을 부렸다. 『손금 안 봐요.』 어줍잖은 손님 취급에 딘도 덩달아 짜증부렸다. 『그럼 왜 왔어. 설마허니 나 같이 혼자 사는 처량한 노인네에게 신문 대금 받으러 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진공 청소기라도 팔러 왔... 어랍쇼.』 딘의 위 아래를 찬찬히 흝어보던 라바는 뭔가를 깨달았는지 짧게 신음 소리를 냈다. 『이게 누구야. 윈체스터?! 그런데 존이 아니잖아. 딩딩 너냐?!』
샘은 갑자기 바빠졌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라바가 문을 도로 걸어 잠구지 못하도록 열린 문 틈으로 재빨리 발 하나를 들이밀었다. 동시에「안녕히 계세요, 할머니」라고 인사하고 곧바로 돌아서려는 형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덕분에 양쪽에서 보이는 반응이 끝내줬다. 『샘! 내가 밧줄이냐, 아님 초인종이냐. 잡아당기긴 왜 잡아당겨!』 『이 고릴라처럼 덩치 커다란 놈아! 어서 내 집에서 발을 빼지 못 할까! 에잇, 닫아버릴테다!』 『봤지? 새미. 할머니가 우리더러 그냥 가라잖아.』 『도대체 존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절대로 아들 놈은 보내지 말랬더니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보내?!』 라바는 악 쓰지, 딘은 울부짖지... 형을 붙잡은 팔도 아팠고, 문틈에 낀 다리도 아팠다. 샘은 인내심이 바닥나는 걸 느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모두 입 다물어~!』 바퀴벌레마저 숨 쉬는 걸 잊어먹은 건물에서 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잘도 울렸다.
『아버진 오실 수 없어요.』 샘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했다. 『돌아가셨거든요.』 짐작도 못 했던 모양이다. 라바는 두 눈을 휘둥글 떠보이며 오우, 하고 불명확한 의미의 소리를 냈다. 충격을 받았던지 불을 붙이려던 담배를 카페트 위로 떨어뜨렸다. 그걸 도로 주울 생각도 못 하고 멍청하게 라이터부터 켜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할 지경이다. 길게 자라난 라이터의 불빛이 반사된 그녀의 얼굴은 촛불 아래서 떠오른 유령처럼 기괴했다. 깊게 패인 뺨의 고랑으로 뿌연 흙먼지가 휘날렸다. 10년 넘게 빗방울이라곤 구경도 못 해본 주름살 위로 매마른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리 없어. 존이 죽었다고? 그의 손금을 봐서 알아. 아직 명이 꽤나 남았는데 어째서...』 현기증을 느낀 것 같다. 라바는 무너지듯 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안색이 더 나빠졌다. 순간 할머니가 기절할지 모른다고 판단한 샘은 부리나케 몸을 돌려 물컵을 찾았다. 차가운 물을 삼키면 도로 기운이 날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하나, 이놈의 물컵과 주전자를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 몸서리치도록 냉기 가득한 방안엔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일상적 가재도구라는게 거의 보이질 않았다. 페인트가 벗겨진 구릿빛 선반에는 책 대신에 정체불명의 약상자와 초가, TV가 있어야 할 받침대엔 이마 부위로 붉은 칠이 발려진 염소의 두개골이 대신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우와, 짐승의 두개골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세 개씩이나 된다. 가정용 인테리어라고 하기엔 대단히 박력적이다. 분위기에 압도당한 샘은 함부로 집안을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싱크대 서랍장을 열었는데 꽃무늬가 그려진 접시 대신 원숭이 미이라가 튀어나오면? 냉장고라 생각하여 손잡이를 잡아당겼는데 사실은 관이었습니다 - 라는 결말으로 치닫으면? 샐샐 웃고 도로 닫아버리면 그만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물은 됐어. 샘.』 딘은 테이블에 놓여진 담뱃곽에서 새 담배를 꺼내 할머니 입에 손수 물려주었다. 『당신의 생명수는 미네랄 워터가 아니라 니코틴이죠. 내 말이 맞죠? 라바.』 라바는 하루에 세 갑 이상을 피워대는, 의사도 두손 두발을 번쩍 들어버린 중증의 니코틴 중독자였다. 유령을 보는 사람 다수가 알콜, 그것이 아니면 헤로인, 더러는 도박에 중독되곤 한다. 유령을 굳이 보지 못 하더라도 술에 찌들어 사는 헌터들을 주변에서 여럿 보아왔다. 담배 중독쯤은 귀엽기만 하다. 딘은 능숙한 태도로 불까지 붙여주면서 재떨이까지 챙겼다.
『자, 그래서 말인데요...』 『되었다. 더 얘기할 것 없다. 아무리 급하다고 물 불을 안 가리고 덤벼들 순 없지.』 그리고는 엉뚱하게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삿대질까지 해가며 버럭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닥쳐, 영감! 내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 얘네들이 아직 어린애들이라는 걸 몰라?』 딘은 혹시 누가 옆에 있는가 싶어 고개를 길게 빼고 쳐다봤다. 당연히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였다. 샘은 불안한 시선으로 형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뭐가 보여?」라고 입 모양만으로 질문했다. 보이긴, 쥐뿔. 거미줄과 먼지만 나풀거리고 있다. 『지금 누구에게 잔소리야! 망할 영감탱이. 물론 그럴 순 있겠지.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할래. 아, 그러셨어? 하지만... 됐어! 대단히 실례했어. 아항, 그렇지만 난 찬성 못 하겠는데.』 이건 흡사 외딴 무인도에서 혼자 살면서 야자나무 열매 윌슨과의 오붓한 대화를 즐기는 방법에 대한 고찰 같다. 지금의 라바는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보였다. 당장 그만하라고 손을 휘젓더니, 담배 연기를 깊게 뱉어내곤 다시 허공을 향해 삿대질이다. 『진짜~!! 그렇게 고집 부릴래?!』
딘은 타임 아웃을 외치며 상황 정리를 시도했다. 『라바?』 『기다려, 보이. 우리가 지금 대화 중이라는 거 안 보여? 하여간 이놈의 영감, 고집은 있어가지고!』 『누구와 대화하는 건데요.』 『토마스 스테이플러.』 『그게 누구인데요.』 『난들 알겠어? 어쨌든 죽은 사람이야.』 물론 그러시겠지요. 딘은 끙 소리를 내뱉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한 겨울이라지만 - 이곳 기준으로 영상 13도라는 건 일단 무시하고 - 보일러를 정상으로 가동했음에도 이가 덜덜 부딪치도록 춥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짐작했던 바다. 시험 삼아 EMF 미터기를 꺼내 전원을 켜봤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단숨에 눈금이 끝까지 치솟으면서 빨간 불이 켜졌다.「지금 난리가 난 거 맞거들랑요」라고 경고하는 삑삑 소리가 되려 성가셔 딘은 EMF 미터기를 끄고 도로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지금 여기 있는 건 성질 고약한 쪽은 아닌 것 같네요. 느긋하게 삿대질에 말다툼도 하는 걸 봐선.』 『고약해? 하하하. 말도 안되는 소리. 이 인간이 살아 있었다면 나랑 결혼해달라고 젓가슴 들이밀며 유혹하고 싶을 정도야. 최소한 엉덩이라도 만지고 싶어지던데.』 낄낄 웃으면서 꺼낸 라바의 농담에 오히려 유령이 질색했던 것 같다. 멀쩡하던 커피 테이블이 끼익- 소음을 내고 저절로 끌려나왔다. 샘과 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할머니~!」라는 눈빛을 하고 두 손을 깍지꼈다. 나이 팔순의 노파가 잘도 성희롱을 하고 있다. 그것도 죽은 사람을 상대로. 정말이지 잘 하는 짓이다. 스테이플러씨가 홧김에 책을 집어던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고개를 돌려 잠시 옆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라바의 회색 눈이 교활함을 담아 가늘어졌다. 『후후후, 지금 이 영감, 자네들 엉덩이를 대신 만지라고 충고하고 있네. 어때. 이 할미가 만지게 해줄겨?』 이제는 딘이 위협과 경고를 담아 커피 테이블을 뒤집어 엎을 차례가 되었다. 『예쁜 얼굴 망가진다. 성질 부리긴.』 라바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부르르 떠는 딘의 얼굴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Posted by 미야
2007/01/05 14:55
2007/01/0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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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엔 사실과 허구가 칵테일 짬뽕이 되어 있으니「말도 안돼~!」말씀은 말아주세요. (웃음) 부산에도 못 가봤는데 라스베가스로 카메라를 들고 취재를 갔겠수, 사진을 봤겠수. 좋아서 쓰는 판타지라고요. 이래서 현대물은 쥐약인데... 끙. 시간대는 시즌2에 맞추어 2006년 겨울입니다. ※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퉁퉁 부어터진 딘은「이제부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란다」이러면서 일곱 살 어린애의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다. 엉뚱한 조수석에 앉더니「김기사? 어서 운전해」라며 팔짱을 꼈다. 백만 개의 의문부호로 얼굴을 도배한 동생이 키를 꽂고 시동을 걸자 이렇게 딱 한 마디를 던졌다. 『딩딩은 아직 어리거든요.』 그리고는 길게 기른 머리를 짧게 자르기 위해 미용실로 강제 연행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딘? 나는 마담 라바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혀 몰라. 알고 있는 사람은 형이잖아.』 『뭐가 문제람. 넌 초능력 소년이잖아. 눈을 감고 집중해. 그러면 주소가 보일 거다.』 『말도 안돼. 지금 나더러 눈을 감고 아브라 카다브라 주문을 외우라는 거야? 그랬다간 필연적으로 전봇대를 들이박게 된다고.』 『어허라, 그건 안되지. 내 차를 박살내면 알지?』 『그러니까 그놈의 망할「카지노에서 딜러와 붙어 이기는 법」책에서 눈을 떼라니까!』
샘이 악을 쓰는 말든, 딘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침착한 자세로 페이지를 넘겼다. 제 48쪽 2번째 줄. 『게임 중에 사용된 X와 @로 분류하여 몇장씩 나왔는지 체크를 하였다면 슈 안에 X가 몇장이 남아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사용된 X가 3장이라면 슈 안에는 틀림없이 13장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평균 X가 나올 확률이 30.7%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46.4%로 높아진다. 따라서 X카드가 많이 나올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딜러보다 플레이어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배팅 금액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외계인이 지랄하며 스트립쇼를 벌이는 소리가 따로 없군. 뭐가 이리 어렵담. 샘? 넌 이게 뭔 소리인지 이해가 가니?』 『지금 카드 카운팅*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맙소사, 딘!』 『왜? 라스베가스잖아. 밤새 슬롯 머신만 잡아당기는 건 처량맞다고.』 『우리가 지금 도박하러 가는게 아니니까 하는 소리야.』 『뭐? 지금 우리가 대박을 꿈꾸며 주사위를 던지러 가는게 아니란 말이야?』
어떻게 거기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을 할 수 있는 거냐. 차라리 말을 말자. 샘은 축 처진 표정으로 기어를 조작하며 임팔라의 속도를 올렸다. 여행은 초반부터 대단히 끔찍해지고 있었고, 짐작이 맞다면 아마 마지막까지 끔찍할 거다. 간단히 요기를 채우기 위해 잠시 레스토랑에 들려 호밀 빵에 칠면조를 끼운 버거를 주문했을 적에도 그의 형은 바지춤에 손을 넣은 채 케첩 소스 병과 후추통을 데리고 병정 놀이에 열중했다. 커피를 서빙하던 웨이츄리스의 잔뜩 찡그린 눈썹도 있겠다, 어쩐지 대단히 부끄러워져서 어흠 헛기침을 했더니 딘은「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난 다 알고 있어」라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딩딩은 아직 어리거든요.』 『알았어요, 아들. 그러니 닥치고 감자 튀김을 입에 넣도록 해요.』 만장하신 가운데 커다란 사내의 머리를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샘은 한껏 근엄한 표정을 짓고 딘을 혼내켰다.
기온은 섭씨 13도 가량. 웃지 말자. 이것이 라스베가스의 겨울이다. 추운 북부의 도시, 그러니까 얼어 죽을 것 같은 뉴욕 같은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어쩜 그럴 수가 있니」해가며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애시당초 사막에서 눈보라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이쪽 기준으로는 이것도 제법 추운 날씨다. 시그널 뮤직과 같이 해서 라디오에서 간단한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10밀리미터 안팍의 비가 내릴 거라며 밝은 목소리의 여자는 미용실에서 애써 만든 헐리우드식 머리 스타일을 망치기 싫다면 데이트를 하러 가면서 우산을 준비하라고 했다. 음, 네바다 주에서 눈은 기대할 수 없지만 비는 기대해도 된다니. 자연은 진정 위대하다.
『사막에도 비는 오는구나.』 『바다에도 비는 내리니까.』 어쩐지 말도 안되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샘은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와 확률 나열에 질린 나머지「카지노에서 딜러와 붙어 이기는 법」책을 진작에 쓰레기통에 집어던진 딘은 반쯤은 감긴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여 샘은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가슴이 욱씬거렸다. 왜 그걸 몰랐을까. 6년 전에도... 아빠가 차를 운전하고 딘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존은 대화를 길게 하는 편이 아니니까 웃고 떠드는 분위기는 아마 아니었을 터. 그 옆에서 딘은 묵묵히 이정표의 글자를 확인하거나, 지도에 그려진 고속도로 라인을 손가락으로 따라가곤 했을 것이다. 어쩌다「다음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야 해요」라고 말하는게 부자 사이로 오고 간 대화의 전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루함이라는 걸 전혀 몰랐으리라.
딘이 리듬을 실어 톡톡 하고 손등으로 유리창을 가볍게 건들였다. 살짝 깨문 입술이 신경쓰였다. 아까는 그렇게도 산만하더니, 지금은 도에 지나친 과묵함에 빠져 혀를 고양이에게 빼앗긴 사람처럼 굴고 있다. 샘은 어떻게 해서라도 형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잠시 서서 저녁 해지는 걸 보고 갈래?』 『웬 청승?』 남의 마음도 몰라주고 딘은 동생의 의견을 가차 없이 묵살했다. 『코요테와 품바야 합창이라도 하고 싶어? 난 싫어. 그런 건 짜증나.』 그리고는 라디오를 만져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곳으로 채널을 비틀었다. 안 되겠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럴 적엔 그냥 직업적 이야기를 하는게 오히려 낫겠다. 샘은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해 보이는 형을 곁눈질하며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꾸몄다.
『저기, 있잖아. 마담 라바가 악령에 빙의된 거라면 어떻게 처리하는게 좋을지 생각해봤어?』 『어떻게 하긴. 중세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 방법을 써야겠지. 수은을 가득 채워넣은 목욕통에 벌거벗은 할머니를 집어넣고 철 쑤세미로 온몸을 벅벅 밀어버리는 거야.*』 『에엑?! 그거 농담이지?』 『왜 그렇게 놀라는 건데, 샘. 천 년 전에는 십자가를 목에 건 성직자들이 귀신을 쫓는답시고 다들 그렇게 했다고.』 『지금은 2006년이지 1006년이 아니니까 하는 말이야.』 『뭐시라! 올해가 1006년이 아니라는 거야?! 이거 놀랍군!』 『눈동자 굴리면서 너스레 떨긴. 재미 없어, 그 농담.』 『쳇, 아빠는 좋아했는데...』 딘은 혀를 차며 바닥으로 몸을 더욱 낮추었다. 덕분에 샘은 바늘 방석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이 굳었다. 이젠 틀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음악이나 듣는 것밖엔 없겠다.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 채 샘은 시리지도 않은 눈을 반복하여 깜빡거렸다.
지금 딘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동생인 샘 윈체스터. 그렇지만 딘과 같이 드라이브를 하고 있는 건 이미 죽고 없는 아버지 존 윈체스터이다. 6년 전과 마찬가지로 샘은 고향 집에 덩그마니 홀로 남겨졌다. 외로움에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제서야 딘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펄쩍 뛰며 스프링처럼 튕겨 올랐다. 『샘?! 네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 딘 윈체스터 식의,「왜 눈시울을 붉히는 거야, 임마!」라는 소리다. 『아아. 별 거 아냐. 피곤해서 그래.』 『휴지 줄까. 아님 사탕 줄까. 내가 눈치가 없어서...』 정신 못 차리고 횡설수설해 하는 걸 재빨리 말꼬리를 잡아챘다. 『그것보단 슬슬 교대해줘. 다리가 저려 죽을 것 같아. 6시간 내내 나 혼자 운전했다는 거 알아?』 나오는 콧물을 도로 목구멍으로 삼킨 샘은 죽을 힘을 다하여 밝게 웃었다.
아쉽게도 마담 라바의 집은 상점가나 호텔이 몰려있는 번화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네온싸인을 보고 와아 좋아했던 것도 잠시, 동생과 교대한 딘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멀건 아파트 단지가 있는 쪽으로 한참을 더 올라갔다. 여기가 24시간 잠들지 않는다던 전설의 라스베가스인가 싶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동네였다.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정신 없이 몰려다니는 도심과는 다르게 냉기가 감돌았다. 해가 진지 좀 되었다 싶었음에도 불이 꺼진 집들도 보였다. 수퍼마켓과 편의점의 간판 몇이 환하게 빛나 생기가 돌았을 뿐, 길가엔 사람이 좀처럼 다니질 않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다고들 말 하지만. 하필이면 나쁜 쪽으로만 비슷하니 진짜 살 맛 안 난다.
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샘을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지금의 샘은 백화점에서 본 산타클로스가 사실은 분장한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걸 깨달은 어린애처럼 보였다. 수염을 세게 잡아당기면 반질반질하게 면도한 맨 뺨이 드러난다. 당황한 아르바이트생은 어색한 오호호 웃음을 지어가며「여기 대단히 수상한 사람이 있어요」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를 뒤로 떠민다. 마침내 아이는 부모에게 달려가 울상을 짓는다. 『반짝이는 전구로 뒤덮힌 파라다이스가 아니라서 실망했어? 새미.』 『조금.』 『이 세상에는 어디를 가든지 절대로 빠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가난이고, 하나는 깡패, 다른 하나는 시궁창이야. 대통령이 사는 워싱턴 DC에도 이런 동네가 널렸는데 라스베가스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니. 자, 그만 내려. 차는 이곳에 세워두고 조금 걷자. 라바가 사는 곳에선 주차를 할 수 없어. 세워둔지 3분이면 양쪽 타이어가, 15분이면 본네트가 찌그러지거든. 우리 베이비가 그런 험악한 꼴을 당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잖니. 그러니까 총부터 챙겨. 사람용 하나, 귀신용 하나다.』
얼핏 듣기론 대단히 위험한 동네인 듯했다. 샘은 꿀꺽 소리를 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 곳을 걸어가도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곰은 안 나오니까.』 샘의 표정이 한층 더 가관으로 변했다.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발언이었다. 곰이라니. 라스베가스 주택가에서 곰?! 대인용 총알이 채워진 탄창을 주워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차라리 프렌치 코트를 입고 기관총을 든 갱스터들이 거리에 쫙 갈렸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앞좌석을 단단히 걸어 잠구면서 딘이 웃었다. 『왜. 지나가는 깡패가 시비라도 걸까봐 무서운 거니?』 『귀신보다 사람이 훨씬 더 무섭다는 건 형도 인정하는 거잖아.』 『치킨.(겁쟁이)』 『내가 왜 닭이야! 겁이 많은게 아니라 신중한 거야!』 『신중한 거 좋아하시네. 몸이 둔해져 혹시라도 놈들에게 당할까봐 그게 창피한 거면서.』 『형이 틀렸어. 정말로 몸이 둔해졌는지 시험해볼래?』 『아서라, 지금 달밤에 체조하자는 거냐. 사양할란다.』 권투하듯 주먹을 쥔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는 동생의 엉덩이를 퍽 소리나게 때린 뒤, 딘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6년이라는 시간은 제법 많은 걸 바꿔놓았다. 하아, 하고 숨쉬면서 언덕진 길을 올라갔다. 도로 이름이 아니었으면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갈피를 못 잡았겠다. 부근으로 싸구려 이동 주택들이 늘었다. 그때는 쓰레기가 쌓인 공터였는데 콘크리트를 부어 농구장으로 바꿔놓았다. 바닥으로 스프레이 페인트로 휘갈긴 욕설이 어지럽다. 갈보에 화냥년, 섹스를 하고 싶다, 기타등등. 설치된 조명은 진작에 돌멩이에 맞아 무용지물이 되었다. 너무 어두컴컴해서 지나가는 여자가 강간 당하기 딱이다. 순간 어디선가 겁에 질린 똥개가 컹컹 하고 짖었다. 폐차장에 가야 할 자동차가 서넛 늘어서 있다. 훔쳐서 범죄에 써먹고 버려두고 간 것이 분명하다. 그 앞을 지나가면서 흘깃 쳐다보니 모양만 자동차고 실상은 고철 쇳덩이다. 카 스테레오는 기본이고 핸들까지 뽑아갔다. 먼지를 소복히 뒤집어쓴 앞좌석엔 최소한 2년은 썩었을 햄버거 포장지가 굴러다녔다.
『이런 곳에서 손금을 보고, 미래를 예언하고,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고? 그 할머니, 장사가 되나?』 칠이 벗겨져 흉물스럽게 변한 5층짜리 아파트를 올려다 보며 샘이 궁금해 했다. 『장사 잘 되지. 미래가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려고 하는 법이니까.』 작동할 것 같지 않은 초인종을 누르면서 딘은 그렇게 대답했다.
세상에나, 이제야 본편 진입입니다. PS : 내가 수퍼내츄럴 팬픽을 쓰는 이유. 영어가 안되서. 차려놓은 밥상을 맛있게 먹고 싶어도 그게 밥인지, 나물인지 구분조차 못하니 어쩔 수 없다. 5,000편에 이르는 광대한 데이터 베이스에서 나를 허우적거려 죽게 하라~!! (털썩) 슬레이어즈에 버닝하던 시절엔 일어가 되지 않아 날 반 미치광이로 만들더니 이젠 영어가 되지 않아 미친다. 자기만족을 위한 자급자족은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란 말인가! 과거로 돌아가 바벨탑을 복구시키는 거다! 우어어어~!! (눈물)
Posted by 미야
2007/01/02 12:18
2007/01/0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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