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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pentance 05

『형?』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10시가 좀 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딘은 벌써부터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먼 거리를 운전하느라 내심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에 젖은 솜덩어리가 되어 완전히 뻗었다.
샘은 신발도 벗지 않고 대자로 뻗은 형을 측은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멀리서 봐도 얼굴이 까칠하다. 먹는 것도 부실해, 생활 패턴도 불규칙해, 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하늘을 팍팍 찔러... 그런데도 딘은 셰비 임팔라의 운전대를 동생에게 넘기길 거부하곤 했다. 어쩌다 샘이 허락도 없이 열쇠를 잡으면 난리가 난다. 남의 애인 뺏어갔다는 투여서 심각해지면 주먹으로 얼굴을 맞을 각오도 해야 한다. 왜 그렇게 똥고집을 부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근들어선 체중도 많이 내렸다. 헐렁한 윗도리로 가리고 있어도 샘은 알 수 있었다. 건들건들 걸으며「내 알통 보여줘?」라고 해봤자 허세에 불과하다.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털썩 쓰러지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딘이 쓰러지면...
여기까지 생각한 샘은 머리에 파리 붙었다며 마구 흔들어댔다. 안 된다. 걱정하면 언젠가 현실이 된다. 그러니까 싹수 누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게 좋다. 형은 건강하다. 문제 따윈 없다.

『딘?』
대답이 없다.
곁눈질로 형을 훔쳐봤다.
어떻게 보면 눈만 감고 있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혼수상태의 중환자처럼도 보인다.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린 채 꼼짝을 않고 있다.
샘은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일단 30분 정도 기다려 보자. 그때 가서도 시체놀이에 열중하고 있다면 신발이라도 벗겨주어야 할 것이다.

딘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샘은 전원을 켜둔 노트북으로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노트북 화면은 한참 전부터 제임스 브리튼에 자살 건에 대한 경찰 보고서를 보여주고 있었다. 행여라도 놓친 것은 없는지, 아까부터 반복해서 읽는 중이다.
그런데 그게 참 난감하다.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꺼리가 나오지 않았다.
부담스런 마음으로 엔터 키를 눌렀다.

그러니까... 2년 전에 브리튼의 아들이 음주운전으로 죽었다.
대단한 말썽꾸러기였던 모양이다. 사망 당시의 나이가 겨우 열 아홉에 불과했다. 그 나이에 술을 먹고 핸들을 비틀다 저승행 티켓을 끊었으니 엄청난 미련 곰탱이다. 열 일곱 살엔 무면허 운전으로 적발, 열 여덟 살에는 과속... 샘은 한쪽 눈썹을 구부렸다. 소년의 아버지는 딘과는 달리「당장 고자로 만들어 버린다!」라며 호되게 야단을 치지 않았던 것 같다. 덕분에 망나니 아들은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끝장을 향해 달렸고, 인생을 종쳤다.

2005년, 1월 27일.
새벽이 다 되도록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브리튼은 벌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자정 무렵에 아이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 아인 술에 취했더군요. 나는 그 애를 다그쳤고, 우린 심하게 말다툼을 했어요. 그치만 이렇게 아침이 지나도록 집에 안 들어올 아이는 아니예요. 뭔가가 잘못된게 분명해요.」

알고 보니 아이는 인기척 드믄 커브 길에서 차와 함께 그대로 뒤집어져 있었다.
경찰은 아들이 즉사했을 거라고 부모를 위로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과다 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아이는 무려 네 시간동안 짜부라진 고철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사실을 안 브리튼 부부는 무너졌다.

「꿈에서라도 좋으니 아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녀석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에게 반항하느라 그런지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더군요. 천국에 잘 있는지, 이제는 아픈 곳 없는지 알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 몹쓸 녀석이 저에게 전화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세요?《이젠 저도 다 컸으니까 더 이상 훈계하지 마세요. 귀찮아요, 아버지》였어요. 맙소사. 나는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전하질 못 했어요. 내가 무어라 했게요.《이 망할 자식아!》라고 했어요. 이렇게 못난 아버지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진짜 형편 없지 않나요. 전 후회스럽습니다.」

보험사가 권장한 우울증 치료는 효과가 별로였던 것 같다.
목에다 전선을 휘감고 죽기 바로 일주일 전, 이혼한 부인과 마지막으로 통화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샘은 손으로 두 눈두덩이를 세게 눌렀다.
그가 맛 보았을 절망감이 어떠한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여자 친구인 제시카가 죽었을 때,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또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들은 떠났다. 샘은 남았다. 얼굴을 쓰다듬으며「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평소에 더 잘 했어야 했다고 후회해봤자 바뀌는 건 하나 없다. 헤어짐을 납득할 수 없는 심장은 그리하여 종종 쓰라린 경련을 일으켰다.
아빠가 그리웠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울면서 존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릴 것이다. 그렇게 가는 거 아니라고, 남겨진 아들 생각은 요 만큼도 하지 않았다며 화낼 것이다. 입술을 굳게 다문 존이 그만하자고 등을 돌릴 때까지 소리를 질러댈 것이다.

순간 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결국은 부자끼리 또 싸움박질이냐.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놈이네.

후, 하고 가늘게 숨을 토하며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틀렸다. 제임스 브리튼의 경우만 봐선 그의 죽음에 초자연적 존재가 개입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자살 도구로 전선을 사용했다는 것 정도? 보통의 자살자는 목을 매달면서 넥타이나 커튼 줄처럼 보다 흔한 걸 사용하곤 한다. 전선은 좀 의외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브리튼이 전선을 쓰겠다고 결심했다는 걸로 모두 설명이 되어버린다. 정말이지 답이 없다, 답이.

샘은 손바닥으로 뺨을 북북 문지른 뒤, 스카치테이프로 벽에다 붙여둔 조그마한 신문 스크랩으로 시선을 주었다.
 
리들리 먼치.
9년 전에 같은 집 계단에서 굴러 목을 부러뜨린 남자다. 보통 유령은 폭력적이고도 돌발적인 죽음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다. 이 점에 비추어 볼때 그 집이 이상해진 건 더도 말고 그가 원인이다.
그러나 샘은 초반부터 리들리 먼치의 죽음을 제외시켰다.
그 첫째, 리들리 먼치는 목을 부러뜨린 당일 날 죽지 않았다. 의료진이 들이닥쳤을 적에 그는 계속해서 숨을 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하고도 1년을 더 살았다. 중증의 전신마비로 고생하면서 먼저 죽은 부인의 이름을 딴 소아암 환자 후원회까지 만들었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먼저 생각한 선한 사마리아 인.
이런 남자까지 악령이 된다면 세상은 진작에 끝장났다.
코에 튜브를 꽃은 채 간호사에게 환한 미소를 던지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서 샘은 어떠한 악의도 읽어낼 수 없었다. 리들리 먼치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이구야, 그렇다면 나이 들어 노환으로 숨졌다는 로렌스 할아버지의 무덤을 파야 한다는 건가.
털썩 쓰러지다시피 해서 침대에 누웠다.
골치가 아프다. 아흔 여덟이나 살다 간 할아버지를 악령 취급 해야 하다니. 로렌스 씨가 천당에서 급히 돌아와 지팡이를 휘둘러대며 역정을 내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이놈들아, 내가 계란 후라이라도 되는 줄 아냐. 내 뼈다구에 소금은 왜 뿌려!」
편안한 안식에서 깨어난 할아버지가 진짜로 원령이 되는 순간이다.
샘은 캐스터내츠처럼 딱딱거리는 할아버지의 틀니를 피해 요리조리 달아나는 공상을 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7개의 분도패...』
『어?』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샘은 드러누운 상태에서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분도패?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뭔 소리. 잠꼬대인가?
딘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형? 깨어 있었어?』
『아니. 사실 이쪽과 저쪽을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어... 졸려 죽겠다.』
『그럼 신발이라도 벗어.』
『나중에.』
『그러다 발바닥 퉁퉁 붓는다.』
『부으라지.』
『겔름뱅이.』
『형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지금 반항하냐.』
『반항이 아니라 충고하는 거야.』
『충고는 싫어. 그런 거 말고 서비스 해줘, 새미. 양말 벗겨줘...』
다리를 내밀며 징징대는 형이라니. 샘은 얼음 물을 뒤집어 쓴 표정을 지으며 정색했다.
『징그러워. 내가 출장 마사지 걸인 줄 알아?』
『스컬리 요원... 제발 부탁해요.』
『누가 스컬리얏!』
『또 화낸다. 하여간 내 동생은 애교가 없어서... 됐어, 됐어. 이 멀더 요원이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넌 불이나 꺼. 자료 조사는 내일로 넘기고 잠이나 자자.』

그치만 샘은 아직 잠자리에 들 기분이 아니었다. 로렌스 할아버지의 틀니는 아직도 그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중이었고, 제임스 브리튼은 전선을 목에다 칭칭 감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척하고 잠들었다간 대략 낭패일 것이다. 잠에 취한 딘을 위해 조명을 낮췄지만 그래서 샘은 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묻고도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내일은 집을 지을 적에 혹시라도 인명 사고가 있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봐야겠다. 카운티 오피스에 준공 기록서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운이 따라주길 기도해보자. 아울러「미국의 귀신들린 집. 닷컴」자료에서 언급한 영매 마리나 쇼우트도 찾아볼 생각이다. 재수가 좋으면 힌트가 될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그런 사람은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결말만 아니었음 좋겠다.

잠깐만.
그런데 아까 딘이 잠결에 무어라 했더라.
샘은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분도패~?! 맙소사, 형!』
『아우... 인석아, 머리 울린다. 왜 소리 질러.』
『자는 척 하지 말고! 성 베네딕트 메달이라니. 원인도 모르면서 미봉책을 쓰자는 거야?!』

앞면에는 수도회의 규칙서를 들고 있는 성 베네딕트 성인의 모습이, 그리고 뒷면으로 CRUX SACRA SIT MIHI LUX (거룩한 십자가여 저의 빛이 되소서), NUNQUAM DRACO SIT MIHI DUX (용의 길을 따르지 않게 하소서) 라는 문구의 첫 글자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된 분도패는 악령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데 예로부터 요긴히 사용되어져 왔다. 동서남북의 각 방향으로 4개, 정 중앙에 하나, 그리고 건물의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에 각각 메달을 놓고 의식을 행한다. 잡스러운 기운을 내쫓을 뿐 아니라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결계를 만들 수 있다.

단순하게 보자면 딱일 것 같긴 하다만.
원인도 모르는 상태에서「밀봉」만 했다간 나중에 더 커다란 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건 상식이다. 찢어졌다고 무조건 꿰매냐. 상처 소독도 하고 이물질도 빼내야 한다. 무조건 봉합했다가 속에서 썩어나가면 그때는 다리를 잘라내야 한다.

샘은 베개를 끌어안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건 최악의 선택이잖아!』

Posted by 미야

2006/12/08 15:32 2006/12/0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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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pentance 04

※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글이 질질 늘어진다고 하시는데 이게 원래 제 스타일이라는 거 아시잖아요오오~ 아앙, 빨리 금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


상대방의 경계심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보고자 딘 윈체스터는 빙긋 웃기부터 시작했다.
그치만 누구보다도 형을 잘 알고 있는 샘은 그것이「웃는다」가 아니라「그러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쪽이라는 걸 한 눈에 꿰뚫어볼 수 있었다. 기뻐서 환하게 웃을 적마다 만들어지는 눈가의 주름도 깊지 않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놀란 고양이의 그것과 대단히 비슷하다.

딘 못지않게 당황한 것이 분명한 여자도 안전핀을 뽑아낸 수류탄인양 은색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기세가 대단하다. 여차하면 폭파 스위치를 눌러 적들을 한 방에 아작내... 가 아니라, 엄지손가락으로 단축키를 눌러 911에 신고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크게 외칠 것이다. 강간범이야.
『당신들,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다음의 생략된 말은「경찰을 부를 거예요」가 분명하다. 여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 저희들 말인가요. 혹시 연락을 못 받으신 건가요.』
온갖 거짓 나부랭이를 주워삼키며 여자를 꼬시던 기술을 총동원했다. 어떤 날엔 방송국 프로듀서, 어떤 날엔 신출내기 신문기자, 또 어떤 날엔 휴가 나온 해병으로 행세하던 그다. 딘은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며 상대방을 슬쩍 떠보았다.
『무슨 연락이요?』
『오늘 이맘때쯤 둘러보겠다고 사전에 알려드렸습니다만. 저어, 아무 것도 모르시는 건가요, 부인.』
『모르는데요.』
쌀쌀맞게 대답한 여자는 바지 지퍼를 절반은 내린 남자 쳐다보듯 해가며 눈을 부릅떴다. 붉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이 경고를 담아 살짝《통화》버튼에 닿았다. 으악, 던진다. 수류탄!
딘은 이거 참 야단났네 하면서 코를 만졌다.

『음... 저희는 앤슨&에이크 인테리어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집을 수리하려고 하는데 견적을 내달라고 요청을 하셨지요. 이쪽은 제 동업자인 에이크고, 저는 앤슨입니다. 뒷문이 열려 있어 맘대로 들어왔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아무튼 가재도구는 이미 치워진 상태라고 하셨으니까... 괜찮죠? 에이크와 같이 1층을 둘러보고 막 2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딘의 말이 정말이라며 샘이 거들었다.
『전화로만 설명을 들었을 적엔 전형적인 프론트 앤 백 양식의 스프릿 레벨이라 생각했는데요. 크고 네모난 기둥들은 동부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션 양식이네요. 운치 있게 잘 조화시켰어요. 현관 아케이드도 그렇고 가급적이면 기본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요. 물론 회반죽을 덧바르긴 해야겠지만요.』
엄마 무덤에 맹세코 동생이 한 말이 뭔 소리인줄도 모르면서 딘은 열성적으로 맞장구쳤다.
『바로 그거예요. 사실은... 음, 많이 발라야 할 겁니다. 회반죽이오.』
『예. 그래요. 잠깐 본 거지만 깨진 부분이 장난 아니더군요.』
『이 친구 말이 맞아요.』
『그치만 염려 마세요. 손만 잘 보면 값비싼 희귀 골든 호클로마 테이블처럼 번쩍번쩍 할 거예요.』
『호클로마... 뭐?』
『쉿! 잠자코 있어.』
『알았으니 그만 꼬집어라, 동업자 에.이.크. 어쨌든 부인? 혹시 저희가 엉뚱한 집을 잘못 찾아왔다던가 하는 건 아니죠? 부인의 표정으로 봐선 아무래도 저희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지금 대단히 불안해지고 있거든요? 잘못 찾아온 거라면 빨리 말씀해주세요. 슬프지만 저희들은 덤벙거리는 일이 많아 가끔씩 엉뚱한 집에 가서 대문을 뜯어고치곤 하거든요.』
『만약에 이번에도 그런 거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빨리 이 집에서 나가겠습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형제는 다소곳이 두 손을 깍지꼈다.

그제야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긴장을 늦추었다. 샘과 딘이 (꽤나 어벙한 것이 분명한) 인테리어 업자라라고 완전히 믿은 모양이었다.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손에 쥐고 있던 수류탄 - 핸드폰을 후딱 치웠다. 그리고는 짧게 손질한 옆머리를 만졌다.
『아뇨, 아뇨. 모르긴 해도 제대로 찾아오셨을 겁니다. 죄송해요. 내 정신 좀 봐. 확실히 집을 수리해서 내놓으면 가격을 더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제가 먼저 말을 꺼냈었죠. 요즘 가벼운 두통을 앓고 있어서 그런지 깜빡했어요.』
『음, 그렇다면...』
딘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죄송하지만 그쪽은 누구시죠.』
『알렉산드라 슈마허예요, 앤슨 씨. 부동산 매매업자죠.』

부동산 매매업자라... 딘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여기서 살던 사람이 자살한게 언제라고. 문제 있는 건 후딱 치워버려, 이런 거야? 그런 거면 무지 섭섭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겉으로 내색은 일절 하지 않았다.

『맞아요. 그러고보니 우리 의뢰인께서 가까운 시일 내로 집을 팔 거라고 하셨죠.』
『예. 사실은 많이 서두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급매물이죠.』
『아항, 급매물이오.』
딘과 알렉산드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사업적 뉘앙스로 씨익 웃었다.

『어흠. 그나저나 슈마허 씨? 우리가 많이 놀라게 해드린 것 같던데 사과드릴게요.』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다 민망하네요. 만나뵈어 반가워요, 앤슨 씨, 그리고 에이크 씨.』

알렉산드라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잘 된 일이예요. 좋은 소식이네요. 전화로 저와 통화했을 적엔 페인트를 새로 칠하는 것조차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더니. 자, 그럼 공사는 언제부터죠? 일주일 후? 보름 뒤?』
그거 참 성급하시다. 딘이 워워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예요, 부인. 지금은 견적만 내보는 단계니까요. 결정은 아직 안 났어요.』
『저런, 그건 유감이네요. 수리는 꼭 하는게 좋을 거예요. 사람들은 무작정 일을 서두르기만 하는데 그래선 될 일도 되지 않아요. 집을 파는 것만 급한게 아니지요. 뭐니뭐니해도 좋은 값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정 뭐하면 벽지만 바꿔도 분위기가 확 달라질 거예요. 지금은 뭐랄까...』
기분이 나쁘잖아요, 라고 말하다 말고 그녀는 살짝 혀를 깨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말 실수를 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알렉산드라는 서둘러 목소리를 낮춰 변명했다.
『신문에 실린 이야기 때문은 아니예요. 제 말은, 그러니까 벽지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신문... 아, 저도 압니다. 전 거주자가 여기서 자살했다고 하죠?』
알렉산드라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어댔다.
『그거랑 상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집은 다른 쪽으로도 문제가 좀 있는 편이죠.』
순진한 척 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요. 혹시 전선에 문제가 있나요? 그러니까 밤중에 전등이 깜빡깜빡 한다던가... 혹시 그런 이야기를 누가 하던가요.』
특별히 고장도 아닌데 전등이 깜빡깜빡 한다는 건 유령이 나올 징조다. 딘은 바짝 긴장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수도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거나?』

여자가「소리」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소리. 바로 그거예요. 아무래도 벽속에 쥐가 있는 것 같아요.』
『쥐요?』
딘과 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맨 처음에 제가 이 집에 왔었을 적에 말이죠. 북북- 하고 뭔가가 벽을 긁는 소리가 들렸어요. 정말이예요. 무척 기분이 나쁘더군요. 아시잖아요? 뭐랄까, 그 끔찍스런 작은 짐승이...』
알렉산드라는 한니발 렉터에게 간을 빼앗긴 시체라도 봤다는 투로 팔짱을 꼈다.
『쥐요.』
그리고 흡혈귀 앞에서 잽싸게 성호라도 그을 기세로 다음의 말을 이었다.
『지금은 21세기인데 말예요.』

싸구려 2인용 모텔 방에 가방을 내려놓은 윈체스터 사내들은 살짝 흥분했다.
알렉산드라가 언급한 쥐에 대해 샘은 도리질부터 하고 보았다.
『쥐는 아닐 거야, 형.』
가볍게 캔맥주를 마시던 딘도 가볍게 으흥, 소리를 냈다.
『분명 아니지.』
왜냐하면 그 어디에서도 쥐똥을 발견 못했다.
『쥐똥만 안 보였게? 쥐구멍 하나 없더라.』
싱글 침대에 앉아 신발을 벗으면서 샘은 킬킬 웃었다.
『맙소사. 그 아줌마, 평생 쥐 같은 건 보지도 못했을 거야. 집안에 쥐가 있으면 후다닥 하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먼저 들리는 법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벽을 긁어댄다고 질색했잖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지.』

딘은 알렉산드라 슈마허의 히스테릭한 말투를 흉내내며 맥주캔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 끔찍스런 작은 짐승이...』
『하하하.』
『21세기엔 멸종되었어야 마땅한 그놈의 짐승이...』
양말을 벗어 둥글게 말다 말고 샘은 박장대소했다.
그 모습을 보자 딘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활짝 웃는 샘은 어쩐지 어린애처럼 보인다.「형, 같이 놀자」이러면서 머리를 쿵쿵 들이밀던 시절의 동생 같다. 지금이야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처럼 덩치가 절망적이지만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까진 안 변했다. 커다란 강아지 같다. 소원 같아선 앞으로 30년이 지나도 안 변했으면 하는 바이다.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을 삼킨 뒤, 딘은 훅 하고 숨을 불었다.
『어쨌든 네 말이 맞다, 샘. 쥐들은 치즈를 쏠아대기 이전에 뛰어다니지.』
『그게 언제였더라? 생각 나? 짐 신부님이 아빠의 부탁으로 우리를 노숙자 보호시설에 보름 동안 재워주었을 적에 말이야. 그때 난 불면증에 걸리는 줄 알았어. 쥐들이 어찌나 요란스럽게 뛰어다니던지... 끝내줬지.』
『어라? 그거 의외네. 그건 네가 여섯 살적 이야기야, 샘. 그런데 기억이 나니?』
『물론이지! 잠이 안 온다고 불평했더니 바보 동생아 하면서 형이 내 머릴 때린 것도 기억해.』
딘은 잠시 멍- 하니 서 있었다.
동생 머리를 때린 기억은 안 난다.
아직 어린 동생이 하도 보채서 힘들어했던 기억은 나지만. 혹시라도 열이 나는 건 아닐까 싶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면 얌전해졌다가 손을 떼는 즉시 발광했었다. 이유를 몰라 쩔쩔매던 딘은 결국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밤새 꾸벅꾸벅 졸았다. 그걸 동생은... 자기 머리를 때렸다고 기억하는 모양이다.
질린다. 여섯 살짜리 어린애다운, 그야말로 대단한 기억의 각색이다.

『내가 때렸다고. 진짜?』
『맹세코 때렸어.』
『안 때렸는데.』
『확신해?』
『쳇, 짜증스런 녀석.』

기억력이 엉망인데도 그 머리로 잘도 대학에 들어갔네 - 딘은 쓴 웃음을 삼키며 텅 비어버린 캔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그 역시 침대로 올라가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일단 그렇게 드러둡자 알콜의 기운이 확 돌기 시작했다. 제법 마신 것도 아니건만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딘은 끙 소리를 내며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졸음이 쏟아지려 했다.

『아무튼 그 집은 뭔가가 있는 거야.』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라, 형. 지금 자는 거야?』
『아니.』
『자고 있잖아.』
『아직 안 자.』

아빠가 자신들을 버리고 갔다며 샘이 울었다. 사흘만 지나면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사냥에 나가선 일주일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짐 신부님은 걱정하지 말라며, 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사히 돌아올 거라며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샘에게 사탕을 주고 장난감도 주었다. 동화책도 가져다 읽어주었다. 그래도 샘은 코를 훌쩍거렸다.
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동생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그는 강한 척했다.
걱정 마. 아빠는 꼭 돌아오셔.
어쩌면 영원히 안 돌아오실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샘이 딘의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또 울었다.
「형도 날 버릴 거야? 갑자기 사라져서 안 돌아오고 그럴 거야?」
바보 같은 소리 한다며 샘의 머리를 딱콩 때렸다.
「형은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당장 뚝 그쳐, 이 못난아.」

확실히... 머리를 때리긴 때렸군.
딘은 웅얼거리며 엹은 잠에 빠져들었다.

Posted by 미야

2006/12/06 13:08 2006/12/0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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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pentance 03

※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아쉽게도 얄리꼴리 분위기는 일절 없을 예정입니다. 사실 전 형을 쪽쪽 빠는 동생이라던가, 꼭 안아줄게 브라더엔 적응 못 하고 있습니다.(아는 사람은 다 아네. 이건 순 공갈) 그쪽으로 미친 듯이 인터넷을 뒤지는 주제에 할 말이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항상 딘이 깔리는 팬픽만 눈에 띄어서 그런지 반항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내 로망은 딘이 새미를 덮치는 거란 말이닷! 누가 좀 써줘어어~!! 같이 달려요오~!! ※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였음 오죽 좋으랴만.
실제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가르친 것들은「즐거운 인생」과는 관계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어둠이 무섭다고 울먹였더니 묵직하게 생긴 권총을 터억 던져주던 아버지다. 그것도 겨우 아홉 살의 철 모르는 꼬맹이에게 말이다.
그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존은 미행하는 방법, 미행당하지 않는 방법, 위장술에 잠입술, 유치장에서 멋지게 탈출하는 방법까지 골고루 전수했다. 여기가 이라크입니까, 아님 아프가니스탄입니까? 남들이 보면 범죄자 더하기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 양성 교육이다. 제3자가 아닌, 아들인 샘이 보기에도 그렇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주입시킨 것은「악당 만들기」가 맞았다.

그 첫째.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앞장서서 걷는 딘도 쓸데 없는 동작은 일절 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았고, 안절부절해 하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매건 이모를 만나러 이 못난 조카 놈이 라스베가스에서 잠시 들렸습니다」라는 투다. 그의 목표는 행여라도 나중에 경찰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 수색을 벌이더라도「수상한 사람이요? 음... 있었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답변을 듣게끔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 짙은 선글래스의 착용은 피했으며, 시선을 정면에 두고 똑바로 걸었다.「난 지금부터 나쁜 짓을 할 거들랑요」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게끔 말이다. 형의 뒤를 따라가던 샘도 걷는 보폭을 일정하게 하며 편안한 태도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표정도 느긋해서 때늦은 점심으로 먹을 던킨 도넛츠와 커피를 주문할 손님처럼 보였다. 이러니 품이 넉넉한 점퍼 속으로 한 자루의 숏건을 감추고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 못할 것이다. 아울러 호주머니 속으로 암염을 꽉꽉 채운 산탄 총알이 그득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집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딘이 짤막하게 수신호하며 자갈이 깔린 진입로를 벗어났다.
여기서 착한 아들들이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교훈 그 두 번째.
신중함과 신속함을 반반씩 배분시켜라.
그 신속함을 위해 샘은 자물쇠 따는 도구를 꺼내들었고, 그 신중함을 위해 딘은 거실 유리창 쪽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인기척이 나면 딘은 주먹쥔 손을 엉덩이로 돌릴 것이다. 아무도 없으면? 샘은 형의 고갯짓에 차고 뒤쪽으로 해서 건물을 반 바퀴 돌았다. 경찰 기록에 의하면 브리튼은 혼자 살던 남성이었다. 자살로 판명된 지금,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안방에 흰 백합꽃을 장식할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관할 것이다.

뒷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몇 개의 망가진 화분이 볼썽사납게 굴러다니는게 전부, 빨래 널이대나 야외용 휴식 의자, 청소용 갈퀴 같은 생활 소도구는 진작에 싹 치워진 상태였다.
샘은 계단 두 개를 딛고 올라가 뒷문 너머를 힐끔거렸다.
가리개가 내려진 상태에서 뒷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울타리 너머에서 딘이 작게 기침을 했다.
한 번의 기침은 괜찮다는 뜻.
두 번의 어흠 소리는 물러서라는 신호다.
딘은 딱 한 번만 콜록거렸다.
샘은 형이 보내는 오케이 싸인에 맞춰 좀도둑이 애용해 마지 않을 작은 철사 조각을 잠금 장치 속으로 살그머니 밀어 넣었다.
칼칵 소리가 들리면서 손잡이가 돌아갔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코를 킁킁대는 일이다. 인기척을 느끼려면 이러는게 최고다. 감각이 남들의 곱절로 민감한 샘은 냄새를 잘 맡는 편이다. 정확하게는 사람의 체취가 아니라 음식 냄새나 구두 깔창의 악취 같은 종류였지만... 요컨대 사람은 생활하면서 여러 종류의 냄새를 피워대는 법이다. 커피도 끓일 것이고, 향긋한 화장품도 바를 것이고, 구운 생선 위로 레몬 즙을 뿌리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제법 오랜 시간동안 그 장소에 고스란히 남아「사람」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신발 냄새가 있으면 그걸 신고 걸어다니는 사람이 있다. 단순한 공식이다.

샘은 만일에 대비해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복도 쪽으로 향했다. 숨을 들이켜 냄새를 맡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눈으로 보는 걸 중요시 하는 딘은 축농증 환자처럼 굴고 있는 동생의 행동이 쓸데 없는 짓이라 폄하했다. 하지만 희미한 여성용 코롱 냄새에 반응, 부리나케 뒤돌아 나갈 채비를 하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유추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 딘도 전자 콧구멍이다.

『아냐, 딘. 집 전체가 조용한 걸로 봐선 아무도 없는게 맞아.』
뒷문을 조용히 닫으라고 손짓하며 샘이 작게 말했다.
『이걸 봐. 안에도 텅 비었네. 거실에 가구가 거의 없어.』
카펫도 치워졌다. 소파는커녕 텔레비전도 없다. 샘은 가까운 전등 스위치 쪽으로 가서 버튼을 꾹꾹 눌러봤다. 전구를 빼놓은 탓인지 불이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흥 소리를 내며 버려진 것으로밖엔 안 보이는 2단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장엔 가게 상표 명이 들어간 싸구려 장식 액자 하나와 오래되어 곰팡내 줄줄 나는 소설책 몇 권이 남아 있었다.
딘이 그 중에서 한 권을 집어들었다.
『로버트 제임스 윌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취향이 좀 그렇네.』
프리 마켓에 내다 팔려고 해봤자 도저히 가져 갈 사람이 나올 것 같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둔 모양이다. 흥미를 잃은 딘은 꺼낸 책을 던지다시피 해서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 왼편으로는 전화기가 놓여졌을 협탁이 하나, 다용도 서랍장이 하나 더 있었다. 서랍장의 손잡이는 일부가 망가져 있었다. 덜렁거리는 모습으로 봐선 고쳐서 쓰기엔 이미 늦은 것으로 보였다.
혹시나 싶어 맨 위에 있는 서랍을 열어봤다. 텅 비어 있다.
딘은 이마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흡사 약탈자가 괜찮은 건 죄다 털어간 형상이었다.
낡은 액자를 탁 소리내어 치며 혀를 끌끌 찼다.

『심하다, 심해. 이렇게까지 빨리 정리되는 거 본 적 있냐, 샘.』
『어... 그러니까 이혼한 전처와 사이가 무척 나빴나 보지.』
『그러게. 이건 정리가 아니라 아예 말살 수준이네. 부엌도 봤냐? 무지 썰렁하더라.』
질렸다며 딘이 한 손으로 짧은 머리를 쓸었다.
『뭐, EMF 미터기*로 여기저기 들쑤시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에겐 좋은 소식일 순 있지만... 이혼한 전처의 짓이라면 정말 무서워. 그치? 그래도 남편이었는데 볼펜 한 자루 안 남기고 그새 모두 치워버렸잖아. 여자는 다 그런 걸까?』
이걸 보라고 - 하면서 딘이 움푹한 자국이 생긴 마루를 향해 팔을 벌렸다. 추정하자면 그쯤해서 소파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 네 개의 다리 자국과 너비로 봐선 2인용 소파가 분명해 보였다.

『딘? 부부 사이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했잖아. 속단하긴 아직 이르지. 그러니까 여자에 대한 환상을 깨지는 말자고. 어쨌든 형 말이 맞아. 볼펜 한 자루 안 남았고...』
EMF 미터기로 2단 책장을 쓱 하고 훑은 샘은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유령이나 초자연적 존재가 개입되었다는 흔적도 안 남았어.』

손가락으로 미터기를 톡톡 하고 건드려봤다. 그래봤자 기계는 바늘 겨우 눈금 하나 움직였을 뿐이다. 빨간 불도 안 들어오고 신호음도 안 잡힌다. 이 정도의 수치라면 옆집에서 라디오를 켰다거나 전자렌지를 작동한 수준이다. 이상 징후는 없다고 봐도 옳다. 샘은 수색 반경을 넓혀 거실의 반대편까지 쭉 걸어갔다. 자살을 했든, 사고로 죽었든, 그 원인이 유령 때문이라면 이 정도의 반응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조용한 기계를 벽에다 문지르듯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바늘이 살짝 튀고 멈췄다. 샘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엔 천장 쪽을 향해 미터기를 들이댔다. 아까보다는 계측 바늘이 움직이는 범위가 조금 더 크다. 하지만 그뿐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흘끔 쳐다본 뒤, 샘은 머뭇거리며 운을 떼었다.
『딘, 방금 말이지. 나... 불편한 생각 한 가지가 떠올랐는데 말이야...』
『불편해? 그럼 싫어. 난 안 들을 거야. 그러니까 말 하지 마.』
딘은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형!』
흉악 범죄자인양 인상이 팍 찌그러진 동생의 표정을 보고 딘은 금방 태도를 바꿨다.
『알았어, 새미. 형이 잘못했어. 마음을 활짝 열고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게. 그러니 말해봐.』
『38달러 주고 딘의 이름으로 포르노 사이트에 가입했어.』
『새미! 너!』
『농담이야.』
농담이라면서 워째 농담 같지 않잖아. 딘은 눈을 야렸다.
『알았어. 가입했다 이거지. 그럼 접속 패스워드를 나에게도 가르쳐 주는 거다?』
『딘!』
『얼쑤? 왜 이래. 농담이라며.』

이야기가 자꾸 삼천포로 빠진다. 샘은 가볍게 헛기침하고 원래의 출발점으로 힘겹게 다시 돌아왔다.
『기억 나? 형. 로스엔젤레스 가와사키 맨션 사건...』
『아, 그거...「주온*」말이냐.』
김 빠졌다는 투로 딘은 대꾸했다.
6개월 전쯤인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일본 공포 영화 제목을 따라「주온」이라 부르는 그 일은 재미 일본인 2세인 가와사키 씨가 윈체스터 가의 형제들에게 의뢰한 사건이다. 샤워기를 틀었더니 뻘건 피가 섞여 나오더라 해서 대 소동이 벌어졌다. 피의 샤워에 당한 주민은 모두 셋. 경찰이 당도하여 곳곳을 수색했음에도 피, 내지는 시체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이 잡듯이 뒤지기가 귀찮아진 로스엔젤레스 경찰은 그래서 주민들이 녹슨 물에 엉뚱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킨게 분명하다고 판단, 집주인에게 배관의 전면 보수를 명령했다. 당연히 피 맛을 본(?) 피해자들은 반발했다. 자신들을 녹물과 핏물을 구분도 못 하는 바보로 몰았다며 가와사키 씨는 입에 거품을 물어댔다. 그리곤 어떻게 알았던지 딘의 핸드폰 번호를 마구 눌러댔다.

『결국은 핏물이 맞았지.』
『응, 토끼였지.』
『계약 만기일이 다가온 세입자가 보증금을 낮춰보려고 수작을 부린 거였지.』
『지금 생각해봐도 옥상 급수탑에 설치한 토끼 핏물 주입기는 획기적이었어. 정교한 타이머까지 달렸잖아.』
『UCLA를 졸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겠지.』
『아냐. 대학 졸업장과는 상관이 없어, 딘. 대학에선 그런 거 만드는 법은 안 가르치거든.』
『그렇지. 토끼를 도살하는 법도 안 가르쳤을 것이고...』
『그렇게나 귀여운 놈들의 목을 치다니. 싹수가 누런 놈이었어.』
『쳇! 엉덩이를 잔뜩 패줬어야 했는데.』
『실제로 눈물 쏙 빠지게 잔뜩 패주곤 뭔 소리야, 형. 어쨌거나 말인데...』

샘은 정색하며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 사건도 그때와 비슷한 거 아닐까.』
『어... 잠깐만. 그러니까 뭐시다냐...』
『부동산 매매 가격을 깎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겠어.』
맘에 드는 집이 매물로 올라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가격이 쎄다.
귀신 붙었대요, 귀신.
그래서 음흉한 소문을 뿌려댄다.
잘만 하면 절반의 가격으로 흥정을 붙일 수 있다. 아자.

『소위 말하는 소문의 경제학이라는 거지. 총기 사고가 발생한 집은 매매시 12% 정도 가격의 손해를 봤다는 통계도 있거든. 그러니까 뭣 같은 사이트에 사진을 올려놓고 미국의 흉가 어쩌고 하면서 루머를 퍼뜨리는 거야. 얘기야 멋대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고, 나중에 누가 뭐라고 항의하면 사이트를 닫고 그대로 튀는 거지.』
『흐음. 그러니까 샘, 너의 말은 즉...』
『알짤 없이 사기일 수 있다는 거야, 형.』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딘은 동생의 주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그 첫 번째. 딘은 손가락 하나를 접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애들이 장난삼아 만든 사이트를 부동산 매매업자가 과연 얼마나 들여다 보겠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고작해야 호기심 천국 수준의 웹 페이지 때문에 집 값이 과연 떨어질까.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딘은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여겼다. 직접적으로 샤워기에서 핏물이 떨어졌다면야 또 모른다. 그치만 이건 영 아니다.
아울러 두 번째. 손가락 하나를 더 접었다.
『사이트에 그 집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올라간 건 2004년이었어, 샘. 이미지 파일이 올라간 날짜가 정확하게 2004년 10월 17일이야. 네 의견대로라면 누군가의 의한「집값 떨어뜨리기 대작전」은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얘기인데... 그 사기꾼이 3년 전부터 포기 안 하고 꾸준히 그래왔다는 건 참 징글징글한 일이지 않겠냐.』
『그치만... 부동산 투자는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일이고...』
『늙어서 죽을 일 있냐. 됐어, 됐어. 얘기는 이제 끝.』

그 이야긴 나중으로 미루자고 손짓하며 딘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층은 대략적으로 살펴봤다. 그렇다면 2층은? 딘은 위를 쳐다보며 난간을 잡았다.
그렇게 다리 하나를 계단에 척 올려놓으려던 찰나.
벌컥- 하고 현관이 열리면서 예고도 없이 커다란 황색 코트를 입은 중년의 여자가 들이닥쳤다.
『어머머! 누구세요?!』
여자가 딘과 샘을 발견하고 자지러졌다.
마찬가지로 윈체스터 가의 형제도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잔향으로 남은 코롱의 주인공이다!
딘과 샘은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며 식은 땀을 흘렸다.

Posted by 미야

2006/12/04 12:30 2006/12/0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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