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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건지는 알 재간이 없었다.
눈꺼풀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래도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제일 먼저 익숙한 이불의 촉감과 베개에 스며든 자신의 체취를 알아차렸고 - 감사하게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맘 편한 장소에 있었다 - 게으른 하마처럼 끔찍하게 부운 눈을 꿈뻑꿈뻑 움직였다.
더듬거리며 아랫배를 만졌다.
겉옷은 벗겨져 있었다. 그래도 프라이버시를 존중받아 속옷은 입고 있는 채였다.
「꽤 오랫동안 잔 것 같은데... 몇 시지.」
헤어져 망가진 바지는 곱게 개켜져 있었다. 다만 열심히 세탁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판단, 버려질 것으로 짐작하고 쓰레기통 옆에 두었다. 협탁에는 안경이 있었다.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걸 엉클 밥 주점의 애덤이 도로 가져다 둔 듯하다. 옆에는 메모도 있었다. 꾹꾹 눌러 쓰는 버릇에 옆으로 길게 누운 글씨다. 내용은 간단했다.「뒷 걱정은 마시고 쉬고 계세요.」서명은 없었지만 공책에 아버지, 어머니, 토끼와 강아지, 하늘과 강 이러고 받아쓰기를 시켰던 장본인이다. 핀치는 메모를 남긴 사람이 애덤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맹세하는데 더러워진 당신 옷을 벗긴 건 애덤 샌더스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저는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막더군요.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했습니다. 절 노려보는 시선도 아주 무서웠지요. 그러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절 당신과 단 둘이 있게 해놓고 아무 조처 없이 떠났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무지 싫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믿어주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반응, 물 컵을 든 리스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입안이 바짝 말랐을 겁니다. 자요.』
핀치는 다시금 눈꺼풀을 꿈뻑꿈뻑 움직였다.
왜 이 남자가 우리 집에 있는 거지 - 어째서 - 거기다 내가 좋아하는 컵을 맘대로 꺼내왔어 - 입고 있는 저 셔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허락도 구하지 않고 - 그러다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다. 알게 뭐람. 에라 모르겠다 이러고 이불을 도로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무시당했다고 여긴 리스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나왔다.
『안 됩니다. 억지로라도 물을 마셔요.』
『더 잘래요.』
『12시간동안 꼬박 잤으면 충분합니다. 화장실도 안 가고 싶어요? 일어나요.』
아닌게 아니라 오줌이 마렵기는 했다. 핀치는 한숨을 내쉬고 꾸물거리는 동작으로 이불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비볐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제가 12시간이나 잤다고요?』
『도중에 한 번 눈을 뜨긴 했습니다. 헛소리도 했고요. 기억이 나지 않나요?』
『무! 무슨 말을 하던가요.』
당황해하는 그 모습이 아니꼬웠던 것 같다. 묘하게 놀리는 어조로 리스가 말했다.
『안심해요. 말 그대로 그건 헛소리였으니까. 무슨 물고기 이야기를 하더군요. 잉어는 연어가 아니네, 바다에서 강으로 돌아가지 않네, 초록색과 보라색의 비늘을 가진 비단잉어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집에 가고 싶다며 버럭 화를 내더군요.』
『연어? 비단잉어?』
『꿈에서 민물낚시라도 신나게 했었나 보죠.』
거기까지 말한 리스는 준비한 갈아입을 의복을 침대 모서리에 내려놓고 뒤로 정확히 여섯 걸음 물러섰다.
핀치는 네모반듯하게 접혀진 삼각팬티를 내려다보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여섯 걸음 차이로는 사생활을 존중받을 수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저 남자가 깨끗한 속옷을 찾는답시고 남의 옷장 서랍을 맘대로 열고 닫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건 실례 아닌가! 그의 눈썹이 파도 모양으로 씰룩거렸다.
『미스터 리스? 지나친 친절은 무례한 겁니다.』
『조심해요, 핀치. 공복에 화를 내면 혈압이 올라가요.』
『혈압이 문제인가요?! 이런 건 무례하다고요!』
『그런 말을 워낙에 자주 들어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의 뜻인 즉, 시선을 돌리라고 해도 돌리지 않을 것이고, 벽을 보며 서지도 않을 것이며, 방에서 나가라 해도 나가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새삼스런 깨달음에 핀치는 손아귀로 쥐고 있던 팬티를 툭 떨어뜨렸다. 그는 완전히 노출되었다.
『엉클 밥이라는 자가 비프-스튜와 계란 반숙, 그리고 부드러운 빵을 가져왔습니다. 옷을 다 갈아입으면 다음으로는 식사를 하도록 해요.』
『엉클 밥은 가게 상호명이고 그의 이름은 로버트 소워스키입니다.』
하는 수 없어 시트를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씻지 않은 몸에서 악취가 났다. 머리카락을 스치자 새카만 흙도 떨어졌다. 차라리 목욕을 먼저 할 걸, 이러고 후회한 건 온몸을 버둥거리며 어렵게 가랑이 구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더니 그게 뒤집어 입은 거더라 라는 걸 깨닫고 난 다음이었다. 씩씩거리며 다시 속옷을 끌어내렸다.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그쯤해서 숨이 답답해졌다. 못 참고 시트 밖으로 머리를 볼록 내밀었다. 그러자 웃음기 없는 리스의 얼굴과 정면으로 맞닥뜨려졌다. 화들짝 놀란 건 둘째고 꼴깍 침을 삼켰다.
『아, 아까처럼 최소한 여섯 걸음 떨어져 주시겠습니까, 미스터 리스.』
『밥 먹을 거죠?』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욧!』
『식사.』
『식욕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요.』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순간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고속 회전하며 질척거리는 덩어리들을 만들어냈다. 대단히 무례. 강압적. 재수 없음. 주먹으로 코를 때려줬음 좋겠음. 그것들은 다시 뜨거운 불에 녹아내린 젤리처럼 미끄덩거리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질릴 정도로 똥냄새를 풍겼다. 이것들이 흔적이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치우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핀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얘기 좀 하죠, 핀치.』
『그 전에 잠깐만요.』
로버트가 만들었다는 스튜는 소름끼치도록 맛이 없었다.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수저를 들기는 했지만 이거 맛있다, 정말 맛있다 이러고 먹을 수는 없어서 곤혹스러웠다. 핀치는 왼손으로 입가를 가렸고, 사래가 들린 것처럼 몇 번 기침을 했다. 만들어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억지로 삼키기는 해야 하겠으나 그것이 부처의 고행을 닮은 행위가 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뭐랄까... 해괴한 이 맛은. 너무나 시고 쓰다. 뒷맛은 떫기까지. 진짜로 이걸 소워스키가 만들었다는 건가. 의심이 담긴 눈초리가 음식이 담긴 접시로 향했다.
『영양제를 섞었습니다.』
푸웃-
『당신은 빨리 기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잠깐!』
『영양제는 닥터 틸만이라는 사람에게 얻은 겁니다. 수상한게 아닙니다.』
틸만은 마을 의사다.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다. 실력도 좋다. 그녀에겐 문제가 없다. 문제는 식사를 마치고 30분 후에 먹으라고 한 걸 밥에 섞어 내놓은 쪽에 있다.
『하느님 맙소사.』
대단히 무례. 강압적. 재수 없음. 주먹으로 코를 때려줬음 좋겠음.
추가하여 먹는 음식에 죄의식 없이 뭔가를 마구 섞음.
결론, 이놈의 자식을 그냥.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