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이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지만 덜컹 소리도 안 났다. 1mm도 안 움직인다. 혹시나 싶어 이번엔 아까와는 반대로 밀어도 보았다.
뭐냐, 이것은. 모양만 문이고 실상은 벽이다? 의심해가며 손등으로 똑똑 두둘겼다.
『극사실주의 터치로 벽에 물감으로 그린 거라면 나무 두드리는 맑은 소리는 나지 않지요.』
그라바스의 지적에 한쪽 귀를 가져가 울리는 소리를 직접 확인해봤다. 하여 그림일 거라는 가설은 아깝다 생각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리 오너라~ 열려라 참깨. 안 열어주면 쳐들어 간다.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을 해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폭탄을 던져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견고함을 자랑하며 혓바닥을 베에 내밀었을 뿐이다.
슬슬 약이 오르려 했다. 유나는 접착제로 고정시켜 놓은 듯한 출입구를 노려보며 검을 빼어들었다.
사람처럼 두 귀가 붙어있지 않은 나무 문이 그런다고 자세를 달리할 리 없지만... 또 아나.
『이얍!』
에이, 손해만 봤다. 손목만 저렸다. 찌잉 하고 독특한 통증이 어깨까지 타고 올라왔다.
골렘을 무 자르듯 하는 검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다니, 과연 마법은 대단하다.
『원래 긴급재난시 피난처용으로 만든 곳입니다. 간단히 부수어지면 체면이 서지 않겠지요. 맷돌로 치거나 불을 질러도 저 상태론 꼼짝 안 할 겁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마법사를 불러와 봉인 해제를 시키거나, 아니면 안에서 얌전히 열어주길 기다리거나, 포기하고 다른 출입구를 찾아봐야겠지요. 셋 다 쉽진 않겠네요.』
『확실히 쉽지 않겠어. 그렇담 너의 그거... 는 안 통하겠나.』
「그거」라고 말하면서 유나는 화살을 쏘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라바스는 이렇다는 말 없이 멎적게 웃기만 했다.
안 통하는 거군. 유나는 이상한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건물의 지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데몬씨는 어디로 갔나? 뒤쪽을 살피러 그라바스와 같이 사라져선 여지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 우물에 빠졌나 싶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면 굴뚝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답시고 용을 쓰다 중간에서 꽉 끼어버렸... 우에, 싫다. 옴짝달짝 못하게 되어「데몬 살려~!!」를 외치는 장면을 상상하다 말고 급히 팔뚝을 긁었다. 정말로 끼어버렸다면 오늘 저녁은 바싹하게 잘 구워진 데몬 훈제다. 그것도 역겨운 소시지 냄새를 풍기는... 막힌 굴뚝을 소제할 청소부는 아마 평생 소시지 같은 건 입에 대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아서요, 유나.』
굴뚝 속에서 소시지가 되어버릴 데몬씨까진 생각 못했다. 하지만「지붕을 통해 접근해본다」건 고민해봤다. 그녀를 따라 지붕으로 시선을 가져간 그라바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둥글게 생긴 지붕 위에서 무슨 재주로?
용케 밥사발 위로 올라갔다 해도 2분을 채 못 버틴다. 뾰족 지붕에선 그래도 박공에 매달리고, 기와에 손톱을 틀어박고, 빗물통에 엉덩이를 걸치고 나는 미쳤소이다 소리도 지를 수 있다. 하지만 둥근 지붕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붙잡고 매달릴 건덕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불을 지르려고 횃불을 던져 올려도 스륵 미끌어져 떨어져 버린다. 횃불이 그러니 사람도 스륵 떨어진다.
단연 최강. 모양을 저렇게 만든 까닭은 단지 심미적 요소 때문이 아니다.
신발 바닥에 쇠못을 촘촘히 박아넣고 난 뒤에는 모르겠다만.
지금처럼 평범한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 있는 상황에선 꿈도 꾸지 않을란다.
하여 그라바스는 정색하며 도리질했다.
『차라리 지붕을 무너뜨리는게 낫죠.』
『맞는 말이다.』
『에.』
『무너뜨리자.』
이봐요, 언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런 끔찍한 대사를 읊는다는 점에서 이 여자의 출신 성분이 의심스럽다. 무너뜨려? 지붕을? 화약도 없이?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찻집에 가면 설탕 단지라는 것이 있지.』
『여기서 설탕 단지가 왜 나옵니까.』
『앞질러가지 말고 잘 들어봐라. 뚜껑이 있는 설탕 단지에 스푼을 끼어넣곤 주먹으로 스푼 머리를 팡 내려치는 거야. 그럼 단지 뚜껑이 멋지게 날아가면서 안에 든 설탕이 위로 확 솟구치지.』
『그런 몹쓸 장난을... 청소는 어쩌라고. 유나는 어렸을 적엔 나쁜 어린이였군요.』
『나? 아냐. 내가 아니고 찻집 아르바이트생이 그랬다.』
『에? 그런 짓을 하고도 짤리지 않는 아르바이트생도 있답니까. 간도 크군.』
『크고 작고 이전에 다루핀 그 자에겐 아예 간이라는게 없는데.』
『에.』
상황 A와 B를 이해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그라바스를 뒤로하고 유나는 여전히 설탕 단지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저 건물이 거대하게 확대된 설탕 단지라고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둥근 돔 지붕 바로 아래로 튼튼한 스푼을 끼워 넣고는... 주먹으로 팡.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지렛대의 원리에 따르면 기다란 막대기 하나로 별을 움직일 수 있다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가르쳤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문제는 결코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막대기와, 힘줄 돋아난 튼튼한 주먹일 터. 그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나머진 과학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럼 결정했다. 적당한 막대기를 구하여 보자.
그라바스는 앗 소리 질렀다. 말리려 했는데 늦어버렸다.
이것이 정답이다 싶자 유나는 자신의 장검을 달 표면에 박힌 전설의 롱기누스의 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큰 숨을 들이마시고 그대로 으라차차, 은빛의 흉기가 쏜살같이 날아가 단단한 외벽에 쩡 소리를 내며 박혔다.
앗싸, 성공. 여자는 만족해하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막대기는 구했다.』
『우앗! 구하긴 뭘 구했다는 겁니까!』
벽에 박힌 칼날은 아직까지도 특유의 울림 소리를 내며 부르르 진동하고 있다.
그라바스는 질린 나머지 머리를 감싸쥐었다. 만만치 않은 높이에, 공략이 결코 쉽지 않을 거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저놈의 무시무시한 흉기를 냅다 던져버려? 그게 제대로 된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이냐!
『아무리 팔뚝이 굵다고 해도 그렇지! 튕겨나오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안 튕겨나왔으니 되었다.』
『되긴 뭐가 되었다는 겁니까. 저기서 도로 뽑아내는 일도 장난이 아닐텐데. 어휴!』
『장난 아니긴. 긍정적으로 사고해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저기에 박힌 검 손잡이 위로 200마리의 코끼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럼 설탕 단지 뚜껑은 뻥 소리를 내며 날아갈 걸.』
『코끼리 200마리?! 그것도 차곡차곡?! 그런게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화가 잔뜩 나서 악을 쓰는 청년의 어깨로 그녀가 차분히 손을 얹었다.
그런데 어랍쇼. 어쩐지 눈빛이 짖궂다.
『물론 가능하지 않지, 그라바스.』
『아앗?!』
그제서야 퍼득 깨달았다.
『날 놀린 겁니까?!』
『그걸 이제 깨달았나. 생각보다 바보로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유나는 싱긋 웃었다.
『여기서의 요점은「지렛대」가 아니지. 봤어? 칼이 박혔다구. 중요한 건 흠집도 나지 않던 출입문과는 달리 저 위엔 방어 마법이 안 걸려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물리적으로 공략이 가능하다는 것!』
찍고, 때리고, 두둘기고, 걷어차면 어떻게든 구멍이 생긴다.
유나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 하는 청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잘 조준해서 쏴.』
천벌 받을 짓을 저지른다며 고함을 질러대는 한 다스의 주민들을 상상했다.
난 이제 큰일 났어, 현상금 수배범 포스터에 내 얼굴이 올라갈 거야, 곡괭이로 무장한 사람들이 머리를 노릴 거야, 천인공노할 악당이 되어버린 거냐며 화가 난 할머니가 비스퍼랑크를 날릴 거야... 끙끙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퓽 소리와 함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화살이 날아갔다.
몬스터를 박살낸 적은 많다. 해적선을 침몰시킨 적도 있다.
성당을 공격한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쾅 하는 굉음과 같이 해서 벽돌이 떨어져 나갔다. 그라바스는 코를 간질이는 먼지에 콜록 기침하면서 두 번째 바람의 화살을 연달아 쏘아 올렸다.
유나는 쏟아져 내리는 파편에도 아랑곳 없이 2층 높이 가량을 단숨에 올라갔다. 손바닥에 파리 끈끈이 접착제라도 발랐나 싶을 지경이다. 발목에 힘을 주고 팔을 위로 쭈욱 뻗는다. 맨손 암벽 등반 대회 우승자가 선생님이라 부르며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도 남겠다.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는 것도 잠시다. 옆구리에서 재빨리 단검을 꺼내 크랙 사이로 억지로 밀어넣었다. 그걸 손잡이처럼 잡고 상체를 끌어 올렸다.
어디에선가 와지끈 소리가 들렸다.
쳇 하고 혀를 차면서 피가 나는 손을 아픔에 겨워 오무렸다.
『유나, 전 밧줄이 없어 못 따라 갑니다!』
난 스파이더맨이 아니거들랑요 - 라는 하소연을 삼키면서 그라바스가 악을 썼다.
『기다려주진 않는다. 맘대로 해.』
쌀쌀맞은 언니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그리 대꾸하며 힘을 실은 왼발로 깨어진 벽돌을 마구 걷어찼다.
따라오든, 따라오지 않든.
애초부터 그녀는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것이 편하다.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후욱.』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쓰라리다못해 격렬한 통증을 호소하는 오른손을 쳐다봤다. 가운데손가락 손톱이 꺾여져 절반이나 없어졌다.
쓴 웃음을 지어가며 벽에 꽂힌 장검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피투성이.
붉디 붉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
몸무게를 실어 억지로 올라탔다.
제법 큰 덩어리의 회벽 조각이 떨어져 나가면서 검날과 같이 그녀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