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범죄자를 잡는 탐정(경찰)을 응원하는 작품, 도망가는 범죄자를 응원하는 작품.
범죄 응원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 영화 스팅이 있다. 

여기서 몇 개의 법칙이 도출되는데 범죄 응원이 되려면,

1)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가 극한 상황에서의 자기 보호, 더러는 과거에 있었던 극악한 행위에 대한 복수여야 한다. 즉, 아무련 연계성이 없는 제3자가 범죄자를 동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매 맞는 아내가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식칼로 찔러죽이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욕한다.

2) 1번의 사항이 아니라도 피해자가 악인인 경우엔 쾌락 범죄나 경제 범죄도 용인될 수 있다. 사기꾼에게 사기를 치는 건 정당(?)하다.

3) 무고한 희생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범죄 응원의 가능성이 커진다. 이때 범죄로 인해 득이 되는 사람이 사회적 약자이거나 다수인 경우엔 십중팔구 범죄 응원이 된다. 사또를 털어 인민을 구제하고자 했다는 홍길동이 대표적인 예다. 어린이가 다치거나, 부녀자가 죽거나 하면 무효. 범죄자에 의한 재산적 피해가 악 소리 나오게 커서 엉뚱한 사람에게 불똥이 튀어도 무효. 전 재산을 잃은 사또가 지랄하여 이방이 자살하면 홍길동은 더 이상 의적이 아니다?

4) 이념 (종교) 범죄인 경우에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범죄 응원을 하게 되어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범죄 응원이며 가장 골치 아프다. 테러범 옹호라던가, 나치 학살이 대표적. 그 행위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살인마저도 불사한다. 여기에 동조하면 사람들은 그 행위가 살인이라는 걸 묵살한다. 단순 공식에 의해 살인마가 영웅이 되기도 한다.

5) 아트 범죄의 경우 간혹 범죄 응원이 있을 수 있다. 범죄가 아트가 될 수 있느냐고 묻지는 마라. 범죄는 혐오스러운 것이고, 조디악 킬러처럼 사후 세계까지 걱정하는 치밀함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언정 [너나 잘 하세요] 라는 욕말이 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본인은 아트 범죄를 부정하는 편에 속한다.

서두가 길었는데... 이 책은 후자다. 제목에 나오는 [헌신] 이라는 단어에서 이 책의 성격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다. 헌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 행위의 전모가 모두 밝혀졌을 적에 [이런 반전이?!] 라고 놀라기 이전에 가슴이 아프게 된다.

추리 소설 고유의 통쾌함 - 천인공노할 악당이 드디어 잡혔습니다~! - 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피해가도록 하자. 차라리 묻어두고 싶고, 차라리 도망가게 해주고 싶은... 그 사람의 행위는 짜증스럽게도 보답받지 못했다.

울게라도 해주게 - 책 후미에서 유가와가 한 저 대사는 마치 독자에게 미안하다 말하는 작가의 속삭임과도 같아 뒷 맛이 매우 찜찜하다.

추리 소설 읽고 기분 다운되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이건 별도의 얘기지만 하드 커버의 양장본이라 마음에 든다. 양억관씨의 번역은 당연히 불평할 건덕지가 없다. 영화 한 편 본다는 생각으로 질러보자.
그런데 기분이 다운되었다면... 구입이 후회스럽다는 거야, 후회스럽지 않다는 거야? 어느 쪽이지?

Posted by 미야

2006/08/23 11:45 2006/08/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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