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미친 바다가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흡사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하늘을 가리는, 단단하고 거대한 물로 이루어진 벽.
밀려드는 물보다 더 높은 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덕 위에 세워진 왕성의 지붕도 그보다는 훨씬 낮았다.

활을 접은 궁사들이 파랗게 질려 무어라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한다.
해가 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이 어두컴컴해진다.
바다가 굉음을 내며 심해에서 두 다리로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쪽을 돌아보곤 눈을 휘둥글 떠보인다. - 해일이다.

종말을 예감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넋이 절반은 나가 있다.
「저런 것과 어떻게 싸우라고.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그것으로 끝이다. 집채만한 무거운 돌로 가슴을 후려치는 통증을 느끼고 시야는 이내 검게 변한다. 고요함과 적막이 그 뒤를 따르고 뒤죽박죽이던 세계는 하늘의 주먹으로 주물러져 기괴한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한다. 사람들도, 나무도, 새도, 짐승도 전부 한 덩어리가 되어간다. 그 위로 쏟아지는 건 몰타르처럼 걸죽해진 진흙으로 그 무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게 살아있던 것 전부를 쓸어버린 뒤에야 신왕의 죽음으로 촉발된 재해는 마침내 가라앉았다.

『으으.』
파묻혀진 석화된 뼈들의 무게에 압사당하며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다들 그만혀. 아직 졸리단 말이야.』
누군가 방문을 두들기고 있다. 고함도 질러대는 것 같다. 좋지 않은 꿈을 꾼 탓에 소동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사나운 기척에 반응하여 서서히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짜증을 내며 베개를 끌어안았어도 잠자리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다. 욕지기 비슷한 걸 중얼거리며 누운 자세를 바꿨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한층 선명해져「손님, 빨리 방을 빼주셔야죠!」내지는「지금 당장 정리를 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하다고!」식의 내용으로 떠들어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말과 존댓말이 반쯤 섞였다. 외치는 목소리도 여자와 남자가 반반씩이다.

방을 빼라니. 분명 사흘치 선불이었는데. 오남은 속으로 이상하다 여겼다.
「충분히 경고했다고요. 그럼 문을 열겠수다.」
크게 숨을 몰아쉬며 베개에서 얼굴을 뗀 순간 잠가두었던 문을 따고 여관 주인이 직접 등장했다.
허락도 없이 방안에 들어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뱃가죽에 기름 낀 남자는 옷장을 열어 짐 가방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혹시라도 떨어져 있을 옷가지를 찾아 서랍도 멋대로 열었다.
『거 참... 무슨 일이오. 불이라도 난 게요, 아님 지난 밤 도둑이라도 들었소.』
『손님? 아침 7시가 넘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둘 다 아니라는 거군.』
이제 겨우 아침 7시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오남은 다시 푹신거리는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그럼 용건은 없는 거지? 다들 썩 나가. 나는 저혈압이란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나가는 건 그쪽이우.』
『응?』
『시간이 되었으니 방을 빼달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수. 아침 7시라니까!』

1층 복도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미 싸움이 붙었다.
『사흘의 방값을 미리 계산했잖아!』
『그건 댁의 착각이지. 숙박부에는 하루라고 적혀져 있는 걸. 봐요, 여기에. 이렇게.』
『이 좇밥아, 그쪽에서 멋대로 숫자를 지우고 고쳐 썼잖아!』
『허어, 그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실수로 생긴 얼룩일 뿐이오. 펜촉이 많이 낡았거든.』
『이 사기꾼이! 사흘치 방값을 이미 다 받아놓고서!』
『글쎄, 그게 하루치였다니까.』
『뭐야?! 이거 완전 도둑놈이잖아!』
『거 듣기 민망하구랴. 아까는 사기꾼이라더니 이번엔 나더러 도둑이라는 거요?』

목청이 그다지 크지 않은 김가의 태영이 악을 쓰고 있다.
끼걱대며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음도 들렸다. 약간의 몸싸움도 벌어졌다는 얘기다.
그제야 오남은 졸린 머리로 돌아가는 사정이 약간만 이해되었다.
「이거, 이거.」
바가지 상술에 도가 튼 여관 주인이 요금을 한 푼이라도 더 챙기고 싶은 욕심에 정식으로 계산을 치룬 투숙객을 제멋대로 내쫓기에 들어갔다.
최근 주변으로 유행하는 수법으로 일명「장부 조작」이다. 사흘 치나 일주일 치 방 값을 선불로 내면 5% 깎아준다고 속이곤 그 다음날엔 두꺼운 낯짝으로 딱 하루치만 계산하지 않았느냐 우기며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젊은이들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다. 이곳의 상인들은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용병보다 더 악마 같아서 뺨에 십자 흉터가 진 근육질의 사내조차 파자마 차림새로 쫓아버린다.

수법에 당한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삿대질을 하며 화를 냈다.
『네놈들~!! 망할 것들~!!』
핏대를 세우며 억울함을 토로한들 이미 틀렸다. 얼씨구나 해가며 가게 종업원들이 가방이니 외투니 하는 것들을 길가로 던지기 시작했다. 주인이 악마라면 그들은 파리떼다. 양말과 구두가 마지막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마무리로는 예쁜 아가씨가 용용 죽겠지 표정을 지으며 침대 시트까지 걷어 탈탈 털었다.

『오호라, 텐이 당했으니 그럼 다음은 내 순서라는 거군.』
졸린 얼굴로 머리를 긁고 있자니 여관 주인이 헤헤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비볐다.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그럼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에스겐? 가방을 들어라.』
『어... 기다려. 나 아직 옷도 안 입었는데.』
『의복은 나가서 찬찬히 입으시면 됩니다. 구두는 여기. 베개는 침대 위로 내려놓으시고요.』
『거 무지 야박하구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팁은 10세겔입니다.』
『여기서 팁을 왜 받아!』
버럭거려 보았자 살아있는 곰의 생 껍질까지도 벗겨낸다는 비타아른의 타고난 돈귀신 - 요괴들은 가차 없었다.
거기다 이미 다음 희생자가 성격도 급하게 방이 비어지길 기다리며 밖에 서있었다.
『......』
물론 그 본인은 또다른 희생자가 될 거라 전혀 생각하지 않겠지만 - 레이스로 장식된 부채를 쥔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나이는 열 여섯, 아니면 열 일곱...? 쳐다보는 오남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기교를 부려가며 부채를 펼쳐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후후 웃는 소리만큼은 부채로 가려지지 않아 짙게 뿌려진 고약한 향수처럼 공중을 맴돌았다. 덕분에 그 웃음소리를 듣자 악취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어쩐지 코를 쥐고 싶어졌다.

『아가씨, 그럼 방을 곧 준비하여 드리겠습니다. 이 남자는 곧 떠날 겁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소녀가 은전이 든 작은 주머니를 들어 공손히 내밀어진 여관 주인의 손에 얹었다.

당황하여 부정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봐, 난 아직 방을 비어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에스겐? 뭐하냐. 손님 가신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출구까지 안내해드릴게요.』
『망할 것들아~!! 어이! 밀지 마!, 어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셔츠 한 장만 걸친 흉한 모양새로 길거리 한 가운데 서있었다.
다행히 슬리퍼를 신어 맨발은 아니었는데 그래봤자 바지를 입지 않았으니 경범죄 처벌 대상이었다.
『다 나왓! 베어버리겠다~!!』
아울러 마을 한 복판에서 칼부림을 선언한 김가의 태영 또한 마찬가지로 경범죄 처벌 대상이다.

셔츠에 속옷 차림새로 가방 위에 엉거주춤 앉은 오남은 잔뜩 흥분한 일행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 모습을 졸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혈압인 관계로 찢어져라 하품만 터져 나왔다.

Posted by 미야

2015/09/14 15:14 2015/09/1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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