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왕국에서 8년이라는 긴 주기를 가진 축제를 언제부터 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진 않다.
말단 경비원 루안의 나이는 올해 스물 아홉이다. 다섯 살 시절에 사람이 꽉 들어찬 광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신나게 뛰어놀던 추억이 있으니 최소 3회는 넘었다. 다섯 살 무렵, 열세 살 무렵, 스물한 살 무렵. 그리고 올해.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내가 젊었을 시절엔 이런 지랄 맞은 행사는 없었어.」라고 했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연하인 잡화상 주인 토마스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 100년 전통을 가진 축제는 분명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젠가 루안은 없던 축제를 새로 만든 계기가 있지 않았느냐 어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무릇 축제라는 건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함이니 하다못해 왕비님의 입덧도 좋은 핑계가 된다. 아니면 단순히 연못에서 독특한 무지개 빛깔의 잉어를 잡아 올렸던 것을 기념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잉어? 무지개 빛깔의?」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왕비님 입덧은 분명 아니야. 그분의 머리카락이 이미 오래 전에 하얗게 새셨으니까.」
그의 아버지는 머리를 긁었을 뿐, 이렇다 할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럴듯하게 풍년 기원이라던가, 왕족의 만수무강 기원이라던가, 지역 경제 활성화 같은 내용을 이유로 내세웠을 뿐, 그저 날씨 좋은 계절에 흥청망청 놀자 판을 벌리는게 진솔한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는 주당들이 비가 와서 한 잔, 울적해서 한 잔, 여종업원 얼굴이 이상하게 예뻐 보여서 한 잔, 이러며 각각의 술잔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러니 오늘에 이르러 8년 축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건 쓸데없다.

『왕국 제일 미인을 뽑는 대회라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렇죠.』
분명 미인대회이긴 하다. 그래도 루안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옆으로 비킨 채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미인대회에선 아름다운 아가씨를 뽑는 법인데 비타아른 공왕국에선 이게 약간 달랐다.
그들은 미녀(女)가 아닌 미인(人)을 뽑는다. 즉, 아름다움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다. 하여 우승자는 남자일 수도 있다.

오남은 정색했다.
『여성이 아닌 남자가 미인대회 우승자로 뽑힌 적도 있습니까?』
『있는 걸로 압니다.』
『출전자들이 우승자를 죽이겠다며 이를 갈았겠군.』
것보다 다른 문제가 있다.
『오남. 너네 가게에서 남성복도 취급해?』
『그게... 커프스 단추 정도는 팔긴 하는데. 음.』
『안 판다는 거구나. 그럼 이참에 남성복 영역까지의 확장을 고려하는 건 어때.』
『싫어! 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싫어! 그랬다간 하루가 멀다하고 맨날 --- 에게 불려다니게 될 테니까.』
삐--- 로 처리된 자의 이름은 루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남이 알아듣지 못하게끔 입술을 벌리지 않은 채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오남이 우물거린 이름을 잘 알아들었던 것 같다.
『그 남자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허나 매출이 껑충 뛸 걸? 돈이 궤짝으로 쌓일 걸 상상하면 기쁘지 않아?』
『매출 이전에 신경성 위염으로 죽을 거다.』
『엄살은. 고깔광대 독버섯을 삼켜도 멀쩡하게 소화 다 시키고 트림만 잘하는 주제에.』
『내가 언제! 이 몸은 섬세하고 예민해! 독버섯을 와구와구 씹어 먹는 무식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리고 자칭 델리케이트한 남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리듬에 맞춰 톡톡 건드렸다.

『저어... 나리. 올해는 분위기가 어떻던가요.』
어떻긴. 초조함을 한껏 담아 묻는 질문에 루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매회 그래왔듯 이번 축제에도 내놔라 하는 미소년들이 여성들과 어깨를 겨루며 출전했다. 루안의 판단으로는 참자가 중 여성이 60%면 남성은 40% 가량 된다. 하지만 군중은 목젖 튀어나오고 수염달린 족속에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편이라 우승후보를 추리고 추려 인원수를 10명 내외로 좁히고 나면 여성의 비율은 90%로 껑충 뛰어오르게 된다.
그 중에서 누가 최종 우승을 거머쥐느냐고?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거고.

포만감으로 노곤해지자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에이딜렌 케이틀린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유력한 우승 후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벌꿀처럼 부드러운 금발에 보석과도 같은 푸른 눈, 잘록한 개미허리, 직업은 보모. 외국어 실력도 출중한 재주꾼이라고 하더군요.』
『호오~』
『안나 레머튼도 꼽을 수 있다죠. 쭉 뻗은 미끈한 다리,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 노래실력이 뛰어남. 사머튼 지방에서 보험사 직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힐머른 중앙 광장으로 나가시면 우승 후보들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아직은 한가할텐데 오전 10시 넘으면 사람으로 꽉 차요. 이따 가보시구려.』

언제 초조해했느냐며 오남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왜냐하면 그 말인 즉, 유치장 철컹철컹은 지금부터 안녕이란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손을 모아가며 확인을 해본다.
『엄훠, 그러면 계속 이곳에 남아 즉석재판을 안 기다려도 되는 겁니까? 나리.』
『그럼 지금 당장 유치장 안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오?』
『아니오.』
『즉답이구먼. 그러면서 뭘 되물어요.』
뭐, 괜찮지 않을까. 이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여행객들일 뿐이다. 소매치기도 아니고, 강도짓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거리 한 복판에서 검을 빼어들고 - 되짚어 보니 검집에서 칼을 빼지도 않았다. 그저 혼을 내주겠다 말로 위협한게 전부다. 이전에 장부를 조작하고 투숙객을 내쫓은 여관집 주인의 잘못이 있으니 전후사정을 들은 판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은 뒤, 이런 건 재판할 꺼리가 되지 않는다며 기각 조처를 할 것이다.

『재판을 안 받아도 된다고 하시니 감사한 노릇입니다만, 저어. 그래도 짐은 여기다 놓고 가면 안 될까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다 놓았더니 보따리를 내놔라 한다던가.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며 경비원 루안은 뺨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방을 구할 때까지만. 네?』
『이보시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루안이 화를 내는 와중에 오남은 포기하지 않고 제안을 더했다.
『물품 보관료를 따로 낼게요.』
『어차피 시장 조사차 나온 거라 가지고 있는 짐이 많지도 않아요.』
『유류품이라고 딱지를 붙여 그냥 물품 보관소에 며칠만 넣어주시면.』
『폭탄이나 음란물 같은 거 안 들었어요. 네?』
쿵쿵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여관 앞에서 사기를 당했다 소리소리 지를 적에 못 본 척하고 그대로 지나칠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는데 쐐기를 박겠다며 오남이 자기 가방을 챙겨 루안의 품에 넘겨주었다.

『귀중품이 없어져도 나는 모르오.』
『그 안엔 양말과 속옷밖에 없어요.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루 보관료는 3세겔로 치지요.』
『3세겔?! 애들 과자 값도 그보단 비싸!』
『쳇. 그럼 5세겔. 그럼 오늘의 보관료를 받으시지요, 나리.』
무르기는 없다며 그가 루안의 손바닥 위로 짙은 갈색이 도는 작은 동전 하나를 올려놓았다. 포효하는 드래곤이 양각된 진짜 작은 동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7 15:47 2015/09/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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