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로 돌아오자마자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자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 나는 창피함도 잊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술에 취한 듯 금방 현기증이 일었어도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은 자유를 만끽했다.
머리를 씻기 위해 찬물을 뒤집어썼을 적엔 격한 욕지기가 터져 나왔지만... 굴하지 않고 두피를 문질러 닦았다. 더운물이 가득 찬 욕조 생각이 간절했어도 숙사감대부의 엄중한 명령으로 식사를 가져온 하수에게 개인적인 목욕물까지 부탁하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가뜩이나 싫은 표정이었는데 거기다 눈치도 없게 목욕물 이야기를 꺼냈다간 실수를 가장하고 들고 있던 쟁반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을 거다. 이럴 적엔 눈치껏 구는게 좋다. 다행히 지금은 한 겨울도 아니고 해서 나는 미리 나무통에 우물물을 길어두었다.
『차가워!』
괜찮다. 사람은 찬물로 머리를 감는 것 정도로는 죽지 않...... 장담은 못 하겠다.

몸이 둘로 쪼개지는 감각을 참아가며 이를 악물고 물을 한 바가지 더 부었다. 괜한 호기였다. 네 번째 물바가지를 붓자 신체가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제야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간수들이 죄수의 몸에 얼음장 같은 물을 끼얹는 건 순전히 고문을 하기 위해서라는 걸 떠올렸다.
『어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동안 나는 제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얻어맞은 피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화기와 방금 전의 냉기가 격렬하게 부딪쳐 일종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듯했다. 우박 섞인 폭풍우가 살가죽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며 뼈와 근육의 틈새를 망가뜨리며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녔다. 억지로 허리를 펴고 일어나 속의를 걸치려고 하자 살이 조각나는 통증이 등가죽을 타고 발뒤축까지 흘러내렸다. 끈 매듭을 묶으려는 손은 계속 떨렸다.

그 상태에서 침상에 가 눕는 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어떻게 무릎 하나를 올리긴 했지만 몸을 완전히 침상으로 이동시키고 바닥으로부터 발을 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곧 종아리가 당기며 쥐가 나려 했다. 나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두 다리를 뻗고 눕자 이번에는 꼬리뼈가 찌르르 아파왔다.

『거울을 보고 싶구나.』
똑바로 누운 자세에서 팔을 위로 뻗어보았다. 바짝 야윈 아이의 손은 어쩐지 낯설어 내 맘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주먹을 폈다 접었다하며 작은 손톱의 모양새와 손바닥의 주름을 잘 기억해뒀다. 그래도 피곤함에 눈을 감자 어린아이의 손은 어느새 핏줄이 돋아난 성인 남자의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먹물이 묻었고, 필기구를 하도 오래 쥐어 엄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배었다. 관절은 툭툭 튀어나왔고 손끝은 뭉툭했다... 아니다, 이것은 안즈의 손이 아니다. 힘겹게 다시 눈을 뜨자 세로줄 모양의 상처가 생긴 고사리 손이 보였다.
『맙소사. 이러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먹겠어.』
쓰게 웃으며 뺨을 만져봤다. 열이 올라오는지 피부가 뜨거웠는데 신기하게도 목 아래쪽은 서늘하고 차가워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다시 더듬어 올라와 이마를 만지자 이쪽은 이미 열탕지옥, 자고 일어나면 연못에서 주워온 나무토막 신세가 될 거라는 숙사감대부의 말은 반드시 실현될 예언이었나 보다.

저녁식사로 나온 닭죽과 호박나물, 우엉조림과 바지락 튀심도 식욕을 잃어 반 이상을 남긴 상태.
그대로 까무룩 기절하려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숙희가 말똥을 양손에 들고 나타나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휩쓸리지 말라고 내 경고했소.」
어째서인지 나는 커다란 용으로 변해 빛도 없는 흑암의 공중을 날고 있었다.
그곳은 풍압이 엄청나 날개를 똑바로 펼 수도 없었다.
기를 쓰고 막을 펼치자 비늘이 떨어지고 피부가 찢겨져 뼈가 밖으로 드러나려 했다.
「내 충고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더니만.」
고통에 몸부림치자 곱게 갈린 날개가 찌익 소리를 내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우와~, 엄청난 얼굴.』
사흘 뒤 창고 문을 두드린 린청은 나를 보자마자 소매를 들어 눈가를 가렸다.
햇빛을 가리려는게 아니라 몹쓸 전염병에 걸려죽은 사람을 보았을 적에나 하는 행동이라서 나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세워두고 부정한 시체 취급을 하다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다. 문지방에 팔을 기대고 서서 죽일 기세로 쏘아보자 소년은 가만히 소매를 도로 내렸다.
『몸살이 대단했던 모양이군, 안즈. 뺨이 푹 꺼졌는데?』
『신경 꺼주세요.』
『멍은 보라색이고. 아니다, 검정색에 더 가까우려나. 한 번 만져 봐도 돼?』
『거절하겠습니다. 것보다 송주, 넌 거기서 뭐 하냐?』
놀랍게도 린청의 등 뒤로 떨떠름한 낯빛을 한 송주가 보였다. 우리와 일행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소년은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서서 회색의 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봤자 싫든 좋든 이미 굴비 두름이었다. 콧망울을 긁는다고 한 벌이 된 걸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은 우리 세 사람이 나란히 벌을 받기로 한 날이다.

『어디 열쇠야?』
두 사람은 수업에도 참석을 못 하고 대신 숙희로부터 열쇠 하나를 받아왔다. 먼지를 치우고 걸레질을 하기로 되어있는 장소의 열쇠다.
겉옷을 주워 입으며 곁눈질로 보니 척 보기에도 크기가 매우 크고 낡아빠진 열쇠다. 그리고 제법 묵직했다. 일반적으로 열쇠의 쇠막대기에서 튀어나온 부분은 요라고 하고 깎여서 들어간 부분을 음이라고 한다. 이건 요가 셋이고 음이 다섯이나 된다. 그리고 요의 생김새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와 ㄱ자형이다. 이 정도면 복제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혹시라도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뜨리기라도 하는 날엔 강바닥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며 가뭄을 정성으로 기원해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특이한 건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버릇인지 콧망울을 만지며 송주가 말했다.
『그야 넌 열쇠 종류를 잘 모르잖아.』
『그러는 넌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자신하는 거냐, 변방인!』
『네놈과 마찬가지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 대문 열쇠와 비슷하게 생겼어. 그런데 숙희 님은 이게 어디 열쇠라고 하였지?』
『어. 그게... 내게 말하길, 귀신 나오는 보물창고의 열쇠라고 농담하던데.』

우리 셋은 나란히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앞서 당해본지라 숙희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일단 확신이 없다.
제일 먼저 귀신이 나온다는 말이 신경 쓰인다. 진짜일까. 뭐, 한 걸음 양보하여 그깟 귀신, 복숭아 가지를 흔들어 내쫓는다고 치자. 그런데 진짜로 보물창고라면...
『걸레질하다 실수로 골동품 화병을 깨뜨리기라도 하는 날엔.』
침 삼키는 꿀꺽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송주가 느끼는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 괴담도 있다. 어린애 울음을 그치게 하는 종류의 옛날 얘기인데 줄거리는 이러하다. 보물창고를 청소하던 몸종이 털이개를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다 그만 선반 꼭대기에 올라간 화려하게 조각된 상자를 잘못 건드렸다. 바닥을 구른 상자는 걸쇠가 풀려 뚜껑이 열리고 말았는데 동그랗고 작은 것이 그 속에서 떨어져 나왔다. 몸종은 그게 귀한 바다진주일 거라 생각하고 얼른 집어 올렸다. 그런데... 가만 보니 색도 흐리고 광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무리 봐도 진주가 아니었다.
그걸 이리저리 굴리며 그 정체를 궁금해 하고 있노라니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 눈알이야. 그만하고 돌려줘.」
우리 세 명은 다시 팔짱을 낀 자세로 침묵했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몸종의 두 눈이 모두 뽑혀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 괴담이 주는 교훈은 뭐냐, 안즈.』
『먼지털이개를 사용할 적엔 신중하게.』
『그게 아니라 땅에 떨어진 건 함부로 줍지 말라는 거 아니야?』
나와 린청이 한가롭게 영양가 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자 송주가 모두를 대표하여 자기 바지주머니 속에 열쇠를 넣었다.
『속 터져 죽겠네. 지금 한가롭게 잡담이나 떠들고 있을 때냐?! 이 무식한 변방인들아!』
물론 그건 아니다. 하여 나는 얼른 빗자루와 걸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Posted by 미야

2015/06/11 19:41 2015/06/1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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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12 01:00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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