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즈! 재빨리 손을 빼서 다행이지. 갑자기 왜 그래, 너.』
『기분이 안 좋아졌어.』
『뒤에서 누가 내 눈알 돌려줘, 이러고 속삭이기라도 했어?』
『비슷해.』
린청은 다소 짜증이 난 듯했다. 그 눈빛이「너도 저기서 북어포를 흔들고 있는 누구처럼 겁을 집어먹은 거니?」라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핏기가 완전히 가신 내 얼굴을 보고는 곧 누구러져 이렇다 할 잔소리 없이 걸레를 들었다. 요컨대 해야 할 일을 빨리 해치우고 밖으로 나가자는 거였다.
『하긴 기분 나쁜 편지긴 했어. 아무리 남자가 매몰차게 찼다고 해도 여자가 그런 식으로 밤새 술 먹고「나 말고 다른 마누라 꿰차고 어디 행복하게 잘 사나 두고 보자!」이러면 안 되지.』
그게... 저기 말입니다. 남자입니다.
『그리고 여자라면 글씨도 동글동글 예쁘게 써야지. 남자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눈물을 찍어야 하거늘, 박력 넘치게 휘갈겨서 어쩌겠다는 거야. 저건 한눈에 봐도 부대 재배치 명령장 글씨체잖아.』
제대로 보신 겁니다, 린청 님. 그건 남자 필체입니다.
『에이, 모르겠다. 청소하자.』
『내 말이 그거야.』
송주도 여기에 동의하고 빗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청소라고 하기엔 민망한 동작으로 바닥에 쌓인 먼지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대신 구석으로 요리조리 밀어 넣기 시작했다. 더러운게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궤짝이니 바구니 같은 물건이 나타나면 정리는 뒷전으로 미룬 채 멀리 피해서 돌아갔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젖은 구렁이가 비늘로 쓸며 바닥을 기어간 듯한 독특한 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층은 어쩌지.』
『때려죽인다 해도 난 올라가지 않을 거야.』송주는 완강했다.
『알았어. 그럼 나와 안즈만 올라가볼게.』
『날 혼자 두고?!』
『그럼 어쩌라고.』

내가 밟았을 적엔 끼기긱 요란한 소리를 내던 계단은 린청의 움직임엔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았다. 빌어먹을 무생물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움직임이 우리와 근본부터가 달라 체중을 실을 적에 무게점을 고르게 분산시켜 발판이 거의 휘지 않았다. 이쪽에서 요령이 무엇이냐 물으면 린청 본인도 아마 답을 모를 것이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 대답하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내가 올라서자 계단은 아까처럼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재주가 없다. 콧잔등을 잔뜩 찌푸린 린청이 뒤를 돌아보기에 눈치가 보여 동작을 더욱 조심했지만... 죄를 지은 마음에 곁눈질하니 좀처럼 그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가운데 말고 가장자리를 밟아.』
그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보다도 약해진 부위가 부러질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내려다보니 색이 좀 변한 것처럼 보였는데 안쪽에서부터 벌레가 먹어치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벌레 탓이 아니라고 해도 관리를 못한 나무는 결을 따라 점차 쪼개지는 습성이 있다. 그곳으로 한 방울이라도 물이 들어가면 이내 썩게 된다. 난간을 잡은 나는 조언대로 측면으로 이동하여 살금살금 다리를 움직였다. 틈새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렇게 높게 올라온 것도 아니면서 간이 오그라들었다.

『책이다.』
2층에는 내가 맡았던 냄새의 주인공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다만 그게 정돈된 서가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무턱대고 쌓아올렸다. 질리도록 엉망진창이라 주문하여 배달된 물품 그대로를 아무렇게나 옮겨놓은 인상이다. 일부는 포장지도 그대로 남았다. 더러는 가나다 순서대로 분류하려 시도했다가 도중에 손을 털고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 것 같았다. 반쯤 부서진 궤짝도 보였다. 물론 그 내용물은 전부가 책이다.
『어느 나라 말이지? 글자를 읽을 수 없는데.』
린청은 동대륙 언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나 보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은「수선화가 필 적에」였고 작가는 레이몬드 월렛, 그 내용은 정혼자인 아내와 결혼하고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소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꾸로 들었다.
『너도 볼래?』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작은 글자가 빽빽하게 인쇄되어 시력을 나쁘게 만드는 종류였다. 강력범죄의 증가와 관료의 부정부패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발한 연구 논문으로 아까와 마찬가지로 동대륙 언어로 적혀 있었다. 서정적인 소설과 딱딱한 사회과학 논문이 같은 자리에 있다? 저자를 보니 윌리엄 라즈 블리스. 몇 권을 더 뒤적거리니 맨 밑으로 실용서 - 뜨개질에 대한 책이 나왔다.
『왜 이런 곳에 책들을 모아뒀지? 읽으면 큰일 나는 금서 종류라도 되나.』
『뜨개질 해법서인데?』
나는 린청이 볼 수 있도록 책을 잘 펼쳐서 들어보였다. 코바늘이 지나가는 순서를 표시한 커다란 흑백 그림은 글자를 몰라도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 버리기 아까워서 여기다 모아뒀나 보군.』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걸레로 표지의 먼지를 휙휙 닦아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쇠로 만든 고리가 달각, 풀리는 듯한.
린청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덩달아 나도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우리들은 사이좋게 허리를 구부려 자세를 낮춘 후 귀를 쫑긋 세웠다.
「들었어?」
피부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하고서 린청이 소곤거렸다.
「들었어. 안쪽에서 났어.」
「쥐라도 돌아다니는 건가?」
「쉬잇. 더 들어보자.」
다시 달각, 하고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모르겠다. 내 귀로는 사람이 내는 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를 골라 서생원에게 한 표를 던졌고 린청은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했다.
「쥐라면 다다다닥 이러고 달려야 하지 않나?」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 움직여 부산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흉내 낸 그는 걸레니 빗자루니 하는 것들을 전부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언가 눈에 띄면 그 즉시 아구창을 날려버리겠다는 투다. 귀신 어쩌고의 가능성은 일말의 재고도 하지 않은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당혹스러워지려 했다.
겁이 나서가 아니다. 걱정이 돼서다.
「그냥 아래로 내려가는 건 어때, 린청.」
「물건을 훔치러 들어온 도둑일 수도 있잖아.」
「설령 도둑이라고 해도 우리가 잡아야 할 까닭은 없어.」
이때 다시 달각 소리가 났다. 나는 흠칫해서 린청의 소매를 힘주어 움켜잡았다. 그 소리는 마치 이리로 가까이 오라는 듯 전보다 더 크고 확실하게 들렸다.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여기서 귀중품이 없어지면 청소를 하러 온 우리가 욕을 보게 된다고.」

그는 나더러 가만히 기다리라는 손동작을 해보이곤 자세를 낮춘 채 빠른 속도로 앉은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더니 궤짝 틈새로 몸을 숨기고 나 있는 쪽을 돌아봤다. 근심에 젖어 입만 뻥긋뻥긋하자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꾸중했다. 다시 앞을 본 그는 네 다리로 기다시피 해서 소리가 들린 곳까지 빠르게 전진했다.
「린청, 린청!」
나는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고 맨발로 그를 따라갔다. 어느새 목소리도 커졌다.
『린청!』
『아무도 없어.』
『쥐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발자국도 안 찍혔어. 아래를 봐. 먼지가 가득한데 여기에 있는 건 우리들 발자국뿐이잖아? 아마 나무가 뒤틀려서 그런 소리를 냈었나봐.』
그런데 또 달각, 소음이 들렸다.
쇠붙이가 움직이는 소리다. 나는 확신했다. 이건 나무가 뒤틀려서 나는 자연음이 아니다.
달각. 달각.
우리 둘은 사이좋게 얼어붙었다.

Posted by 미야

2015/06/15 15:10 2015/06/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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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15 16:24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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