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부터 전해오는 말에 붓은 칼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도끼를 든 사형집행인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던 나도 붓을 휘두르는 자 앞에선 오금이 저려왔다. 분명 붓이 더 무섭다. 이게 왜 무섭냐 하면...
『이 싸가지 없는 것들이!』
기억해두자. 숙희는 흥분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욕설을 한다.
『자, 여기에 서명하라고, 서명해! 우리가 반드시 책임지갔슴다, 이러고 서명하라고! 내가 과로로 쓰러지면 내 마누라와 아이들 부양은 온전히 너희들의 몫이다. 싫다고 하기만 해봐, 불알을 까버린다.』
『차라리 일주일치 반성문을 쓰라고 하세요!』
『송주 님? 제가 방금 전 뭐라고 경고를 드렸지요?』
『부, 불알을 까버린다고...』
『야, 이 자식아! 내가 깐다고 하면 진짜로 까는 거야! 못 할 것 같어?!』
그러면서 붓과 종이를 코앞에서 펄럭거리고 있으니 소름이 돋다 못해 온몸에 난 땀구멍이 전부 막힐 지경이었다. 마른침을 꼴딱꼴딱 삼켜가며 지긋이 올려다보니 검은 안개처럼 생긴 것이 남자의 몸을 위아래로 두껍게 휘감고 있었다. 가끔씩 푸른빛의 번개도 번쩍였는데 아무리 봐도 그간 먹은 것이 부실한 탓에 허깨비가 보이는 것 같진 않았다. 두건 속의 감추어진 그의 머리카락도 아마 벼락을 맞은 감나무처럼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하자 체온이 내려갔다.

이런 흉악한 것에 대항하여 이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린청의 옆구리를 툭툭 치고 숙희가 내민 종이에 지리가 안즈라고 조그맣게 이름을 적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린청 또한 나를 따라서 자기 이름을 그 옆으로 나란히 적었다.
이 와중에도 송주는 꾀를 낸답시고 몰래 점을 하나 더 찍어 제 이름이 아니라「송쥬」라고 썼는데 지금까지 글자 밭에서만 놀고 살았던 숙사감대부가 그 사소한 걸 놓칠 리 없었다.
『눈 가리고 야옹거리면 내가 모를 줄 알아?!』
벽돌 두께의 사전을 번쩍 들더니 도끼살인마 저리가라 식으로 그걸로 불알을 찍어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암튼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바닥을 벌벌 기던 송주는 먼저 적은 이름에 가위표를 그린 뒤에 적당한 여백에 다시 글자를 적었다. 붓이 와들와들 흔들린 탓에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이번만큼은 숙희의 얼굴로 그럭저럭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도 남의 영혼을 절인 고등어 한 마리 가격에 강탈한 악마의 미소 그 자체였다.

『맙소사. 이제 내 나이 열 한 살인데... 여차하면 부양을 해야 할 사람이 생겼어.』
『그러니까 날 과로사의 위기로 몰아넣지 말란 말입니다, 린청 님. 처지가 비슷한 변방인이라고 자꾸 안즈 님 편을 들어주시는 눈치인데... 내 편도 들어달라고요. 보십시오, 제 눈자위가 시커멓게 색이 죽은 것을.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이런 소동을 겪은 건 결코 흔치 않았소. 제발 부탁이니 다른 분들처럼 얌전히 지내시란 말입니다. 골칫덩이 짓은 하지 말라고요.』
순간 항의가 빗발쳤다. 사람이 코앞에서 목이 졸리고 있는데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건 비정상 - 말똥이 머리에 비벼졌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 왜 얌전히 있는 놈에게 마굿간 청소를 시켜서 일을 이 지경으로 - 엄한 손가락은 왜 부러뜨리고 지랄 - 귀가 따가워진 숙희는 재빨리 가느다란 실을 가로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동작을 해보이며 모두 입 다물고 정숙할 것을 요구했다.
『여러분. 내가 쓰러지면... 부양비가 청구됩니다. 거짓말 같죠? 시험 해봐요.』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다. 우리 세 명은 끽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특히 수중에 돈 한 푼 없어 빈털털이인 내 입장은 더욱 난감했다.
『또 소동을 피우면 이 숙희, 자리를 보존한 채 드러눕겠습니다. 제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제 가족들에 대한 부양비 청구는 그렇다 치고.』
뒤로 붙을 내용이 또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니 숙희가 다시금 악마의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들은 사흘 간 각자의 방에서 자숙하십시오.』
나는 대놓고 발끈했다.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요? 내일은 중부고가 일주일에 딱 한 번 열리는 날인데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어차피 그런 몸으로 독서는 불가능하오, 안즈 님. 부어서 눈도 잘 뜨지 못하면서 얼어 죽을. 그리고 내 장담하는데 오늘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이게 과연 내 몸뚱인지 아니면 연못에서 주워온 나무토막인지 구분도 안 갈걸. 돌아눕고자 했는데 호흡이 곤란, 사람 살려 외치지만 마시구려. 그러니 사흘간 침상에 누워 잘 쉬고 - 이후로 몸이 괜찮아지면 벌칙으로 노동을 좀. 요~만큼만.』
『노동?! 설마, 마굿간을 또 청소하라는?!』
『말똥은 이제 질렸소. 대신 다른 곳에 보내어 걸레질을 시킬 거요. 세 사람 전부!』

세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걸레질을 시키겠다는 엄포에 송주가 격렬하게 반항했다.
『나는 엄연히 피해자인데 왜 나까지 걸레질을?!』
그래봤자 씨알도 안 먹혔다.
『헐... 대륙어 공동 사전보다 더 커다란 걸로 확 까버려?』
소중한 곳이 맛보았던 지옥의 고통을 기억한 소년은 다소곳이 몸을 웅크렸다.
『알겠소? 지금부터 자숙이오. 이제부터 한 마디라도 더 뻐끔하면 쓴 맛을 보여주지. 각자 방으로 돌아가시오.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오는 것도 금지하겠소.』
린청이 서둘러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대륙어 공동 사전의 크기를 가늠하자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대신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뭔가를 눈빛으로 열심히 호소했다. 그러나 나는 점쟁이가 아니라서 린청이 하고 싶어 한 말이 무엇인지 알 재주가 없었다.
「네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
입모양으로 뻐끔거리자 숙희가 보란 듯이 사전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우리들은 나란히 발잔등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쨌든 우리의 이름이 적힌「영혼 매매 증서」는 돌돌 말려 소매춤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숙희는 예의 피곤에 찌들고, 업무에 차이고, 수면시간이 부족한 관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젠장, 글피까지 재고 파악도 해야 하는데.』
그가 늘 파김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개인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이 한계치보다 늘 많아서임을 오늘에 이르러 확신했다. 지금 보니 탁상 위에 놓은 종이뭉치가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예부나 호부, 내이정부의 고급관리 - 예를 들어 예부의상서도 저 정도의 살인적인 서류작업은 하지 않을 터인데... 그들은 일개 숙사감대부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고 있었다.

『안즈 님.』
간단히 목례하고 돌아 나오는데 숙희가 조용히 나만 불러 세웠다.
『예.』
『그분에게 휘둘리면 안 됩니다.』
『예?』
『안즈 님은 똑똑하신 분이니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실 겁니다.』
이쪽에서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자 재차 못을 박았다.
『그분에게 휘둘리면 명이 획기적으로 짧아집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실이에요.』
숙사감대부가 말한「그분」이라는 건 분명 자손을 가리키는 것일 터, 나는 멍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작금의 말똥 소동은 그가 부추겨서 커졌다기보다 나 혼자 제멋대로 난리를 친 면이 없잖아 있고, 잘잘못을 따지면 죽을 죄인은 나 하나다. 숙희는 내가 그에게 심리적인 조종을 받아 그리하였다 여기는 듯했는데 사실 자손의 잘못은「제일 좋은 위치에서」호기롭게 싸움 구경을 하려 했다는 것 정도라서 숙희의 지적은 엉뚱한 면이 없지 않았다.
나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휘둘린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마구 부림을 당하거나 지배를 당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사감대부의 눈빛은 근심 걱정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상대가 황족이라고 호기심을 가지면 그 결과는 재앙입니다. 이사실의 황족과 변방인이라는 신분의 차이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요. 저는 분명 경고 드렸습니다... 그래봤자 귀담아 듣지도 않겠지만. 뭐, 이것도 다 팔자소관이려나.』
그러고서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데 어딘가 나사가 풀렸던지 끼익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Posted by 미야

2015/06/10 11:41 2015/06/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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