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 제기랄. 눈 딱 감고 왔던 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5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특정 양식을 따른 것이 아니고 전반적으로 팔각형으로 각이 진 길죽한 생김새의 목조 건물이었다. 도둑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3층 높이까지는 환기를 위한 용도로의 작은 덧창만 나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4층과 5층에는 사람 몸이 그대로 빠져나올 수 있는 큼직한 통유리창이 달렸는데 아래에 달린 창은 작고 위에 붙은 창의 크기는 매우 커서 그 탓에 착시효과를 일으켜 건물 자체가 시각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게 보였다. 뭐랄까, 지나치게 작은 신발을 신은 덩치 큰 사람처럼 보였다. 본인은 편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보는 입장에선 아장아장 걷다 못해 쓰러질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손바닥을 눈가로 가져가 꼭대기의 모양을 관찰하던 린청은 건축가의 무지를 탓했다.
『어차피 밧줄을 걸어 4층으로 침입하면 그만이잖아.』
그렇기는 하다만, 그런 수고를 일부러 하게끔 만들었다는 점에서「보물창고」어쩌고의 단어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게다가 사람이 벽을 타고 오르면 다른 사람들 눈에 쉽게 띄게 되는 법이다. 은밀히, 남들 모르게, 눈에 띄지 않도록 - 이라는 절도 수작의 기본 규칙이 깨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 뭐 들은 건 없어? 하수들이나, 주변에서 떠든 얘기가 없느냐고.』
열쇠를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송주는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러더니 모른다, 혹은 안다, 답을 하는 대신 영 신통치 않게 말했다.
『아마도... 아닐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뭐가 아니라는 건가.
입술이 달짝달짝 움직이는 걸 봐선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괘념치 않고 입 밖으로 꺼내면 재수가 단단히 없을 거라 믿는 눈치다. 절박한 눈빛이 우리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입을 조가비처럼 닫고 있어선 그렇다, 아니다, 어느쪽으로도 맞장구를 쳐줄 수가 없었다.
소년은 내부의 불온한 공기를 미리 읽으려는 듯 손을 내밀어 자물쇠 부분을 더듬었다. 왼손에 든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오른손에 쥔 북어포에 더 신경을 썼다.
『있잖아... 열쇠가 녹슬어 움직이지 않았다고 거짓말 하자.』
『숙희 님이 한 말을 기억 못하는구나, 송주. 우리가 제대로 청소를 했는지 나중에 자기가 직접 와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잖아. 그러면 자물쇠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그런 거짓말, 그 자리에서 금방 들통 날 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라면 일찍 들어가는 편이 나아. 이런 말도 있잖아.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
『시끄러, 변방인. 내가 아는 상식은「매는 가급적 안 맞는 편이 좋다」이다.』

드디어 열쇠를 꽂긴 했는데 그게 왼손이었다. 덜걱덜걱 흔들었지만 이래선 가위를 왼손에 쥐고 천을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리만 요란했지 일정 부분에 이르면 뭔가에 걸린 것처럼 둔탁한 소음을 냈다. 그런데도 송주는 손목에 힘을 주고 억지로 비틀려고만 했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서 열쇠를 오른쪽으로 회전시켰다. 뻑뻑한 느낌이었지만 반회전 하자 찰칵, 소리가 제대로 났다.
『아직 열지 마! 준비 좀 하고.』
네, 네. 영험하신 북어포를 챙기셔야죠. 알다마다요.
손잡이를 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를 천천히 세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힘을 주어 잡아당겼는데...
투웅
격렬하게 부딪치는 감각에 소스라쳤다. 생뚱맞게 밖에서 미는 문이었다.

『창문이 좁아서 그런가. 안이 많이 어둡군.』
『물통을 여기에 놓아서 문이 도로 닫기지 않도록 하자.』
『아직 내부로 들어가지 마. 눈을 감고 있다가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 들어가.』
아이들이 이것저것을 말하는 동안 나는 코를 킁킁거려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포에 각인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오래되어 낡은 것들의 냄새... 곰팡이... 그리고 좀약의 냄새... 환의로 몸이 떨리려 했다. 신룡님, 감사합니다. 이 안쪽에는 책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책이다. 다른 것들도 아닌, 책들이다! 그것도 책장 하나를 채운 분량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았다!

신 난다, 외쳤던 것 같다. 아니면 끝내준다, 그렇게 말한 것도 같다.
서둘지 말라 만류하는 린청을 나도 모르게 뿌리치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책! 분명히 이것은 책! 발을 구르자 발치에서 무수히 많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벽면 가장자리부터 시작해 내부를 한 바퀴 죽 훑었다. 어디냐, 분명 가까운 곳에 서가가! 회색으로 덩어리진 거미줄을 양손으로 치우며 보물을 찾아 진격했다.
『야! 이 미친놈아! 저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분류되지 않은 잡동사니가 좀 보였지만 내 흥미를 잡아끌만한 종류는 아니다. 나는 옷에 옮겨 붙은 거미줄을 털어낼 상각도 하지 못한 채 오래되어 케케묵은 책의 향기를 음미했다. 어디지? 위쪽인가?

송주의 욕설은 한 귀로 흘린 채 종종걸음으로 정 중앙으로 난 계단으로 향했다. 이때 나는 이미 눈에 보이는게 없는 상태였다. 한 걸음 내딛자 끼익 울리는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썩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여겼다. 어린아이의 몸무게조차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 염려는 일찌감치 접고 신이 나서 한꺼번에 세 계단을 연거푸 밟아 올라갔다. 끼익, 끼익, 끼익, 체중을 실을 적마다 소름끼치는 음색이 귀를 찢었다.
『야, 인마.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기다리라고 했잖아!』
송주는 내가 귀신에게 홀렸다고 믿은 것 같다. 득달같이 목덜미를 움켜잡더니 냄새 지독한 북어포로 내 머리를 찰싹 후려갈겼다.
『아니면 보물을 강탈할 생각에 정신이 나갔냐?! 엉?!』
그리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다시 1층 바닥으로 내려서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뜻 모를 소리를 작게 중얼거렸다.
『홀렸다면 눈을 감고, 아니라면 입을 다물어라.』
잘은 몰라도 여기선 입을 다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은 함부로 만지지 마.』
언제부터 대장이었다고 송주는 우리들에게 명령했다.
『혹시라도 안 좋은게 닿을 수 있을 수 있으니까 주의해서 바닥 먼지만 쓸... 야~~!』
그래봤자 린청과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서 이사실의 백성이 내리는 지시에는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선반에서 굴러 떨어진 상자에서 요괴의 말린 눈알이 튀어나왔다는 괴담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린청이 눈앞에 놓인 장식 상자를 벌컥 열었다. 놀란 송주가 기함했지만... 내눈에도 그건 그렇게 위험한 종류가 아니었다.
『편지함인데? 이거.』
『어디 보자... 오늘은 눈을 뜨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여전히 옆에 누우신 것 같아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새벽 이슬비를 맞은 듯 싸늘하였습니다. 밤새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오전, 두통에 괴로워하며 여전히 나는 내 곁에서 멀리 도망친 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이 지겨운 감각은 분명 취기 탓이 아니겠지요. 하여 그대는 나를 항상 괴롭게 만듭니다. 그대가 밉습니다, 그대를 증오합니다. 왜 이런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건가요.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건가요... 뭐야, 이거. 연애편지?』
「연애편지」라는 단어에 반응, 송주의 고개가 타조의 머리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아직 나이는 어려도 그런 쪽으로 관심이 아주 없는 건 아닌지라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귀신이 두려운 탓에 직접 만지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꺼리는 건 아니라서 기꺼이 코를 박아가며 글자를 읽으려 했다.
『어디보자... 식욕도 잃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졌습니다. 나는 이대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데, 나는 말라가고 있는데, 먼 이국에서 상냥하고 착한 아내를 맞이하여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내용이 연애편지 치고는 영 산뜻하진 않네.』
송주는 내 의견을 구하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빳빳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 연애편지의 뒷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받아봤던 입장에서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오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이여, 미움 받아 마땅한 자여.
그대는 내 영혼을 말려 죽이고 있어.
그러니 나 또한 그대를 죽이려 드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는가.
나의 벗, 그리고 나의 안식처.
그대의 이름을... 시오재. 조용히 입술에 담아 감히 애원하노니
이 번뇌의 화염을 그대에게 고스란히 보여줄테니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책들에게 둘러싸여 타 죽어버리렴.

외마디 비명이 터지려 했다.
더 읽어선 안 된다. 계속 엿봐서는 안 된다.
나는 린청의 손가락이 자칫 끼일 뻔했다는 걸 알면서도 호되게 편지함의 뚜껑을 닫았다.

Posted by 미야

2015/06/14 21:08 2015/06/14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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