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별 거 아닌 작은 원인을 까닭으로 미래는 정해진 운명에서 이탈하고 새로운 장을 써내려간다.
원래대로라면 사내는 눈이 망가지고, 나는 크게 다쳤어야 했다. 그것이 정해진 줄거리였다.
그러나 작은 요소의 개입으로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간다.
신발 밑창으로 볼록 튀어 오른 조약돌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주룩 미끄러졌다. 하여 나뭇가지는 그의 눈꺼풀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눈가로 깊은 생채기를 냈다.
『으악! 내 눈!!』
지면을 똑바로 밟지 못한 탓에 찌르기가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못 하고 빗나갔다.

뭐,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나 역시 치명상을 입는 대신 어깨를 살짝 베이는 걸로 끝났다는 거다. 사선으로 잘려나간 옷 틈새로 빠르게 붉은 물이 베어나왔지만 피부 아래 근육까지 칼날이 닿은 건 아니어서 적절한 조처만 취한다면 출혈 역시 곧 멈출 터였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나는 더 이상 상대를 공격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산을 타며 체력을 잔뜩 소모한데다 방금 전의 일격에 모든 걸 쏟아 부은 탓에 말 그대로 먼지와 재만 남은 상태였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이 두 다리로 선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얼어붙은 건 바로 그 때문이었고, 누군가 옆에서 훅 하고 입김만 불어도 그대로 쓰러질 참이었다. 신물이 올라와 구토감이 느껴졌음에도 그래서 마음 놓고 기침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거의 숨도 쉴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타평은 이런 내 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그는 허겁지겁 뒷걸음질 쳐서 나와의 거리를 벌리더니 칼로 허공 베기만 죽어라 했다. 아마도 하는 짓거리로 보아 공황상태인 듯했다. 이쪽에서 다시 도약하여 달려들면 어쩌나 겁을 집어 먹은게 분명했다. 마침내 내가 참지 못하고 콜록 기침을 터뜨리자 혼비백산했다. 지금 같아선 나 같은 어린애는 주먹질 한 방이면 단숨에 끝내버릴 수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요, 요망한 것!』
그가 어찌나 씩씩거리던지 콧구멍이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어,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리고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어 내 머리꼭지를 돌게 만들었다.
『애를 잡아먹고 둔갑했구나! 이 사악한 요마 녀석!』
아니, 이보쇼.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숨이 막혀 구역질을 느끼는 요마가 있음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타평만 그런 생각을 한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뜬금없이 고약스런 살기가 느껴진다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피러 와봤더니... 음.』
타평과 나, 두 사람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청년 장수의 존재를 깨닫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하나는 전혀 인기척을 내지 않고도 사람이 그렇게나 가까이 접근했음에, 다른 하나는 그가 화려하게 칠해진 붉은색의 의주갑을 착용하고 있어서였다. 더하여 청년 장수의 어깨 보호대엔 구슬을 물고 있는 용의 머리 그림 세 개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씩이나 되었다.
「적룡군이다.」
어린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한다는 위용은 과연 소문처럼 범상치 않은지라 타평은 듣기 민망한 끽 소리를 내며 거북목을 만들었다.

해를 등지고 선 채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던 청년 장수는 여전히 골몰히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했다.
『어느 쪽이 살인자고 어느 쪽이 요괴지... 보아하니 저쪽으로 시체도 한 구 굴러다니는 것 같고... 어디보자. 칼을 든 자는 이쪽이고...』
심드렁한 말투지만 어쩐지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이런 말도 했다.
『이거 귀찮군. 헷갈린다고 전부 죽여 버리면 잔소리를 들을 테고... 음, 생각 같아선 전부 죽이면 간단할 것 같은데... 까짓 것, 일단 저지르고 볼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타평은 파랗게 질려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가파른 부근에 이르러선 뛰어내렸다. 그만한 기울기와 높이면 발목을 접지를 것이 분명했음에도 펄쩍 뛰는 동작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음, 저놈은 바지춤을 쥐고 달아나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잡으러 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대신 청년 장수는 노골적인 호기심 - 더하여 불쾌감을 얼굴에 드러내며 내 쪽을 주시했다.
『자, 그럼 너는 어떻게 할래?』
어쩌긴. 나도 달아나고 봐야지.
그렇게 눈빛으로 대꾸하고 등을 돌리던 찰나 후들거리던 오른쪽 무릎이 보란 듯이 꺾였다.
무릎이 꺾인 것뿐인데 청년 장수는 내 몸짓에 반응, 순간이동의 마법을 부려 - 움직임이 너무 빨라 순간이동이라고 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다 - 땅바닥에 코를 박지 않게끔 친절하게 날 부축해 줬... 개뿔, 정정한다. 한손만 사용하여 장사의 힘으로 내 멱살을 힘껏 잡아챘다.
『후욱!』
시야가 억지로 반 바퀴 돌자 긴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좋지 않던 속이 더 나빠졌다. 게다가 허공으로 발이 들린 채 흔들리기까지 하여 울렁거림은 곱절이 되었다. 목 졸림에 더하여 현기증까지 일자 의식이 빠져나가려 했다. 안 좋다. 여기서 기절하면 적룡군의 청년 장수는 그대로 내 목을 부러뜨릴 것이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가운데 주변은 이내 소란스럽게 변했다. 한 명이 아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흐릿한 관계로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그 어조는 분명해서 청년 장수더러 당장 하던 짓을 멈추라며 야단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내 귀를 자극한 건 특정 인물의 울부짖음이었다.
『무무무무무무, 무슨 짓입니까!』
『요괴를 붙잡았다, 이라벽치.』
『어딜 봐서! 그냥 어린애잖아욧!』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가고한에 어린애로 변신하는 요괴가 나온다고.』
『그런게 있기는 있죠. 하지만 그건 머리가 나빠서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지 못해요. 둔갑을 해도 속옷을 머리에 쓰고 다닌다고요! 아이고, 그러니 제발 그만 하십쇼. 그러다 죽겠어요!』
말리는 손이 가세되니 공중에서 내 몸뚱이는 더욱 흔들렸다.
『어허! 잘 보거라, 이라벽치. 네가 사전에 알려줬던 그대로 이것 또한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어.』
『뭘요. 제가 보기엔 바지와 윗도리를 잘 입었는데요.』
『이라벽치 네 녀석은 여전히 관찰력이 꽝이군. 눈 커다랗게 뜨고 자세히 봐라. 허리띠를 허리에 묶지 않고 엉뚱하게 발목에 묶었잖아.』
『에... 지금 보니 분명 허리띠가 맞기는 합니다만...』
『그러니 변신귀가 분명하겠지.』
『에, 에엣?! 그 정도의 사소한 걸 갖고 변신귀라고 단정짓는 건가요?! 이 아이, 상처를 입고 피도 흘리고 있는데... 험한 일 당한 가엾은 아이면 어쩌려고... 제 눈에는 영락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만.』
『거 참. 요괴가 맞다니까 그러네.』
인상을 찌푸린 청년 장수가 멱살을 잡은 팔에 힘을 더 주어 내 몸뚱아리를 거칠게 흔들어댔다.
빨리 죽이고 싶으니 어서 둔갑을 풀어라, 풀어라 그렇게도 말했다.
제발 그만해. 이제 한계다.
『웨에에엑!』
날 에워싼 모두의 눈이 삽시간에 동그래졌다.
『......』
『......』
쥐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이제 모두의 시선은 토사물을 몽땅 뒤집어 쓴 청년 장수에게로 집중되었다.

Posted by 미야

2015/05/10 12:22 2015/05/1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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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11 02:0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15/05/11 11:21 # M/D Permalink

      댓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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