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실의 수도 루은(累恩)은 거듭되는 은혜라는 그 뜻만큼 좋은 곳이다.
태어나 자란 적은 없어도 아무래도 서대륙의 중심지인 만큼 유람 차 들린 적도 많고, 일꾼으로 품을 팔러 온 적도 있었다. 전생에서는 이곳에서 공부를 했고, 성적이 좋았던 관계로 관직을 줄테니 옮겨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인연이 아니라 판단하여 관직은 에둘러 사양했지만 책을 구하러 최소한 1년에 한 번씩 찾아오곤 했다. 당시 나는 작은 나라의 부서고(府書庫), 국립 도서관의 총 책임자였다.
『비켜주세요, 지나갈게요.』
『각종 야채 있어요, 과일 팔아요.』
그때마다 나는 마을의 활기참에 감탄하며 인파에 휩쓸려 거의 넋을 잃곤 했다. 성격 급한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들 역시 발걸음이 빨랐다. 시장은 미어터지고 짐꾼들은 걷는 대신 뛰어다녔다. 소란도 빈번한 편으로 외문을 통과하려는 성마른 백성들이 서로의 등을 떠밀다 시비가 붙는 경우도 잦았다. 여자들은 깔깔거렸고 엄마 치마폭을 붙잡은 애들은 과자를 물고 빨았다.
『분명히 사라사 비단주가 420포요. 여기 거래서가 있소.』
『네 눈은 동태 눈깔이냐. 기록에는 400포잖아.』
『이리 다시 주시오. 그럴 리 없는데... 먹물이 튀었나.』
『먹물 어쩌고는 난 모르겠고, 신고부터 다시 하시게.』
『씨발.』
외지에서 들어오는 물자들의 행렬이 단속을 이유로 정체될 적엔 상인들의 입이 걸어졌다.
외문을 통과하고 나면 돌연 분위기가 차분하게 바뀐다. 아무래도 중심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높으신 분들이 많이 살고 정비된 구획으로 자리를 잡은 중요 관청들의 숫자도 늘어나는 법이다. 그만큼 절제와 제한의 요구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통행인들의 발걸음은 보다 느려지고, 마차는 위급상황이 발생한들 정해진 속도 이상으로 달릴 수 없다.
도로는 세로 방향으로 왼편부터 일문대로부터 십이대문로가, 가로는 북쪽 방향에서 일주로부터 시작해 십이주로가 뻗어나간다. 적룡신의 은혜로 외적의 피해를 일절 당한 적 없어 예로부터 이곳은 미로형이 아닌 네모반듯한 바둑판 모양으로 시가지를 세웠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무척 멋질 거라 생각한다.
오문대로를 곧장 달려 황궁의 지붕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면 드디어 내문인데 그 경계는 인공수로다. 너비 28척으로 땅을 파서 물을 채웠고 깊이는 어른의 키 정도 된다. 배를 띄울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데다 수원인 비천호에서 많은 물을 끌어오기엔 문제가 있어 원래 설계보다 상당히 작아졌다. 표면적인 주목적은 화재 예방이지만 872년 전 인공수로 위로 놓인 다리가 화마에 전소된 적이 있으니 그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이사실의 주인이 그저 뛰어난 경관을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내재원으로 가신다고요... 사친으로 오셨군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사정이 있어 나 혼자일세.』
『그럼 나중에 오시게 됩니까?』
『일행은 없네.』
작은 옷 보따리 하나 끌어안고 다리를 건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문장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행색을 살펴보곤 한쪽 눈썹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릴 내용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어느 나라인지는 모르나 감히 거지를 보냈군.」
고개를 돌려 건너왔던 다리 저편을 바라보니 이래저래 기분이 착잡했다.
『다행이라 생각하십시오. 어쨌든 비가 새지는 않으니까요.』
내재원 숙사에 이르러선 아예 바닥에 엎어져 손바닥으로 땅을 짚어야 했다.
계란을 구하려면 닭부터 기르라고 했던가.., 준비한 닭이 없으니 계란도 없었다. 하여 그들이 나에게 내어준 방은 일반적인 방이 아니고 잡동사니로 가득 찬 창고였다.
『보시오, 저렇게 창문도 달렸고.』
시큰둥하게 설명하던 숙사감은 두꺼운 판자를 덧댄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판자는 두꺼운 못으로 고정이 되어 환기를 하려면 먼저 도구를 사용해 뜯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뽑을 수 있다면 말이다. 못의 상태로 봐선 판자를 떼어내려다 창문부터 박살날 가능성이 많았다.
『이불도 있고.』
이번에는 100만년 전에나 물과 비누를 만났을 것 같은 쥐색의 담요를 가리켰다.
『화장실도 달렸고.』
숙사감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걸레를 빠는 용도였을 큼직한 나무통이 보였다.
정말이냐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었지만 숙사감의 말대로라면 아무래도 저건 소변통 용도인가 보다.
『청소는 직접 해야겠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셔야지요.』
긍정적으로 보자면 주란새가의 정치범 수용소보단 시설이 썩 괜찮았다. 그러나 아마주리의 매음굴보단 형편없었다. 최소한 그 매음굴에선 여러 개의 다리로 재빠르게 기어가는 벌레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벌레에 물려 피부에 가려움이 오르면 몸을 팔 수가 없기에 거기선 그나마 주기적으로 약을 쳤다.
어쩌지. 차라리 이대로 도망쳐버려?
내려놓은 옷 보따리로 시선을 내리깔자 웬일인지 숙사감의 시선도 같이 붙어 따라왔다.
『......』
『......』
그러자 퍼득 깨달음이 왔다. 저 인간은 이라벽치의 요청을 들었음에도 업무가 바빠 그만 내 방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먹은 것이다.
살집이 붙은 사내는 서늘한 온도에도 겨드랑이로 땀을 흘렸다.
「이만하면 알아듣고 나가겠다 하겠지.」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던 그는 은밀히 기대하며 내 입을 주시했다.
『식사는 어찌합니까.』
『잘 생각하셨소. 이러지 말고 부근 여인숙으로 옮겨... 응? 지금 뭐라고?』
숙사감의 단추 구멍 같던 찢어진 눈이 위아래로 벌어졌다. 여기서 잠을 자겠다고? 진짜? 정말로? 그리고 두껍고 징그러운 얼굴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무어라 하셨소.』
『식사는 어찌하냐 여쭈었습니다.』
내 호주머니엔 여인숙에 지불한 돈 같은 건 없다. 정 급하면 노숙이라도 하겠지만 깊은 밤 내재원 뜰안에서 찬 이슬을 피할 불을 피우면 진짜 볼만할 거다. 야간 순찰 중이던 병사들이「이거 좋은 걸? 같이 불이나 쬡시다, 형씨.」이럴 리 없으니 방망이질에 곤죽이 되는 걸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의 가장 적절한 판단이라는 건 창고라도 감지덕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식사 같은 건 없소!』
계략이 어긋나자 숙사감은 솟구치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아니, 그럼 날 쫄쫄 굶기겠다는 거냐. 이사실 인심 진짜 박해졌네!
나 또한 화가 치밀어 허리에 손을 얹고 무어라 한 마디 하려던 찰나, 숙사감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내일이 길일이라 칠배례 행사가 잡혔소. 오늘 하루 식사는 없고 마실 물도 제한되고 있으니 그리 아시오. 바빠 죽겠는데 짜증나게... 에잇.』
그리고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