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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종이들을 정리하다 말고 린청이 가만 물어왔다.
『혹시 들었어? 보름 정도 뒤에 무슨 큰 행사가 있나 보던데.』
들은 바가 없었지만 속으로 가만 날짜를 계산하고 납득했다.
바뀐 환경에 그럭저럭 적응을 마치면 그때부터 슬슬 향수병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학부생들은 가족이 그립다고 몸서리치고, 식욕저하와 불면증을 호소하게 된다. 기름진 진수성찬도 집에서 먹던 마른반찬에 비하면 형편없게 느껴지고, 나이든 유모가 안전을 기원하며 손수 꿰매준 호신부에 눈물자국이 번지는 거다.
그래서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고 여러 흥을 돋구기 위하여 이 무렵이면 일종의 문화제를 여는게 이사실의 관습.
일명, 사무월 축제다.
『단체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데. 자기네들끼리 모여 안무를 연습한다며 시끄럽게 굴더라고.』
그래봤자 그런 방면으로 흥미가 전혀 없는 린청은 번잡하고 성가시다며 불평했다.
다행히 칠배례 의식과 달리 강제성은 없는지라 일찌감치 나는 빼달라고 하고 빠져나온 눈치다.
것보다 쓸데없는 선민의식을 가진 그들이 사친으로 온 우리 같은 변방인에게 노래를 불러봐라, 나와서 춤을 춰봐라 이럴 리가 없으니 우리는 그냥 편하게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박수나 치면 된다.

소년은 환한 보름달을 구경하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고향에서도 비슷한 걸 하기는 했는데. 해가 지면 어른들이 코가 비뚫어지게 술을 마시곤 했지.』
『술? 그건 아닐텐데.』
나는 빙긋 웃으며 린청을 따라 필기구를 정리하며 어질러진 탁상을 치웠다.
『사무월 축제는 원래 아름다운 소년이나 천하제일의 미소녀를 뽑는 행사야. 매년 했던게 아니라 8년에 한 번 열려서 8년 축제라고도 했지. 일등으로 뽑히면 머리에 화관이 씌워져 모두에게 인사를 받으며 마을 한 바퀴를 돌게 되. 마을 주변을 따라 빙 돈다는 행위에는 요괴나 악령의 침입을 방지한다는 주술적 의미도 함께 있는 거야. 결계를 새로 그리는 중요한 행사를 하면서, 그것도 8년에 한 번 있는 의식인데, 흥청망청 코가 비뚫어지게 술을 마시겠냐. 뭐, 원래의 그 의도와 목적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면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이사실도 그렇다. 여기선 거대 도시 주변을 빙 돈다는게 사실상 무리라서 온갖 꽃으로 치장한 몸으로 황제 앞에서 인사를 드리는 걸로 끝이 난다. 마을을「제대로 죽지 못한 것」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원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미동을 내세워 재주와 미를 겨룬다는 겉핡기만 남았다.

『천하제일의 미소녀를 뽑는 행사라고? 쳇. 어쩐지 팔뚝이 간지러워지는군... 언젠가 사촌누이가 뽑힌 적이 있지.』
『휘사 님이?』
나는 경사가 진 자갈투성이 산길에서 엄청나게 굽이 높은 신을 신고 발랄하게 움직이던 소녀를 떠올렸다. 어떻게 저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땋을 수 있을까 감탄했던 색 밝은 머리카락도 생각났다. 화려한 색의 나비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회상에 젖고 있는데 녀석이 불만을 표현했다.
『나는 린청이고, 녀석은 높여 불러 휘사 님이냐. 그거 기분 나빠!』
『그래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구두 굽으로 찍어 남의 뒷통수에 구멍을 내고도 남을 분이라서 - 라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우리 둘은 동시에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주변머리로는 그녀를 감히 휘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거 아냐? 여인들 숙사에 방이 하나 남았는데 서로 옷방으로 쓰겠다며 은밀히 다툼이 있었다고 하더군.』
린청 님, 그 방은 원래 제가 쓸 방이었사옵니다.
다리가 푹푹 빠지는 진흙뻘밭이 되어버린 내 심정도 모르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계속 얘기했다.
『희망자 중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 그 방을 쓰도록 하자고 결정했다가 항의가 나왔나봐. 그래서 다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방을 차지하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내 사촌누이가 벌떡 손을 들고 나서서 운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를 보자고 건의를 한 거야. 그리고는 뭘 하자고 했는지 알아? 꽃꽂이나 수예실력을 겨뤄보자 했음 내가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지도 않지.』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나조차 그 소문을 들었다. 휘사 님이 제안한 건 정좌 자세로 오래 버티기였다.
그 정도야 별 거 아니잖아 쉽게 생각하기 쉽지만.
앞에 잔칫상을 차려놓고. 그것도 상다리 뽀샤지게 차려놓고. 튀긴 닭과 염소젓탕, 구은 도미, 송이버섯과 어란과 같은 산해진미를 잔뜩 올려두고. 군침을 꼴딱꼴딱 삼켜가며 - 그것도 나중에 귀부인이 될 여자애들이 - 누가 오래 식탐을 참을 수 있을지를 겨루자고 했단다.
그림을 상상하자 나는 그 즉시 뿜었다.
『으이그, 이기기라도 했음 화도 안 나지.』
휘사 님은 3등을 차지했고, 결국 옷방 쟁취에 실패했다. 진짜지 여자애들은 무섭다. 아, 나도 여자애지만.
『그런 녀석이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흥! 다들 눈이 어떻게 된 게지.』
『하지만 휘사 님은 분명 눈에 띄는 미인이고...』
『믿었던 너마저 눈이 삐었냐.』
『그게 아니라 네 평가가 야박한 거야, 린청. 만약 휘사 님이 미인대회에 나가면 분명...』

여기까지 말하는데 린청이 갑자기 내 입에 손가락을 대며 급히 쉿, 소리를 냈다.
『왜?』
신이 나서 잡담을 떠들던 여운이 남아 나는 계속해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린청은 헷갈린다며 가만히 천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만 낮추었다.
『있잖아,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 지붕 위로 새가 날아다닐까?』
『올빼미라면 가능하겠지. 무슨 수상한 소리라도 들었어?』
『꼭 그런 건 아닌데... 모르겠어. 어쩐지 몸무게가 엄청 가벼운 사람이 저 위를 빠르게 걷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가만히 일어나 구석에서 기다랗게 생긴 도구를 가져와 천장을 두 번 쿵쿵 찍었다.
『사람이 저 위를 왜 돌아다니겠어. 그럴 리 없잖아, 린청.』
내 주장에 화답하듯 지붕에서 푸드득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소년의 굳었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뭐야, 저 위로 새둥지라도 있는 거야?』
『직접 보진 않았지만 뭐, 그와 비슷한 거겠지.』

실은 전혀 비슷하지도 않았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순번을 바꿔가며 내가 사는 창고 지붕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아마도 잃어버렸던 내 왼쪽 신발을 가져와준「그것」과 주기적으로 교대라도 하는 눈치였다. 녀석들은 숨도 쉬지 않았고, 일절 기척이라는 걸 내지 않았다. 냄새도, 체온도, 심지어 형체조차 없는 주제에 존재감은 의외로 뚜렷해서 나는 창고로 돌아올 적마다 지붕 위를 쳐다보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날 이대로 내버려둬, 소리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늘 올려다보고 싶은 걸 꾹 참아가며 문손잡이를 돌리곤 했다. 내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쳐다보면 더 소란스러워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날짜가 흐르자 나는 견디다 못해 그것을「」라고 여기기로 결심했고, 밖에서 봉처럼 생긴 긴 막대를 가져와 쥐를 쫓듯 천장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처럼 대놓고 왔다갔다 걷는 일은 아예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람.」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어 거기에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린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약을 놓아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할지도. 여러모로 불편한 동거 중이라네.』
나는 호들갑스러운 동작으로 막대기를 들었다 놓았다 해보이며 연극조로 허리를 구부려 절을 했다.

숙소로 돌아가고자 건물 밖을 나서면서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지붕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당연히 눈으로 보이는 건 없었지만 의아심이 들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걸까, 아니면 감이 좋은 것일까, 작은 자갈을 주워들더니 성가신 까마귀를 내쫓는 요령으로 그걸 지붕 위로 던졌다.
하지 말라는 의미로 린청의 소매를 끌어당겼지만 그는 다시 적당한 돌을 골라 주워 손에 쥐었다.
『안즈, 네 눈에는 보이는게 없어?』
『없어.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절대로 없어.』
제법 단호하게 -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없다 말했지만 듣지 않고 돌을 던졌다.

더 강하게 말려야 했던 걸지도.
숙소로 돌아가는 소년의 등 뒤로 기분 나쁜 검은 아지랑이가 따라붙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03 09:44 2015/07/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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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 아니구나! 변방국 출신이라고 하나 엄연히 신분 높은 귀족의 자제인데 거세를 하고 자신을 보좌하는 내관이 되라 했다고?!』
화를 내며 거세를 거-거-거-거-거세로 발음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다 할 수 없고.
나는 지긋이 실눈을 뜨고 공책의 한 부분을 지적했다.
『린청, 그 단어는 태양이지 캐양이 아니야. 틀리게 적었어. 그 옆의 문장은「산골짝의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이고. 아니, 것보다 교과지문이 왜 이따위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거절은 확실하게 잘 했고?』

요즘 린청은 내가 머무는 창고로 와서 숙제를 곧잘 했다. 일단 손을 봐주겠다며 줄줄 서서 덤벼드는 귀찮은 녀석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고, 그리고 동대륙 표준어를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내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뼈대 굵은 무가(武家)에서 자라난 소년은 아무래도 외국 문물에 대한 공부엔 소홀했던지 어머니, 아버지, 산과 바다 따위의 기본적인 단어조차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보다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병법을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서 가본 적도 없는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데 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 자체가 컸다.
『바다를 건너갈 것도 아닌데. 젠장.』
뾰로통한 표정으로「캐」라고 적은 부분에 가위표를 그리고 다시 태양이라고 제대로 고쳐서 적었다.
『하긴... 린청은 멀미를 심하게 하니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건 무리.』
『누가 멀미를 한다는 거야! 련 가의 장남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멀미를 한 적이 없어.』
『하지만 예전에 내가 봤을 적엔...』
『그건 소화불량.』
강하게 주장하며 이번엔 사과가 그려진 그림조각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젠장맞을, 사과를 사과라 부르지도 못하고... 이걸 동대륙 사람들은 뭐라고 하지?』

항해술이 놀랍도록 발달하면서 대륙간 교역이 점진적으로 활발해지고 있는 중이다. 무역에 눈을 뜨면서 상인들은 일찌감치 동대륙 언어를 배웠고, 세금을 걷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 다음 순서로 세관원들이 동대륙 언어를 배워야 했다. 지금은 귀족들도 앞 다투어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린청 입장에선 초급 동대륙 언어 강좌가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이라서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악마가 떨어뜨린 더러운 발톱이라도 되는 양 사과 그림을 움켜쥐고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심지어 교양을 위해 악기도 배워야 한다는 거야. 차라리 활쏘기를 배우라고 할 것이지.』
『그렇군.』
『어이. 남의 집에서 불났다는 투로 시큰둥하게 말할 때가 아니라고?』
나는 난처함을 감추고자 목덜미를 문질렀다. 린청과 달리 나는 악기 연주에 그다지 두려움이 없는 쪽이다. 예전에도 다섯줄 아현을 곧잘 연주했으니 조금만 연습하면 예전과 비슷한 실력 정도는 나올 거라 생각한다. 다만 곤란한 건 수중에 없는 악기를 장에 나가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건데... 마침 내가 쓴 협박편지가 본국에 도착할 즈음이라 조만간 그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거다.
가만히 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속달로 가면 이십일 정도. 왕복으로 한 달 열흘.
펄펄 뛰며 마당으로 벼루를 집어던질 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좋은 소리를 낼 악기를 상상했다. 아현을 얻으면 제일 먼저 린청 앞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볼 작정이다. 악보가 없어도 음률은 여지껏 외우고 있으니 손가락만 풀어지면 그럭저럭 괜찮은 연주를 해보일 수 있을 터다.
『듣고 있어? 사내인데 악기를 배워야 한다니까?』
『괜찮사옵니다. 그야 저는 린청 님과 다르게 교양이 샘솟는 종자라서요. 거기 단어 또 틀렸다.』
소년은 이를 갈아대며 다위라고 쓴 걸 바위라고 고쳐 적었다.

공책에 코를 박은 상태에서 린청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너, 내가 아까부터 물어보잖아. 거절은 확실하게 했어?』
『응? 무슨 거절.』
『거세를 하고 내관이 되라는 제안을 들었다며.』
이번에는 거-거-거-거-거세로 발음하지 않고 깔끔하게 딱딱 끊어 거세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로 태어난 내가 있지도 않은 고환을 떼어내고 내관이 되는 건 애초부터 무리여서 이쪽에서 승낙을 하고 자시고 이전에 불가능한 이야기다.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어.』
린청은 고럼 고렇지, 이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 그럴수록 딱 잘라서 거절해야 한다니까.』
모르겠다. 평민의 아이였다면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을지도. 허나 여관이 되어 궁궐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다지 근무조건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월급은 그럭저럭 받겠으나... 대신 휴가가 일절 없다. 말 그대로 죽을 때가 되어야만 퇴직을 허락받고 들 것에 실려 밖으로 나올 수 있는데 난 그런 건 딱 질색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례를 치르러 나갈 수가 없다며 몰래 울던 지밀상궁을 봐서 안다. 평생을 안에 갇혀서... 아이고, 끔찍스러워라.

빌린 교과서를 다른 종이에 베껴 쓰기 위해 탁상에 필기구를 펼치고 먹을 가는데 린청이 또 질문했다.
『저... 있잖아. 그런데 제안을 거절하니까 상대방 반응은 어떻든?』
제정신이 아니라는 둥,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는 둥, 욕을 하긴 했어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내심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렸던지 그의 표정이 퍽이나 좋지 않았다. 사실 신분 높은 자가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고, 그걸 단칼에 거절하는 일은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웃는 낯으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마쳤음에도 나중에 화근이 미치기도 한다. 외동딸을 첩으로 달라고 하여 부드럽게 거절했더니 모반을 꾸몄다 모함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는 제법 흔하다.
『그 자손이라는 남자, 성격도 보통은 넘는 것 같던데.』
『분명 보통 성격이 아니지. 그래도 일단 화를 내지는 않았고...』
대신 뜬금없게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는 거기에 대한 답을 강요했다.

질문. 길도 변변찮은 외진 곳으로 다 쓰러져가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주변으로는 인가도 없어 낮이나 밤이나 그 주변에서 사람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곳이라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 여름 더위를 피하고자「나는」해가 질 무렵 사당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힘들게 걸어 도착을 하고보니 노을이 질 무렵이었고, 바람 하나 없어 오히려 땀이 흘렀다.
괜한 헛걸음을 하였구나 실망하여 사당 앞에서 바로 돌아 나오려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바스락 기척이 들리면서 목덜미로 바람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소년은 고민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음... 그건... 아마도 들개겠지.』
『사람 목덜미에 바람이 닿았는데? 나타난게 개라면 높이가 안 맞지.』
『그럼 강도인가.』
『주변에 인가 자체가 없는데 노상강도짓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령?』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냥 장면을 연상하고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답하면 되는 문제다.
『들개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며, 귀신도 아닐 거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안즈.』
『착각.』
『응?』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실제와 다르게 느끼거나 자각함. 착각.』
『에이, 그게 뭐야...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

여기서 중요한 건 내 대답이 아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내 콧잔등을 때리며 자손은 이리 말했다.
틀려, 꼬맹아. 흐흐흐. 네 뒤에 서있을 그건 바로 나야.

린청의 안색이 변했다.
『그거... 어쩐지... 자기 제안을 거절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가? 내가 봤을 적엔 웃느라 정신없던데.』
어쨌든 떼어낼 불알 같은 건 내 몸에 안 달렸다.
먹을 다 간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빌린 책을 베껴 적기를 시작했다.
대륙 공론의회란, 제의와 그 심의를 위한 회의체로 그 목적과 권한은 독립적이다. 이사실에서는 종교기구라기 보다는 정치기구에 더 가까운데 왜냐하면 황제와 그 권속들이 적룡신의 강력한 치세를 받기 때문으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상황에서 다수의 귀족들과 제후들이 연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共和)와는 다른 것으로... 붓은 빠르게 움직이며 빈 공간을 채워나갔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유아 어 뤼스이 일라브리즈 캄?』
『같이 저녁 식사를 하시죠.』
『바란 데 이스 플르 디너.』
『짜증나.』
『강데 잇.』
『아니, 내가 짜증난다고. 어우, 모조리 다 때려치고 싶다.』
옆에서 린청이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Posted by 미야

2015/07/01 15:50 2015/07/0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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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7/01 19:0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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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눈에 띄지 않게. 얌전히. 존재감 없도록. 사고치지 않고. 기타등등.
아침마다 정해진 구호를 외쳐가며 각별히 행동을 조심한 탓에 주변 인식도 그럭저럭 바뀌기 시작했다. 외진 창고에서 빈대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거야 변함이 없었지만「사고뭉치」로서의 등급은 하락을 계속해 삼주 가량의 시간이 흐르자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은 채 복도를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허벅지가 땅에 끌릴 정도로 비대한 몸이었다가 체중 조절에 성공하여 정상 체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쪼는 듯한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늘진 곳으로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으면 아무도 내가 그곳에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저승대부가 나오는 창고에서 청소를 한게 좋은 경험이었던 거에요.』
숙사감대부는 대단히 만족스런 눈치였다.
『어쩐지 린청 님은 역효과가 난 듯하지만.』
당지 없이 길게 풀어헤친 머리로 곳곳을 돌아다닌게 화근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모양을 한 이사실의 아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형상을 한 그를 보고 낄낄거리며 웃느라 바빴다. 하필이면 그게 또 머리카락에 대한 놀림이라서 린청도 사정 봐주지 않고 꼭지가 돌아버렸다. 결국 매일같이 주먹질이 오고갔는데 그것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입장이라 평판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쓸데없는 도전의식을 불러 일으켜 상급생까지 손을 봐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판국이라 조만간 사달이 날 상황이었다.
『이쪽은 얌전해져서 그나마 다행이지.』
칭찬을 받으니 속이 불편해지려 했다. 따지고 보면 다 내가 원흉 아닌가.
『아무튼 앞으로도 잘 해나가리라 믿어요, 안즈 님.』
여기에 격려까지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어쨌거나 하품이 나올 것만 같은 지루한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인생사, 내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날 가만두지 않는 인간이 있으니 문제다.
『여어~ 도토리.』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뺨에서 경련이 일어나려 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억지로 참고 뒤돌아 얌전히 예를 갖추었더니 신경질을 부린다.
『그거 참 지루한 인사법일세. 답지 않게 평범하잖아.』
진짜지 이해를 못 하겠다. 성인이 된 황족의 남자가 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느냔 말이다. 내가 가진 보따리 속엔 황금처럼 비싼 물건은 안 들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 같은 것도 없고, 내 엉덩이엔 꼬리도 안 달렸고, 이마엔 뿔도 안 돋았다. 그런데도 일부러 찌르고 건드리면서「재밌는 반응을 보여봐」이러고 있으니 진짜 감당이 안 된다.
나는 어중간한 미소를 지으며 비굴할 정도로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그냥 제 가던 길 가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보기와 달리 바쁜 사람이에요.
그래봤자 자손은 손가락을 까딱거려 이리 가까이 오라고 명령했다.
아... 진짜 엮이기 싫은데.

『발칙한 녀석,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기냐.』
이쪽에서 좀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자 그 또한 다소의 불쾌감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 맘대로 되는 일도 아닌데다가 지금 그의 복장이 평복이 아닌 것도 영향이 컸다. 그는 당장에라도 말 위에 올라타 전장으로 떠나도 되는 정식 군장 차림이었고, 그리고 혼자도 아니었다. 붉은색의 갑주를 걸친 사내가 뒤로 세 명이나 서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들이 얼음으로 깎아 만든 것처럼 냉기가 솔솔 풍겼다. 여기서 궁금한 건 저 차가움이 나 때문이냐 하는 거였는데... 셋 중 가장자리에 선 남자를 바라보니 마누라를 겁탈한 파락호를 앞에 두고 있다는 식으로 적개심까지 드러낸게 제법 알쏭달쏭하였다.
『어디를 보고 있누? 꼬맹아. 나는 이쪽에 있어.』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며 자손이 다소 성가신 얼굴로 일침을 놓았다.
나는 다시 손바닥을 마주비비며「그러게나 말입니다」엉뚱하게 대꾸하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처럼 기계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눈 하나는 여전히 뒷 배경으로 선 남자들을, 다른 눈으로는 자손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사팔뜨기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알이 쏘는 듯 아파와 결국 눈꺼풀을 비비고 시선의 초점을 조정해야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저를 불러 세우셨잖습니까. 용건이 있으신게 아니옵니까?』
『아, 그거.』
깜빡했다며 자손이 둥그런 뭔가를 내밀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내려다보니 그 정체는 잘 익은 복숭아였다. 아니, 그래서요. 이걸로 뭘 어쩌라고요. 나는 당황하여 얼어붙었다.
황족의 남성이 변방국에서 온 어린아이에게 손수 복숭아를 하사하시었다 - 라는 줄거리는 어딘지 모르게 함정이 있을 법해서 순진하게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과일을 받기가 두려웠다. 그렇다면 뒤로 다른 속셈이 있다고 가정을 해봐야 할 터인데 내가 받은 건 비밀 교지도 아니고 일반 복숭아다.
『...... 잘 익었네요.』
『창리궁 마마에게 인사드리고 나오는 길에 먹음직스럽게 생겼기에 내 하나 따왔다.』
그러니까 맛있어 보여서 하나 챙겼는데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손에 들고만 있었다는 거? 결국 나더러 기미를 보라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손의 안색을 읽으려 노력했다. 허나 글러먹었다. 내 재주로는 저 사내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무리였다. 아... 정말이지. 답답할 따름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군장 차림새의 사내 셋은 왜 아까부터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거냐곳.

『그럼, 실례하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한 입 베어 물고 잘 씹었다. 달콤한 육즙이 상등품 이상이었다. 입안을 후리는 상큼함에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잘 참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소인, 맛을 보니 독은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이제 안심하고 드시옵소서.』
하여 나름 최대한 공손하게 복숭아를 도로 바쳤더니 이 인간 반응 봐라.
『와하하하하~! 하하, 아하하하!』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배를 쥐고 웃음을 터뜨리는게 아닌가.

『기특하다. 네 녀석의 엉뚱함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원하신게 이게 아, 아닙니까?』
『멀쩡하게 생겨서 말은 왜 더듬누. 아니다. 잘 하였다. 넙죽 받아먹지 않고 나를 위해 기미를 보다니. 다른 놈들에게 따라 배우라 강요하고 싶을 지경이야. 그래, 맛을 보니 독은 없다고?』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옛말에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글쎄요, 일단 혀가 얼얼하다거나 손끝이 저리지는 않는데요.』
『흐음... 독에 대해 잘 아느냐?』
『그렇게까지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무취에 무색, 무향의 독이 있다는 건 모르겠네?』
『에?』
『섭취하고 보름 뒤에야 증상이 나타나는 독도 있는데.』
『에?』
『심지어 사내를 고자로 만드는 독도 있단다.』
『에?』
『나야 여러 가지 독에 면역이 워낙에 잘되어 있어서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너는 아닐텐데. 아이고, 불쌍해서 이를 어쩌나. 우리 다람쥐, 복숭아를 덥썩 베어물고 그만 고자가 되어버렸네.』
『뭐라고요?!』
『괜찮다. 남자로서의 기능을 잃으면 정궁으로 들어와 내 밑에서 일하는 내관이 되렴.』

아마도 농담이었을 것이다. 듣는 순간 소름이 돋은 걸 봐선 농담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뺨을 꾹꾹 누르더니 단 세 입 만에 복숭아를 씨만 빼고 전부 먹어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5/06/29 14:16 2015/06/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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