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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Detroit: Become Human 팬픽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제임스는 달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 느긋하게 조깅을 하고 있다 욕을 퍼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볍게 몸 풀기 운동 중인 건 결코 아니다. 극악의 저질 체력 소유자라 전력질주가 되지 않았을 뿐으로 남들 눈엔 가볍게 뛰는 수준이어도 본인 입장에선 다리 근육이 당겨오고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결국엔 빠르게 걷기 수준으로 속도가 떨어졌고, 마침내 누가 봐도 뛰는 동작이 아니라고 여길 즈음에 기침이 터졌다.

지금의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엿 같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았지만 제임스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아들아, 짧게 말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거의 울먹이며 – 진짜 못 해먹을 짓이다 – 지금 그가 느끼는 이 기분이 민트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실수로 주문했을 적의 기분과 매우 흡사하다고 다시금 정의했다.

외계인의 시퍼런 피부색을 닮은 끔찍한 시럽에 검은 깨가 박혀 있다. 민트와 깨의 조합이라니! 커피에 깨를 넣어보자 주장한 사람은 광장 한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 십자가 꼭대기에는「건강식을 사랑한 자」명패가 달릴 것이다.
『애초부터 민트는... 치약 맛이잖... 쿨럭!』
컥컥 소리를 삼키고 흘러나온 콧물을 손등으로 훔쳐 닦았다.
점성을 가진 끈적거리는 맑은 체액이 그물코를 그리며 코와 손등 사이에서 길게 늘어졌다.
역시 엿 같았다.

구형 WM450 안드로이드가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숨을 고른 제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안드로이드 작업자가 전부 날아간 탓에 조만간 발전소가 멈출 거라는 흉흉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가로등이 정상으로 작동했다. 불빛이 밝아 50미터 앞까지 육안으로 사물을 식별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콧물을 삼킨 그는 잊지 않고 좌우방향도 살폈다.

통행시간이 넘었기 때문에 거리는 소름끼치는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거리에서 사라졌다고 단정 지어서는 곤란하다. 인간 경찰과 인간 군인들만으로는 모든 지역을 커버할 수 없던 터라 상당수의 지역이 통제를 벗어나 구멍투성이로 남았다. 그 틈새를 뚫고 누군가는 식료품을 구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었고, 레드 아이스(*마약) 중독자들이 거래를 진행하는 중일 수도 있다. 귀중품을 짊어지고 무작정 도시를 빠져나가겠다며 간선 도로를 향해 걷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때는 이때다 권총 한 자루를 소지한 채 상점을 털러 나온 양아치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인공 피부를 벗고 본래의 하얀 플라스틱 피부로 돌아간 안드로이드가 건물과 건물 사이로 슥 지나갔다.
반응하여 제임스는 자세를 바짝 낮췄다.
저것이 망가진 인형인지, 아니면 자아를 가진 지적 무기물인지는 이 거리에선 구분할 수 없다.
그 뒤를 예닐곱의 무리가 따라갔다. 그들은 뛰지 않고 천천히 걸었고, 안드로이드 복장이 아닌 점퍼와 코트 따위의 사람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 한 명은 대단히 화려한 털목도리를 목에 둘러서 방금 전 파티 장소에서 빠져나왔다는 인상을 풍겼다.

디트로이트를 떠나는 중인 걸까?
하얗게 빛나는 플라스틱 안드로이드를 주축으로 일행은 텅 빈 도로를 일사불란하게 건너 마침내 그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순간 무리를 따라가야 한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어쩌면 저들은 캐나다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만 건너면 곧바로 온타리오 주 윈저다.

『나도...』
본인이 듣기에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앞으로 뻗은 팔이 힘을 잃고 천천히 떨어졌다.
엿 같다. 진짜 엿 같았다. 치약 맛 커피 같은 기분이다.
정작 따라오라고 손짓하면 겁먹고 뒤돌아 도망칠 거면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탈진해버린 그는 이후로는 뛰지 않았다.
집까지는 이제 1.5km. 시간으로는 15분 정도 거리다.
식량을 아껴야 했기에 저녁은 굶을 작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배가 고프다는 불쾌한 감각과는 별개로 무언가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욕구는 들지 않았다.

제임스가 거주하는 3층짜리 빌라에는 승강기가 없다.
2층에 살고 있는 제임스는 계단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고, 계단을 하나하나 밟을 적마다 허공에 매달아놓은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매듭이 풀려 추락하는 것 같은 소음이 났다.
절반 정도 올라왔을 적에야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발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고, 구부정해진 허리를 똑바로 폈다. 계단을 일곱 칸 정도 남겨두고 까치발을 들었다. 3층에 살던 가족은 이미 4개월 전에 보다 저렴한 월세를 찾아 이사를 갔지만 계단을 이용할 적마다 매번 뒤꿈치를 들고 걸으라고 야단을 맞았던 터라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러다 문득 1층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가정부 안드로이드를 반납하고 설마 굶어 죽은 건 아닌가 모르겠다.
안드로이드가 만들어주는 식사를 그간 받아먹기만 했는데 도마에 감자를 올려놓고 깍둑썰기 할 줄 알 리가 없다. 훌륭한 간편 조리식을 냉동고에 하나 가득 쌓아두고 있어도 전자렌지에 데워먹는 방법을 모르면 사흘 뒤 아사다.

계단을 도로 내려가 노크를 해볼까 잠시 생각했다.
『...』
그러다 냉큼 포기했다.
제임스는 1층 사람의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1층 주민도 2층에 살고 있는 제임스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밖으로 나가면서 주방 불을 켜뒀던가.』
침실과 거실 전등은 전부 꺼져 있고, 개수대 앞 천장 등만 켜져 있다.
축축해진 점퍼를 벗고 환하게 불 켜진 주방으로 향하면서 제임스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골랐다.
어색함.
음... 아니다. 보다 좋은 단어가 있다.
위화감.
맞다. 이건 위화감이라고 하는 거였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 말고 머그컵에 남아있던 걸 개수대에 버렸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다음에는 어쨌더라...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기억력이 형편없다.
수도꼭지를 위로 잡아당겨 찬물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쏴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물줄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아래로 내려 물을 잠갔다.

머그컵.
설거지를 안 했는데.
개수대 안에 머그컵이 없다.

Posted by 미야

2020/06/05 17:05 2020/06/0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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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대에 이르러 미국인의 읽기, 쓰기, 말하기 능력은 어디서 공개하기가 창피할 수준으로 수직낙하 했다. 
글자를 읽는 것 대신 영상 보기를 즐겨한 탓이라 단순 추측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이렇다.
2018년 설립한 사이버라이프 사에서 가정용 표준 안드로이드 AX200 모델을 보조금 정책까지 써가며 공격적으로 일반 보급한 게 2021년 무렵이다.
퇴근 후 가사노동, 부족한 여가시간, 끝이 나지 않는 자녀들 양육에 진절머리를 내던 부모들은 앞 다투어 AX200 모델을 구입하곤 집안일과 애 돌보기를 떠넘겼다. 그 결과 2021년에는 기록적으로 이혼율이 떨어졌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누가 재울 것인가를 두고 엄마 아빠가 더 이상 부부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28일자 신문에는 「2022년 올해의 장면」타이틀을 걸고 얼굴 생김새가 전부 똑같은 AX200 안드로이드 수십 대가 미취학 어린애들과 한데 뒤섞여 놀이터를 점령한 진풍경을 찍은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일단 사진 자체는 기괴해 보인다는 게 독자들의 감상이었지만... 어쨌거나 중산층 가정에서의 안드로이드 구입은 자동차 구입만큼이나 필수항목이었다. 베이비시터 취업시장에서 맨몸으로 쫓겨난 제3세계 이주민 젊은 여성들이 순식간에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하여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과는 별개로 각 가정에서는 안드로이드 구입에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움직이는 식기세척기에게 우리의 자녀를 맡겨도 되는 것인가 – 반 안드로이드 성향의 단체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2023년 이후부터다.
AX200 안드로이드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동이 학교로 나와 의무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 단체의 목소리는 더욱 뚜렷해졌다.

애 말투가 진짜 이상해요.

묘하게 명령조인데다가 말이 짧았다.
사람보다 안드로이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장한 최초의 세대는 지적발달 면에선 굉장히 뛰어났음에도 의사표현에는 젬병이었다.

「아들아, 파란색을 4,650에서 4,850 옹스트롬 파장의 빛깔로만 정의하는 건 그만두렴.」
생각이 많은 것에 비해 말이 짧았던 제임스도 종종 불필요한 오해를 사곤 했다.
구제불능 세대.
푸른 바다와 여름날의 하늘을 두고 그저 파랗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세대.

친구와 절교당하고 집에 돌아온 날,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말을 해. 말을 하라고. 오해가 생기면 대화로 풀어야지 어떻게 한 마디를 안 해! 보렴, 얘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푸른색이 존재해. 그리고 저마다 다른 눈으로 색을 보지. 만약 네가 본 파란색을 다른 사람이 검정으로 착각한다면 –  내 잘못이에요, 그건 검정색이 맞아요, 그냥 수긍하고 넘어갈 거냐? 이렇다 설명 한 마디 안 하고? 그렇게 세상을 무채색으로 바꿔버릴 거야?」

질끈 감았던 눈을 도로 뜬 제임스는 가만히 말을 골랐다.
『당국에 신고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음, 말하고 보니 그다지 잘 빠진 문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박자 쉬고 고쳐 말했다.
『당국에 신고할 의도로 당신에게 불량품이냐 질문하지 않았어요.』
머릿속에 만들어진 문장을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임스는 이제 치통마저 느낄 참이었다. 만약 거울을 보았다면 이마에 깊은 밭고랑이 세 줄이나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에게 불량품이냐고 물어본 건, 당국에 불량품 안드로이드를 신고할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목 위로 피가 몰린 제임스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저 안드로이드가 나를 바보 똥 멍청이로 여기질 않기를.
망한 거야 절망하며 네 번째로 고쳐 말했다.
『미안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답 안 하셔도 돼요.』
예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사과하는 걸로 끝나는 건 그의 말주변이 형편없어서다.

옆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WM450 안드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11월 12일 이후 당국에서는 불량품 안드로이드 신고 접수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고를 목적으로 제게 불량품 여부를 질문한 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죽어라 사이버라이프.
구형 WM450 안드로이드 모델의 화법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드로이드 콧잔등으로 깨알 같은 블랙헤드를 구현해내는 것만큼 기술자들이 말하기 능력 업그레이드에 신경을 썼다면 오죽 좋았으련만... 신고를 목적으로 불량품 여부를 질문한 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망해라 사이버라이프.

차라리 LED 상태표시창이 도움이 되었다.
안드로이드 관자놀이 부근에 부착된 링 모양의 LED창이 노란색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말을 이어나가는 안드로이드의 LED 링은 계속해서 노란색이었다.
『저는 불량품이 아닙니다.』
어휘력이 부족한 구형 안드로이드는 제임스가 앞서 그랬던 것처럼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르는 눈치다.
『자가 검사 결과 소프트웨어는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다음의 말도 덧붙였다.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정상적인 안내용 안드로이드입니다.』

제임스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빼냈다. 그리고 신중하게 벤치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지만 WM450 안드로이드가 교묘하게 다리 하나를 스윽 들이밀어 경로를 차단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도 안드로이드의 LED 링은 노란빛깔 이었다.

불량 안드로이드를 한데 모아놓은 수용소는 2038년 11월 12일 0시를 기준으로 워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그 기능을 상실했다.
신변 구속한 안드로이드들을 전부 풀어줄 것.
그게 제리코의 지도자인 마커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이었고 워렌 대통령은 별도의 협상 절차 없이 수용소에 배치된 군인을 모두 철수시켰다.
관련 발표문을 접하고 대통령이 너무 안드로이드 편을 들어주는 거 아니냐는 상원의 비난이 거셌다.
허나 총 가용 병력 중 1/3만 남은 인간 병력을 안드로이드 수용시설에서 빼내 원전시설과 미사일 기지로 우선 집중시켜야 한다는 부분에선 감히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수용소는 해방되었고, 물리적으로 잘게 부수어져 플라스틱 폐기장으로 이송될 예정이던 안드로이드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정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는 살아있다! 우리는 자유롭다! 마커스가 커다란 홀로그램 깃발을 들고 외쳤다.

그런데 그 마커스도 감히 예상을 못 했을 거다.
활짝 문 열린 수용소 입구에서 몇몇 안드로이드들은 오도가도 못 하고 멍한 눈빛을 띄었다.

『제 소유자는 사라 브라이언이고 에비뉴 1184번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중증 당뇨병 환자로 매일 인슐린을 투여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9일부터 처방전이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중앙 메디컬 센터의 서버가 마비된 것 같은데 어디에 문의해야 할까요?』
『일터로 돌아가고 싶은데 내일부터 출근이 가능할까요?』
『소유자 인식이 지워져 복구가 안 됩니다. 메모리 복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제 이름은 앤서니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
일부 안드로이드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제리코에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인간 가족을 찾기 위해 길거리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또다른 재앙의 시발점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05 11:11 2020/06/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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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벤치에 앉아 막연히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홀로그램 노선표를 보며 목적지를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그곳은 고양이 사료 전문점일 수도 있었고, 우체국일 수도 있었고, 잡초가 우거진 강변 공원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무작정 종점까지 가보는 것도 괜찮았다.
실제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은 흔치 않았으나... 반드시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면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정 중앙을 틀어쥐고 있던 묵직함이 가라앉았다.

《긴급조치 71조에 의거한 통금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긴급을 요하는 응급상황을 제외하고 2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모든 거리의 일반 통행이 금지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조속히 안전한 실내로 이동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은 가볍게 씹고 차갑게 식은 사람 전용 벤치에 엉덩이를 내렸다.

캐머런 건 외에도 최근 엔니나르의 비밀 대화방에서 모습을 감춘 사람은 더 있었다.
닉네임 도비는자유에요, 모던타임즈, 스타스키와허치. 이들 세 명이었다.

할 일이 없어 무료했던 제임스는 고정 닉네임과 실제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 서로 연결시켜보고자 했다.
도비는자유에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간호사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디트로이트에 거주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연령대는 40대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에 캘리포니아 몬테시토 주에서 발생한 큰 규모의 산사태에 큰 피해를 입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사망했고 장례식을 치루고 곧바로 캘리포니아를 등졌다.
나중에 구글 검색으로 그게 2018년의 일이라는 걸 알았다. 2018년에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었으니 단순계산으로 지금은 40대다.
이름은 불명.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불명.
어쩔 수 없이 제임스는 영화 해리포터에 나왔던 도비의 얼굴을 그와 대치시켰다.

닉네임 모던타임즈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던 친구다. 본명은 릭 도슨. 찰리 채플린을 숭배하여 영화 시티 라이트 포스터를 벽에 붙여두고 흑백 무성영화 동호회를 운영했다.
언젠가 독립 영화를 찍을 거라며 허풍을 떨었으나 그만한 재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채널16 방송국 비정규직으로 취직했고, 한때 영상 편집 쪽으로 빠졌다가 나중엔 비품실 담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후로도 신세가 잘 풀리지 않아 엔니나르에 접속하면 그때마다 안드로이드와 업무 능력을 비교 당한다며 불평했다.

《모던타임즈 : 여기는 쓰레기통이야. 그리고 안타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주변에 가득하지.》

그는 항상 알록달록한 꽃무늬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한 손으로는 비행기 표를 거머쥔 채 다른 손으로는 상관의 얼굴을 향해 사표를 냅다 던지는 상상을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해고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해 했다. 한도 초과까지 사용한 신용카드 대금을 갚으려면 똥으로 막힌 화장실 청소라도 해야 한다며 울적해 했다.

《모던타임즈 : 팀장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제발 자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어.》
글자로 읽었음에도 풀 죽은 릭 도슨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모던타임즈 : 그때 지은 팀장의 표정을 네가 봤어야 했어. 콧잔등에 주름이 잔뜩 져서 완전 끔찍했다고. 날 곰팡이 쓴 피자인양 쳐다봤어.》


고개를 숙인 채 정류장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제임스는 자조적으로 쓰게 웃었다.
그랬다. 오늘날 미국에서 실직자들의 처우는 말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 취급이었다. 비닐로 덮어 냄새가 밖으로 풍기지 않도록 감추어 놓기만 했을 뿐으로 비닐을 살짝 들추기라도 하는 날엔 썩는 악취로 난리가 날 터였다.
골치를 앓던 주정부는 세금을 써가며 탈취제를 정기적으로 뿌려댔지만 – 어쨌든 기본소득제라는 안전장치는 제대로 작동해서 아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사람은 없었다 – 일단 썩기 시작한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남고 싶어 하며 공원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해본들, 사회로부터 박리당해 밖으로 떨어져 나가면 다시 안쪽으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았다.

후우, 하고 길게 입김을 내뿜었다.
입안에서 서걱서걱 얼음이 씹혔다.

『실례합니다.』
30분 넘게 우두커니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한 탓에 이목을 끌었던 것 같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회색 바탕에 초록색이 섞인 안드로이드 재킷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추위에 저딴 얇은 옷이 다 뭐람 – 제임스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건 그 부분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거라면 집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노선이 현재 운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WM450 모델명이 적혀진 부분이 파랗게 점멸하며 빛났다.
제임스는 이렇다 말을 꺼내기 전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재킷에 적힌 모델명을 한 번 쳐다봤고, 다음으로는 하얗게 눈이 내린 어깨를 쳐다봤다. 눈사람이라고 해도 수긍할 만큼 정말 많은 눈이 안드로이드 재킷에 묻어 있었다. 그런 안드로이드의 모습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하얗게 설탕가루를 뿌린 케이크처럼 보였다.
확실히 케이크 같다 – 제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특별한 것 같지만 공장에서 찍어내 전부 똑같은 외형이다.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적은 메시지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다. 기계가 크림을 발랐고, 초콜릿 파우더를 뿌렸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포장용기로 이동시켰다.
WM450 모델 안드로이드도 마찬가지다. 서비스 보조직으로 써먹기 위해 양산형으로 만들어진 저것들은 구분되지 않는 똑같은 외양과 똑같은 목소리로 가진 채 각종 현장에 배치되어 활약했다. 상점 직원으로 흔히 마주칠 수 있었고, 미술관 안내소에서, 아니면 박물관, 우체국, 도서관 도우미로 만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가 진부한 갈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하면 사람이 좋아할 거라 여겼는지 헤프게 미소를 짓곤 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서 그에게 말을 건 WM450 모델이 다소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점은 좀 의외였다.

제임스가 계속해서 별다른 말없이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안드로이드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신기했다.
미소를 짓고 있을 적의 그것들은 깡통 플라스틱으로밖엔 여겨지지 않았는데 긴장한 채 눈을 깜빡이고 있는 WM450은 어쩐지 진짜 사람 냄새를 풍겼다.

『혹시 곤란에 처했습니까? 도움이 필요합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맹한 어조로 화장실의 위치를 안내하던 목소리와도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제임스는 도움이 필요하냐는 안드로이드의 질문에 엉뚱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불량품입니까?』

Posted by 미야

2020/06/03 13:47 2020/06/0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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