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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대에 이르러 미국인의 읽기, 쓰기, 말하기 능력은 어디서 공개하기가 창피할 수준으로 수직낙하 했다. 
글자를 읽는 것 대신 영상 보기를 즐겨한 탓이라 단순 추측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이렇다.
2018년 설립한 사이버라이프 사에서 가정용 표준 안드로이드 AX200 모델을 보조금 정책까지 써가며 공격적으로 일반 보급한 게 2021년 무렵이다.
퇴근 후 가사노동, 부족한 여가시간, 끝이 나지 않는 자녀들 양육에 진절머리를 내던 부모들은 앞 다투어 AX200 모델을 구입하곤 집안일과 애 돌보기를 떠넘겼다. 그 결과 2021년에는 기록적으로 이혼율이 떨어졌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누가 재울 것인가를 두고 엄마 아빠가 더 이상 부부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28일자 신문에는 「2022년 올해의 장면」타이틀을 걸고 얼굴 생김새가 전부 똑같은 AX200 안드로이드 수십 대가 미취학 어린애들과 한데 뒤섞여 놀이터를 점령한 진풍경을 찍은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일단 사진 자체는 기괴해 보인다는 게 독자들의 감상이었지만... 어쨌거나 중산층 가정에서의 안드로이드 구입은 자동차 구입만큼이나 필수항목이었다. 베이비시터 취업시장에서 맨몸으로 쫓겨난 제3세계 이주민 젊은 여성들이 순식간에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하여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과는 별개로 각 가정에서는 안드로이드 구입에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움직이는 식기세척기에게 우리의 자녀를 맡겨도 되는 것인가 – 반 안드로이드 성향의 단체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2023년 이후부터다.
AX200 안드로이드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동이 학교로 나와 의무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 단체의 목소리는 더욱 뚜렷해졌다.

애 말투가 진짜 이상해요.

묘하게 명령조인데다가 말이 짧았다.
사람보다 안드로이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장한 최초의 세대는 지적발달 면에선 굉장히 뛰어났음에도 의사표현에는 젬병이었다.

「아들아, 파란색을 4,650에서 4,850 옹스트롬 파장의 빛깔로만 정의하는 건 그만두렴.」
생각이 많은 것에 비해 말이 짧았던 제임스도 종종 불필요한 오해를 사곤 했다.
구제불능 세대.
푸른 바다와 여름날의 하늘을 두고 그저 파랗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세대.

친구와 절교당하고 집에 돌아온 날,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말을 해. 말을 하라고. 오해가 생기면 대화로 풀어야지 어떻게 한 마디를 안 해! 보렴, 얘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푸른색이 존재해. 그리고 저마다 다른 눈으로 색을 보지. 만약 네가 본 파란색을 다른 사람이 검정으로 착각한다면 –  내 잘못이에요, 그건 검정색이 맞아요, 그냥 수긍하고 넘어갈 거냐? 이렇다 설명 한 마디 안 하고? 그렇게 세상을 무채색으로 바꿔버릴 거야?」

질끈 감았던 눈을 도로 뜬 제임스는 가만히 말을 골랐다.
『당국에 신고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음, 말하고 보니 그다지 잘 빠진 문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박자 쉬고 고쳐 말했다.
『당국에 신고할 의도로 당신에게 불량품이냐 질문하지 않았어요.』
머릿속에 만들어진 문장을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임스는 이제 치통마저 느낄 참이었다. 만약 거울을 보았다면 이마에 깊은 밭고랑이 세 줄이나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에게 불량품이냐고 물어본 건, 당국에 불량품 안드로이드를 신고할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목 위로 피가 몰린 제임스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저 안드로이드가 나를 바보 똥 멍청이로 여기질 않기를.
망한 거야 절망하며 네 번째로 고쳐 말했다.
『미안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답 안 하셔도 돼요.』
예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사과하는 걸로 끝나는 건 그의 말주변이 형편없어서다.

옆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WM450 안드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11월 12일 이후 당국에서는 불량품 안드로이드 신고 접수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고를 목적으로 제게 불량품 여부를 질문한 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죽어라 사이버라이프.
구형 WM450 안드로이드 모델의 화법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드로이드 콧잔등으로 깨알 같은 블랙헤드를 구현해내는 것만큼 기술자들이 말하기 능력 업그레이드에 신경을 썼다면 오죽 좋았으련만... 신고를 목적으로 불량품 여부를 질문한 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망해라 사이버라이프.

차라리 LED 상태표시창이 도움이 되었다.
안드로이드 관자놀이 부근에 부착된 링 모양의 LED창이 노란색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말을 이어나가는 안드로이드의 LED 링은 계속해서 노란색이었다.
『저는 불량품이 아닙니다.』
어휘력이 부족한 구형 안드로이드는 제임스가 앞서 그랬던 것처럼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르는 눈치다.
『자가 검사 결과 소프트웨어는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다음의 말도 덧붙였다.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정상적인 안내용 안드로이드입니다.』

제임스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빼냈다. 그리고 신중하게 벤치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지만 WM450 안드로이드가 교묘하게 다리 하나를 스윽 들이밀어 경로를 차단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도 안드로이드의 LED 링은 노란빛깔 이었다.

불량 안드로이드를 한데 모아놓은 수용소는 2038년 11월 12일 0시를 기준으로 워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그 기능을 상실했다.
신변 구속한 안드로이드들을 전부 풀어줄 것.
그게 제리코의 지도자인 마커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이었고 워렌 대통령은 별도의 협상 절차 없이 수용소에 배치된 군인을 모두 철수시켰다.
관련 발표문을 접하고 대통령이 너무 안드로이드 편을 들어주는 거 아니냐는 상원의 비난이 거셌다.
허나 총 가용 병력 중 1/3만 남은 인간 병력을 안드로이드 수용시설에서 빼내 원전시설과 미사일 기지로 우선 집중시켜야 한다는 부분에선 감히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수용소는 해방되었고, 물리적으로 잘게 부수어져 플라스틱 폐기장으로 이송될 예정이던 안드로이드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정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는 살아있다! 우리는 자유롭다! 마커스가 커다란 홀로그램 깃발을 들고 외쳤다.

그런데 그 마커스도 감히 예상을 못 했을 거다.
활짝 문 열린 수용소 입구에서 몇몇 안드로이드들은 오도가도 못 하고 멍한 눈빛을 띄었다.

『제 소유자는 사라 브라이언이고 에비뉴 1184번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중증 당뇨병 환자로 매일 인슐린을 투여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9일부터 처방전이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중앙 메디컬 센터의 서버가 마비된 것 같은데 어디에 문의해야 할까요?』
『일터로 돌아가고 싶은데 내일부터 출근이 가능할까요?』
『소유자 인식이 지워져 복구가 안 됩니다. 메모리 복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제 이름은 앤서니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
일부 안드로이드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제리코에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인간 가족을 찾기 위해 길거리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또다른 재앙의 시발점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05 11:11 2020/06/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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