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Detroit: Become Human 팬픽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제임스는 달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 느긋하게 조깅을 하고 있다 욕을 퍼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볍게 몸 풀기 운동 중인 건 결코 아니다. 극악의 저질 체력 소유자라 전력질주가 되지 않았을 뿐으로 남들 눈엔 가볍게 뛰는 수준이어도 본인 입장에선 다리 근육이 당겨오고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결국엔 빠르게 걷기 수준으로 속도가 떨어졌고, 마침내 누가 봐도 뛰는 동작이 아니라고 여길 즈음에 기침이 터졌다.

지금의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엿 같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할 것 같았지만 제임스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아들아, 짧게 말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거의 울먹이며 – 진짜 못 해먹을 짓이다 – 지금 그가 느끼는 이 기분이 민트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실수로 주문했을 적의 기분과 매우 흡사하다고 다시금 정의했다.

외계인의 시퍼런 피부색을 닮은 끔찍한 시럽에 검은 깨가 박혀 있다. 민트와 깨의 조합이라니! 커피에 깨를 넣어보자 주장한 사람은 광장 한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 십자가 꼭대기에는「건강식을 사랑한 자」명패가 달릴 것이다.
『애초부터 민트는... 치약 맛이잖... 쿨럭!』
컥컥 소리를 삼키고 흘러나온 콧물을 손등으로 훔쳐 닦았다.
점성을 가진 끈적거리는 맑은 체액이 그물코를 그리며 코와 손등 사이에서 길게 늘어졌다.
역시 엿 같았다.

구형 WM450 안드로이드가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숨을 고른 제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안드로이드 작업자가 전부 날아간 탓에 조만간 발전소가 멈출 거라는 흉흉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가로등이 정상으로 작동했다. 불빛이 밝아 50미터 앞까지 육안으로 사물을 식별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콧물을 삼킨 그는 잊지 않고 좌우방향도 살폈다.

통행시간이 넘었기 때문에 거리는 소름끼치는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거리에서 사라졌다고 단정 지어서는 곤란하다. 인간 경찰과 인간 군인들만으로는 모든 지역을 커버할 수 없던 터라 상당수의 지역이 통제를 벗어나 구멍투성이로 남았다. 그 틈새를 뚫고 누군가는 식료품을 구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었고, 레드 아이스(*마약) 중독자들이 거래를 진행하는 중일 수도 있다. 귀중품을 짊어지고 무작정 도시를 빠져나가겠다며 간선 도로를 향해 걷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때는 이때다 권총 한 자루를 소지한 채 상점을 털러 나온 양아치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인공 피부를 벗고 본래의 하얀 플라스틱 피부로 돌아간 안드로이드가 건물과 건물 사이로 슥 지나갔다.
반응하여 제임스는 자세를 바짝 낮췄다.
저것이 망가진 인형인지, 아니면 자아를 가진 지적 무기물인지는 이 거리에선 구분할 수 없다.
그 뒤를 예닐곱의 무리가 따라갔다. 그들은 뛰지 않고 천천히 걸었고, 안드로이드 복장이 아닌 점퍼와 코트 따위의 사람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 한 명은 대단히 화려한 털목도리를 목에 둘러서 방금 전 파티 장소에서 빠져나왔다는 인상을 풍겼다.

디트로이트를 떠나는 중인 걸까?
하얗게 빛나는 플라스틱 안드로이드를 주축으로 일행은 텅 빈 도로를 일사불란하게 건너 마침내 그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순간 무리를 따라가야 한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어쩌면 저들은 캐나다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만 건너면 곧바로 온타리오 주 윈저다.

『나도...』
본인이 듣기에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앞으로 뻗은 팔이 힘을 잃고 천천히 떨어졌다.
엿 같다. 진짜 엿 같았다. 치약 맛 커피 같은 기분이다.
정작 따라오라고 손짓하면 겁먹고 뒤돌아 도망칠 거면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탈진해버린 그는 이후로는 뛰지 않았다.
집까지는 이제 1.5km. 시간으로는 15분 정도 거리다.
식량을 아껴야 했기에 저녁은 굶을 작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배가 고프다는 불쾌한 감각과는 별개로 무언가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욕구는 들지 않았다.

제임스가 거주하는 3층짜리 빌라에는 승강기가 없다.
2층에 살고 있는 제임스는 계단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고, 계단을 하나하나 밟을 적마다 허공에 매달아놓은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매듭이 풀려 추락하는 것 같은 소음이 났다.
절반 정도 올라왔을 적에야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발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고, 구부정해진 허리를 똑바로 폈다. 계단을 일곱 칸 정도 남겨두고 까치발을 들었다. 3층에 살던 가족은 이미 4개월 전에 보다 저렴한 월세를 찾아 이사를 갔지만 계단을 이용할 적마다 매번 뒤꿈치를 들고 걸으라고 야단을 맞았던 터라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러다 문득 1층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가정부 안드로이드를 반납하고 설마 굶어 죽은 건 아닌가 모르겠다.
안드로이드가 만들어주는 식사를 그간 받아먹기만 했는데 도마에 감자를 올려놓고 깍둑썰기 할 줄 알 리가 없다. 훌륭한 간편 조리식을 냉동고에 하나 가득 쌓아두고 있어도 전자렌지에 데워먹는 방법을 모르면 사흘 뒤 아사다.

계단을 도로 내려가 노크를 해볼까 잠시 생각했다.
『...』
그러다 냉큼 포기했다.
제임스는 1층 사람의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1층 주민도 2층에 살고 있는 제임스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밖으로 나가면서 주방 불을 켜뒀던가.』
침실과 거실 전등은 전부 꺼져 있고, 개수대 앞 천장 등만 켜져 있다.
축축해진 점퍼를 벗고 환하게 불 켜진 주방으로 향하면서 제임스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골랐다.
어색함.
음... 아니다. 보다 좋은 단어가 있다.
위화감.
맞다. 이건 위화감이라고 하는 거였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 말고 머그컵에 남아있던 걸 개수대에 버렸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 다음에는 어쨌더라...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기억력이 형편없다.
수도꼭지를 위로 잡아당겨 찬물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쏴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물줄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아래로 내려 물을 잠갔다.

머그컵.
설거지를 안 했는데.
개수대 안에 머그컵이 없다.

Posted by 미야

2020/06/05 17:05 2020/06/0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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