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소년이 햇빛에 닿은 광견병 환자처럼 덤벼들자, 이사실 굴지의 명문 이운가(家)의 열 한 번째 아들 숙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로 도망쳤...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느냐만. 이 남자의 정체가 사실은 만성피로에 찌든 관리가 아니고 자객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반응 속도는 남달라서 눈을 깜빡이고 보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쪽은 공격을 당한 숙사감대부가 아니라 린청이었다. 『천 년은 빨라!』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의 남자 형제들은 무려 스물네 명에 이르러 고위관직자의 자제 어쩌고를 떠나 형제들끼리 어릴 적부터 경쟁과 시기질투를 일삼아 엄청나게 살벌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뒷간에서 바지를 내리려는데 화살이 날아드는 일도 일반사, 덕분에 기습적 공격을 회피하고 상대방의 어깨 부위의 급소를 눌러 순식간에 제압하는 일 정도는 식은 떡먹기가 되어 무예를 배운 적이 없는 몸으로도 주먹으로 얻어맞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나, 뭐라나.
『어, 어떻게 한... 우욱.』 아무리 기를 써도 책상에 박은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나 보다. 팔로 무게를 지탱하려 해보았지만 팔뚝 근육만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킬 뿐, 노력해서 겨우 얇은 책 두께만큼만 상체를 세울 수 있었다. 언뜻 보이는 소년의 목덜미로 파랗게 핏줄이 곤두섰다. 『숙사감대부! 나에게 뭔 짓을 저지른 거요?!』 『별 거 아니오, 린청 님. 귀신산발한 채 달려든 죄 값이라 생각하소. 일각 정도 뒤에 마비가 풀릴 겁니다. 것보다 제가 과로사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제 나흘밖엔 안 지났는데 잊어버리신 겁니까?』 『잊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죽게 생긴 건 바로 나지, 당신이 아니잖아!』 『말씀드렸잖아요. 마비는 곧 풀려요. 것보다... 사내 머리 꼬라지가 그게 뭡니까. 단정치 않게.』 긴 머리를 지적당하자 린청은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저리 가! 내 머리를 만지면 반드시 죽인다.』 손을 대어 직접 만져보려던 숙희는 얼른 팔을 올려 만세 자세를 취했다. 죽이겠다는 협박이 마음에 걸려서라기보다는 그렇게나 싫어하는데 일부러 만질 까닭이 없어서였다. 으르렁거리는 개는 쓰다듬지 않고 그 성질이 한풀 꺾이게끔 내버려두는 법이다. 대신 사내는 짐짓 나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안즈 님은 어떠셨나요?』 대답은 린청이 해주었다. 『저 녀석, 기절했었어. 전부 당신 책임이야!』 『그래요? 수업 중인 교당 안으로 냄새나는 말똥을 들고 오신 분이 의외로 담이 작군요.』 보일락 말락 빙긋 웃던 그는 팡 소리가 나도록 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격려인 것도 같고, 야단을 치는 것도 같고, 달라붙은 귀신을 내쫓기 위한 행동인 것도 같고... 아무튼 가뜩이나 얇은 등가죽이 매운 고춧가루로 문지른 것처럼 화끈거렸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그 유명한 유령대부를 직접 보니.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말썽은 피우지 말아야겠다, 착하게 살자, 싸움질 하지 말자, 이런 신박한 결심이 막 솟구치지 않던가요.』 악령을 내세워 계행을 실천하는 교육자는 이 세상천지에 당신밖에 없을 거다. 이 빌어먹을 인간아. 그래봤자 비난하는 이쪽의 눈초리는 개의치 않아하는 눈치다. 둔한게 아니라 뻔뻔했다. 『뭐, 괜찮아요. 외모가 무섭게 생긴 것과는 달리 실제로 해코지를 하는 분은 아니라서. 그냥 겁을 줘서 벌 받는 아이들을 밖으로 내쫓기만 하지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데 방해를 받으면 싫은 거겠지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한 번 봤던 사람은 잘 기억해뒀다가 같은 얼굴이 두 번 연속해서 계단을 올라오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진짜로 화를 낸다고 그럽디다. 다음번엔 곱게 안 끝나요.』 곱게 안 끝나면 어쩔건데. 그 유령의 정체가 바로 난데! 나는 격심한 두통을 느꼈다.
『숙희 님도 그 유령을 직접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 저는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잘도 그랬겠다.』 『못 믿는 눈친데 진짜입니다. 그래도 제 일곱 번째, 아홉 번째 형님께서 벌을 받고 그곳으로 올라가신 적이 있지요. 우리 어렸을 시절엔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없을까, 서로 즐겁게 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소문에는 거기 다락으로 수상쩍은 유골함이 있다고도 했고. 그래서 형님들은 유령을 피해 도망치며 기를 쓰고 4층까지 올라가 보셨다고 했지요. 막상 올라가보니 하품이 나올 지경으로 별 것 없었다고... 그러면서 왜 창문으로 뛰어내려 종아리뼈를 분질러먹었나 몰라. 떠올리니 그립군요.』 『진짜로 유골함이 그곳에 있습니까?』 허리를 으쓱으쓱 흔들던 숙사감대부는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없어요.』 더 놀라운 발언도 했다.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저요.』 실제로 가본 적도 없다면서 그렇게까지 장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거든요. 법전에는 사람의 유골을 취급함에 있어 반드시 매장하라 되어 있습니다. 고인의 유골을 상자나 병에 넣어 건물의 벽이나 바닥에 숨기거나 하면 허락받지 않은 주술을 행한 죄와 고인에 대한 모욕죄를 물어 편격형으로 다스립니다. 이때 쓰는 채찍엔 구리로 만든 심지가 박혀 있지요.』 편격이라 함은 사람을 기둥에 묶은 뒤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을 일컫는다.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라 착각하기 쉬우나 때리는 도구가 살을 후벼 파는 종류라서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형 집행이 끝난 뒤 독이 올라 죽는 사람도 다수다. 이를 방지하고자 사흘 간격으로 열 대씩 나눠서 때리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벌이 무서워 아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얘긴데. 그런 이치라면 이 세상에 강간, 살인, 폭행이 여전히 만연하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두 팔을 마주 걸어 팔짱을 낀 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걸 반대로 돌려 해석하면 누군가 허락받지 않은 주술을 행하기 위해, 혹은 고인을 모욕하기 위해 유해의 일부를 그 건물 어딘가에 숨겨뒀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이사실 수도 루은에서, 그것도 황제폐하와 신룡이 코앞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잘도 그딴 짓을 저지르겠군요. 정말이라면 목숨이 여덟 개라도 부족할텐데?』 이런 종류의 대화가 불쾌하다는 걸 숨기지도 않은 그는 얼른 열쇠나 돌려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열쇠따위 알게 뭐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적손 본인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그 즉시 숙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종류로 바뀌었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군.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은 거냐, 지리가 안즈.』 집안 이름까지 포함하여 내 이름을 부른 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얘기다. 정말로 죽게 된다는 경고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열쇠는 린청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요. 꺼내 가지세요」라고 얌전히 말한 뒤 무릎을 구부려 예를 올렸다.
그날 저녁, 본국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낼 장문의 편지를 썼다. 평범한 문안 인사부터 시작하여 편지의 중간까지는 단순한 내용으로 덮었다. 하지만 안녕하셨어요, 용건만으로 붓을 잡은 것이 결코 아니었기에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주의하여 문구를 골랐다. 여행길에서 나를 죽이려고 시도한 미리노와 타평의 이름도 언급했다.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지「그들이 나에게 해준 여러 고마운 말들이 참 많았는데 잊으려 해도 내 힘으로는 잊혀지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아버지에게 꼭 전하고 싶다」식으로 빙빙 돌려 적었다. 저지른 죄가 있는 아버지는 이 말을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결론 부분에 이르러선 옷을 빌려 입는 어려운 처지라는 걸 강조했다. 수업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편안하게 자식 시집보냈다 생각하라는 말도 썼다. 「우아하게 협박하는 것도 쉽지는 않군.」 쓰던 붓을 입술과 코 사이에 끼어 넣고 엉덩이를 긁었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당신이 날 죽이려 한 걸 폭로할 수도 있으니 입막음 돈을 부치세요, 날 시집보내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배가 덜 아플 거에요. 돈을 받으면 얌전히 꺼져줄게요 - 라는 것이 줄거리였다.
15세가 되면 성인이 되어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내 결정에 따라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작정이다. 대신 다른 나에게 가서 준시를 치룰 생각이다. 여성도 관리가 될 수 있는 나라가 몇 있으니 자세히 알아본 뒤 그곳의 말단관리가 되어 편안한 노후를 노려보도록 하자. 5년... 앞으로 5년 남았다.
편지봉투에 보내는 이 이름을 적는데 지붕 위에서 새가 내려앉은 듯한 작은 소리가 났다. 바람에 기왓장이 흔들렸구나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그 기척은 모두 셋... 그들 전부가 사람이 아니었다. 이를 악문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때에는 생각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일이 더 복잡해지고 꼬인다. 5년이다. 5년만 버티자.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주문처럼 반복하여 외웠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잃어버린 왼쪽 신발 한 짝이 깨끗하게 손질된 모습으로 돌아와 문밖에 가만 놓여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6/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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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을 잡힌 채 비틀비틀 끌려갔다. 걷고 있었지만 스스로 인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머리의 절반이 방금 전 충격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두개골은 박살났고 좌뇌의 전부와 뇌량 일부가 소실되었다. 남은 뇌조각도 밖으로 노출되었기에 색이며 냄새가 빠르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충격으로 뽑혀나간 안구는 시신경이 끈 역활을 해줘 턱 아래까지 늘어져 매달렸다가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하나 남은 눈은 눈꺼풀이 뜯겨나가 싫든 좋든 앞을 봐야 했으나 망막에 투영된 사물은 죄다 흐리멍덩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피부는 연기에 그을렸고, 몸 안 장기는 오그라들었고, 인생은 풍비박산. 이것이 몇 번째 맞이하는 죽음이던가. 차근차근 헤아리다 지쳐 금방 포기했다.
『똑바로 걸어. 그러다 넘어진다.』 시체가 되고 나서도 신기하게도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있군. 안 죽었어. 기력이 약한 탓에 잠시 기절했을 뿐이야. 설마, 눈 뜨고 자는 거냐. 안즈!』 그 이름은 생소하다. 내 이름은 안즈가 아닌데. 『자기 이름도 모른댄다. 환장하겠네.』 가볍게 뺨을 톡톡 치고 피부를 꼬집어댔다. 『정신차려! 자꾸 이러면 현선당 앞 못 안에 처박는다? 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린청은 나를 연못 안에 거꾸로 집어던지는 대신 두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물가로 내려가 손을 충분히 적신 후, 물기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가져와 내 이마를 덮어주었다. 차가움도 차가움이지만 거슬리는 물비린내에 저절로 코가 실룩거렸다. 썩어가는 식물 뿌리 냄새와 살아있는 잉어의 비늘 냄새가 뒤섞여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찌는 무더위가 며칠 계속되면서 수량이 줄어 못의 수질이 나빠진 모양이다. 『우어... 구려.』 그래도 싫은 냄새를 맡자 후각과 촉각을 포함해 여러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주변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다. 올해 열 살 계집아이로 고향은 빈사국 남리향 천의. 아버지는 지리가 위복천, 모친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복동생 이름은 리세리, 내가 현재 머무르고 있는 곳은 제국 이사실의 수도 루은, 사친 대상으로 뽑혀 이곳으로 공부하라고 보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먹물이나 붓은 구경도 못한 채 남의 집 마굿간을 청소하고, 귀신 나오는 창고도 청소했다...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도로 폈다.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 입안에서 소금 맛이 났다. 뒷통수를 만져보니 여전히 둥글었고, 신발을 잃어버린 왼발은 발바닥에 상처가 생겨 쓰라리고 아팠다. 발가락을 꼬물거리다 말고 이마를 찌푸렸다. 머리가 박살났을 그 당시에는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이 정도의 피부가 베인 상처엔 콕콕 쑤시는 통증을 느껴야 하다니. 발을 살짝 뒤집어 보니 상처 입은 곳으로 가볍게 피가 베어 나왔다. 편모암의 일종인 암강석을 돌로 깨어 만든 편돌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장식재지만 맨발로 밟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종류다. 내리막길을 정신없이 걸어오면서 아무래도 튀어나온 모서리를 잘못 밟았던 모양으로 뒤꿈치로 길게 붉은 줄이 그어졌다. 가볍게 상처부위를 누르자 핏물이 다시 올라왔다. 따가움은 배가 되었다.
소독도 할 겸 침이라도 발라둘까 하여 손가락을 입에 무는데 린청이 자기 머리카락을 묶은 푸른색의 당지를 풀어 내게 주려 했다. 『이걸 써.』 나는 깜짝 놀랐다. 고급 비단에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금박을 입힌 당지는 그 가격이 매우 비싸다. 상처가 난 발을 묶는 일에 써먹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이라 나는 손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던 물건이다. 비유하자면 모자를 신발로 쓰겠다고 하는 격이라서 나는 직설적으로 거절의 말을 건넸다. 『아서라, 나에겐 갚을 능력 없어.』 『그걸 누가 모른대?』 올려 묶었던 머리를 어깨 아래 길이로 늘어뜨린 소년은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도 내가 한참을 주저하자 차라리 본인이 직접 해주겠다며 허리를 낮추고 자리에 앉았다. 민폐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나에게 잘 대해줘서 그저 미안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부끄럽기도 하여 상처가 난 왼발을 짐짓 뒤로 감추었는데 그 모습에 짜증이 치솟았는지 버럭 대마왕은 도망간 발목을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진짜지 배려하는 것 같으면서도 섬세한 구석은 요만큼도 없는 녀석이다. 덕분에 균형을 잃은 나는 뒤로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수그리고 앉은 린청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남들이 이런 우리를 보면 뭐라고 그럴까. 암만 생각해도 모양이 그다지 보기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발이 참 작군.』 그 비싼 당지를 붕대처럼 사용하여 칭칭 감으면서 린청이 쓸데없는 말 한 마디를 흘렸다. 『꼭 여자아이의 발처럼 생겼다.』 말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걸 얼른 정정했다. 『별 뜻은 없어. 네가 여자 같다는 건 아니고. 어... 그건.』 나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새삼스럽게 깨달음이 와서 우리들의 관계가 남자와 남자아이가 아닌, 남자와 여자아이라는 걸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처럼 그 심장의 고동이 귀여웠겠구나 착각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보다는 몰래 단맛 나는 조청을 핥아먹고 뚜껑을 다시 닫아놓았을 때의 두근거림이었다. 아니면 길고양이 새끼를 방에 숨겨두고 어른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는 심정이었다. 이제 귀까지 열이 올라 화끈거렸고, 죄인이나 다름없는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여자아이인데. 한 살 많은 남자아이에게 맨발을 아무렇게나 보여주고. 반성하도록 하자. 이대로는 큰일 나겠다. 말투도 소녀처럼 조신하게 바꿔야지.
매듭을 꼼꼼하게 묶은 뒤, 이만하면 다 되었다는 신호로 가볍게 툭툭 쳤다. 『문제는 네 발이 작아 내 신발이 너에겐 맞지 않을 거라는 점이지. 남는 걸 한 켤레 주려고 생각했는데.』 『그거 참... 마음을 써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으응?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목소리도 간드러지게 내리깔고.』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갑자기 여자애처럼 말하는 건 영 어색하다. 아니면 입고 있는 옷 탓일까, 색깔부터가 소년다워서 무의식중에 남자 어린이의 말투가 툭툭 튀어나간다. 발은 여자아이의 것이지만 - 글쎄, 이러한 성정체성의 혼란이 보다 깊은 부분으로 그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만... 모르겠다. 것보다 만사 귀찮다. 다시 손목을 잡힌 채 억지 걸음을 강요당하면서 나는 아래로 주저앉으려는 무거운 눈꺼풀을 손등으로 비볐다. 정신적 피로감이 드디어 육체의 피로감으로 성격을 바꾼 듯하다. 두통도 생겼다.
『송주는?』 『네 상태가 좀 이상해지자 북어포를 앞세우고 재빨리 도망쳤어.』 『아이고.』 『어떤 의미에선 크게 출세할 녀석이야. 나는 새삼 녀석의 약삭빠름이 존경스러워졌어.』 돌아보는 린청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화가 치미는 단계를 한참 지난 나머지 그저 헛웃음만 나오게 되었나 보다. 그런데 그게 잘 생긴 미소라서 바보처럼 나도 모르게 헤실거리고 따라 웃고 말았다. 『성공할 거야.』 『성공하겠지.』 『저... 그런데 열쇠는?』 『나더러 반납하라며 던져주고 가던데.』 『진짜 약아빠졌어... 어쩔 수 없군. 그럼 돌아가서 숙희 님 방부터 들려야겠네.』 『물론.』 소년은 이를 드러내며 또 개구지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맹세했다. 『두고 봐, 안즈. 나, 지금 각오를 다지고 있어. 이 열쇠로 숙사감대부의 콧구멍을 뚫어버릴 거야. 기대하라고?』
Posted by 미야
2015/06/2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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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주는 월급은 쥐꼬리고, 닳아 헤어진 관복의 소매를 몇 번이고 수선해서 입는 가난뱅이가 대역죄인... 처음엔 질 나쁜 농담이라 여겼다. 일용할 양식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왕위찬탈, 반역, 모략 이런 걸 궁리한다는 건 사치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나서야 딴 생각을 품는 법이다. 복잡한 권력투쟁이 묘사된 300년 전의 왕실 비화록을 오늘날의 문체로 옮겨 적는 일은 곧잘 했지만 내가 직접 왕을 독살할 계획을 세운 적은 맹세코 없다. 그리고 작년 시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벽은국 왕의 사인은 지병 악화가 원인이지 독살 같은게 아니다. 아니, 것보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모종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치자. 설령 그랬다 쳐도 이사실 제국에서 군대를 보내 왜 나를 직접 처단하려 하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질 것처럼 짙은 회색이던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나는 의자를 발판 삼아 올라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리비단을 덧댄 엄청난 고가품 의자를 끌어다가 발판으로 써먹었다는 건 비밀이다. 어차피 지금은 발도장 찍힌 국보급 의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 정신 나간 미친놈들아~!」 그저 분에 겨워 발악을 해봤을 뿐으로 대답이 돌아올 걸 기대하진 않았다.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와 중앙 계단 방향으로 달음박질하여 달렸다. 사방에서 불과 재의 냄새가 났다. 매캐한 연기가 이미 3층까지 올라오고 있었고, 일종의 굴뚝 역할을 하고 있는 중앙 통로로는 내려가는 것도, 올라가는 일도 쉽지가 않게 생겼다. 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지만 금방 목과 가슴이 답답해졌다. 매워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러다 질식사 하겠구나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시오재 서리!」 살집이 있는 사내가 몸을 야단스럽게 흔들며 뛰어왔다. 얼굴을 두꺼운 천으로 칭칭 감고 있어서 그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뜬금없게도 그는 양팔에 백과전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김으로 만드는 요리 백과전서였고, 하나는 두부로 만드는 요리 백과전서였다. 「콜록콜록... 화재가 번지기 전에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서둘러 대피시켜야 할텐데. 댁은 누구요.」 「젠장맞을! 이 마당에 농담이 나와요?! 접니다, 아평소요. 저 무식한 천벌 받을 놈들이 바깥에서 1층 출입구를 도끼로 부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자칫하면 갇힐 거야. 서둘러 불을 꺼야... 아니다. 이미 늦었나.」 「2층은 불바다에요! 콜록. 불쏘시개를 집어넣은 것처럼 타고 있다고요.」 「이 안에 지금 누구누구가 있나.」 「사리와 진수리는 방금 전까지 봤는데 나머진 모르겠습니다. 아예는 이성을 잃고 3층에서 뛰어내렸고요!」 「맙소사, 이 높이에서?」 「이성을 잃었다니까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연기 때문에 아래가 보이지 않아요.」 「큰일이군. 자네도 사리와 진수리를 찾지 말고 여기서 빨리 나가게.」 「시오재 님은 어쩌시려고요.」 「사람들을... 책들이...」 「아니, 이 양반아!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면 떨어져요!」 잡으려는 손길을 뿌리치고 난간에서 몸을 한껏 내밀어 아래층을 쳐다보았다. 붉은 앙점이 저 아래서부터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중이다. 그것은 찰라의 힘을 다하고 일순간 온기를 잃었다가 나무나 천자락에 들러붙는 순간 밝은 귤색으로 변해 세차게 번져나갔다. 흡사 숯가마의 안쪽을 가늘게 실눈을 뜨고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열기가 미처 뺨이 후끈거렸다.
「저래선 못 내려갑니다. 올라가야 해요!」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엉뚱하게도 서쪽 통로를 향해 뛰어갔다. 틀린 건가. 전부 불타버리는 건가. 내가 모은 책들, 그리고 내가 번역한 수천, 수만 권이... 모조리? 그 와중에 아래층에서 소름끼치는 굉음이 들려왔다. 백병전의 대가인 이사실의 군인들이 쇠로 감은 1층 현관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는 신호다. 비명 소리도 들렸다. 그들이 애꿎은 사람들을 베어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지만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내 재주로는 알 길이 없다. 3층 통로의 거대한 주 출입구를 몸으로 밀어 닫으며 나는 신물을 토했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더라... 분명 내가 뭘 잘못하긴 했을텐데.
검댕이 옮겨 붙은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가며 나는 중앙 서궤가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사리와 진수리는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열린 창문으로 책들을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있었는데 밖에 선 군인들의 머리를 노리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한 권이라도 책을 살려보고자 하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사리가 창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시오재 님.」 「나도 거들겠네.」 모든 책은 소중하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차이는 없다. 나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진수리와 같이 무거운 궤짝을 들어 창가로 옮겼다. 창 앞에 앉은 사리는 궤짝 안의 내용물을 하나 둘 집어 가냘프고 부러질 것 같은 팔로 바깥을 향해 힘껏 던졌다. 대다수는 지난 20여년에 걸쳐 코피 흘려가며 직접 번역한 책들로 평범한 문학작품부터 진귀한 자연과학 도서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제대로 된 사전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벽은국 도서관을 풍족하게 만든 건 나... 진수리가 참지 못하고 엎드려 통곡했다. 주먹으로 바닥도 쳤다. 그는 분했던 것 같다. 「울지 말게.」 「하지만 억울합니다! 원통합니다! 어째서, 왜!」 「미안허이. 나도 왜 이렇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어.」
꽉 닫은 문으로 연기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이 더욱 번지는 듯했다. 열기는 둘째고 수상쩍은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 난 건 아닐테니 건물 기둥이 쓰러지는 충격이 여기까지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사리는 겁에 질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반복해서 외쳤다. 그러더니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원래부터 얌전하고 깜짝 놀라기를 잘하던 아이다. 측은한 마음에 사리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 되었다.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도망가.」 「도망갈 곳이 없어요.」 「포기하면 안 된다. 위층까지 불은 안 번졌을 거야.」 「그냥 여기서 죽을래요.」 「안 돼. 도망쳐. 이건 부서고서리로서의 명령이야.」
살아다오, 사랑스러운 생명들아. 사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은 지나갈 거야. 너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힘 내. 불행은 온전히 내 몫으로 가져가마.
멍한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니 선명한 피의 색, 귤색의 불 찌꺼기들이 꽃잎처럼 휘날렸다. 나는 여전히 책들을 옮기려고 기를 쓰고 있는 진수리의 팔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보게. 사리를 부탁함세.」 「싫습니다. 사리보다는 이 책들이 제겐 더 소중합니다.」 나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네 이놈! 일생일대의 내 부탁을 그딴 식으로 매몰차게 거절할 건가!」 진수리의 눈이 접시처럼 벌어졌다. 「그, 그런게 아니옵고...」 「부탁할게. 이렇게 부탁할테니... 동쪽 계단은 아직 괜찮을 걸세. 자, 방석으로 코와 입을 막도록 하게. 도중에 절대로 멈추지 말고. 뒤돌아봐서도 안 돼.」
그렇다면 시오재 님도 같이 가요. 여기서 도망쳐요. 진수리가 내 팔을 잡았다. 아니다. 이 손은 작아서... 어린아이의 손이다. 그리고 붓을 잡은 손도 아니다. 이토록 작은 주제에 못이 박혀서... 시오재 님. 연기가 가득 찼어요. 이리로 지나갈 수 없어요. 누군가 내 뺨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쳤으면 잇몸까지 얼얼하다. 손을 이리로. 제발 저와 같이. 아아악. 아악. 손을 놓지 마소서. 어디에 있으신가요?! 눈을 떠야 하는데 눈꺼풀이 무겁다. 그게 아니라면... 사방이 어둡고 흐리다.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 흔들려요. 기둥이, 지붕이! 거기서 물러서요! 거기 서있지 마세요! 『안즈!』 번쩍 눈을 뜨자 내 머리를 향해 똑바로 곤두박질하는 거대한 대들보가 보였다.
Posted by 미야
2015/06/23 10:35
2015/06/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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