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서 주는 월급은 쥐꼬리고, 닳아 헤어진 관복의 소매를 몇 번이고 수선해서 입는 가난뱅이가 대역죄인...
처음엔 질 나쁜 농담이라 여겼다. 일용할 양식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왕위찬탈, 반역, 모략 이런 걸 궁리한다는 건 사치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나서야 딴 생각을 품는 법이다. 복잡한 권력투쟁이 묘사된 300년 전의 왕실 비화록을 오늘날의 문체로 옮겨 적는 일은 곧잘 했지만 내가 직접 왕을 독살할 계획을 세운 적은 맹세코 없다. 그리고 작년 시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벽은국 왕의 사인은 지병 악화가 원인이지 독살 같은게 아니다.
아니, 것보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모종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치자. 설령 그랬다 쳐도 이사실 제국에서 군대를 보내 왜 나를 직접 처단하려 하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질 것처럼 짙은 회색이던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나는 의자를 발판 삼아 올라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리비단을 덧댄 엄청난 고가품 의자를 끌어다가 발판으로 써먹었다는 건 비밀이다. 어차피 지금은 발도장 찍힌 국보급 의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 정신 나간 미친놈들아~!」
그저 분에 겨워 발악을 해봤을 뿐으로 대답이 돌아올 걸 기대하진 않았다.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와 중앙 계단 방향으로 달음박질하여 달렸다. 사방에서 불과 재의 냄새가 났다. 매캐한 연기가 이미 3층까지 올라오고 있었고, 일종의 굴뚝 역할을 하고 있는 중앙 통로로는 내려가는 것도, 올라가는 일도 쉽지가 않게 생겼다. 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지만 금방 목과 가슴이 답답해졌다. 매워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러다 질식사 하겠구나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시오재 서리!」
살집이 있는 사내가 몸을 야단스럽게 흔들며 뛰어왔다. 얼굴을 두꺼운 천으로 칭칭 감고 있어서 그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뜬금없게도 그는 양팔에 백과전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김으로 만드는 요리 백과전서였고, 하나는 두부로 만드는 요리 백과전서였다.
「콜록콜록... 화재가 번지기 전에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서둘러 대피시켜야 할텐데. 댁은 누구요.」
「젠장맞을! 이 마당에 농담이 나와요?! 접니다, 아평소요. 저 무식한 천벌 받을 놈들이 바깥에서 1층 출입구를 도끼로 부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자칫하면 갇힐 거야. 서둘러 불을 꺼야... 아니다. 이미 늦었나.」
「2층은 불바다에요! 콜록. 불쏘시개를 집어넣은 것처럼 타고 있다고요.」
「이 안에 지금 누구누구가 있나.」
「사리와 진수리는 방금 전까지 봤는데 나머진 모르겠습니다. 아예는 이성을 잃고 3층에서 뛰어내렸고요!」
「맙소사, 이 높이에서?」
「이성을 잃었다니까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연기 때문에 아래가 보이지 않아요.」
「큰일이군. 자네도 사리와 진수리를 찾지 말고 여기서 빨리 나가게.」
「시오재 님은 어쩌시려고요.」
「사람들을... 책들이...」
「아니, 이 양반아!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면 떨어져요!」
잡으려는 손길을 뿌리치고 난간에서 몸을 한껏 내밀어 아래층을 쳐다보았다. 붉은 앙점이 저 아래서부터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중이다. 그것은 찰라의 힘을 다하고 일순간 온기를 잃었다가 나무나 천자락에 들러붙는 순간 밝은 귤색으로 변해 세차게 번져나갔다. 흡사 숯가마의 안쪽을 가늘게 실눈을 뜨고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열기가 미처 뺨이 후끈거렸다.

「저래선 못 내려갑니다. 올라가야 해요!」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엉뚱하게도 서쪽 통로를 향해 뛰어갔다.
틀린 건가. 전부 불타버리는 건가. 내가 모은 책들, 그리고 내가 번역한 수천, 수만 권이... 모조리?
그 와중에 아래층에서 소름끼치는 굉음이 들려왔다. 백병전의 대가인 이사실의 군인들이 쇠로 감은 1층 현관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는 신호다. 비명 소리도 들렸다. 그들이 애꿎은 사람들을 베어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지만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내 재주로는 알 길이 없다. 3층 통로의 거대한 주 출입구를 몸으로 밀어 닫으며 나는 신물을 토했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더라... 분명 내가 뭘 잘못하긴 했을텐데.

검댕이 옮겨 붙은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가며 나는 중앙 서궤가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사리와 진수리는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열린 창문으로 책들을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있었는데 밖에 선 군인들의 머리를 노리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한 권이라도 책을 살려보고자 하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사리가 창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시오재 님.」
「나도 거들겠네.」
모든 책은 소중하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차이는 없다. 나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진수리와 같이 무거운 궤짝을 들어 창가로 옮겼다. 창 앞에 앉은 사리는 궤짝 안의 내용물을 하나 둘 집어 가냘프고 부러질 것 같은 팔로 바깥을 향해 힘껏 던졌다. 대다수는 지난 20여년에 걸쳐 코피 흘려가며 직접 번역한 책들로 평범한 문학작품부터 진귀한 자연과학 도서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제대로 된 사전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벽은국 도서관을 풍족하게 만든 건 나... 진수리가 참지 못하고 엎드려 통곡했다. 주먹으로 바닥도 쳤다. 그는 분했던 것 같다.
「울지 말게.」
「하지만 억울합니다! 원통합니다! 어째서, 왜!」
「미안허이. 나도 왜 이렇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어.」

꽉 닫은 문으로 연기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이 더욱 번지는 듯했다. 열기는 둘째고 수상쩍은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 난 건 아닐테니 건물 기둥이 쓰러지는 충격이 여기까지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사리는 겁에 질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반복해서 외쳤다. 그러더니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원래부터 얌전하고 깜짝 놀라기를 잘하던 아이다. 측은한 마음에 사리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 되었다.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도망가.」
「도망갈 곳이 없어요.」
「포기하면 안 된다. 위층까지 불은 안 번졌을 거야.」
「그냥 여기서 죽을래요.」
「안 돼. 도망쳐. 이건 부서고서리로서의 명령이야.」

살아다오, 사랑스러운 생명들아.
사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은 지나갈 거야. 너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힘 내. 불행은 온전히 내 몫으로 가져가마.

멍한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니 선명한 피의 색, 귤색의 불 찌꺼기들이 꽃잎처럼 휘날렸다.
나는 여전히 책들을 옮기려고 기를 쓰고 있는 진수리의 팔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보게. 사리를 부탁함세.」
「싫습니다. 사리보다는 이 책들이 제겐 더 소중합니다.」
나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네 이놈! 일생일대의 내 부탁을 그딴 식으로 매몰차게 거절할 건가!」
진수리의 눈이 접시처럼 벌어졌다.
「그, 그런게 아니옵고...」
「부탁할게. 이렇게 부탁할테니... 동쪽 계단은 아직 괜찮을 걸세. 자, 방석으로 코와 입을 막도록 하게. 도중에 절대로 멈추지 말고. 뒤돌아봐서도 안 돼.」

그렇다면 시오재 님도 같이 가요. 여기서 도망쳐요.
진수리가 내 팔을 잡았다.
아니다. 이 손은 작아서... 어린아이의 손이다. 그리고 붓을 잡은 손도 아니다. 이토록 작은 주제에 못이 박혀서...
시오재 님. 연기가 가득 찼어요. 이리로 지나갈 수 없어요.
누군가 내 뺨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쳤으면 잇몸까지 얼얼하다.
손을 이리로. 제발 저와 같이. 아아악. 아악. 손을 놓지 마소서. 어디에 있으신가요?!
눈을 떠야 하는데 눈꺼풀이 무겁다. 그게 아니라면... 사방이 어둡고 흐리다.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 흔들려요. 기둥이, 지붕이! 거기서 물러서요! 거기 서있지 마세요!
『안즈!』
번쩍 눈을 뜨자 내 머리를 향해 똑바로 곤두박질하는 거대한 대들보가 보였다.

Posted by 미야

2015/06/23 10:35 2015/06/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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