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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와 나란히 하교하는 미즈키를 향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해한다. 하나에 선배는 미인이니까. 공주님과 선머슴의 조합은 아무래도 눈에 띈다.
소곤거리며 귓속말을 나누는 이들 중에는 반장 하시모토와 그녀의 단짝 이시즈미도 있었다.
막상 미즈키와 시선이 마주쳤을 적엔 고개를 홱 소리가 나도록 돌려버렸지만...
어쩐지 반장은 속이 불편한 표정이었다. 찡그린 모습이 콜라와 된장 콩볶음 반찬을 같이 먹었을 적과 비슷했다. 아마도 변비로 인한 배변감이 남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미즈키는 짐작했다. 성장의 후폭풍을 맞은 다수의 여중생들이 여드름 이전에 변비라는 복병을 만나 고생을 하고 있다.

모쪼록 내일 아침 화장실에서 좋은 소식과 마주치기를.
상대방이 호응을 해주든 말든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선배와 발맞추어 교문을 나섰다.

너무 기뻐 전봇대를 껴안고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술 취한 주정뱅이 회사원 흉내는 내고 싶지 않았기에 전봇대를 상대로 추태를 부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햄버거 가게 마스코트 인형을 껴안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음 진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울렁증까지 왔다. 젊었던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을 적에 멀미를 일으키고 토를 했다더니, 그 피는 어디로 가지 않았다.

『괜찮니? 스가와라. 안색이 창백한데.』
『스가와라라고 부르지 말고 미즈키라고 이름 불러주세요. 저도 하나에 선배라고 부를게요.』
그 와중에도 챙길 건 챙기고 보는 미즈키였다.

『무리를 시킨 건가 싶어 미안하네. 잡초 뽑는 거, 많이 힘들었어?』
『괜찮아요. 이래 뵈도 근육 많아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청소는 1시간 정도 걸렸다. 담배꽁초나 포장종이 이런 걸 줍지는 않았는데 잡초 파워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귀찮다고 내버려두면 쑥쑥 자라 나중에는 원예용 가위나 낫 같은 도구를 동원해 베어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단다. 날씨가 더워지고 비가 오기 시작하면 누가 일부러 배속시키기라도 한 양 잡초의 성장속도가 눈부시게 빨라져 여름에는 청소부가 아니라 원예부로 업태 변경되는 일도 있다고 했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이라도 지르고 싶다는 유혹도 그래서 생긴다나.
『위험하잖아요.』
『당연히 위험하지. 산불로 번지면 학교 체육관까지 순식간이야.』
그나마 산이 그늘지고 서늘한 편이라 부원 숫자가 없어도 일이 돌아가는 거라고 하나에가 설명했다.

『그렇군요. 청소부에 부원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역시 영화 감상부나 추리소설 클럽처럼 인기가 있을 수는 없겠죠.』
반장 하시모토 리코가 가입한 해리 포터 원서 독해부는 2003년에 출간된 불사조의 기사단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부원이 증가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제일 커다란 부실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쓰지 않는 낡은 음악실을 개조한 장소에 모두 모이면 무려 마흔 명까지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 영어 원서를 소리 내어 읽으면 꼭 불경을 개굴개굴 외우는 모양새가 되었다.
개의치 않고 부원들은 팔까지 휘두르며 마법 스펠링을 합창했다.
익스펙토 페트로눔!

『으... 제발 학교에서 그런 짓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법 주문을 소리 내어 읽다니.』
이이지마 하나에가 50대의 아저씨처럼 허리를 구부리며 진절머리를 냈다.
『선배는 해리 포터 안 좋아하세요?』
눈치껏 짐작하자면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미즈키의 생각에 이이지마의 취향은 해리 포터가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의「인간 실격」쪽이다. 책장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장편소설「설국」도 꽂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 넘기며 히라가나 별도 표기 없이 세로방향으로 한문이 잔뜩 적힌 낡은 책을 집중해서 읽어 내려가지 않을까.
『...... 영화 정도는 봤어.』
『그럼 다음 시리즈가 나오면 같이 보러 가요. 올해 여름방학 시즌에 아즈카반의 죄수가 개봉될 거래요.』
어린애처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면서 미즈키가 약속을 졸라댔다.

이상하게 그러자, 말자,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미즈키는 겨울날 눈 맞은 강아지처럼 한 바퀴 더 빙글 돌았다.
『하나에 선배?』
『젠장. 있잖아, 후배님. 여기까지 와서 도중에 바꾸자고 말하는 건 좀 미안한데, 오늘의 메뉴를 꿀빵에서 카레라이스로 변경하면 안 될까? 갑자기 미친 듯이 카레가 먹고 싶어졌어. 응. 그래. 오늘은 카레다.』
무엇을 봤기에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뜬금없이 하나에가 카레 타령을 했다.

목적지인 오로보로당 가게 앞으로 가쿠란을 입은 남학생 두 명이 서있었다.
두 사람 다 운동하는 사람처럼 키가 굉장히 컸다. 몰라도 180cm는 넘을 터였다.
하지만 배구나 농구선수는 분명 아니다. 왜냐하면 한 명은 머리를 하얗게 탈색한데다 색이 짙은 선글라스를 썼고, 다른 한 명은 어깨에 닿는 길이로 머리카락을 길렀기 때문이다. 교복도 개인취향을 반영해 수선을 한 눈치다. 그러니까 학교 교칙과는 담 쌓고 사는, 질 나쁜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탈색남이 징징거렸다.
『나는 딸기크림 꿀빵이 먹고 싶다고오. 왜 팔지를 않겠다는 거야.』
『손님, 그게... 품절이라서. 팔지 않겠다는 게 아니고.』
진열대 앞에 서있던 아르바이트 점원이 애원하듯 목소리를 떨었다. 두 남학생의 덩치에 완전히 압도당했는지 평소 유창하던 접대멘트는 전부 까먹고 버벅이느라 바빴다. 대학교 3학년이 고등학생에게 쫄았다.
『저쪽 포장박스에 남아 있잖아. 하나, 둘, 셋, 넷, 여섯 개나 남았네.』
『그것은 비매품으로. 죄송하오나. 네. 여섯 개군요.』
오로보로당 주인은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젊어서 고생을 잔뜩 했던 기억 때문인지 부족한 학비를 벌기 위해 가게에 취업한 아르바이트 점원에게 가욋돈을 더 붙여준다는 식의 친절을 자주 베풀곤 했다.
상자에 담아 미리 빼둔 꿀빵 또한 오로보로당 사장이 주는 일종의 선물이다. 집에 돌아가 동생들과 같이 먹으라며 인기가 많아 금방 품절이 되는 종류로 골라 때때로 챙겨주곤 했다.
그러한 속사정을 미즈키가 상세히 꿰고 있는 까닭은 그녀 또한 비매품으로 빼둔 꿀빵에 눈독을 들이고 하나만 달라 졸라댄 적이 있어서다.

『고죠. 너는 비매품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거냐. 상품으로 팔지 않겠다는 뜻이잖아.』
장발남 쪽이 적당히 하라며 한 소리 했다.
『그럼 더 잘됐네. 돈 내고 사지 말고 서비스로 받아가면 되겠다. 그지?』
멋대로였다. 탈색남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우기고 보았다.
『에, 그러니까 저쪽 비매품 딸기크림은 서비스로 전부 주시고. 설탕조림 사과 맛이랑 바나나 화이트치즈 포장해주세요. 열두 개 세트요.』

미즈키가 하나에의 귀에 대고 살짝 귓속말했다.
「못 보던 교복인데 아마 양아치인가 봐요.」

귀가 밝았다. 탈색남이 아앙? 날티 가득한 소리를 내고 이쪽을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뭐긴요. 꿀빵이 참 맛있다고요.』
『양아치라고 하지 않았어?』
『양갱이라고 했는데요.』
목숨은 하나다. 미즈키는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거짓말했다.
『그쪽이 귀가 안 좋은 거예요. 비매품이라는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잖아요.』
『지금 싸우자는 거냐.』
『아뇨. 훈수 두는 건데요. 설탕조림 사과보다 허니 시나몬을 사가요. 그게 더 맛있어요.』

언짢았던 모양이다. 상대방의 기운이 매서워졌다.
『기분 더러워. 도쿄에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짜증나는데 양갱이니 양아치니...』
『그만해, 고죠! 여기서 주력 꺼내지 마. 비술사... 아니, 일반인이잖아. 게다가 중학생이고.』
『저게 어딜 봐서 중학생이야. 똑바로 보라고, 스구루. 초등학생이잖아!』
『교복 입었어.』
『땅에 코가 닿고 있잖아! 불쾌한 초등학생이야!』
미즈키는 참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이라고요! 제 키는 평균이고요. 한여름도 아닌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까 보이는 게 없지!』
『너무 잘 보여서 쓰고 있는 거야, 이 어리석은 중생아.』
『중생의 뜻은 알아? 비매품의 뜻도 몰랐으면서.』
『중간에 생기다 말았다는 거잖아, 꼬마야. 아무렴 이 위대하신 고죠 사토루님이 그것도 모를까보냐.』
허리에 손을 댄 사내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가뜩이나 커다란 자신의 신장을 더욱 크게 보이게 만들었다.
미즈키도 이에 질세라 뒤꿈치를 들어 올렸는데 슬프게도 그래봤자 남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Posted by 미야

2021/03/11 15:42 2021/03/1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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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어어~기부터, 저어어어어~기까지.
사실 어느 정도 규모인지 명확치 않다. 그냥 터무니없게 넓다고 보면 되었다. 까마득히 떨어진 강으로부터 너무 멀어 희게 보이는 산까지가 고쿠로쿠치나와님의 영역이라고 했다.
민속학자이자 괴담소설 작가인 이이지마 리쓰가 먼 친척뻘의 손녀 같은 하나에에게 지명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설명을 해주었는데 발음 곤란한 옛날 이름이다보니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아무튼 지도를 펼쳐보면 센다이 중심부가 아닌, 야마가타 현과 더 가까웠다.

「신사 관계자라면 내막을 더 잘 알 것 같구나. 하지만 말 그대로 내부정보라서 우리 같은 외부인에게 결코 알려주려 하지 않지.」
「일본에는 800만이나 되는 신이 계신다면서 뭔 특급 비밀 취급이래요? 할아버지.」
「특급이니까.」

고쿠로쿠치나와님은 천 년은 족히 묵은 토지 신으로 예로부터 치노후부사야 씨 일족의 숭배를 받았다.
강력한 토지 신을 등에 업고 일족도 몇 백 년에 걸쳐 엄청난 부를 누렸던 모양이다. 번성기에는 일족이 궁궐 같은 집에 살았고, 면장이 굽신거리는 등, 공권력도 감히 손댈 수 없는 위엄이 넘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위풍당당도 권력의 뒷받침이 없음 맛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
군불에 타들어가듯 서서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다 군부로부터 거액의 사기를 당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지역 유지 타이틀도 빼앗기고 기왓장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후 온천개발이나 관광산업 등에 투자하여 나름 재기에 분투하였으나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게 쇼와 18년, 그러니까 서기 1943년 9월 14일이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일처럼 멸문 날짜가 명확하게 남은 건 그 날짜에 당주를 포함하여 무려 여덟 명에 이르는 집안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주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의식불명인 채로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아내는 야산에서 목을 맨 상태로 나중에 발견되었다. 장남은 둔기에 맞아 머리가 깨졌고, 장녀와 차남은 각자 자기들 방에서 목이 부러져 사망했다. 장녀는 거의 목이 잘린 상태여서 거죽 하나만으로 목이 몸통에 붙어 있었다. 유모는 우물에 처박혔다. 밖에서 낳아 데려왔다던 양녀는 유모의 시체 아래쪽에 구겨져 있었는데 유모가 다리부터 떨어진 것과 다르게 양녀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물구나무 선 자세였다. 결혼을 하지 않아 같이 한 집에서 거주하던 당주의 여동생도 9월 14일 사망... 특이하게 이쪽은 오래된 지병 악화로 인한 병사다.

그야말로 긴다이치 탐정의 사건수첩에 등장할 법한 미스테리 사건의 향연이라 세간이 시끄러웠을 법한데 보도통제가 있던 시대인 만큼 신문이나 일간지에 일절 내용이 실리지 않고 묻혔다.
수사도 미진해서 이 끔찍한 학살의 주범은 외부인이 아니고 피 토하고 죽은 당주인 걸로 잠정 결론 났다. 일가족 살해 후 음독자살,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사업 실패에 대한 감정적 동요, 대충 그런 모양새로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피 냄새가 났다.

「누가 범인이었던 거에요?」
「긴다이치 탐정이라면 사망 순서부터 조사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뒤에, 사실과 다른 부분을 하나하나 밝히고, 동기가 무엇인지, 사건을 촉발시킨 원인을 유추하고 범인을 상상해보겠지.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탐정이 아니라서.」
「그래도 뭔가 알고 계시잖아요.」
「짐작 가는 건 있지.」
「그게 뭔데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거... 반드시 기억해두렴, 하나에. 삿된 것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거래를 제시하면 결코 응해선 안 되는 거란다. 이 할아버지가 대학생이었을 적에 팥빵을 다섯 개 주면 낙제를 면하게 해주겠다던 툇마루 요괴가 있었어. 어땠을 거 같니.」
「툇마루 요괴가 대학교 리포트도 쓸 줄 안데요? 어우야, 능력 좋은데?」
「그럴 리가 있겠니. 대학 강사를 자동차로 크게 다치게 해서 그 학기 강좌를 통째로 날려버리더구나. 삿된 것과의 거래라는 건 그런 거야. 인간이 생각하는 범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 버리지.」

언덕길의 끝에서 미즈키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제법 높아!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여요!』

그렇게 스러져 뒤안길로 사라진 치노후부사야 일족의 본가가 있던 자리가 현 카제야마 중학교다.
이이지마 하나에와 스가와라 미즈키가 빗자루니 걸레니 하는 청소도구를 들고 걸어 올라온 산도 원래 치노후부사야 일족의 소유지였다.
소유자가 몇 번 바뀌다가 지금은 시에 매입된 공유지이고, 산의 일부는 잘려져 나와 1979년 카제야마 중학교 부지가 되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의 입구가 학교 체육관 뒷길인 건 그런 까닭에서다.

『선배. 올라왔던 길과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상점가로 빠르게 갈 수 있겠는데요?』
『그건 포기하는 게 좋아, 스가와라. 옻나무 군락을 뛰어넘어야 하거든.』
가파른 외길에 짜증을 느낀 이이지마 하나에가 보다 편한 길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결말은 항히스타민제 연고 처방이었다.
『스가와라는 옻나무가 어떻게 생긴지 알아?』
『전혀요. 그래도 옻이 오르면 밤나무 잎을 끓인 물로 목욕을 하면 좋다는 건 알아요.』
『오. 그래?』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요, 라며 스가와라 미즈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선배,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당은 어디 있어요?』

사당은 제례를 지내는 곳이다. 따라서 법으로 정해진 크기는 없을지 몰라도 예식에 필요한 물건과 성인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미즈키가 보통의 가정집 크기를 가진 일본식 목조 건축물을 상상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건 상식에 의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겁니다.』
『거짓말?!』
『진짭니다.』
하나에가 어색한 동작으로 뺨을 긁었다.
이해합니다. 나도 처음엔 님과 같은 반응이었어요.

천 년이나 묵었다던, 그것도 속된 표현으로 엄청 강려크 했다는 신을 모신 사당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백엽상 크기라는 건 납득이 어렵다.
열어보면 온도계와 습도계가 들어가 있을 것만 같다. 흰색으로 칠이 되어 있으면 누가 뭐래도 저것은 백엽상이다. 크기와 모양새까지 흡사한데 오로지 색만 검정색이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와줬던 스가와라 미즈키가 지금까지 날 속인 거냐 표정을 짓고 이이지마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맹세코 속인 건 없다. 이이지마 하나에가 1학년이었을 적에도 그것은 백엽상처럼 생겨먹었고, 주물 쇠붙이 고리가 달린 양문을 잡아 열면 그 안에는...
『필~통?!!』
주인을 잃어버린 헝겊으로 만든 빨간색 필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거 농담이죠?!』
『질 나쁜 장난처럼 보인다는 건 나도 인정해.』

원래의 신체주물(神體呪物)이 무엇이었는지 하나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부터 지퍼 달린 평범한 빨간색 필통으로 대체되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물건의 낡기로 짐작해보면 몇 년 내의 최근이다.
콧쿠리님으로 섬김을 받았던 과거 학생이 엿 먹어봐라 이러고 장난을 친 건 아닐까.
필통의 색이 빨간색이니 분명 여학생의 짓일 거다. 남자도 정열의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주장하면 반박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이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텅 비었다는 점이다.
짐짓 속눈꺼풀을 열고 사당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색이 사라지고, 음영이 반전되어 무슨 현상한 필름처럼 시야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속눈꺼풀을 열었다고 이런 식으로 사물이 뒤틀려 보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속눈꺼풀은 일곱 살이 되면 대부분 저절로 닫힌다. 극소수만이 나이를 먹은 나중에까지 속눈꺼풀을 열어 사물을 볼 수 있었는데 친척 할아버지 이이지마 리쓰의 말대로라면 능력으로 음화 이미지로 바꾸어 보는 일은 하나에가 유일했다.
「요령이 붙기 전까지는 어색해서 엄청 고생했지.」
검정색의 사당은 구름보다 희게 바뀌었다.
그뿐이었다. 요력이라던가 신력이라던가 하는 종류는 터럭만치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분 좋을 정도로 깔끔했다. It's empty.

『얏호! 청소하자~!! 다 끝나면 먹고 싶은 거 사줄게, 후배님. 라멘 먹을까? 아님 아이스크림?』
빗자루를 움켜쥔 미즈키가 태세를 바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오로보로당의 꿀빵!』
집에서 돼지라고 불리는 건 다 까닭이 있는 거였다.

Posted by 미야

2021/03/10 13:36 2021/03/1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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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왔고 등장인물 또한 오리지널 캐릭터가 거의 전부입니다. 주술회전은 애니 초반부만 감상한 상황이라 원작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이 글의 배경은 2004년으로 고죠 사토루와 게토 스구르는 주술고전 1학년입니다. 주인공 이이지마 하나에는 중학교 2학년, 스가와라 미즈키 및 하시모토 리코는 1학년입니다. 손가락 대마왕님 료멘 스쿠나는 간접적으로 등장할 예정입니다.


혼란된 혼돈속의 혼미한 정신.

2학년인 이이지마 하나에가 1학년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반장이 이성을 잃고 괴성을 질러댔다.
상의 탈의 중 신체 건장한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댄 터라 옆 반에서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렸을 정도다.
『왜 이라 캅니까, 선배! 이러는 거 아닙니다!』
평소의 고급 외제승용차 이미지를 순식간에 말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삑사리가 났다.
분명 표준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빠른 걸음으로 교실 안으로 난입한 이이지마 하나에가 손가락을 쭉 뻗어 반장의 코로 딱밤을 먹였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딱밤이었음에도 상대방은 무릎의 힘이 풀렸는지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다리를 오므릴 힘도 없어 벌려진 스커트 사이로 속옷이 훤히 드러났는데 창피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깊은 산속에서 동면에서 깨어난 곰과 마주쳤다. 숲이 침묵했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전부 사라졌다. 하시모토는 시야가 어두워지고 있다고 착각했다. 여전히 하늘 위로 빛이 있음에도 맹렬하게 땅을 잠식하고 들어오는 저 공포스러운 것의 정체는 어스름이다.

이이지마가 팔짱을 낀 자세로 딱 한 마디만 했다.
『팬티 보인다.』
『히익!』
할 말은 제법 있었다. 솔직히 화도 좀 난 상태였다.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지만 콧쿠리님 모시기는 끝이라고 그렇게 강조를 했으면 들어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귓등으로 들은 척도 안 하고 멋대로 1학년의 콧쿠리님을 모셔?!
앙화는 이제 없노라 (※ 殃禍 지은 죄의 앙갚음으로 받는 온갖 재앙)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
전교 10등 안에 든다는 잘난 머리라면서 그 말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츳, 하고 혀를 찼다.
그렇다고 1학년 후배를 겁먹게 만들어 가랑이를 벌린 채 교실 바닥을 기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어서 곧 표정을 풀고 기운을 갈무리했다.
게다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반장이 이번 일의 주동자인 것도 아니다.
엄연히 따지자면 1학년 2반 전원이 피해자여서 이런 식으로 성을 내봤자 엄한 곳에 화풀이가 될 뿐이었다.

「하아.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정작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이 굴고 있고... 나 혼자서 열 내고 있는 기분이잖아.」
얼쯤하여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쓸어 넘겼다.

어쩐지 이번 1학년의 콧쿠리님은 매우 둔한 성격인 것 같았다.
반 아이들의 따돌림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한 1학년의 콧쿠리님이 야외용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모습은 제법 여러 번 목격되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측은하기 짝이 없건만 당사자인 미즈키는 어째서인지 따끈해진 봄볕을 기분 좋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따분하고 졸린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심지어 발목으로 영 좋지 않은 걸 주렁주렁 매달고도 그늘이 없었다.
체육복을 입고 비뚤 걸음으로 걸으며 천연덕스럽게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미즈키를 보고 그래서 놀랐다.
아, 뭐라더라... 이런 걸. 마이 웨이라고 하던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릴 거라고, 귀신으로 변해 보란 듯이 저주를 내릴 거라 맹세하던 3학년의 콧쿠리님과는 양상이 180도 달랐다.

「발목의 붕대는 어쩌다 그런 거야?」
자판기에서 잘못 나온 우롱차를 핑계로 말을 걸어보았더니 발랄하게 대답했다.
「덜렁거리다 계단에서 굴렀어요. 뛰거나 하면 아직 욱신거리고 아프지만 거의 다 나았어요!」
뱀 한 마리가 송곳니를 박은 채 발목을 칭칭 감고 있는데 금방 낫겠니.
「괜찮아요. 이따~만한 바늘로 주사도 맞았거든요.」
아픈 발목을 앞뒤로 까딱거리며 미즈키가 말했다. 그때마다 피부에 이를 박고 있는 뱀도 마찬가지로 까딱까딱 흔들렸다. 두 눈이 퇴화하고 없는 눈 먼 뱀이었다.

지금도 그 뱀은 스가와라 미즈키의 발목을 물고 늘어져 땅바닥에 꼬리 일부가 닿아 질질 끌리는 중이었다.
불쾌하게도 땅에 끌린 흔적이 꼭 음식물 쓰레기 국물이 흐른 자국을 연상시켰다. 악취가 날 것 같아 코를 쥐어 막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칠 지경이었다.
「얘는 진짜지 어쩌다가 이런 음식물 쓰레기를 달 게 된 거람.」
눈이 퇴화한 뱀이니 분명 통할 거라 여기며 재빨리 발로 지려 밟으려 했다.
얄밉게도 그것의 반응이 빨랐다. 이이지마 하나에가 발로 밟으려는 것과 동시에 삿 하고 뱀이 꼬리를 위로 올려 피했다. 기분 탓일까, 눈이 퇴화해서 없는 주제에 뱀이 이쪽을 노려보며 눈싸움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욱 힘주어 미즈키의 발목을 칭칭 감았다.

『에고... 곤란하게 됐네.』
『아니오! 전혀! 전혀! 보기에만 그렇지 걷는데 크게 지장 없어요.』

스가와라 미즈키는 맹세코 사실이라며 붕대를 감은 다리를 척 들어보였다. 전혀 안 아픈 건 아니지만 빠르게 걷거나 뛰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았다. 의사도 뼈에 금이 간 건 다 나았다고 장담을 했고, 일주일 정도 뒤에 붕대를 풀기로 되어 있었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속도가 느린 건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고 숨이 차서다. 생각보다 길이 가팔랐다.
『학교 뒤쪽으로 이런 길이 있는지 몰랐어요, 선배.』

클린업 클럽, 일명 청소 부는 카제야마 중학교에 존재하는 다수의 유령 부와 마찬가지로 부원도 딱히 없고 부실도 없었다. 감독하는 선생님도 부재다.
그런데 부 활동은 엄연히 있댄다. 그것도 무려 1945년부터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학교가 생기기도 전이다. 부활동이 아니라 당시에는 동네 행사처럼 행해졌던 듯하다.
손가락을 접었다 펼쳤다 반복하며 년 수를 헤아리던 미즈키는 진심으로 놀랐다. 자그마치 59년 전에도 양동이와 빗자루, 걸레와 같은 청소도구를 들고 이 길을 걸어간 학생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때 미즈키의 부모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체육관 뒤쪽으로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철문이 있고, 녹슬어 뻑뻑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뒷산으로 이어졌다. 그곳이 카제야마 중학교 부지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개인 사유지인지 알 수 없었다. 담장도 안 보였고 안내 표지판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빗자루를 꼭 쥐고 가면서 미즈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흡연금지, 버섯채취 금지, 대충 이런 문구를 적은 표지판 대신 돌을 쌓아 만든 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는 크기 않아 한 자에서 두 자 정도였고 특이하게도 돌의 색이 검었다.
점판암? 글쎄다. 수업시간에 봤던 암석 샘플을 떠올려 봐도 종류를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돌은 표면이 거칠었고 색이 일정했다. 표면에 칠을 해서 인위적으로 색을 입힌 것일 수도.

『만지지는 말고.』
『네.』
방금 전 뱀 소굴에 손을 대려 했다는 것도 모르고 스가와라 미즈키가 밝게 대답했다.

「으, 진짜지 뱀 투성이! 온 동네가 뱀!」
지금도 스윽 소리를 내며 뱀이 땅바닥을 기어갔다. 탁하고, 물기가 있고, 꿈틀거린다.
처음에는 진짜 뱀이라고 착각해서 미친 듯이 발을 굴렀더랬다. 만약 그게 진짜였다면 자기 몸을 방어하려던 뱀으로부터 엄청나게 물렸을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체가 없는 종류여서 「버려진 사탕 봉지를 먹바퀴로 착각한 이이지마 하나에가 킹콩처럼 발을 굴렀다」로 마무리가 되었다.
먹바퀴는 옥외 서식 습성이 있고 주택 부근의 숲이나 옥상 텃밭에서 잘 발견되는 종류다. 마침 창궐하는 뱀에 패닉을 일으켰던 장소가 수풀이 우거진 곳이어서 다행히 먹바퀴 핑계는 잘 먹혀 들어갔다.

『이 돌탑들은 누가 쌓은 걸까요?』
꿈틀거리는 뱀들이 먼지처럼 쌓인 수풀 앞에서, 발목에 눈먼 뱀을 매달고 있던 미즈키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
『하나같이 다들 올망졸망해서 귀여운 느낌이에요!』
『......』
『에엣? 선배는 아니에요?』

걸레를 담은 양동이를 휘둘러 망할 뱀 구덩이 돌탑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싶은 걸 시몬, 너는 아느냐.
해탈한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배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Posted by 미야

2021/03/09 13:48 2021/03/0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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