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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며칠 동안 잿빛의 나날이 계속되어 스가와라 미즈키는 우울해졌다.
『아아, 하나에 선배, 그리운 하나에 선배. 어째서 당신의 이름은 하나에인 건가요.』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로미오와 줄리엣 대사를 흉내 냈다.
하지만 연기력이 형편없다 훈수를 두는 반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봄바람에 맛이 갔구나 비웃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바람이 아직 쌀쌀하니까 빨리 창문 닫으라고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냥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부아가 치솟은 마즈키는 애들 눈깔이라도 삐게 만들겠다며 교복 치마를 배꼽 위까지 들어올렸다.
안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다들 본체만체 했다. 반장 하시모토 리코가 침 삼키는 소리를 낸 동급생의 배를 주먹으로 때렸을 뿐이다.

이이지마 하나에가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학교에 나오지 않은지 이틀.
그동안 미즈키가 한 말이라고는 매점에서「딸기우유랑 야끼소바 빵 주세요.」라고 한 게 전부다.
이 상태로 2학년이 되면 혀가 굳어 말 하는 법을 까먹을지도 모른다.
위기감을 느끼고 머리를 쥐어뜯었으나 당장 좋은 묘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반 아이들은 미즈키를 더욱 완벽한 투명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정해진 순번에 따라 주번활동을 하는 것까지도 막았다. 칠판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대신 고승처럼 묵언수행이나 하라는 거였다.

『잘 됐다. 손이 부족해서 그러는데 도와주지 않겠니?』
그래서 미술 교사 다나베 고우지가 말을 걸어왔을 적에 미즈키는 깡충깡충 뛰어갔다. 시큰거리고 아프던 발목 통증이 사라져 뛰어도 괜찮았다.
『무슨 일인데요? 뭘 도와드릴까요?』
『새로 주문한 석고상을 미술실까지 옮겨야 하거든. 내가 아레스를 들 테니 너는 아그리파를 옮겨다오.』
살짝 머뭇거렸다. 소묘화 수업 교과재로 도착한 석고상 중 어떻게 생긴 게 아그리파인지 미즈키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악티움 해전 등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고, 외국인의 얼굴을 한 석고상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1학년은 수업시간에 수채화 물감으로 정물화를 그리는 중이다. 정물화에 사용한 대상도 원뿔모형에 정육면체 모형이 다였다.

『그쪽의 작은 걸 들어주면 된단다.』
보다 커다란 조각상을 들고 다나베 고우지가 앞장섰다.
남은 걸 들쳐 메고 미즈키가 그 뒤를 따라갔다.

미술실은 어두웠다. 낮에도 햇빛을 가리는 용도의 커튼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 역광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데 방해가 된다는 게 까닭이었다.
방과 후 활동을 위해 펼쳐둔 이젤에 스케치북이 아직 치워지지 않고 올라가 있었다. 훔쳐보니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풍경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리는 중이었... 미즈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옮겨 그린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사진은 녹색인데 그림은 흑백이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새카맣게 칠이 되어 있어서 굵은 가지를 사방으로 뻗고 있음에도 이미 모두 말라 죽어버렸다는 느낌이었다. 먹을 사용하여 그리는 동양화도 아닌데 왜 굳이 흑백으로 묘사한 건지 미즈키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갔다.

『고맙다. 이쪽으로 내려주겠니?』
『네.』
스케치북에서 시선을 떼고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석고상을 적당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림에 흥미가 있니?』
남이 그린 그림을 오래 쳐다보고 있으니까 미술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라고 오해를 받았다.
미즈키는 헤실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손재주가 없어서요.』
다나베 고우지가 그럼 못 쓴다고 일갈했다.
『재능이 없으니 좋아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단다. 마음이 중요한 거지 재주가 중요한 건 아니거든.』
『그런데 선생님. 저 진짜 똥손이라서요. 어느 정도냐 하면 짝꿍 얼굴 그려주기 했을 적에 왜 너 혼자만 초상화가 아니라 추상화를 그리고 있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정도라서. 남의 얼굴을 가지고 이럴 수가 있느냐며 항의도 들었고. 지금도 정물화 그리기 과제에 애 먹는 중이고... 이상하게 다들 사과 그림자를 보라색으로 칠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림자는 보라색이 아니잖아요?』

두서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와중에 방이 어둡다는 느낌에 전등 스위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일몰 때가 다가왔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상 해가 지고 있을 리는 없으니 어쩌면 날씨가 흐려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산을 미리 챙겨 등교하지 않았기에 난처했다. 편의점에서 일회용 우산을 구입해도 되었지만 미즈키의 어머니는 아메바처럼 무성생식 하는 일회용 우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집구석이 좁은 탓이다.

『그러게. 보라색이라니. 그럼 미즈키는 그림자를 무슨 색으로 칠했니?』
선생님이 친근함을 드러내며 물어왔다.
그런데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러 되레 경계심이 들었다.
명찰을 보고 알았다고 해도 이름인 미즈키가 아니고 성인 스가와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이때 퍼뜩 든 생각이 일부 남자 교사들이 여학생을 꾀어내어 은밀한 터치를 시도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거였다. 격려의 의미로 어깨를 툭툭 치는 척하더니 재빨리 손을 내려 브래지어 끈을 튕겼다, 식의 이야기는 어느 학교에서나 괴담처럼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다른 걸 염려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미술 교사 다나베 고우지의 동공이 뱀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죽해졌다.

『왜 그러니?』
이제 그는 미술 교사 다나베 고우지로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석고상을 옮겨 달라 부탁을 했을 적부터 다나베 고우지였는지 확신도 없다. 그림자가... 복도에 드리워진 그건 사람 형태였던가?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이곳은 학교다. 게다가 아직 낮이다.
『미즈키는 그림자를 어떤 색으로 칠하면 좋을지 아직 고르지 못했니?』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나긋해졌다.
미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검게 칠하면 되는데. 검고, 검게 칠하려무나. 어둠은 고쿠로쿠치나와님처럼 검게 칠하면 된단다.』
『저기요, 선생님.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참배를 하러 갔었잖니. 길을 따라 올라갔지? 선생님은 길을 올라가는 네 모습을 봤단다.』
『참배가 아니라 청소하러 갔는데요.』
온기를 잃은 차가운 손이 미즈키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미즈키는 핸드크림 한통을 한꺼번에 전부 바른 듯한 촉감에 질겁했다.
『그래. 거기서 무엇을 보았니.』
『뭘 보긴요. 별 거 없었는데. 정 궁금하면 직접 올라가서 보면 되잖아요.』
『비밀이야? 말해주지 않을 거야? 진짜 그러기야?』
『아니, 비밀이고 자시고 간에! 놔주시겠어요?』

체육관 뒷문을 열고 언덕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그 끝에 검은색으로 칠을 한 온도측정대가 있다.
어린이 키 높이의 관측대다.
양문을 잡아 열면 어찌된 영문인지 온도계는 보이지 않고 대신 빨간색 필통이 있다.

『필통이군.』
고죠 사토루는 한방 거나하게 맞았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런 기척이 없어 헛수고를 했노라 이미 짐작은 했다만, 안이 텅 비어있는 것과 생뚱맞은 학용품이 놓여 있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세상에, 도대체 어떤 멍청이가 여기다 필통을 넣어뒀어?! 장난이라고 치기엔 악질이잖아!

『과거에 뱀 신을 모셨던 사당이라고 하지 않았어? 고죠.』
『그랬지.』
『일단 사당처럼 생기지도 않았다는 건 둘째 치고... 언제부터 필통이 뱀 신이 되었는데?』
『묻지 마.』
『자율안전 인증. 이 제품은 품질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읽지 마.』
『와, 추억 돋는데? 초등학교 시절에 이것과 비슷한 걸 썼었어. 색은 빨간색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학교 부지로 바뀐 탓에 애들이 짓궂은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지장보살의 머리 위로 찹쌀떡이나 귤을 올려놓는 게 애들이니까... 슬그머니 흘러나온 (웃음을 참느라 나온) 눈물을 닦은 게토 스구루는 필통을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았다. 주인도 그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 찾으러 올 일은 없겠지만, 혹시 또 아나.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어엿한 사회인이 된 아저씨가 「내가 말이지~ 어렸을 때 좀 놀아서 말이야~」후렴구를 넣으면서 추억을 뒤쫓아 이곳 언덕길을 터벅터벅 올라올지도 모른다.

『빨간색인데?』
『빨간색 티셔츠를 입는 남자들도 많아. 고죠, 너도 빨간색 운동화 신잖아.』
『하지만 난 빨간색 필통은 써본 적이 없어.』
『넌 아예 학교에 가본 적이 없잖아, 인석아. 너, 신발주머니가 뭔지는 알아?』
『스구루가 날 무시하네. 나도 학교에 가본 적 있거든? 여러 번 갔었거든? 주령이 잘 나오는 곳이라서 퇴치하러 자주 갔었거든? 신발주머니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보다, 얏호? 오랜만이야.』
거기까지 말한 고죠 사토루는 무서운 기세로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여자애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Posted by 미야

2021/03/17 10:10 2021/03/1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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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주술회전은 애니 초반부만 감상한 상황이라 원작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원작에서 이런 부분은 없었어, 라고 해도 용서해주세요.


핸드폰을 열고 글자를 입력했다.
《고죠가 주력으로 일반인을 위협하여 꿀빵을 강탈함》
《고죠가 주력을 실어 발목을 다친 일반인 여중생을 걷어찼음》


『사실과 다르잖아! 스구루!』
삑, 소리가 나도록 문자 저장 버튼을 누른 게토 스구루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성질을 부리고 있는 고죠 사토루를 외면했다. 솔직히 입안이 미어터지도록 꿀빵을 씹어가며「지워, 지우라고!」다그쳐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 그보다는 한심해 보였다.
『내 말을 무시하면 안 나눠줄 거야! 나 혼자 다 먹을 거라고!』
아직 고등학생 미성년 신분이라 특급으로 승급하지 않았을 뿐인 1급 주술사, 사실상 일본 내 최강인 무하한과 육안 술식의 소유자가 다섯 살짜리 애처럼 굴고 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게토 스구루는 뒷목을 주물렀다.
망했네, 주술계. 최강자가 저따위여선 일본의 미래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애초에 나눠먹을 생각 자체가 없잖아, 고죠.』
『그야 스구루는 빵이나 케이크 같은 밀가루 음식을 안 좋아하잖아. 싫어하는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는 건 폭력이지. 위대하신 고죠 사토루님은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악질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
『어라. 방금 북극곰이 춥다고 난로 가져오라는 식의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제대로 카드결제 하고 왔습니다, 게토 스구루님. 강탈했다는 거, 취소해주세요.』
설탕가루를 가볍게 털어내고 조림 사과맛 꿀빵을 한 입에 우겨넣었다.
혼자 다 먹겠다는 거, 진심이다. 심지어 즙이 묻은 손가락도 핥아먹고 있다. 그리고는 두뇌의 저장 공간을 낭비해가며 전국 맛 집 리스트를 갱신 중이다. 롯폰기 어느 가게의 다쿠아즈가 맛있다느니, 산노미야 다이마루 백화점 지하에서 파는 초코렛 무스가 최고라느니,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흥분하여 난리도 아니다. 먹고 있는 꿀빵도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이참에 허니 시나몬도 추가로 사 먹어봐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다.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돌아갈 적에 기차 안에서 (처)먹을 작정인가 보다.

『아닌데.』
여전히 실실 웃는 모습이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여기서 가능한 줄거리는 둘.
① 오로보로당 꿀빵이 아니라 다른 걸 사서 기차 안에서 먹는다. 예를 들자면 JR 센다이역점 2층 개찰구 앞에서 파는 키쿠후쿠. 완두콩 크림 추천.
② 교토로 돌아가는 건 나중이다.
게토 스구루의 판단으로는 후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충 시늉만 내다가 적당히 눈치를 봐서 학교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재밌는 걸 찾았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아깝지.』
『5급 주령화 된 부해가 사람에게 들러붙은 게 그렇게 신기했었어?』
『그쪽이 아니라 허리 구부리고 잔뜩 헛구역질한 쪽.』
『아, 흥미가 간 건 그쪽이었나.』

게토 스구루가 흐음, 이러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느낌이 다소 이상하긴 했지만 그 정도면 정상 범주 아니야? 동네가 동네인 만큼 어느 정도 주력이 뒤틀린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일으켜 세워주면서 봤는데 손목에 구슬 팔찌 형태의 주물도 차고 있었어. 싸구려 부적 같은 게 아니고 주술사가 만든 진짜 물건이더라. 추측하자면 부해에 닿지 않으려고 만든 거겠지. 때로 부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조사하면 금방 나올 거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창에게 알아보라고 지시하면 되잖아, 고죠. 이게 네가 직접 나설 일이야? 여중생에게 양갱 취급받았다고 그새 억하심정이라도 생겼어?』
『슬퍼. 날 그렇게 속 좁은 남자로 보았던 거야? 스구루.』
『그 많은 꿀빵이 한꺼번에 다 들어가는 걸 보면 속이 작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 너는 느끼하지도 않냐.』
『하나도 안 느끼해. 맛있기만 하구먼.』
고죠가 별안간 웃음기를 걷어내고 표정을 달리했다.
『그리고 스구루, 창에게 조사를 미루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봐.』

어디 한 번 계속해 보라며 게토 스구루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유는?』
『비유하자면 이런 거야. 현대국가에서 살고 있는 나는 코카콜라 빈병을 보면 재활용 쓰레기, 이러고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겠지. 그런데 아프리카 사막지대에 사는 원시 부족민이 우연히 모래에 파묻혀있던 코카콜라 병을 봤다고 치자. 문명이라는 걸 접해본 적이 없는 그는 이게 유리병이라는 것도 모를 테고, 코카콜라라는 건 더더욱 몰라. 태어나 코카콜라를 마셔본 적이 없으니까. 입구에 대고 후후 숨을 불었다가 소리를 내는 악기라고 단단히 오해를 하고 집으로 가져가 보물로 삼겠지.』
『사막에 쓰레기 버린 놈, 죽어라.』
『아름다운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주자! 분리수거 철저히!』
사이좋게 구호를 외친 뒤, 두 사람은 언제 그랬느냐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해했어. 요컨대 코카콜라를 먼저 마셔봐야 한다는 거군.』
『대충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네 녀석의 판단은? 육안(六眼)으로 봤을 거 아냐.』
『봤지.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창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걔, 인간 아닌 것이 미묘하게 섞였더라고. 아주 살짝.』
『뭐?』
『그렇게 정색하고 놀랄 일은 아니야, 스구루. 큰 접시에 날치 알 하나 정도로 섞였으니까 네가 눈치를 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봐.』
『날치 알이든, 가쓰오부시든, 인간 아닌 거라며. 그게 뭐였는데.』
『미안, 스구루. 나도 아직은 잘 몰라. 나 역시 코카콜라 빈병을 처음 보는 아프리카 부족민 심정이라니까.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좋을지, 집에 가져가 보물로 삼을지 판단이 서지 않아.』

저주와 동화한 인간은 주술 규정에 따라 사형을 집행한다. 예외는 없다.
그 저주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얼른 잡아다가 주술사로 키워야 한다. 가뜩이나 인력부족으로 허덕이는 주술계다.

『사형이라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구나, 너.』
『어라, 그러고 보니 스구루는 주술고전 입학식 날 야가 선생님 앞에서「주령은 얼마든지 잡아 족칠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 인간은 죽이기 싫어요. 주령을 다루는 인간이라고 해도요.」라고 말 했었지?』
『야가 쌤에게만 말한 걸 네가 왜 알고 있는 건데.』
『음... 그건. 내가 1학년 반장이니까?.』
『주술고전 1학년생이 너랑 나, 이에이리 쇼코까지 딱 3명인데 누가 반장이야.』
『에잉, 반장이 하고 싶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속상하면 부반장이라도 할래?』
『이야기의 논점이 빗나가고 있잖아, 고죠.』

게토 스구루가 진심으로 화를 내려고 했기 때문에 고죠 사토루는 약삭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있잖아~ 타락한 신을 조복하려면 스구루는 제일 괜찮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해?』
『야가 선생님이 나불나불 거렸냐고. 아님 엿들었어?』
쉽게 안 넘어오네. 한숨이 푹 나왔다.
『나는 육안(六眼안)의 소유자이지 육이(六耳)의 소유자가 아니야. 엿듣는 짓은 하지 않아.』
『호오... 그렇다면 야가 마사미치 그 양반이 나불거렸다는 거네.』
『교사로서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생과 사의 경계선을 항상 왔다 갔다 하고 있잖아. 상대방이 사람이라서 죽일 수 없다, 일찍이 단정지어버리면 목숨이 아홉 개라도 부족할 테지.』
팡, 소리가 나도록 게토 스구루의 어깨를 때렸다.
온전히 손목 힘으로만 때렸기 때문에 아플 일은 없겠지만 게토 스구루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각설하고, 다시 질문할게. 타락한 신을 조복하려면 스구루는 제일 괜찮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해?』
『원자폭탄.』
『어이. 지금 화가 난 상태라는 건 알겠는데 대충 대답하진 말아주겠어?』
『대충 대답한 거 아니야, 고죠. 타락한 신이면 특급 오브 더 특급이잖아. 그걸 무슨 재주로 잡아. 네가 가진 무하한 술식이면 가능하겠지만 내 경우엔 비벼보지도 못 한다고. 1초도 되지 않아 머리가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갈 거다. 1초 컷이야.』
『그렇군. 무하한이 없으면 1초 컷인가...』
그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스구루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한자성어의 뜻이 뭔지 알아?』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는 의미잖아.』
『바로 그거야. 특급으로 특급을 잡는다는 의미지!』
고죠 사토루가 예고도 없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짙은 색의 선글라스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게토 스구루는 육안의 파란 눈동자가 직접 닿았다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Posted by 미야

2021/03/15 16:51 2021/03/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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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주술회전은 애니 초반부만 감상한 상황이라 원작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자가발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만화책이라도 사다 읽어야하나 고민 중인데 등장인물이 갈려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증발하는 수준이라고 들어 당혹스럽군요.


그들은 벌칙수행 중이었다.
정정한다. 고죠 사토루는 벌칙수행 중이었다.
동행한 게토 스구루는 상층부의 요청에 따라 일종의 도련님 감시자 역할로 따라붙었을 뿐으로 귀찮다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은 채 설설거렸다.
『으아, 사방에 음식물 쓰레기가... 너도 와서 도와, 스구루.』
『싫거든.』
『친구 사이에 그러기냐. 너와 나의 우정은 그렇게 얄팍하지 않잖아.』
『얇아. 계란 부침보다 못한 두께지.』
육교 아래로 좋지 않은 것들이 썩은 표주박처럼 주렁주렁 맺혔어도 게토 스구루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주술고전에 입학에서 고죠 사토루와 통성명을 마친 게 얼마 전이다. 살갑게 친구타령을 하기엔 아직 빠른 거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부러 거리를 둘 마음도 없지만 먼저 다가가 가깝게 지내고 싶은 것도 아니다. 게토 스구루는 제법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런 서툰 부분을 도련님은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지만.
『평가가 너무 야박한 거 아냐? 스구루. 우리의 우정은 최소한 비프 스테이크 두께라고. 이~ 정도쯤?』
『역시 좋은 집에서 자란 도련님이네. 그만큼 두꺼운 고기도 썰고.』
손가락으로 이 정도 두께라고 어림짐작해 보이는 고죠 사토루를 향해 피식 웃어 보이는 게토였다.

예전부터 실수를 저지른 주술사에게 페널티를 부과할 필요가 생기면 뱀신 마을로 보내 제대로 골탕을 먹이는 게 관행이다.
파충류를 좋아하고 취미로 도마뱀을 기르는 부류라면 페널티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당한 정신적 부담을 지게 된다. 사방에서 뱀이 솟구치는 – 여기에도 뱀, 저기에도 뱀 – 정작 퇴치해야 할 주령은 4급에서 5급 피라미들이라서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고, 대신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은 반세기 전부터 부해(腐賌)하여 결국 거름이 되어버린, 과거 신으로 모셔지던 것의 잔해다.
『반성한다고, 젠장! 영혼을 다해 반성한다고~!!』
장소 불문하고 주룩 흘러내리는 검정의 찌꺼기, 그것도 뱀의 형상을 한 무더기의 부해가 지뢰밭처럼 널려있는 걸 보고 있자면 「내가 왜 그때 결계가 완성되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주령의 모가지를 똑 따버렸을까. 1초만 참았더라면. 과거의 나, 반성해라!」극심한 후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머리 위로 상한 토사물을 닮은 역겨운 것이 후드득 쏟아지는 느낌에 질색했다.
무하한이라는 술식이 있어 직접적으로 닿는 일은 결코 없지만, 아무튼 썩은 미역줄기를 뒤집어쓰는 건 충분히 기분 나빴다.

『확실히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긴 한데...』
어깨에 묻은 부해를 고양이 털인양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며 게토 스구루가 말했다.
『숫자가 어마어마해서 그렇지 크게 해롭지도 않은 종류래. 여기 뱀신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익숙해져서 이런 거에 닿는다고 앓는 법도 없다고 하더라. 야가 선생님도 삼나무 꽃가루 취급하면 된다고 하셨어.』
『뭐가 삼나무 꽃가루야! 삼나무 꽃가루는 주술사가 나서서 일부러 치우는 법 없잖아!』
『가짜로 우는 척하지 마, 고죠. 1급 주술사가 부해 정도로 죽는 소리나 하고 앉았고... 모자란 너님 인격수양에 큰 도움이 될 거라던 담임 쌤 말씀을 떠올려.』
『음식물 쓰레기 앞에서 인격수양이 뭔 말이야! 빌어먹을 야가 선생! 나를 썩은 뱀 마을로 보내놓고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다! 농담이 아니야. 이러다간 밧줄만 봐도 뱀이다 고함치게 생겼다고!』

토지신이 타락하면 특급의 주령이 된다.
그러면 주술사들이 나서 조복(調伏)을 한다.

『마무리가 엉성하면 나중에까지 이렇게 개지랄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군.』
담장에서 전봇대까지 엄청난 량의 부해가 왁자지껄하게 엉켜 붙어 있다.
5년에서 6년 터울로 주기적으로 주술사가 방문하여 부해를 걷어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 정도의 양이라면 과거에는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안 갔다.
『주술사들에게도 빨간 종이(징집영장)가 떨어졌던 시대에 벌어진 일이라고, 스구루. 젊은 실력자들은 전쟁터에서 구르고, 어쩔 수 없이 관짝 입성 하루 전날의 영감님들이 요통을 호소하며 어여차 했는데 상대가 특A급이다 보니 쉽지 않았던 모양이야. 요행으로 조복에 성공은 했는데 딱 거기까지였던 거지. 듣자하니 비술사 주술사 가리지 않고 사망자도 제법 나왔다고 하더라.』
『나는 비술사 집안 출신이라 그런 이야긴 몰라, 고죠.』
『주술사 집안이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야. 젠인 가문에서도 이곳 뱀신 마을 이야기에 대해 꿰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걸? 기록 불가에 함구령까진 떨어진 사건이라고. 고죠라서 그나마 정보가 있던 거고... 뭐,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야. 잘난 척하는 영감님들이 바지춤도 못 내리고 똥을 지렸는데 얼마나 부끄러웠겠어.』
꿈틀거리는 부해를 손으로 잡아 쥐어 터뜨리던 고죠 사토루가 대놓고 이죽거렸다.
『줏대도 없고, 능력도 없고, 콧대만 높아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똥이나 싸는 것들.』
진짜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일이 없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이라고요! 제 키는 평균이고, 코가 땅바닥에 닿는 일은 없다고!』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일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다.
이쪽을 봐도 뱀, 저쪽을 봐도 뱀.
성가시게 코딱지까지 뱀을 달고 나타났다.
『그만해, 고죠! 여기서 주력 꺼내지 마. 비술사... 아니, 일반인이잖아. 게다가 중학생이고.』
저게 어딜 봐서 일반인이야. 고죠 사토루는 대놓고 투덜거렸다.

짜리몽땅이 발목에 감고 있는 뱀은 지금까지 보아온 부해와는 모습이 달랐다.
덜 썩었고, 훨씬 실재감이 강했다. 문드러진 곤약 젤리가 아니라 뱀 머리형태가 선명했다. 심지어 비늘도 달렸다. 눈이 좋은 고죠 사토루는 비늘에 난 소용돌이 문양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부해는 썩어 사라지는 게 아니었나?
이쪽에서 일부러 약간의 주력을 흘려보내자 반응을 보였다. 아주 약간이었지만 색이 검게 짙어졌다.
『한여름도 아닌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까 보이는 게 없지!』
정작 그 뱀을 달고 있는 코딱지는 일절 반응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주력은 주술사와 비술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많고 적음이 다르고, 본인의 의지로 그걸 다룰 수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주령만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도 주력에 반응한다.
실수로 가발 벗겨진 교장 선생님 앞에 선 기분 – 게토 스구루는 그런 비유를 쓰기도 했다. 그게 정확히 그게 무슨 기분인지 일반인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고죠 사토루 입장에선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식은땀이 나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선천적으로 둔감한 체질인가.」
저 중학생은 어디를 봐도 가발 벗겨진 교장 선생님 앞에 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교복을 입은, 키가 더 큰 쪽은 그와 반대로 얼굴 표정이 대단했다.
기회를 보고 여차하면 달아날 태세지만 아직까지 걸음아 나 살려라 하지 않는 건 그가 흘려보낸 주력에 반응해 몸이 굳어서이고, 더하여 의리 없게 땅딸보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내적 갈등 탓인 듯했다.

재밌어하며 고죠는 흘려보내던 주력을 조금 더 늘렸다.
사람이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 컨트롤하는 건 물론 잊지 않았다.
『히이익! 포, 포장해 드릴게요! 말씀하신 꿀빵 다 드리겠습니다! 딸기크림, 조림 사과, 바나나 화이트치즈, 맞죠? 금방 준비하겠습니닷!』꿀빵 가게 점원이 주력에 반응했다.
『와, 도련님 인성 보소.』게토 스구루가 뒷목을 잡았다.
『중생의 의미는 중간에 생기다 말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다!』
여중생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뽐내며 같지도 않은 코를 세웠다.

오른발을 내밀어 팡 소리가 나도록 발을 굴렀다.
주력을 실은 간단한 동작에 발목을 감고 있던 뱀이 풍선처럼 부풀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졌다.

허겁지겁 꿀빵을 포장지에 담던 가게 종업원이 어, 소리를 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는 곧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왜 귀를 막았지? 것보다 방금 뭐였어? 어디서 가스통이 터졌나? 그런데 소리가 들리긴 했나?
반사적으로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미야기현 지진특보가 흘러나올 거라 생각해서였다.
동시에 아랫배를 부여잡은 이이지마 하나에가 돼지 멱따는 웨엑 소리를 내며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21/03/13 19:46 2021/03/1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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