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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키가 컸던 고죠 사토루는 어렵지 않게 다나베 고우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물론 시선 높이의 차이일 뿐, 그게 힘겨루기 우위를 가름하는 척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약간의 만족감은 있었다.
이름 없는 가게의 생크림 케이크를 막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을 때의 흡족함이었다. 맛이 훌륭하진 않아도 어쨌든 케이크였다.

그 비뚤어진 미소를 본 게토 스구루가 눈치껏 팔을 엑스 자로 교차해 보였다.
주술고전 1학년 담임인 야가 마사미치는 고죠 사토루가 특정 표정을 짓는다 싶으면 일단 안 돼, 라고 말하라고 부탁을 해온 적이 있다. 주인이 한눈을 판다 싶으면 쓰레기통부터 뒤엎고 보는 말썽꾸러기 강아지 취급이었지만,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전원 아득히 먼 하늘까지 날려버린 뒤에 비술사만 딱딱 골라 얌전히 바닥에 착지시키고 나머진 피떡으로 만들어선 곤란했다.
예전에도 저주사를 대상으로 콩주머니 던지기 놀이를 한 전적이 있었기에 게토 스구루의 염려는 기우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럼 네 생각은 뭔데, 스구루.』
『음... 애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먼저 협상 비슷한 걸 해보는 건 어때.』
『진심이냐?』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시도한 게 지금이 처음인 건 아니잖아.』

잠시 생각해보고 고죠 사토루가 사람인 척하는 그것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애들은 풀어줘, 썩은 귤. 아니면 콱 모가지를 따서 죽여 버린...』
형편없는 말본새에 게토 스구루가 고죠 대신 바통을 이어나갔다.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밖으로 나가면 사람이 더 많다. 일부러 붙잡지 않을 테니 건물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먹던지 말던지 맘대로 해보는 건 어때.』

그것은 눈을 가늘게 뜨고 꼭 낯선 일본어를 처음 듣는 외국인의 낯을 했다.
학교 밖으로 나가라는 말이 거슬린 걸까, 아니면 나가서 사람을 먹으라는 말에 반응한 걸까.
진짜로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닐 테니 변화구를 던져 계속해서 떠보는 게 좋을 것이다.
『싫어? 별로야?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아니면 여기서 떠날 수가 없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원하는 것이 있어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지?』

옛날, 신이 타락하여 특급 주령이 되었다.

주술적인 이유로 땅에 종속되었다면 떠나고 싶어도 발이 묶여있을 수 있다. 지박령 같은 것들은 사실상 초강력 접착제로 땅에 붙들려 있다고 봐야 한다.
반대로 이동이 자유로운데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거라면 골치가 아파질 수 있다.
고죠 사토루는 과거, 이 장소에서 특급 조복을 위해 특급 주물이 사용되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게토 스구루의 생각으로도 충분히 그럴싸한 줄거리였다.
그럴 듯해서 그 특급 주물이라는 게 어디로 가지 않고 여전히 이곳에 잠자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봤다.
몇십 년에 걸쳐 걷어도 걷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지막지한 양의 부해 – 비정상적인 현상에는 항상 원인이 따로 있는 법이다.

옛날, 주술사들은 조복에 실패했다.

게토 스구루는 희극적으로 팔을 벌려 보였다.
『그게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보고 싶지 않아? 학생들을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아이들을 해치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뱀의 눈을 한 남자를 응시하며 살살 구슬렸다.
『애들은 보내줘. 그러는 편이 이득이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생각해봐. 나라면 다 포기하고 홀가분하게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

뚱한 얼굴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그것이 마침내 말했다.
《그대의 소원은 하찮군.》
『어?』
《짜증날 정도로 하찮아. 제국과 만세일계(※ 萬世一系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일본 왕실이 단 한 번도 단절된 적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의 번영을 기원하지는 않더라도 개인의 영화 정도는 빌어봄직 하지 않은가. 다 포기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소원이라니... 되었다. 가거라. 네 소원은 이루어졌다. 대가는 받았다.》
『어어?』

잠깐만 기다려, 외치는 사이에 시야가 훅 바뀌었다. 어느새 건물 밖이었고, 옆에는 과잉 친절을 베풀어 동료인 고죠 사토루까지 제대로 모셔져 있었다.
욱신거리는 격한 통증을 느껴 아래를 내려다보니 왼손 검지와 중지의 손톱이 빠져있었다.
어이가 없다. 이게 대가? 게다가 그따위 소원을 언제 빌었다고. 제멋대로 착각해놓고 사람을 모지리 취급...
머리카락이 정전기에 올이 일어선 스웨터처럼 변했다.
『크아앗, 새끼. 갈아버린다~!!』
『앗, 우리 스구루 눈 돌아갔다.』
『게다가 왜 손톱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뽑아버린 거야! 어째서 저 녀석과 나를 세트 취급 하느냐고! 세트 취급하려면 마트처럼 원 플러스 원으로 계산하던가! 제기랄, 쓰라려!』
『화를 내는 포인트가 이상해.』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쓰잘머리 없는 물건을 강매당한 기분이라고!』
하나는 인정해도 두 개는 아니야. 내 손톱 내놔, 외치며 손가락을 움직여 인(印)을 맺었다.
보랏빛의 연무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났고, 이윽고 제각각의 주령들이 떼를 지어 학교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두꺼비의 눈을 하고 유리창에 철썩 들러붙은 주령의 모습에 이이지마 하나에는 몸을 사렸다.
「말세구나. 뱀 다음에는 두꺼비냐.」
개굴개굴 소리를 낼 것처럼 생긴 것이 바깥에서 유리창을 쾅쾅 두드렸다. 예의를 차려 노크를 하는 모양새가 아니고 정말로 부셔버리겠다는 투지를 드러내며 때렸다. 방탄유리도 아닌데 영 깨질 기미가 없자 두꺼비처럼 생긴 그것은 더 약한 부분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두꺼비의 시선을 피해 교무실 바닥을 거의 기다시피 움직여 가까운 자리에 위치한 책상 안쪽으로 몸을 숙이고 들어갔다. 누구의 자리인지는 몰라도 체취처럼 남은 발 냄새가 지독했는데 스프레이 파스 냄새까지 뒤섞여 코점막을 고문했다.

억지로 숨을 참고 있는 도중에 쿵, 하고 큰 진동음이 울렸다.
놀랐는지 옆에 있던 스가와라 미즈키가 히익 소리를 냈다. 덧붙여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조용히!』
『죄송해요.』
스가와라 미즈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터진 딸꾹질은 마음먹은 대로 멈추지 않았고, 그녀가 알고 있는 딸꾹질을 멈추는 방법은 물을 한 컵 마시는 거였다. 당연히 주변에는 마실 물 같은 건 있지 않았기에 불가항력적으로 히끅 히끅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다시 쿵, 하고 건물이 흔들렸다.
기분 탓인지 바닥이 오른쪽으로 기운 것 같았다.
재차 쿵, 쿵, 진동음이 울리자 이번에는 바닥이 아래로 내려앉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던 두꺼비 주령이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서두르자.』
미즈키의 손을 잡은 이이지마 하나에는 유선전화가 있을 행정실 방향으로 낮은 오리걸음으로 걸었다.
『뭘까요. 방금 전 그건 지진이었던 걸까요?』
스가와라 미즈키는 일반인이다. 주령이니 하는 것들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감이나 육감 같은 게 완전 퇴화하여 사라진 상태여서 석고상을 들고 사람 아닌 것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을 정도다.
그러니 물결치며 쓸려오는 주령들이 거대 진동음을 내고 있어도 그다지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눈치다.
딸꾹질은 끝났고 지진은 염려스러웠다.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걱정했다.

『또 흔들리면 어쩌죠?』
『자세를 낮추고 머리를 보호해야겠지.』
『무서워요. 하나에 선배는 안 무서워요?』
『나도 무서워.』
『저, 엄마 보고 싶어요.』

눈물 젖은 목소리를 내는 후배의 어깨를 기운 내라며 툭툭 쳤다.

그리고 속으로 한탄했다.
엄마가 보고 싶니?
부럽네. 난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는데. 엄마도 아빠도,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Posted by 미야

2021/04/06 14:31 2021/04/0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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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오작동으로 의심했던 화재경종이 영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3학년 3반 수업을 진행하던 지리과목 담당교사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원시용 안경을 벗었다.
옆 반에서는 이미 수업을 중단하고 대피에 들어갔다.
연기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타는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니 두말할 것도 없이 오작동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시설이 낡아가고 고장이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만, 예산부족을 탓하며 제대로 손보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어 이런 식으로 수업에 지장이 생기는 일이 간혹 벌어지고 있다. 
그래도 만의 하나라는 것이 있고, 과거 이 학교 미술실이 영문 모를 화재로 피해를 입은 적도 있으니 훈련이라 생각하고 슬슬 움직여야 할 것이다.
벗은 안경을 셔츠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은 교사는 손바닥으로 교탁을 탕탕 때렸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을 쨀 수 있게 되었다며 몇 눈치 없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기뻐했는데 진도를 나가지 못한 부분은 숙제의 형태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터이니 좋아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만 떠들고 일어나 일렬로 운동장으로 이동하도록. 숨어서 자겠다는 놈 있으면 깨워서 데리고 나가라.』
상급반일수록 층수가 낮아 3학년 교실은 1층과 2층에 집중되어 있다.
현관 출입구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3학년 3반 전원이 중앙 출입구 앞에 다다랐을 적에 열다섯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자기들끼리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격렬하게 의사소통을 벌이는 중이었다. 다들 흥분한 상태여서 대화가 아니라 싸움 수준이었다. 더하여 세 명이 동쪽에서 달려 나왔다. 지갑을 두고 나와 교실로 돌아갔다 온 것도 아니다. 시원한 표정이 아닌 것으로 보아 화장실에 다녀온 건 더더욱 아니었다.

학생들을 양몰이 하며 뒤에서 따라오던 교사가 역정을 내며 다가갔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단순했다. 신발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학생들 다수가 실내화를 벗고 실외화로 갈아 신은 뒤였다. 교칙위반이었다.
『야! 너희들. 운동화를 신고 누가 마음대로 복도를 뛰어다니랬-』
『창문으로 나가보자. 가서 걸상을 가지고 와.』
『아니, 멀쩡한 출입구를 놔두고 왜 창문으로 나가려는 거냐고. 너네, 제대로 설명 안 할 거야?!』
『나중에요.』
아이들은 교사의 호통을 대놓고 무시했다.

의자를 밟고 창문을 넘어보자 제안하는 학생은 3학년 5반이었다.
그 옆에서 손톱 거스러미를 잡아 뜯고 있는 여학생은 명찰을 보니 3학년 1반이었다.
『절대 인정 못해! 인정 못 한다고! 나도 콧쿠리님을 모셨단 말이야!』
『거짓말. 언제는 미신이라며 비웃었잖아.』
『기합 넣기 체조가 싫어서 거짓말했어. 그게 내 잘못이야?』
그렇게 외치던 여학생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언저리를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몰래 바른 화장품이 엉망으로 번졌어도 당사자조차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걸상이 준비되자 멋대로 순번을 자처한 여학생이 앉는 부분을 밟고 올라갔다.
운동신경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신중한 성격이었는지 다소 굼뜬 동작으로 다리 하나를 창틀에 올렸다. 그런데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뛰어 넘는다는 다음 행동으로의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더듬거리자 막이 느껴졌고, 주먹으로 치니 출렁거렸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외마디 소리를 지른 그녀는 몸을 던진다는 요령으로 어떻게든 나가고자 했다.
그래봤자 눌린 뺨이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질 뿐이었다.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의자에 올라선 상태로 그녀가 악을 써댔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사과할게. 사과한다고! 그러니까!! 당장 그만둬!』

지금도 계속해서 운동장으로의 대피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대다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구를 잘 빠져나왔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오는 게 아예 불가능한 몇몇의 학생들은 뭐냔 말이다.

운동장 밖으로 이미 대피를 완료한 학생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본능적으로 창가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의자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애를 강제로 끌어내렸다.
얼굴색을 바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하하 웃었다. 경련하듯 입술이 떨렸지만 웃었다.
인정하면 진짜가 되어버린다. 저주라는 건 그런 것이다.  
『출구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른 곳으로 가보자.』
『어,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럼 우린 구름다리 쪽으로 가볼게.』
그러면서 그들 중 몇은 1학년의 콧쿠리님과 2학년의 콧쿠리님이 몇 반이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렸다.
그게 지푸라기이든, 썩은 동아줄이든, 잡아야 했다.

이이지마 하나에는 신발을 양손에 쥐고 양말 차림새로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이게 최고다. 수업을 몰래 빼먹던 실력은 어디로 가지 않아 계단을 올라오던 상급생이 알아채지 못하고 4층으로 향했다. 납작 몸을 숙였던 이이지마는 속눈꺼풀을 열고 스쳐지나간 3학년을 관찰했다.
머리부터 발목까지는 외관이 멀쩡했지만 발목 아래부터는 형태가 일그러져 잘 보이지 않았다. 부해 찌꺼기를 잔뜩 밟은 탓인지 옮겨 붙었다. 따라가는 일행도 옆구리부터 목덜미까지 먼지에 뜯어 먹힌 형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화를 나눴는데 「옥상, SOS 글자, 헬기가 오면, 영화처럼」단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골탕 좀 먹겠군, 생각하며 목을 길게 빼고 아래층의 냄새를 맡았다. 상급생 두 명은 재작년 자살소동으로 옥상 출입문을 봉쇄했다는 걸 까먹은 눈치다.
『연기 냄새는 안 나요.』
마찬가지로 코를 킁킁거리던 스가와라 미즈키가 그렇게 말했다. 진짜로 화재가 발생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중이라고 여기고 있기라도 한 건지 집중해서 화재의 징후를 찾고 있었다.
설명이 귀찮았던 탓에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자며 신호했다.

1학년 2반 아이들 중 다수가 부해에 접촉했다.
그중에서 단연코 사정이 월등하게 나빴던 건 머리부터 무릎까지 부해를 왈칵 뒤집어쓴 스가와라 미즈키다.
깨끗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미역다발이라고 오해할 법한 수준으로 더러움이 옮겨 붙었다.
손을 뻗어 검게 얼룩진 미즈키의 뺨을 문질러봤다. 그런들 기름얼룩 같은 종류가 아니니 지워질 리 없었다.
얼굴도 그렇거니와 문제는 입안부터 목구멍까지 새카맣게 변했다는 거다. 아, 하고 입을 벌리면 검댕이 잔뜩 묻은 굴뚝처럼 보였다.

당연히 좋지 않다. 게토 스구루의 말에 의하자면 미술 선생님 다나베 고우지의 몸 안으로 뱀의 모습을 취한 것이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스가와라 미즈키도 조만간 뱀을 토할지도 모른다. 뱀만 토하면 차라리 다행이고... 몸을 떨면서 우우, 우우우 이러고 이상한 목소리를 내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이이지마 하나에가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걸 어떻게 해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지 짐작이 안 갔다.
조언을 듣기 위해 급히 할아버지 이이지마 리쓰에게 전화를 시도했더니 전파수신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의 막대가 아예 사라져 있었다. 무려 통화권을 이탈했단다.
유선전화가 필요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허리를 구부정히 숙인 모습으로 5층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내려오던 고죠 사토루는 무진장 저기압이었다.
그리고 그의 불편한 심기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1층에 자리하고 있던 미술 교사 다나베 고우지와 맞닥뜨리고부터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것은 대피하는 아이들을 돕는 척하며 출입구를 한 가운데 자리를 떠억 잡고 있었다.

빙의했다고 해도 안에 든 내용물이 영 별로인데 확 찌그러뜨릴까.
고죠 사토루가 막 불순한 생각을 품었을 때 다나베 고우지가 대피 중이던 학생 한 명을 끌어당겨 방패처럼 세웠다.
딱 봐도 협박이었다. 네가 뭔 짓을 하면 나도 뭔 짓을 해버리겠다,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확고했다.
보고 있던 고죠 사토루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부해 찌꺼기 주제에 협박까지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당장 찌그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손가락 관절을 우둑 소리가 나도록 꺾으며 계단을 하나 더 내려왔다.
앞으로 다섯 계단만 더 내려가면 반으로 접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 마! 애들이 다쳐.』
다급하게 만류하는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3층에서 게토 스구루가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걸 멈춘 고죠 사토루가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 위쪽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싫은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는 걸로 마음 먹었던 걸 철회했다.
반으로 접어버리려고 했던 것이 다나베 고우지가 아니라 학교 건물이었으니 아직 대피하지 못한 아이들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1/03/31 16:51 2021/03/3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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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중학생은 위대하다.
화재경종이 울리고 있는데 아무도 대피를 하지 않는다.
교사부터 학생까지, 그딴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모두를 빠르게 대피하게 만들려면 허위신고가 아니라 진짜로 학교에 불을 질러야 하는 거였나.
이동술식으로 옥상으로 자리를 옮긴 고죠 사토루는 발신인이 시금치로 뜬 핸드폰을 쥔 채 아주 작게 망할, 이라고 중얼거렸다.

호우코우(보고), 렌라쿠(연락), 소우담(상담), 앞 글자를 따서 호우렌소우(시금치).
《현4급 현장으로의 긴급 진입을 보고받았습니다.》
나이가 제법 많을 거라 추측되는 전화기 저편의 여성은 자기소개를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술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나 주술사는 아닌 자들로 이루어진 집단, 창.
평소에는 주술고전 관계자들에게 하인이나 수족처럼 마구 부려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때로 그 힘의 관계는 아주 간단하게 역전되기도 한다.
《주술전문고등학교 1학년 생도는 빠른 퇴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양은 권고이나 사실상 명령 조처다. 권고에 따르지 않을 시 보조감독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다굴을 쳐서 10년이고 20년이고 못살게 굴겠다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으니 다른 의미에선 협박과도 마찬가지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목소리로 추정하자면 60대, 실력과 능력을 우선시하는 주술계라도 나이를 아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조직이든지 관록이 붙으면 위로 올라가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정도의 나이면 제법 고위층 관계자일 거라고 합당한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고죠 사토루는 전화기 저편의 음성이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인지 헤아려봤다.
코흘리개 시절 유모로 일하던 여자와 느낌이 흡사하다는 것 말고는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파편이 없었다. 그러니까 심드렁하게「기저귀를 갈아드리겠습니다.」말하던 사용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장소가 장소인데 이대로 후퇴해도 괜찮을까? 아직 하교하지 않은 애들이 바글거리는 중학교라고, 여기.』
《네. 장소가 장소이니까요. 거긴 폐퇴신역(閉頹神域)이잖습니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가 함부로 개입하면 곤란한 곳이죠.》
『하아?』
감정이 일절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여자가 느린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주령이 얽힌 일이 아닐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기이현상은 봉인술식이 오래되어 느슨해진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계를 보수하신 분이 지금은 고인이라 적임자를 찾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곧 안정화를 시킬 적임자를 파견할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하고 그 장소에서 벗어나기를 권고합니다.》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네. 부해가 살아 움직이면서 사람에 씌는 걸 직접 못 봐서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는 거지. 그 적임자의 파견이라는 거 말이야... 5분 안에 가능해?』

고죠 사토루의 질문에 여자는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화재발생 신고를 받고 소방차가 도착하는 게 5분이지, 적임자 파견은 당연히 5분 내 도착이 불가능하다.
먼젓번 관계자는 고인이다.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새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도 신역봉쇄가 가능한 초특급 봉인술식 실력자를 찾아야 한다. 하루가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외국의 전문가를 모셔 와야 하는 수도 있는데 그 적임자가 한국인이면 케케묵은 국가 간 감정 때문에 초반부터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쪽은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해도 자존심을 걸고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5분 내 적임자 파견이 불가능하다고 사실을 넙죽 알리는 건 더 곤란했다.
《최대한 분발하겠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관리용 멘트를 읊었다.

『주술고전 1학년생이 아니고 고죠가(家) 당주대행으로 다시 물어도 같은 대답일까?』
《저어, 그건.》
당주대행 카드를 내밀었더니 상대가 당황했다. 그래서 살짝 더 압박해봤다.
『고죠가(家) 당주대행이면서 최강의 주술사 자격으로 다시 물으면 이번엔 뭐라고 할래? 있잖아, 내 입으로 말하기가 쬐꼼 부끄럽지만, 고죠 사토루님은 지구 뿌셔 최강입니다.』
여자는 이쪽의 소리가 전달되지 않도록 핸드폰의 스피커 부분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른 채 가만히 욕을 했다. 썩을, 빌어먹을, 얼어 죽을, 귀가 좋은 고죠 사토루가 알아듣기로는 대충 그 셋 중 하나였다.

아무튼 중학생은 위대하다.
화재경종이 울리고 있는데 아무도 대피를 하지 않는다.
고작 한 뼘 너비밖에 되지 않는 4층 창틀 턱 위로 닭둘기인양 쭈그리고 올라가 앉은 게토 스구루는 이걸 어쩌나 싶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몸과 정신의 성장이 심한 불균형을 이루게 되어 천상천하 유아독돈, 망상에 가까운 자기도취에 빠진다. 오죽하면 세간에서 중이병이라는 표현을 쓸까.
게토 스구루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먼 시선으로 자신의 지난 행적을 더듬어봤다.
「뭐, 나도 만만치 않은 과도기를 보내긴 했지.」
외벽을 타고 올라온 수상한 사람을 향해 중학생이 용감하게 실내화를 집어 던졌다.
궤적을 그리며 1층으로 떨어지는 실내화를 보았을 적에 게토 스구루의 뇌리로 딱 떠오른 단어가 그거였다.
중이병.
상대방의 정체는 안 궁금하고 일단 때리고 보겠다는데 그게 중이병이 아니면 뭐겠느냔 말이다. 앞뒤 가리지 않는 그 만용이 무섭다. 오늘만 살고 뒷일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눈치다.
드르륵 소리를 내어 창문을 열고 칠판 정면에 붙은 급훈을 쳐다봤다.
액자 속 내용은 제법 멀쩡해서「성실한 오늘, 더 나은 미래」라고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페이크일 수도 있다. 뒤집어보면「죽어보자!」글귀로 바뀌는 건지도 모른다.

『불이야, 소리가 들리면 밖으로 대피하라고. 그 정도는 상식 아니야?』
그런데 옆 반에서 외치는 비명은 약간 다르긴 했다. 뱀이야.
따져 묻는 중학생들의 시선을 회피하며 게토 스구루는 성큼 걸음으로 둥글게 부푼 부해 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부해가 일종의 장막처럼 기능하는 건 처음 봤다.
질감은 고무풍선 같았는데 두께가 얇아도 안이 비처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손목까지 주력을 두르고 시험 삼아 톡 건드리자 태동하는 태아처럼 꿈틀거렸다.
『선배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그 말을 듣고 바람이 든 비닐 풍선을 잡아 뜯는 요령으로 거죽을 찢었다.

안에 갇혔던 이이지마 하나에를 끄집어냈을 적에 맛이 간 중학생은 회까닥한 눈빛으로 언령부터 날리고 보았다.
팡, 하고 높게 세운 교복의 목깃이 풀어헤쳐지면서 단추가 날아갔다.
손가락을 집게처럼 사용해서 입을 다물게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으로는 뭐가 날아갔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진짜지 못 말린다, 중학생.

『으븝!』
『패닉 상태라는 건 이해하지만 진정해줬음 좋겠는데.』
『으븝, 으븝!』

이이지마 하나에의 눈이 빠르게 왼쪽으로 향했다. 대가리 터진 뱀 시체 없음.
이번엔 반대편 오른쪽으로 향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쥔 1학년 2반 학생들이 보였다.

마침내 주둥이가 자유를 찾았을 적에 하나에는 외쳤다.
『제기랄, 올해가 몇 년이지?!』
게토 스구루의 반응이 싸했던 걸로 보아 시간의 오차는 염려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저기, 혹시 본인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던가, 집 주소를 잘 모르겠다던가...』
『기억상실증 아니거든?! 진짜로 올해 몇 년인데.』
『헤이세이 16년.』
『조상님, 감사합니다!』

그보다는 상황정리가 우선이다.
계속 버티면 정학 조처를 취하겠다고 윽박질러 마침내 교실 문을 열어젖힌 선생님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건물 전체로 화재 경종이 귀청 따갑게 울리고 있는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뭐하고 있었어. 싸웠어? 학폭이야?! 패싸움 중이냐고. 저 커다란 남학생은 뭐야. 교복이 우리 학교 교복이 아니잖아! 거기 책상 위로 올라간 너, 당장 내려오지 못...』
눈을 살벌하게 부릅뜬 하나에가 팔을 옆으로 휙 움직여 문을 닫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정말로 탕, 굉음을 내며 저절로 문이 닫혔다.

『성질부리지 마. 그러다 봉인술식 터진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다다미방을 돌아다니면서 손도끼를 들고 따라오는 여자랑, 사람을 먹으려고 하는 뱀과 싸워보지 않았으면 입 다물어.』
진실로 중학생은 위대하다. 구해준 사람에게 입 다물라 하는 패기 좀 보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토 스구루는 이 맛 간 중학생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Posted by 미야

2021/03/29 12:33 2021/03/2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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